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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14일 금요일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마태 5,17-20 참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율법을 단순히 지키는 것을넘어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여 완성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5,21)라는 율법 조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본디 율법이 지키고자 하였던 가치가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까닭 없이 심하게 모욕하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살인이 될 수 있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율법까지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교회도 신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근거로 주일 미사는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말 그대로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에만 몰두하고, 미사에 다녀와서는 온종일 온갖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어떠할까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계명의 본뜻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주일 미사를 드리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롭게 일주일을 시작할 수 있는 영적 위로와 힘을 얻어 가면 좋겠습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화내지 않고 남은 인생 여정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 마음속에서 자주 머리를 쳐드는 것이 젊은 시절 제 인생 여정 안에서 발생한 실수요,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정입니다. 그때 그 순간 왜 참지 못했을까? 왜 하필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 두고두고 후회할까?
특히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커집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돌아보니 얼마나 자주 가까운 이웃들에게 불처럼 화를 냈고, 또 그 화를 제어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을 안팎으로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씩 화를 내고 있고, 요즘은 겉으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 여전히 그런 과한 표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즘 화날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화를 내고, 분노할 일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자신을 돌보고 방어하는 노력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이라야지, 틈만 나면 흥분하고, 여기 퍼붓고 저기 퍼붓다가는 주변 사람들 다 떠나가고 철저한 외톨이로 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화나 분노의 성숙하고 균형잡힌 발산입니다. 먼저 분노할 일인가 웃어넘길 일인가 식별이 필요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정말이지 억울한 일,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저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그런 순간은 아이큐가 30퍼센트 급하락 하는 순간이니, 절대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냉각 기간, 짧게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한 후, 이성을 차리고 평상심을 회복한 후, 억울한 일에 대응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 순간 기도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성모송을 천천히 세 번 정도 바치며,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주 좋은 노력입니다.
언성을 높이면 지는 것이니, 일단 편안한 목소리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라며 차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나를 내 스스로 변호하고 배려해주는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보니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계신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여정도 분노 한번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서 ‘회의’를 하게 됩니다. 사목회의, 구역장 회의, 꾸리아 회의, 직원회의, 세대별 모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회의는 ‘시작기도, 안건토론, 공지 사항, 건의 사항, 사제 강복‘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구역장 회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회의가 진행됩니다. 시작기도, 복음 나누기, 안건토론, 공지 사항, 건의 사항, 사제 강복’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복음 나누기는 33년 전 서울대교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2000년대 복음화’라는 주제로 2000년을 복음화의 차원에서 맞이하려고 준비했습니다. 2000년대 복음화의 핵심 과제는 ‘복음 나누기’였습니다. 2000년대 복음화는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의 힘으로’ 시작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1993년에 복음 나누기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서 필리핀으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당시 연수에서 복음 나누기는 ‘Seven Step’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복음 나누기가 7개의 단계를 거쳐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일 단계는 회의에 주님을 초대합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자유롭게 주님을 초대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암송 기도에 익숙해서 자유롭게 하는 기도를 어색해 하지만, 주님을 초대하면서 회의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단계는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세 번 정도 복음을 읽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복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신앙인으로 지내면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삼 단계는 침묵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 겁니다. 엠마오로 가는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 단계는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을 3번씩 선포하는 겁니다. 복음이 이제 나의 마음 안에 머무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오 단계는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그 밭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 복음 나누기는 말씀이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찾은 보물을 나누다 보면 모임이 풍성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말씀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육 단계는 공동체의 나눔입니다. 공동체가 하였던 일, 공동체가 하는 일,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눕니다. 본당의 사목 방침을 알려줍니다. 본당의 공지 사항도 알려줍니다. 공동체의 의견을 본당에 알려주기도 합니다. 칠 단계는 마침 기도입니다. 참석한 인원 중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는 초대 교회가 살았던 신앙의 삶입니다. 30년이 지났지만, 달라스 구역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처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
하느님께
가는 길은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길이니
하느님을
품는 마음을
하느님처럼
품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건네는 눈길을
하느님처럼
건네는 눈길로
하느님께
내미는 손길을
하느님처럼
내미는 손길로
하느님께
내딛는 발길을
하느님처럼
내딛는 발길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하느님처럼
함께하는 삶으로
하느님께
가는 길은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길이니
오늘의 성인
성녀 마틸다(Matilda)
신분 : 왕비
활동연도 : 895-968년
같은이름 : 마띨다, 마띨디스, 마틸디스
프리슬란드-덴마크의 귀족 가문인 그라펜 디트리히의 딸로 태어난 성녀 마틸다(Mathildis)는 909년 작센(Sachsen)의 공작인 하인리히(Heinrich)와 결혼했다.
919년 하인리히가 독일의 하인리히 1세 국왕이 되자 독일 여왕이 된 그녀는 슬하에 다섯 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훗날 독일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Otto), 프랑스의 루이 4세와 결혼한 게르베르가(Gerberga),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하인리히, 프랑스 카페(Capet) 왕조의 위그 카페의 어머니인 하드비히(Hadwig), 그리고 쾰른(Koln)의 대주교가 된 성 브루노(Bruno, 10월 11일)가 그들이다.
그녀는 32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때 아들인 오토 1세로부터 극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심이 뛰어났으므로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동생 하인리히가 형인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드는 판국이니 그녀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그녀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 곳이나 세웠고, 만년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죽기 전에 그녀의 아들 오토 1세와 화해를 하고 968년 3월 24일 사망하여 궤틀린부르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과 교회의 후원자로서 큰 공경을 받는다.
성녀 바울리나 (Paulina)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젤(Zell)
활동연도 : +1107년
독일의 공작부인이었던 성녀 바울리나는 남편이 죽은 뒤에 그녀의 아들인 베르너(Werner)와 함께 젤에 파울린젤레(Paulinzelle)로 알려진 남녀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1107년 독일에서 선종하였다.
성 레오비노 (Leobinus)
활동년도 : +558년경
신분 : 주교
지역 : 샤르트르(Chartres)
같은 이름 : 레오비누스,루빈
성 레오비누스(또는 레오비노)는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일을 해 왔다. 소년이 되면서부터 배우려는 열망과 지식에 목말라하다가 어느 수도원으로 가서 노동일을 맡아하게 되었다.
낮에는 수도원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밤에는 불빛을 감춘 채 공부하였다.
그렇게 그는 겸손과 항구심을 얻었고, 그 수도원 안에서도 놀라운 지식의 소유자가 되었다.
한 번은 우연하게도 성 카릴레푸스(Carilefus, 7월 1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은수자 생활을 꿈꾸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성 아비투스(Avitus, 6월 17일)의 도움으로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스승이 운명하자 다시 은수생활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샤르트르의 주교로 착좌하고 교구내의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제4차 오를레앙
(Orleans)과 제2차 파리(Paris)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루빈(Lubin)으로도 불리며, 9월 15일에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