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2)
채명신 장군 진짜 예편이유
최근 세상을 떠난 채명신 전 파월사령관(중장)이 자신을 국립묘지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8평에 시신을 매장하는 장군묘역과 화장해 1평에 묻히는 사병묘역과는 천지차이다. 채 장군의 마지막 모습은 나름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그의 부음기사를 보면 박정희 유신에 반대했다거나, 박정희가 그를 라이벌로 생각해 강제 예편시켰다거나, 평생 허름한 후암동 집에 살았다 등 찬양 일색이다.
하지만 그를 취재했던 기자는 군인으로서, 공직자로서, 아니 한 집안의 아버지로서 그의 삶은 별로였다고 평가한다. 꼭 20년 전인 1993년 용산 후암동 채씨의 집 앞에서 20대 젊은 청년의 이색 1인 시위가 벌어졌다. 피켓에 쓰인 글은 ‘아버지 한번 뵙게 해 주세요’였다.
사진은 바로 그 때 시위를 벌인 청년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20년 전 공개한 얼굴이며, 채 장군의 젊은 시절과 닮지 않았나) 왜 잘생긴 청년이 채 씨 집 앞에서 ‘아버지!’를 외쳤을까. 나중에 친자확인 소송을 통해 드러난 것이지만 사정은 이러했다.
5.16 쿠데타에 가담해 권력을 쥔 채 장군은 젊은 여대생과 내연관계를 가져 1967년 아들 채 모 군(이름도 채 장군이 지어주었다고 한다)을 낳았다. 당시 아이의 초등학교 학적부 부친란에도 '채명신'으로 돼 있다. 채 장군의 아들을 낳은 이 모 씨에 따르면 자신과 채 장군의 이런 관계는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차지철 경호실장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 채 군이 성장한 1975년 ‘돈을 주면서 멀리 가서 살라’고 해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갔다. 다행히 이 아이는 잘 커 미국주립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치료사 자격증까지 따, 병원 카운슬러로 취직했다. 그런데 서울 용산에 있는 미8군 병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던 채 군은 어머니에게 자신의 출생비밀을 물었고,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는 한국의 유명한 제너럴 채’라고 대답했다.
서울에 온 채 군은 가벼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 전화했다. 미국에서 학창생활을 한 채 군은 미국 분위기가 그렇듯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대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채 장군은 쌀쌀맞게 ‘나는 그런 아들을 둔 적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채 군이 채 장군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에서 채 장군이 끝까지 자신의 친자를 부인하자 미국에 있던 어머니가 증인으로 법정에 서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원고 측 소송을 해마루합동법률사무소 천정배(후에 법무부장관 역임) 변호사와 임종인 변호사(역시 후에 국회의원)가 맡았다.(소장 사진, 호적은 1년 늦게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채 장군측은 대법관을 지낸 거물 변호사를 선임하며(당시 이례적으로 대법관 출신 변호인이 직접 법정에 나와 변론을 펼쳤다) 시간을 끌었다. 당시 판사가 ‘채 장군을 설득해 병원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으라’고 얘기하면,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일어나 ‘유전자 검사 자체가 장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이에 판사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음 기일로 넘기는 것을 반복했다.
결국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채 군의 미8군 근무 계약기간이 만료됐다. 서울에서 생활할 여건이 없던 채 군 모자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975년 채 군 모자의 미국행을 실무적으로 추진한 사람이 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었다. 재판할 즈음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있던 강 의원은 이런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확인해 줬다. 그리고 채 장군의 예편 이유에 대해서도 ‘월남에서 너무 축재를 많이 해 부하들이 연판장을 돌려 예편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채 군과 어머니 이 씨는 미국에서 채 장군을 상대로 다시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때 파악된 채 장군의 재산(국내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제외하고, 자녀 명의로 된 해외 금융자산)은 상상을 초월할 규모였다. 강창성 의원은 ‘월남에 간 김 상사도 귀국할 때 비싼 TV를 들고 올 정도였는데, 파월 총사령관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관대하게 평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특히 채 장군이 자신이 지휘했던 사병과 같이 묻히겠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일부 언론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채 장군이 유신에 반대하다 예편했다거나, 청렴한 군인이었다는 것,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것 등의 평가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그는 보통사람이 아닌, 우리 현대사에서 나름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 당시 주체세력의 확장과 분화, 몰락 이유 등은 현대사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따라서 최대한 진실에 기초해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요즘 논란이 되는 현대사 왜곡을 방지하는 일이다.
PS;
세상에 믿을놈 하나 없네...
코메디같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