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호>
면면함에 대하여/ 이지엽
뒷집 까무잡잡한 황정문 어르신(70) 마당에 불쑥 들어선다
올해 파 금이 좋아 재미가 좋았지유?
그랬지라우 한 마지기 농사에 밭 한마기 살 정도 였응께
그라믄 농사도 도시서 샐러리맨 하는 것보다 훨 낫겄소 안
그래봐야 뭔 소용이 있간디요
한 해 조믄 시 해는 갈아 엎어야하는디
하얀 것 누르통통한 것 뒤섞인 계란 한 판을 부끄럽게 내미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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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묘비명/ 한희정
아무도 거두지 않아
속엣말은 못했네
다 말라 비튼 탯줄
그마저 놓지 못해
미약한 심박동 소리가 살아갈 이유였네
한 생이 남루하여
남은 것은 봉서 한 통
유언 같은 내력의 씨
뜻이야 알건 말건
의연히 늙은 호박이 발원 몇 줄 남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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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꽃/ 양해기
머리 땋은
그림자가
내 등 뒤에 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녀의 집
벌어진 대문 틈을 살필 때
내 발 앞에
툭- 하고 떨어져 내리던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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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아니야/ 마윤지
산에서
풀들이 떠는 냄새를 맡았다
매화가 언제 그렇게 피었는지
사람 같은 건 알 수 없는 비밀
지붕 끝에 집을 짓고 살던 벌들이
장례가 끝난 날
벌집을 다 비우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아, 깜빡 잊었다
하고 말해볼까
산까치는 몸이 작고
마을 사이로는 날지 않는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엄마가
식탁에 놓인
무화과잼의 생년월일이 언제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숙이고 나는
나에게 들리도록 답한다
모두의 두려움 속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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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호>
꽃이 피는 너에게/ 김수복
사랑의 시체가 말했다
가장 잘 자란 나무 밑에는
가장 잘 썩은 시체가 누워있다고
가장 큰 사랑의 눈에는
가장 깊은 슬픔의 눈동자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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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단교/ 장영춘
꽁꽁 언
압록강 배 타고 중심에서 본
툭 하니
끊어진 다리 어제의 일 같아
반세기
통탄의 시간 박제로 걸려 있다
우리는
왜 서로 품어주지 못하는가
자꾸만
쓸어내린다, 머리와 가슴으로
안부를
묻고 싶지만 입도 산도 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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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이숙경
한 발짝 뗄 때마다 한 뼘씩 불어난 바다
청보리 푸른 물결 가다듬는 올된 바람
먼 데서 가팔랐던 맘이 이 섬에선 만만하다
억지로 떼어내듯 못내 돌아섰던 날
들추면 지난 일들 한소끔 달아올라
다시금 일파만파로 번진다 두고 온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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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액자/ 최문광
목필(木筆)에 앞날 묻혀 밑그림 앉혀놓고
한설풍 입김마저
이불 덮어 모사했다
황금비 과정 익히며
황사 벽에 벙근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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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호>
칼/ 정수자
야밤에 칼을 샀네, 비색에 홀려 들어
오늘의 운세 삼아 입술이나 대볼까
꿉꿉한 묵언 끌탕이나 채로 진탕 쳐볼까
직입은 똑 놓치면서 푸념만 후 늘어져도
대낮에 칼을 품고 나갈 일은 없을지니
쪼잔히 노염이나 썰어 바람길에 뿌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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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거울- 도약/ 서정화
뜨겁고 마른 공기
검고 붉은 거친 숨 쉬며
무너질 듯한 심연을 온몸으로 지키려
잉어가
입 벌린 채로
물살에 튀어 오른다
금 긋고 번쩍이며
선(禪)이 쏟아져 내린
물줄기가 소리치며 풍경을 벗는다
어느새
나로부터 떠나는
그렇지만 떠난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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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김영주
까도 까도 나온다고 날 비난할 일인가
까도 까도 양파니까 까도 까도 나올밖에
그래 나, 껍질 아니야
양파라고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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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정 위로 한 줄/ 김나영
냉동고 문을 열다 찬 통이 떨어졌다
발톱이 무슨 죄야, 반창고를 붙였다
평소에 꼬락서니를 감춰볼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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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학교/ 최서연
봉사활동 차 농아학교에 들르는 날 비가 내립니다.
대화 중에도 창밖으로 동글동글 동그랗게 내립니다
한 아이가 도화지에 줄기차게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동그라미 속에 엄마 강아지 나무 풀꽃들이 있습니다.
이름 부를 수 있는 것들이 가득 담긴 동그라미입니다.
어떤 이름도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동그라미입니다.
입을 닮은 동그라미이고 말같이 생긴 동그라미입니다.
동그라미마다 따스한 빗방울 촉촉하게 머금고 있습니다.
-<시와사상>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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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일기 15/ 강나루
한기를 느끼는 나보다 뜨거운
구름의 체온이 내 마음을 뎁힌다
부드러운 살이 내 살과 만나 감촉이 좋아
오래 안고 있어도 무겁지 않다
체온과 체온, 살과 살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일은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는 것
사람과 동물이라는 경계와 선입견은 지워지고
마치 내 아들이나 딸 같다는 생각뿐
그러므로 나의 피가흐르고 있음은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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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자작/ 김천수
종이접기처럼 한 사람의 기억을 접으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해
눈물은 기억을 접어 본 사람만 아는 비밀 같아서
소리 없이 주저주저 걸어가는 상처 같아서
기억을 접으면 슬픔을 접는 것 샅아
접으면 접을수록 하나로 귀결되는 사람
저물녘, 소금 바람에 휘청거리는 배가
배정된 부표 앞에 멈춰 서 목을 빼고 울 때
애도 한 줄 없이 겨울 바다가 내게로 와 젖었다
젖은 바다는 가끔 사람들을 지워버리곤 해
산분함 속에서 한 줌 한 줌 가루로 떨어지는 너를
영하 20도 차가운 수면에 떨어지는 너를
전부 다시 건져 올리고 싶었던 소한 저녁
나는 젖는다와 접는다에 갇히고 말았지
사실 기억은 날마다 익숙해지는 통증 같은 것일지 몰라
접을 때마다 슬픔은 종이 인형처럼 납작해지고
자작자작해진 초상 하나가 나에게 집중할 때까지
거침없이 눈발이 날리는 날
나는 너를 잃고 습관처럼 떠도는 나를 접고 또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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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
칠운(七雲)/ 김동호
거처가 일정치 않다
하늘과 땅 사이에 거하며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은
한 번도 없다
능소능대의 몸집으로
만물과의 사랑에만 흥이 난다
'왜우리 여기 왔을까?'
'언제 우리 여기 떠날까?'
이런 깡통 질문, 그들은 안 한다
죽음이
그들을 피해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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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을 쌓는 사람/ 김가연
돌탑을 쌓는다 돌은 돌을 받들고 새로운 돌이 된다
햇살이 쏟아진다 심장이 뛰고 피돌기를 한다
돌은 돌이 되고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다
한 덩이 침묵을 들어 올린다 돌은 가벼워지고 돌은 보이지 않고 돌이
앉았던 자리가 빛나고 새가 날고 돌은 돌을 받들고
돌이 자라고 이끼가 자라고 몇 번이고 다시 자란 돌이 차오르고 돌을
나르는 이도 없는데 돌탑을 쌓고
돌은 돌을 받들고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다 돌을 쥔 당신의 손금이 빛
난다
-<시현실>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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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배/ 오세영
시는 영혼의 술,
술은 육신의 시,
높이 들어라 술잔!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하늘을
날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마시자
취하자
우리들
자유로운 영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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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론/ 이건청
텃밭에서 무 배추가
자랍니다.
고추도 토란도 한 두럭,
햇살과 비와 흙이 함께
세상 풋것들을
전부 기릅니다.
자연 섭리 따라,
배추도 고추도,
시도 철학도, 역사도
흙에 뿌리를 바로 내려야
가을 결실을
기다립니다.
흙에 뿌리를 바로 내리고서야
꽃도 피우고
시도 거둔다는 걸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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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 사이/ 이서화
별은 우주 공간에
몸을 매어 두고 있다.
너무 멀어서 어쩔 수 없는 그쯤
현재라는 시간으로 버려져 있다
멀리 빛나는 두 개의 별 사이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다
별이 늘 한자리에 머무는 것은
줄다리기할 때처럼
어쩔 수 없는 두 개의 힘
저 별빛은
아득한 먼 곳에서 온다
먼 곳의 빛 그 끝이나 처음쯤에서
가깝게 혹은 또 멀게 서 있다
멀리멀리 가면서 사라지는
별의 일생
도착도 돌아갈 곳도 없는 빛의 일생이라며
그런 별빛의 종착을
자처하고 싶지만
내가 서 있는 이곳에 내려서지 않는
빛은 내가 살아서는 닿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두 개의 별 사이
그곳은 가만히
서 있기 딱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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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당 공원/ 김민정
11월 숫자처럼
힘차게 서 계시네
사당 안에 앉은 처녀
바라옵기 민망해도
향나무 굳센 결기로
해마다 풍년이다
힘의 원천이요
성스러운 신의 선물
오래도록 잠들었던
내 처녀도 깨어나서
바닷가 놀빛에 타는
한 가을이 후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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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펑나무 신전/ 임영숙
한 자락 넓은 그늘 발 등에 깔아놓고
팔 벌려 오가는 새 의자도 되어주며
경계를 넘나드는 것
손 인사도 나누지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는 여정 속에
허공 속 헤엄쳐서 구름도 엮어가며
결연한 마음의 끈을
단단하게 내리지
속 깊이 뿌리내린 지독한 사랑으로
서로가 길이 되고 서로가 신전 되는
땡볕에 삭아가는 몸
스펑나무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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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살아있는 불가능을 감추고/ 정지윤
달빛에 가지들이
우르르 어두워진다
높은 곳 고양이가
두 발을 모으는 밤
밖으로
뛰어내리는 달
나는 발을 헛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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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을/ 김비주
어떤 사람은 물 같아서 손으로 잡기 전에
흘러내리기도 하지
흘러내린 그 물에 얼굴이 비치면
저 먼 나라에서 잠깐 다니러 온
마알간 복숭아 같은 사람
올여름은 신들이
땀에 절인 편지들을 구깃구깃
흘러내리던 마음들 사이로 태양은 곤두섰고
시를 쓰는 일이
바람 잡는 일이 되어
서편 별이 이울 때까지
바람의 끝에 매달려 바람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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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완창/ 천양희
바람이 짧게 강변을 지납니다. 산그림자 길게 당겨보고 물새 발자국도 슬
쩍 들춰봅니다 상형문자 같은 발자국들 새들도 때로 자국을 남깁니다 물살
에 잠긴 저것이 흔적일까요 물은 흔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기 저 물자리가 무량합니다 물뱀들 물방개들 물길 따라 놀고
온갖 잡풀들 물을 타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물속에서도 잘 놀던 아이들을 생
각합니다. 물속에선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갑니다 그것만큼 무심한 것이 더
있겠습니까 무심한 마음으로 무궁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곳에 산다는 건 자
주 물 먹는 것이라던 친구의 말이 물보라 칩니다 물 같은 삶은 없는 것입니
다 물속을 한번 더 들여다봅니다 눈 뜬 물고기들이 나를 빤히 올려다봅니다
물 먹고도 잘 살고 있다는 듯 물 흐르듯 살지 못한 내가 오늘은 물에 대해 수
심 깊게 적고 말겠습니다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에 대해 물의 내
력에 대해
-『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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