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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남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푸대화상
천축산 불영사
불영사는 울진군 관내에서 가장 크고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가 많아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대사가 백암산 아래 단하동(丹霞洞)과 해봉(海峰)에 올라가서 북쪽을 보니 서역의 천축(天竺)과 같은 명산이 바라보여 산마루를 타고 그곳에 당도하니 산세의 묘함이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여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고 하였다. 전면의 큰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있으므로 주문으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구룡사(九龍寺)라 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절의 정서편(正西便) 산에 있는 부처님과 같은 바위의 그림자가 못에 항상 비춰져 절 이름을 다시 불영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 후 의상대사가 서산으로 가서 영주 부석사(浮石寺)와 봉화 각화사(覺華寺)를 창건하고 15년 동안 돌아다니다가 다시 불영사로 돌아오니 마을의 한 늙은 노인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셨다”고 하여 백암산 불귀사(佛歸寺)라고도 하였다.
이 전설을 증명이나 하듯 불영사의 서쪽 산등성이에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작은 바위가 앞의 큰 바위를 향하여 인사를 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을 향하여 인사를 하는 형상이라 여기고 이 모습이 연못에 비추어져서 이름하여 불영지(佛影池)라 한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불귀사(佛歸寺)가 보인다. 울진의 서쪽 40여 리 백암산에 있는데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영사에 관련한 문헌 자료는 매우 적고, 이러한 자료마저도 소재지에 관련한 것이 대부분으로 불영사의 초창기 역사를 명확히 밝혀줄 자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불영사에 소장된 기문류(記文類)가 있으나 대부분 조선시대에 작성된 것이어서 초기 자료에 관한 것은 보다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불귀사의 절 이름에 관한 것으로 1630년에 새긴 불귀사고적소지(佛歸寺古蹟小志)라는 현판이 현재도 불영사에 전하고 있고, 후대에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이지만 1370년 자료인 천축산불영사 시창기(天竺山佛影寺始創記)라는 현판도 전하고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불영사의 역사를 정리하면, 1397년(태조 6)에 화재로 소실되어 소진대사(小震大師)가 중건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고 1500년(연산군 6)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중건하여 선당(禪堂)으로 하였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어 1609년(광해군 1)에 성원법사(性元法師)가 재건하여 영산전(靈山殿)을 짓고 1701년(숙종 27)에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수선하였다. 1721년(경종 1)에 천옥법사(天玉法師)가 재건하고 1899년(고종 36)에 설운대사(雪耘大師)가 중수하였다. 창건 당시의 유적으로는 무영탑과 대웅전 축대 밑의 돌거북이 있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몽천서원에 배향된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의 친필이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건물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관음전·응진전(應眞殿)·응향각(凝香閣)·황화실(黃華室)·설선당(說禪堂)·법영루·칠성각·산신각 등 10동의 크고 작은 와가 건물들이 있는데 창건 당시의 건물은 하나도 없고 조선시대에 와서 중수한 것으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 또는 보수하여 왔으며 1977년에 절 입구 도로를 확장하였고 구동교(九動橋)·불영교(佛影橋)도 가설하였다. 절 서편에는 불영암이 높이 서 있고 동남쪽에는 구룡대가 반석이 되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향로봉(香爐峰)이 높이 솟아 있어 금강산의 비로봉(毘盧峰)을 방불케 한다.
향로봉과 구룡대(九龍臺)의 반석 가운데로 흘러 떨어지는 16척 높이의 백운(白雲) 같은 폭포와 청신한 공기가 감도는 고요함 속의 묵직한 분위기는 사찰 고유의 장엄한 위용을 느끼게 한다. 산세 또한 태극과 같이 굽이쳐 흐르는 듯하므로 산태극(山太極)·수태극(水太極)이라 전하고 있다. 울창한 수림 속에 특이하게 의상대사가 심은 굴참나무는 수령이 1천 년이나 되고 그 외 소나무도 수백 년 생이 허다하다. 불영사 농토는 원래 전답이 수백 두락이었으나 해방 이후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현재는 밭이 2만 평, 논이 30두락으로 근근이 공양미에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영사 응진전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3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다포양식이다.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그 위에 오금을 많이 둔 기둥을 세웠고, 맞배지붕 홑처마의 다포양식으로 내외삼출목 오포작(內外三出目五包作) 건물이다.
불영사 대웅보전
1994년 5월 2일 보물 제1201호로 지정되었다. 불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로 신라 때인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대웅보전은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당우(堂宇)를 가리키는데 대웅전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내 삼존불의 주존불은 나발에 육계가 있다. 통견(通肩)을 하고 삼도의 구분이 있으며 군의대를 하였다. 주존불은 좌고 99㎝, 두고 33㎝, 견폭 54㎝, 흉폭 41.5㎝, 무릎 폭 69㎝, 무릎 높이 14㎝이다. 좌우협시불은 보화(寶花) 새김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삼도가 있고 현수가 귀를 감아 내리고 있으며 연경을 잡고 있다.
대웅보전은 불영사의 중심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웅보전 내부에 있는 탱화(幀畵)의 묵서명(墨書銘)에 ‘옹정 3년 을사(雍正三年乙巳)’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도 1725년(영조 1)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무사석으로 크기에 따라 적절히 쌓아 이음이 일정한 선을 이루지 않고 자유롭게 조성하였다. 자연석 주추 위에 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좌우를 대칭되게 다듬지 않고 형태만 이루게 한 18세기의 특징을 나타낸다. 문짝은 어칸에 사분합을, 좌우 협칸에 분합문을 달았다. 측면은 벽체로 마감되었으나 드나들기 쉬운 자리에 문을 내었다. 공포(栱包)는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의 형식으로 가구구조(架構構造) 및 각 부재의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이밖에 범자(梵字)를 새긴, 지름 66.5㎝의 금구가 있고 대웅보전 석축 밑에는 머리부분만 노출된 귀부(龜趺)가 양쪽에 있다. 특히 내부의 단청과 5점의 탱화는 18세기 영남지역 특유의 양식과 색상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 및 불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불영사 귀부
불영사의 석귀(石龜)는 대웅전 축대 밑에 두부만 노출되도록 중앙의 좌우에 배치하였다. 두부의 크기는 목까지 길이 65㎝, 경(徑)이 20㎝이다. 이와 같이 석귀가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것은 풍수설과 거북에 대한 세간의 믿음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양성당선사부도비의 규모는 전고(全高) 1.96m, 비신고(碑身高) 1.25m, 폭 58㎝, 두께 17㎝이다. 이수는 조선 통식(通式)으로 높이 33㎝, 폭 81㎝, 비좌는 장방형으로 치석하고 전면에 2조(條)의 방형(方形)을 음각하고 안쪽에는 안상을 각출하였다. 비는 폭 1.01m, 높이 35㎝ 위에 폭 57.3㎝, 높이 2㎝, 폭 76㎝, 높이 1.7㎝의 2단 괴임을 각출하여 그 위에 비공을 마련하고 비신을 꽂았다.
불영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하원리 불영사에 있는 고려 전기 삼층석탑.
상층 기단 갑석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남쪽과 서쪽 갑석 끝이 파손되었다. 윗면의 경사는 약하고 각호각형 3단의 초층 탑신 받침이 조출되어 있으며, 하부에는 부연이 없다. 탑신부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각층 탑신석의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옥개석 받침도 각층 모두 각형 4단이다.
각층 옥개석 지붕에는 각각 호형 2단의 탑신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 경사는 약간 급하며, 처마 밑은 수평이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경쾌하고 날렵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이 없고 앙화, 보개, 복발, 보륜, 보주 순으로 되어 있는데, 순서가 바뀌어 놓여 있다. 상륜부를 이루는 부재의 석질이 탑신부와 기단부의 석질과 다르다.
불영사 삼층석탑은 원래 황화실 옆 동쪽에 무너져 있었다가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으나, 불영사 수장고를 지으면서 원래 탑이 있었던 지역에서 탑의 기초 유구가 확인되지 않아 원래의 위치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79년 1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불영사 삼층석탑의 제작 시기는 부연이 없고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을 이루고 있어 신라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영사 극락전
서쪽의 반야당 옆에 있는 극락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어느 시기엔가 대웅전의 불상을 새로 조성하면서 원래의 삼존불을 극락전으로 이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불은 17세기 중후반기에서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서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크게 조각되고 겉옷인 대의(大衣)가 두텁게 표현되었으며, 팔각의 하대·중대·상대로 구분되는 좌대 역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단지 대웅전에 봉안되었을 때에는 석가모니로 불리었을 것이나 극락전으로 이전 봉안되면서 법당 이름에 맞도록 아미타불·대세지불·관세음보살로 명칭이 변경되었을 뿐이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와가 주심포 양식의 겹처마이다. 문은 교창(交窓) 무늬로 되어 있는데 삼존목불좌상이 봉안되었고 탱화 3점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목불좌상의 주존불은 좌고(坐高) 1.14m, 두고(頭高) 34㎝, 견폭(肩幅) 33㎝, 무릎 높이 20㎝이다. 좌우협시불도 동일한데 좌고 1.08m, 보관고(寶冠高) 23㎝, 두고 18.6㎝, 견폭 46㎝, 흉폭(胸幅) 25㎝, 무릎 폭 75㎝, 무릎 높이 20㎝이다. 탱화는 한 점은 1739년에 경상좌도 경주 북령 보현산 거조사 오주암에서 조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최근의 것이다.
극락전 내 삼존불의 주존불은 나발(螺髮)에 육계는 없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구분이 뚜렷하며 군의대(裙衣帶)를 하였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삼존불은 좌고 114.2㎝, 두고 34㎝, 견폭 52㎝, 흉폭 33㎝, 무릎 폭 82㎝, 무릎 높이 20㎝이다. 좌우협시보살(左右脇侍菩薩)은 좌고 108㎝, 보관고 23㎝, 두고 18.6㎝, 견폭 46㎝, 흉폭 25㎝, 무릎 폭 70㎝, 무릎 높이 17.8㎝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와옥의 다포집이다. 안에는 5점의 탱화가 있는데 모두 조선 말기의 것이다.
첫 번째 것은 1860년(철종 11), 두 번째 것은 1906년(광무 10), 세 번째 것은 1735년(영조 11), 네 번째 것은 1880년(고종 17), 다섯 번째 것은 묵기(墨記)가 없다. 또 금구(禁口) 1구가 있는데 지름 66.5㎝이고 네 곳에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대웅전 석축 밑에 두부(頭部)만 노출된 귀부(龜趺)가 양쪽에 있다.
인현왕후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존호(尊號)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는 의열정목(懿烈貞穆)이다. 병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은 후궁 장씨(張氏;희빈 장씨)를 총애하여 왕후를 멀리하고, 장씨가 왕자 윤(昀;뒷날의 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의상전(인현왕후 원당)
이러한 전각 중에서 하나 주목되는 것이 있다. 현재 의상전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로 원래는 인현왕후의 원당(願堂)이었다. 원당이란 왕실의 복을 비는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이러한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통도사·선암사·직지사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찾아 볼 수 있다. 단순히 왕실의 복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왕손의 태를 사찰 인근에 묻고 이를 축원하는 기능도 맡아 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숭유정책 속에서 불교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기능이기도 하였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인경왕후가 죽자 왕비가 되었으나 장희빈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희빈에게 밀려 났다가 다시 복위되는 비운의 왕비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불영사의 스님과 가졌던 인연이 사찰 내에 있는 사적비에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숙종이 총애하는 장희빈 때문에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비가 자결하려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는데 내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궁희가 꾸민 사건이 발각되어 죄를 받고 왕비는 환궁하게 된 까닭에 불영사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를 세워 부처님의 은혜에 사례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원당이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의상전은 불영사가 갖는 왕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나말여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탑 앞의 배례석이 있다. 석탑은 높이 3.2m이며 우주와 탱주의 비율은 2:1, 옥개받침은 4단이다. 배례석은 중앙에 연화문을 새겨 놓았는데 매우 정교하다. 또한 대웅전 앞의 석축 아래 좌우에는 거북이를 각 한 마리씩 조각하여 놓았다. 이는 대웅전을 지혜의 배라는 반야용선으로 상징화하고 이를 거북이가 지혜의 바다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거북의 머리와 목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는데 거북이를 제작한 기본적인 의도는 다르지만 북한의 수창궁에서도 보이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이다.
불영사는 조선시대 산간에 중창되는 가람 배치법을 계승한 사찰이면서도 이와는 조금 다른 배치법을 하고 있다. 가람 배치란 사찰을 구성하는 건물들을 배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중창되는 사찰들은 대체로 절 입구에 일주문(一柱門)을 세우고 조금 들어가서 중문(中門)인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짓고 더 들어가면 2층 구조의 누각을 지으며 이를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양쪽 옆으로 스님이 사는 승방을 두고 정면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불로 모시는 대웅전이나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극락보전이 있는 배치법이 통례이다. 그런데 불영사는 이러한 가람 배치에서 일주문과 중문이 없을 뿐 누각부터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배치법을 사용하여 건축물을 지었다.
그러나 불영사는 이러한 축선의 건물 외에도 서쪽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있는데 응향각·명부전·의상전·응진전·칠성각·극락전·반야당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는 불영사의 대지가 산을 등지고 앉아 비교적 동-서쪽으로 길게 평탄지를 이루고 있어서 동쪽을 불영사의 중심 구역으로 삼고, 서쪽에 있는 불영지라는 연못을 중심으로 이를 에워싸는 형태로 각기 기능을 달리하는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중심 구역은 부처님과 승려가 기거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서쪽으로 각기 신앙화할 수 있는 전각들을 지어 조선시대에 보이는 통불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웅전의 예불에 관련한 일을 하는 승려가 기거하는 응향각(凝香閣),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하고 10왕을 봉안한 명부전(冥府殿), 불영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의상대사를 봉안한 의상전(義湘殿), 석가모니 재세 시에 수기 제자인 나한상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토속 신앙과 관련한 칠성 신앙의 칠성각(七星閣),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전(極樂殿), 승려가 수행하는 반야당(般若堂) 등이 있다.
[불영사를 노래한 시인]
불영사 입구에는 단하동천(丹霞洞天)이라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다. 이는 신선이 노니는 그런 마을이란 뜻으로 바로 불영사를 말하고 있다. 아니 불영사 경내만이 부처님이 사시는 것이 아니라 불영계곡 구비구비, 모두 부처님이 사시는 곳이라 부처님의 세상이란 뜻이다.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는 단속사(斷俗寺) 입구에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 쓴 글씨가 있는데, 사찰에서는 이렇게 대문격인 사찰 입구에 글을 새겨 놓아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미를 더하게 만들었다. 광제암문이란 많은 사람을 도와 이롭게 한다거나, 넓게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으나 모두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마음을 정제하거나 그렇게 살라는 뜻일 것이다. 불영사에는 많은 선비와 시인들이 찾아와 글을 남겼는데 조선 후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불영사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부용꽃 천송이 절 둘렀는데/ 금탑봉 청라봉이 날아갈 듯 솟았다/ 전각 밑 용소에는 용이 숨어 있는데/ 동문에 쏘이는 빛 부처님 아니신지/ 계곡에 눈 녹은 시냇물은 폭포 이루고/ 이월 달 봄 구름 산허리 감았다/ 새벽녘 거닐 때 달빛 따라 가다가/ 좌망대 오르니 마음 맑아져 속심 씻긴다
불영사 영산회상도
1997년 8월 8일 보물 제1272호로 지정되었다. 불영사(佛影寺)는 651년(신라
이 영상회상도(靈山會上圖)는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후불(後佛) 그림이다. 중앙에 설법인(혹은 항마 촉지인)의 석가여래를 모시고, 좌우에는 5위씩의 십대보살을 묘사하였다. 협시보살 위쪽 좌우에는 제석천과 범천상, 아래쪽 좌우에는 사천왕상, 본존의 위쪽 좌우에는 십대제자상과 신중상들을 배열하였다.
구도에서 영산회상도는 일반적으로 팔대보살이 표현되나, 이 불화에서는 십대보살이 묘사되고 협시보살인 문수보살(文殊菩薩) 혹은 관음보살(觀音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혹은 大勢至菩薩)을 아래쪽에 크게 묘사하여 강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좌상의 석가모니불 법의(法衣)가 홍가사(紅袈裟)를 취했고, 광배도 붉은 테를 두른 2중 광배를 나타내고 있는 것 등은 영·정조 때에 많이 제작된 조선 후기 불화 양식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동 쌍계사 팔상전에 소장된 숙종 때의 영산회상도나 대구 파계사 원통전의 영산회상도와도 양식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불영계곡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하원리부터 근남면 행곡리까지 불영사(佛影寺)를 중심으로 한 계곡. 불영사 계곡 일원은 1979년 12월 명승 제6호, 1983년 10월 군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산태극수태극형(山太極水太極形)에 자리잡은 불영사와 함께 신비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계곡과 주변이 조화를 이루어 계절 따라 특이한 경관을 이룬다. 계곡을 따라가면 의상대·창옥벽·조계등·노적바위·부처바위·중바위·소산 등의 기암괴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 사이를 솟구쳐 떨어지는 맑은 계류가 절경을 이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의상(義湘)이 창건한 불영사가 있어 불영사 계곡 또는 불영계곡이라고 부른다. 산세가 태극과 같이 굽이쳐 풍수지리학적으로 산태극, 수태극의 위치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의상은 이곳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을 닮았다고 해서 산 이름을 천축산이라 짓고, 신비로운 주문을 외워 아홉 마리의 용을 내쫓고 그 용이 있던 연못을 메워 절을 지어 구룡사라 했다. 그 뒤 서편에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그 그림자가 늘 못에 비치면서 불영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경상북도 북부의 동쪽인 울진과 서쪽의 봉화 땅을 가름하는 태백준령 사이에 놓여있는 구절양장의 계곡이 불영사 계곡이다. 광천 유역에 형성된 계곡으로, 계곡 끝자락에서 이어지는 왕피천을 비롯해, 불영사와 자연휴양림이 계곡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와 쉴 곳을 함께 제공하는 계곡이다.
오래전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숨겨진 비경은 더욱 감동적이다. 수억 년 동안 바위틈을 흘러내리면서 만들어낸 물길과 물에 닳아 반들반들해진 넓은 청석들, 마치 물항아리처럼 패인 암석들, 기암절벽 사이를 뚫고 바위틈을 흘러내리는 청류는 그 시원함이나 깨끗함에서 최고라 할 만하다.
계곡의 바닥과 양쪽 절벽에는 흰 빛을 띠는 화강암이 풍화되어 장관을 이루고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면서 곳곳의 바위 바닥이 깊이 패어 작은 물항아리를 이루고 있는데, 태고 때는 이 계곡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계곡 옆을 달리는 도로가 개통되어 계곡 특유의 한적함이나 적막함은 버렸지만, 계곡으로의 발길을 막아 놓아 계곡미는 태고의 모습 그대로다.
불영사 계곡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선유정에서 200여m 올라간 지점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으로, 둥글게 휘어진 계곡 주위로 기암들이 저마다의 폼새를 뽐내고, 크고 흰 화강암과 푸른 물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장마 끝이나 비온 후 물이 많아지면 더욱 절경이다.
불영사 계곡은 여름에는 계곡 피서지로 알맞고, 봄·가을에는 드라이브 코스로 아름다우며, 겨울에는 설경이 빼어나다. 불영사는 대웅보전, 영산회상도, 삼층석탑, 명부전, 응진전, 의상전, 칠성각, 극락전, 불영사 일주문, 양성당 선사 부도 등이 있는 고찰이다.
주변 관광지로는 민물고기전시관, 망양정 해변, 성류굴, 덕구온천 등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꼬리진달래와 백리향을 비롯해 560여 종류의 식물이 계곡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 또한 학술조사를 통해 조류 11종, 어류 42종, 포유류 17종, 나비 30종, 거미류 94종이 살고 있음이 밝혀졌다.
수산 검문소에서 왕피천을 왼쪽으로 끼고 영주와 현동 방면으로 접어들면 불영사 계곡으로 가는 길 초입에 이른다. 건잠교를 지나 삼근2리에 이르는 18㎞ 구간이 불영사 계곡이라 명명되는데, 이 중에서도 건잠교에서부터 불영사 입구까지의 구간이 진짜 불영사 계곡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중간에 불영정과 선유정이 경치 좋은 곳에 세워져 있고, 곳곳에 야영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들 야영장은 일 년 중 여름 한 달만 개방된다. 불영사 계곡을
불영사 불연
경상북도 울진군 불영사에 있는 조선 중기 시련의식에 사용된 가마.
시련은 가마를 문 밖까지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이나 재를 받을 대상인 영가 등을 가마에 모시고 여러 가지 위의를 갖추어 법회 장소까지 행렬을 지어 오는 불교 의식이다. 이때 불·보살을 의식 도량에 모셔와 돌려보내는 데 필요한 불연, 행렬에 필요한 나팔, 각종 번 및 기치류가 사용된다.
이러한 불교 의식에 사용된 의식구는 불교적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구상성을 지니는 불교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불연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불교 의식과 함께 그 제작이 보편화되었다.
불영사 불연은 2채가 있다. 이 가마는 매년 석가탄신일 때 아기 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 때 사용하고 있다.
불영사 칠성각 불연의 크기는 높이 125㎝, 난간폭 86㎝, 총길이 311㎝이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난간을 두른 집 모양이며, 안에는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앞과 뒤에서 4명이 밑에 붙은 가마채(손잡이)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 운반하게 되어 있다. 즉, 사람이 들 수 있도록 한 긴 손잡이 위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몸체를 올리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모습이다.
불연은 받침대·몸체·지붕의 세 부분이 각각 분리될 수 있게 조립하였다. 받침대는 몸체를 올려놓기 위한 누각의 난간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으며, 앞과 뒤에 2개씩 4개의 긴 손잡이를 만들어 맨 끝에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난간에는 연꽃, 사방 모서리에는 생동감 넘치는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받침대와 손잡이 부분에는 붉은 칠을 하였다.
몸체는 4개의 기둥에 창이 있는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려놓았다. 양측면 창에는 육각형의 그물망을 치고 그 중앙에 지름 14.9㎝ 되는 원형의 청동판을 달았으나, 현재는 한쪽만 남아 있다. 앞면과 뒷면 창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벽체에는 화려하게 여러 가지 꽃무늬를 양각이나 음각하여 채색하였다.
지붕은 둥근 형태로 바깥은 녹색 비단으로 처리했으며, 상부에는 노란 색 복련 위에 붉은 색의 연봉을 세워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지붕의 네모서리에는 봉황의 머리를 끼울 수 있게 구멍을 뚫었으나, 지금은 3개의 봉황 장식품만 남아 있다. 내부에는 그물처럼 대나무를 엮어 지붕의 골격을 이루었다.
불연사 황화실 불연의 크기는 높이 125㎝, 난간폭 80㎝, 총길이 303㎝이다. 형태는 불영사 칠성각 불연과 거의 비슷하나, 손잡이 끝의 용머리는 앞쪽에만 장식되어 있다.
불영사 칠성각 불연의 받침대 밑면에는 불영사조연기(佛影寺造輦記)와 시주질 및 연화질, 불연사 황화실 불연의 받침대 밑면에는 시주질(施主秩)과 사내질(寺內秩)이 묵서로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영사 칠성각 불연 : 불영사조연기〉
삼가 봉연(鳳輦)이라 하는 것은 법회를 열 때 수많은 부처들이 올라앉아 궁전으로 내림(來臨)하던 것이라. 그러나 어찌 한갓 그러한 것이기만 하랴. 항차 난봉(鸞鳳)이 꿈틀대며 난간 중에 날아오르고, 황룡(黃龍)이 용솟음치며 청련(靑蓮) 위로 솟아오르며, 십이진금(十二眞金)으로 벽을 장식하고, 칠보명주로 지붕을 얽고, 둥그런 명월과 같은 거울이 앞뒤로 걸려 있으며, 수놓은 작은 문을 열면 운영(雲影)이 누각에 내리고, 작은 보석으로 장식한 창을 열면 일월이 궁전을 비추는 것 같음이랴. 위대하고 장함이요, 찬연히 빛남이로다.
세상에 이 물건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학종선덕(學宗禪德)이 바로 이것이로다. 무신년 가을에 소매 속에 옥축(玉軸)을 갈무리하고 길을 떠나 경상도 울산부에 이르렀다. 온갖 마을에 바람이 거세고 구름이 젖어들거늘 적선지가(積善之家)의 선연(善緣)을 맺게 하고, 홍공(鴻功)을 이루고자 했지만 좋은 장인을 만나지 못해 한세월을 그냥 보냈다. 기유년 봄에 홀연히 좋은 장인을 만났으니, 그때 마침 춘북령 원적산 대승암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공업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경술년 봄에 결단을 내려 서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는 가히 사람의 소치가 아니라 하늘이 하는 바라. 옛날에 이르기를 대운(大運)이 도와 두루 미치지 못하면 정성만 거듭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가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러니, 이는 덕을 쌓고 능히 베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삼가 원컨대 불연을 조상한 후에 귀신이 용을 호위하여 하늘에서 지키고, 삼재(三灾)와 오해(五害)가 모두 끊어져 들어오지 못하며, 육시(六時)와 천락(天樂)이 무성하게 절로 내림하여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고, 선풍(禪風)이 다시 떨치게 하소서.
시주질, 경상도 양산 공양보시주 박수억 9월 양주, 울산 공양시주 김춘산 양주 공양시주 이림.
연화질, 광현비구 성열비구 덕진비구 공양주, 능간비구 기민보체, 화주 학종비구, 인권대덕 혜능대사비구. 기유년에 시작하여 경술년 4월에 완성함. 강희 9년 경술 4월에 공력을 마침.
〈불연사 황화실 불연 : 받침대 밑면 묵서〉
시주질, 울산공양대시주 한귀남양주, 울산 정계상양주, 울산 허해립양주, 울진 남계목양주, 울산애령보체.
사내질, 지순, 태경, 도은, 해임, 법현, 경욱, 성주, 성진, 수승 탁륜, 삼보 사철, 화주 학종. 강희 9년 경술 4월 일 마침.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불연은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분야로 아직까지 그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다. 불영사 불연은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며, 제작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유물의 양식 편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불영사 불명패
경상북도 울진군 불영사에 있는 조선 후기 불패.
불패는 부처님이나 스님을 모시는 위패(位牌)로 주로 경서, 불·보살의 명호, 승려의 법명이나 발원 내용 등을 적어 놓은 패를 말한다. 일반적인 형태는 내용이 적힌 패를 연화대 위에 놓는 것인데, 패 주위를 구름 모양이나 보주형 등으로 조각하고 그 안에 꽃·용·구름 등으로 화려하게 조각한다.
불영사 불패는 대웅보전 안에 은행나무로 만든 2점이 남아 있다. 불패는 하부의 좌대와 상부의 패신으로 나뉜다. 형태는 구름을 도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불패①〉
앞면을 여러 가지 문양으로 양각하고 뒷면을 편평하게 만들었다. 앞면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액(額)을 만들어 ‘우순풍조 국태민안’이라는 원문(願文)이 한글로 묵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한자로 ‘雨順風調 國泰民安’이라고 적어 두었다. 가장자리는 여러 가지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특히, 상부에는 황룡(黃龍) 한 마리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부의 좌우에도 각각 황룡 한 마리를 양각하였다. 그 주변에는 구름 모양을 각양각색으로 화려하게 조식하였다.
패신의 크기는 전고 71.8㎝(패신 65.8㎝+좌대꽂이 6㎝), 상폭 40.5㎝, 중폭 40.5㎝, 하폭 3㎝, 두께 7㎝이다. 좌대는 평면 장방형에 상부에는 난간을 표시하였다. 앞면에는 3칸으로 구획을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사자를 한 마리씩 안치했으며, 측면에는 안상형의 문양을 그렸다.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좌대의 평면 크기는 가로 39㎝, 세로 20.1㎝이고, 높이는 15.7㎝이며, 상면에는 패신을 꽂는 직사각형의 구멍 가로 4.9㎝, 세로 3.3㎝, 깊이 7.3㎝ 크기로 있다.
불패①의 패신 뒷면에는 바깥쪽 선은 굵고 안쪽 선은 가늘게 하여 2조의 선을 그어 만든 가로 22.3㎝, 세로 47.7㎝의 직사각형 내부에 발원문이 묵서되어 있다. 계선은 긋지 않았으며, 글씨는 해서체로 행서 장법이다. 글자의 크기는 전반부는 거의 비슷한 형상이나 후반부는 작아진 형상이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발원문서
경상도 운제산 오어사 철현, 영취산 통도사 영현, 탁진 등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해도(海道)를 따라 송악으로 향하던 중에 먼저 강원도 울진땅 천축산 불영사를 방문하였는데,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자취가 성스러워 마음이 혼연히 기쁨에 여름 한 철을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손에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마음에는 깊은 믿음이 있었으며, 주지인 혜능대사 또한 믿음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서로 믿고 화합하면서 사찰의 부족한 점을 같이 한스러워하였습니다.
생각컨대 불패와 전패가 실로 △△이 정성스럽게 공경하는 것이라, 같이 발원하여 사우(寺宇)가 만세토록 보전되어 전할 수 있기를 빌고자 곧 불패 삼위와 전패 삼위를 조성하여 세상의 뛰어난 보배로 뭇중생들이 감동하여 찬탄하는 바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으로써 사덕(四德: 철현, 영현, 탁진, 혜능)이 같이 발원하노니 금강불후의 영약과 같이 종래토록 대각의 지표를 이루게 하시고, 원하옵건대 이것으로써 일체에 공덕을 보급하여 우리들과 뭇중생들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사내질 신학, 성규, 탁원, 초연, 혜언, 희옥, 지순, 초운, 홍윤, 학종, 사철, 청□, 경오, 도은, 해임, 인잠, 탁변, 사준,△△, 도안, 초□, 쌍일, 극윤, 삼보, 계흠.
화원 철현, 영현, 탁진, 청식태희채어인권화주 원인.
강희17년 무오세수패승해의균탁윤상치청우여환, 명현대덕충학.
〈불패②〉
좌대가 결실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만들어 받쳤다. 형태는 불패①과 비슷하나, 패신을 받치는 앙련대가 있다. 패신의 상부에는 구름 사이로 봉황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부 좌우에는 3개의 꽃과 잎들이 조식되어 있는데, 꽃은 개화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앞면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액을 만들었는데, 어떤 글자가 적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패신의 크기는 전고 34㎝, 상폭 24.2㎝, 중폭 23.5㎝, 두께 4㎝이며, 앙련대의 너비는 18㎝이다.
이 불패들은 전체적으로 섬세하며 정교할 뿐만 아니라 그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형태·색감·필치가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며, 격조 높은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패는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다. 불영사 불패는 1678년(숙종 4)이라는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어 불패의 양식 편년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이 불패 발원문의
불영사 법고
경상북도 울진군 불영사에 있는 조선 후기 예불이나 의식에 사용된 불구.
북은 아침, 저녁의 예불 때나 수행의 정진을 위해 사용한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법화경서품(法華經序品)』에 따르면, 번뇌와 망상 또는 집착과 오욕의 마군을 없애는 설법을 할 때 북을 친다고 한다. 북은 범어로 ‘bheri’라 하며, 고(鼓)·법고(法鼓)·제고(齊鼓) 등으로도 불린다. 우리나라의 북은 주로 나무로 기본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가죽을 입힌 후 여러 가지 그림으로 장식한다.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뉜다.
불영사 부도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하원리 불영사에 있는 조선 후기 양성당 선사 혜능 부도.
혜능 입적 후 다비를 하자 사리가 나와 부도를 건립하였다. 양성당 선사의 부도 비문은 조선 후기 학자 최석정(崔錫鼎)이 지었다.
불영사 부도는 지대석, 기단석, 탑신의 3석으로 구성되었으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종형 부도로서, 전체 높이 176.5㎝이고, 탑신의 폭은 83㎝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방형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기단석을 각각 별도의 돌로 놓고 그 위에 일석으로 만든 종형의 신석과 보주형 상륜을 올렸다.
지대석은 대강 치석한 방형 대석으로 별다른 조식이 없다. 기단석의 옆면에는 8판의 중복련(重伏蓮)을 양각으로 장식하였으며, 상부에 원형의 탑신 받침을 호형으로 각출하여 신석을 받고 있다. 신석은 평면 원형으로서 하단이 약간 좁은데, 복부로 올라가면서 넓어졌다가 상부에 이르면 다시 하단과 같이 좁아진다.
신부 측면에는 장식이 없고 하부에는 6판의 앙련(仰蓮)을, 상부에는 14판의 복련을 장식하였으나 매우 형식적이며, 그 윗면에는 호형 1단의 원형 받침을 각출하여 상륜을 받았다. 상륜 하부에는 1단의 원대(圓帶)를 조각하였고, 그 정면에 연봉형의 보주를 조출하였는데 장식은 없다. 신석과 보주는 동일석으로 조성되었다.
[금석문]
부도비의 비신 앞면, 뒷면에 명문이 음각되었으며, 글씨는 해서체이다. 글자의 크기는 앞면의 경우 2.5×2.5㎝로 거의 모두가 비슷하나, 뒷면의 경우에는 3.5×3.5㎝의 크기도 있다. 금석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양성당대사의 법명(法諱)은 혜능이고, 자는 중열(仲悅)이며 세속의 성은 남씨로, 그 선대가 고려 때부터 선사(仙槎)에 우거하여 후예들이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 대사로부터 고조, 증조, 조 등 5대를 연이어 과거에 급제한 명문 집안이며, 모친은 행주전씨로 명망 가문이다. 모친이 꿈에 하늘의 신선을 보고 대사를 잉태했는데, 태어난 뒤에 이름을 몽선(夢仙)이라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곧아 말을 함부로 아니하였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처신하며 항상 출세의 뜻을 가지고 있어 부모가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에 응철장로(應哲長老)를 쫓아 출가하여 계를 받고 8년간 정진하여 모든 불경을 통달한 뒤 천조대사에 나아가 묻고 또 호구당에게서 수행하여 크게 깨달아 막히는 데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 인후하고 보시하기를 기꺼이 하였으며, 계율을 엄히 지켰고 평생을 명산 고찰을 찾아 주류하기 좋아하여 두류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소백산 등 그의 발자취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스승을 찾아 도를 강론하여 초연한 넓고 큰 뜻을 가지고자 함이리라.
어느 날 홀연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탄식하기를 ‘도를 구하는 데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 사람이 근본을 돌이키지 않는 것은 어찌 일찍 떠난 고향에 돌아감을 잊는 것과 다를 바 리오.’ 하며 마침내 불영사로 돌아와 머물며 수도하는 집에 현판을 달아 양성당(養性堂)이라 했다. 또 그곳에서 시를 읊었는데, 모두다 염불삼매 중에서 자연히 흘러나온 것 같았으니 그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론을 마치고 염불에 날이 저물면
밝은 달 솔바람 타고 사립문을 닫아 거네.
고요하게 살면서 고요하게 흥취를 자득하니
온 경내 고요하여 꿈결인 듯 아늑하네.
이 시를 읽으면 마치 내가 부처와 연꽃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병자 12월 17일에 앉은 채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75세요, 법랍 64세이다. 다비하는 날 서기(瑞氣) 한 줄기 중천에 뻗쳐 수일 만에야 사라지고 드디어 금빛 나는 사리 3과가 나왔기에 부도를 절 동쪽 수십 보 지점에 세우고 그의 수제자 천옥(天玉)대사가 장차 비석을 세워 양성대사의 행적(行蹟)을 기록코자 홍우해(洪于海)를 통하여 나(최석정)에게 비문을 청하니 우해와 대사는 마치 주나라 문왕과 태전(太顚)과 같은 관계이므로 대사에 대한 사실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나에게 상세히 말하므로 내가 듣고 가상하여 비문을 쓰고 명(銘)하노라.
부처님의 오묘한 뜻은 성(性)을 바로 보는 것이 가장 요점인데
대사는 능히 일찍 깨우쳐 깊은 이치 꿰뚫어 보고
참 가르침 더욱 터득하여 삼승(三乘)의 도를 극명히 밝히셨네.
아! 우리 대사여, 후세에 족히 징표가 되리.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최석정 지음
부도비에 이끼가 심하게 끼어 명문을 제대로 판독할 수 없었는데, 「양성당 선사혜능 부도비명(養性堂禪師惠能浮屠碑銘)」이 최석정의 문집인 『명곡집(明谷集)』에 실려 있어 혜능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문에 의하면, 양성당은 1696년 12월 17일에 75세로 입적하였으며, 불영사 부도는 혜능이 입적한 1696년에 건립하였으나, 부도비는 1738년 2월 18일에 설치한 것을 알 수가 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불영사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은 인도에서 4세기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중국·한국·일본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매우 널리 숭배되어온 보살이다. 형상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이거나 두건을 쓴 모습이며,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중앙에 본존인 지장보살이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脇侍)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시립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얼굴은 원만하고, 머리에는 투명 두건을 쓰고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모두 걸친 통견의인데, 그 표현이 매우 두터운 편이다. 앞가슴에 가로로 된 옷 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아래로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다리를 감싸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두 펴고 무릎에,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오른발 위에 올려놓고 있다.
양옆의 도명존자는 민머리에 합장을 하고 있고, 머리에 보관을 쓴 무독귀왕은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옷에 살짝 감추어져 있다. 불영사지장보살삼존상의 크기를 보면, 지장보살은 높이 139㎝, 무릎너비 107㎝이고, 도명존자는 높이 125㎝, 어깨너비 43.8㎝, 무독귀왕은 높이 127㎝, 어깨너비 37.5㎝이다.
불영사 지장보살삼존상은 석조로 제작되었는데 본존인 지장보살은 개금을 하였으며,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화려하게 색을 입혔다. 석불이지만 뛰어난 조각솜씨와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고 조선 후기 지장보살삼존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회화사 연구의 학술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불영사 금강역사가 있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지붕의 양단을 길게 낸 것이 특징이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함께 안에는 칠위(七位)의 신장대왕(神將大王) 즉, 일직사자(日直使者)·도시대왕(都市大王)·태산대왕(泰山大王)·송제대왕(宋帝大王)·초강대왕(楚江大王)·섭성대왕(燮成大王)·오도전륜대왕(五道轉倫大王) 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신장대왕 어깨의 크기는 길이 2.09m, 폭 2.65m 정도이다.
또한 그 앞에 좌우로 10대 천왕을 모셨는데, 중앙 칸 좌우에 옥으로 조성된 불영사 금강역사 한 쌍이 있다. 이 명부전에 소장된 불영사 금강역사의 크기는 높이 126㎝, 폭 63㎝이다.
명부전 후불탱
지장보살은 석가 입멸 후, 56억 7000만 년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중간 시기인 무불의 시대에 출현하여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천상·인간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이다.
「불영사 지장보살후불탱」은 258×273㎝의 크기로, 화면 중앙에 오른손에 보주를 쥔 지장보살이 결가부좌하고, 그 앞쪽에는 투명한 두광을 갖춘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있다. 양쪽 가장 앞쪽에는 사천왕, 그 위쪽으로 녹색 두광을 갖춘 육광보살과 천부·판관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지장보살은 머리에 투명 두건을 쓰고, 붉은색 대의와 녹색 군의를 착용하였으며, 대의에는 연화이중원권문과 당초연속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지장보살과 여러 보살상의 육신은 황색을 발라 다른 권속과 구분 지었으며, 크기 또한 지장보살이 부각된 반면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사천왕상은 상대적으로 축소된 상태여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상단 천공에는 군청색을 바르고 서기와 운문으로 여백을 메웠다.
1880년(고종 17)에 금어(金魚: 불상을 그리는 사람) 서봉(西峯), 응순(應淳) 등이 제작한 것으로, 불영사 명부전의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양측에 시왕도가 별도로 배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불영사 사적비
불영사 산신각
불영사 산신탱
경상북도 울진군의 불영사에 있는 조선 말기 산신을 소재로 그린 작자 미상의 불화.「불영사 산신탱」은 울진군 불영사 황화실(黃華室)에 있는 조선 말기의 탱화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산신각(山神閣)을 두고 그 안에 산신도를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불교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나 고유의 산악신앙, 즉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생겨난 대표적인 신불(神佛) 수용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산신각은 불교 사찰 사료를 통해서 볼 때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고, 현존하는 산신탱화도 조선 후기 이전의 작품은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산신탱화를 사찰에 봉안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로 추정할 수 있다.
「불영사 산신탱」은 100×87㎝의 크기로, 전국의 어느 사찰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흔한 탱화이다. 일반적으로 산신도는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인 신선을 큼직하게 그리고, 호랑이는 신선 앞에 정답게 애교 띤 모습으로 그린 경우가 많다. 호랑이는 대호(大虎)로 그리는 경우도 있고 고양이처럼 그리는 경우도 있으며, 민화 풍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섭지 않고 해학적으로 그리는 예가 많다.
신선은 항상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를 배경으로 기암괴석 위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간혹 옆에 동자(童子)를 배치하여 시봉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불영사 주지실에 산신도 복장 발원문이 남아 있어 제작 연대는 물론 제작처와 제작 동기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불영사 조사전
불영사 칠성각
칠성각(七星閣)은 1950년에 지방 신도로 구성된 칠성계에서 창건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규모가 작은 목조 와즙이다. 안에는 칠성탱화 1점이 봉안되었는데 폭 1.87m, 길이 1.46m이고 하부에 묵서가 있어서 다른 여러 탱화의 개분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1899년(광무 3)에 설치한 범종루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로 훼손되어 중수하였고 종각은 범종각(梵鐘閣)에 괘종 병용(掛鐘 並用)하던 것을 다시 종각을 신축하여 대종(大鐘)을 달아 1978년 9월 19일에 타종식을 하였다.
불영사와 이런 저런 인연들
《해 저문 들길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오는 누구인지 물을 것 없이 굳이 덧없는 세상일을 들추지 않아도 좋다》
불영사에는 죽었던 사람을 살린 이야기가 전한다. 1408년(태종 8년) 8월 판관 이문명(李文命)이 쓴 환생전기(還生殿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옛날 광산 백극재(白克齋)선생이 울진 현령으로 제수 받아 수레를 타고 임지로 내려가다가 삼월에 돌림병을 얻어 갑자기 사망하였다. 부인 이씨가 민망하고 두려워 이 지역에 기도를 올릴 정사가 있는지의 가부를 묻자, 한 관리가 말하기를 서쪽에 불영사란 절이 있으며 건물은 오래되었고 불상은 영험하다고 하였다. 이에 부인이 상여를 절의 탑 앞에 옮기도록 조치하고 부처님 앞에서 분향하고 울며 축원하기를 첩의 지아비가 길을 떠나 죽었으니 횡사함과 같구나. 즉시 엎드려 하늘에 기도하고 꿇어 앉아 정성들이기를 삼일 삼야에 이르러 부인이 잠깐 잠이 들자 산발을 한 도깨비가 달려가며 지금이 각천광중 10년 원이 맺혔구나 하고 말하는데 반복하지 않고 끝내었다. 부인이 놀라 깨어 관을 열어보니 엄연히 환생하였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로 탑을 돌고 기쁨으로 불전을 돌며, 환생한 건물로 인하여 금글씨로 연화경 7축을 베껴 썼으니 부처님의 은혜 때문이라.
당나라의 식하(食荷)비구가 6일 만에 환생한 것도 불력의 깨우침이고, 양나라의 유씨 딸이 7일 만에 환생한 것도 법력의 깨우침이요, 두씨의 아들이 3일에 환생한 것도 하늘의 힘이 깨우침이니, 정성이 있는 곳에 감응이 있는 것에 고금의 세속이 한결같이 의지하는 것이니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울진 군지 관안에 백극재는 1396년(태조 5년)에 부임하여 산성에 읍을 옮겼고 관청에서 죽으니 부인이 불영사에 가서 불공을 드려 환생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33년의 천축산 불영사 사적비기에는 백극재가 성종 5년 1474년에 울진현령으로 제수 받고 내려가다 돌림병을 얻어 사망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문명이 환생전기를 쓴 1408년 보다 오히려 늦다. 앞뒤 정황상 잘못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남편의 금의환향이 죽음으로 되었으니 얼마나 참담했을까 하는 심정은 어렵지 않게 든다.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고 기도하고 살린 곳이 불영사라고 한다.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살기야 하겠냐만... 지금 불영사에서는 대웅보전 동편에 있는 황화실을 환생전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휴 임유후(萬休 任有後, 1601-1673년)는 1628년 동생 지후(之後)가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취정(就正)과 그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했다. 이 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울진 행곡의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20여 년간 살게 된다. 그는 궁향 벽지에서 많은 제자들을 기르는 등 지역의 문풍에 일대 기여를 한다. 그는 1630년 불영사를 방문하게 되는데 법당 단청문과 불영사 14경이란 시를 남긴다.
법당 단청문에서『기술하노니 내 일찍이 설산서극(雪山西極)에 도량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창해 동쪽 머리에 진상(眞像) 있음을 보았도다. 진실로 여래가 고해의 마귀를 항복받는 신령한 힘을 나타내었고, 대사의 싱그러운 주문이 용을 쫓아내는 기이한 위력을 발휘하였음을 전했더라...(중략)...임진병화로 잿더미 된 이 사옥을 새로 지으니 연작(燕雀:제비와 까치)이 처마 밑에 와서 하례하고 긴 들보 큰 기둥이 옛 초석 위에 거듭 지어졌고, 동쪽 숲 속의 쇠북 종은 부처님의 찬미를 전하는데 서쪽에 있는 단청은 빛바랬구나...(중략)...산정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불문에 감동하여 우는 소리 같고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이니 어찌 자비의 한 세상을 이루지 않겠는가? 보배가 집에 가득해도 업을 짓는 원인이 되고 착한 심근(心根)은 윤회의 괴로움을 벗어날 인(因)이 되리라. 빈부를 불구하고 보시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크고 적은 공덕을 어찌 쌓지 않을까 보냐. 단장에 채색하는 것은 선승들의 마음을 밝히고...(후략)』
또 불영사 주변의 승경(勝景)을 14경으로 명명하고 시를 남긴다.
1.부용성(芙蓉城) 2.청라봉(靑螺峰) 3.해운봉(海運峰) 4.종암봉(鍾巖峰) 5.금탑봉(金塔峰) 6.삼각봉(三角峰) 7.향로봉(香爐峰) 8.원효굴(元曉窟) 9.의상대(義湘臺) 10.좌망대(坐忘臺) 11.용혈(龍穴) 12.오룡대(五龍坮) 13.단하동(丹霞洞) 14.학소(鶴巢) 등이다. 이중 제10경인 좌망대 시를 소개한다.
『앉아서 시내물 맑은 것을 사랑하니 해가 서산을 넘어 가도 모르겠구나
발을 씻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소리 높여 자지곡(紫芝曲:중국 한나라 때 자연에 묻혀 살아가려는 의지를 노래한 곡)을 노래하더라.
坐愛溪水淸 不知山日夕 濯足望靑天 高歌紫芝曲』
삼연 김창흡 (三淵 金昌翕, 1653-1722)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 창집·창협과 함께 은거하였다. 후에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울진의 성류굴을 방문하여 기문을 남겼으며, 다음은 불영사에 왔다가 남긴 시 한 수이다.설악산 영시암을 최초로 지으신 분이다.
『부용꽃 봉우리가 피고 피어 성 이루고 금탑봉 청루봉이 날고자 하는데
전각 밑 용추에는 용이 황홀하고 동문 밖 광경에는 부처처럼 방불하네
눈 녹은 시냇물은 은폭포를 이루는데 이월의 봄구름은 푸른 산기운이 서리고
새벽에 둥근달을 따라가 좌망 대에 앉으니 속진을 씻겠더라
芙蓉千朶化城圍 塔岫螺峰惚欲飛 殿脚潭湫龍恍惚 洞門光景佛依?
一溪雪水騰銀瀑 二月春雲幕翠微 向曉步隨圓月去 坐忘臺上淡忘機』
이 외에도 임만휴의 수제자 이었던 우와 전구원(愚窩 田九?, 1615-1691)은 보개봉 소설(寶蓋峰 小說)과 남암 중창기(南庵 重創記)를, 울진 현령으로 재임 시 큰 선정을 베풀었던 서파 오도일(西波 吳道一, 1645-1703)은 양성 법사에 증하는 시를 남긴다.
자장(子張) 이세기(李世機)는 1701년(숙종27년) 9월에서 1705년 6월까지 울진 현령으로 부임하는데, 1702년에 불영사를 방문하고 시와 천옥 법사에 증한 글을 남긴다. 또 영의정을 지냈던 기자헌 (奇自獻, 1562~1624)도 불영사를 방문하고, 응진전 대들보에‘대시주 의정부 영의정 기공 자헌’이라 쓴 글이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아동이 있는데 불영사에 4살에 와서‘만고화(萬古化)’라고 썼다.‘평해 사동 김주서(金周瑞) 4세 서(書)’라고 협서가 쓰여 있는데,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불영사를 둘러보고 만고화라고 썼다니 기가 막힌다.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글씨는 참으로 천진난만한 질박미가 있어 보면볼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