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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4:5-8) 보암직한 유혹을 이기는 비결
누가복음 강해 (2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눅4:5-8)
원죄의 발생 경위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해서 에덴동산을 아름답게 관리하도록 아담과 이브를 서로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습니다. 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입증하면서, 선악과 하나만은 따먹지 말라고 금지했습니다. 만약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경고했는데, 사실은 당신이 베풀 사랑의 품을 절대 떠나지 말라는 신신당부였습니다.
한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풍족히 누리며 즐겁게 살던 그들에게 사탄이 은밀히 찾아왔습니다.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 죽지 않고 오히려 너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속삭였습니다. 이브는 너무나 매혹적인 제안이라 솔깃해져 선악과를 다시 주목해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창3:6) 여겨져 따먹고는 함께 있던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자기들 기대와는 정반대로 스스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되기는커녕, 거꾸로 자기들의 실체가 보잘것없이 미약하고 너무 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과 완전히 단절됨으로써 선악과 금령대로 그 영혼이 완전히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초 부부는 창조의 첫째 축복인 생육하고 번성할 책임을 져야 하므로,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반면에 그 모든 후손은 태생적으로 그 원죄의 멍에를 쓰고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인간의 그런 상태가 이브가 죄에 빠졌던 모습과 똑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2:16) 세상의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고 사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만 높이는 원죄에 묶인 모든 인간은 먹음직한 육신의 정욕과, 보암직한 안목의 정욕과, 지혜로워져서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킬 목적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씌워진 그 원죄의 멍에를 벗겨서 구원해 주려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첫 번째 사역으로 광야에서 사탄과 대결을 벌리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브에게 사용해서 쉽고도 철저하게 성공했던 유혹을 주님에게 똑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즉 육신의 정욕을 건드리는 시험을 걸어왔습니다. 목숨이 오갈 정도로 굶주린지라 선악과가 먹음직해 보여서 따먹었던 이브의 잘못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주님더러 사람들에게 현실적 축복을 풍요롭게 베푸는 메시아가 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며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브의 잘못을 바로잡고서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준 것입니다. 또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현실적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주는 메시아가 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보암직했던 안목의 정욕을 건드리는 두 번째 시험을 완전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물리쳤는지 알아볼 차례입니다.
시험의 순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언급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복음서끼리 첫째 시험은 일치하나, 나머지 두 시험의 순서가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누가와는 반대로 사탄이 주님더러 성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을, 자기에게 절하라는 시험에 앞서 기록했습니다. 성경이 반드시 시간적 순서대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 시험을 받으시더라는 원어가 금식 기간 내내 세 시험에 시달렸다는 뜻이므로, 어느 순서로 해석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마태에 따르면, 사탄이 두 시험에 실패하자 마지막에 노골적으로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요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의 순서는 창세기와 요한일서가 증언하는 이브의 타락 과정과 일치합니다. 사탄이 먼저 돌을 떡으로 만드는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을 걸었고, 그것이 실패하자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어서 안목의 정욕을 건드렸고, 마지막으로 주님더러 성에서 뛰어내리는 큰 능력으로 이생에서 자랑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이브는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또 지혜롭게 보여 선악과를 단번에 따먹었습니다. 죄의 행동은 한 번이나 그 생각은 육신의 정욕에서 안목의 정욕으로, 마지막에는 이생의 자랑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원죄에 묶인 인간은 순서와 관계없이 셋 중 한둘만 채우려 들어도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잘 따져보면 인간 죄악의 발생 경위는 거의 다 이브처럼 육신의 정욕이 해소되면, 안목의 정욕을 채우려 들고,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높이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탄이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갔다’라고 하고, 마태는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라고 합니다. 유대 광야에 천하만국이 보일 만큼 높은 산이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기사는 명백한 오류라고 비판하지만, 에베레스트산에 올라가도 천하만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시험을 받았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제벨 쿠룬툴’ 산에 한 수도원이 세워져 있는데, 험준하고 가팔라서 케이블카로 올라가야 합니다. 라틴어로 ‘제벨’은 산이고, ‘쿠룬툴’은 사십이라는 뜻이라 문자적으로 ‘사십의 산’이라고, 즉 주님이 사십 일간 금식했던 곳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여리고에서1.2킬로밖에 안 떨어져 있고, 여리고 자체가 해저 약 258미터에 위치해서 그 산이 체감적으로는 아주 높아 보입니다. 여리고 성을 포함해서 요단 계곡과 사해 방면이 한눈에 다 내려 보입니다. 추적하던 가나안 군병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숨어서 볼 수 있도록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두 정탐꾼을 피신시킨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2:16)
사탄은 사십 일이나 금식해서 의식이 흐릿해진 주님에게 천하만국을 환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도 산 아래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성읍이 천하만국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첫 시험에서도 주님 주변의 돌들이 빵 색깔과 같아서 떡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 시험에 절대로 져선 안 되고 또 그럴 리도 없지만, 생명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냈다는 것은 우리로선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대단한 은혜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매혹적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는 모든 사물과 사안의 표피적인 차원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그 겉모습만 봐도 너무 좋아서 인생을 만족하게 살게 해줄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보기 싫으면 싫어하고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고 있는 대상 자체가 지니는 고유의 의미와 가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속 알맹이는 버리고 빈 껍데기만 취하는 셈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고 떡을 먹는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수인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그 중 최우선인 식량을 조달해서 생존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에 어떤 욕심이 생깁니까? 색깔과 향기가 좋아서 보기에도 그럴싸한 맛있는 음식을 이왕이면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우아하게 먹으려 합니다. 기본적인 양이 채워지면 질적인 수준을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식량 다음에 갖춰야 할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는 다들 가난하고 옷이 부족해서 언제 어디서나 한 벌로 버텼습니다. 낡아서 헤어지면 기워서 입었고, 심지어 양말마저 구멍이 나면 못 쓰게 된 양말에서 천을 떼서 갖다 덧붙였습니다. 그러다 점점 소득이 늘어서 생활 수준이 높아지자, 보기 좋고 품위 있는 옷을 여러 벌 구매하여 경우에 맞춰서 골라 입게 되었습니다.
휴식과 수면을 취하는 장막인 주택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중상류층 주택에는 체육관, 영화관, 도서관, 의상실 등을 갖추는 것은 보통입니다. 땅이 넓고 주재료가 나무라서 건축비가 저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택이 더 이상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직장생활은 하루 24시간 중의 8시간뿐이므로, 그 두 배가 되는 여가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는 공간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사람의 욕구는 끝이 없어서 의식주의 질을 높이다 보면 불필요한 사치와 낭비로 치닫게 됩니다. 또 필수적인 역할과 기능은 제쳐두고 겉모습만 치장하면 온갖 무리수가 동원됨으로써 이런저런 폐해가 나타납니다. 사람들 사이에 불쾌감과 위화감을 조성하다 못해서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원죄 아래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인데,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다 보면 사촌끼리도 싸워서 더불어 사는 사회와는 거리가 더 멀어집니다.
과유불급의 덕목
그래서 세상 도덕과 종교에선 무엇이든 평균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게 추구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고, 즉 과유불급의 미덕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과 종교의 도움 없이도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체험으로 깨닫는 상식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비록 원죄로 많이 왜곡 파괴되었어도 자기 이성과 양심에 따라 그 정도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외적으로도 질서 있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만드셨습니다. 당신께서 임재하실 성막이나 성전을 정확한 양식에 따라서 그 외관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세상을 외적으로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는 것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에 속합니다.
짐승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집을 멋지게 꾸미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새들은 작은 가지들을 얽어서 새끼가 혼자 날 수 있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둥지를 만드는 것으로, 즉 생육 번성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만 외적인 아름다움도 추구할 수 있는데, 사실상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에 참여하는 고귀한 일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예술이 다 사라진다면, 예컨대 미슐랭 맛집이나 미술관이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인간끼리 애정이 점점 메말라져서 오히려 죄악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누구나 체험으로도 알 수 있는 중용의 도, 검소한 생활 습관,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기껏 그런 가르침을 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으며, 지금도 사십 일이나 금식하며 사탄에게 조롱 섞인 시험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브가 넘어졌던 원죄, 그래서 인간에게 씌워진 그 끈질기고 교묘하고 음흉한 멍에를 벗기려고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검소한 중용의 미덕을 가르치려 했다면, 천하만국의 영광이 너무 화려해서 그곳의 왕 노릇은 하기에는 과분하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사탄도 그런 도덕적 잘못에 빠지게 하려고 이 시험을 건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목적은 주님더러 자기에게 절하게 하는 것이었고, 주님도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절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시험을 물리친 것입니다.
주님은 세 시험을 다 신명기의 말씀으로 물리쳤는데, 안목의 정욕을 건드리는 이 유혹에는 신명기 6:13을 인용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명기는 알다시피 40년의 광야 방황을 끝내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의 신세대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새롭게 가르친 설교집입니다. 처음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받을 때는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의 거역으로 형벌을 받은 아버지 세대의 잘못을 절대로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처럼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선악과 금령처럼 하나님 사랑의 품을 제발 벗어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주님은 보암직해서 안목의 정욕을 채우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려면 하나님만 경외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굳건하게 결심했더니 천하만국의 영광이 갑자기 쓰레기로 보이거나, 아예 그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까?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또 간절히 기도했더니 미슐랭 맛집을 보면 구역질 나고, 명품 옷이 누더기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요한 사도가 안목의 정욕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으나, 세상의 것이 전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묵인하에 공중 권세를 잡고서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을 뜻합니다. 사탄이 심어주는 안목의 정욕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안목의 정욕을 하나님을 배제한 영역에서 충족하려 들면, 죄에 빠지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주신 외모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는 순간 추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해서 만물을 관리할 청지기로 세우려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사랑의 품 안에만 거해야 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원죄를 범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에 세상에서 자기만 최고로 높이려는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 세 욕망이 세상에서 온다고 설명했는데, 인간이 자기만을 위해서 그 세 욕망을 채우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온전히 주관하는 주체는 하나님과 사탄뿐인데, 불행하게도 타락 이후로 사탄이 주인의 자리를 꿰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성자 예수님이 사탄을 인간의 주인 자리에서 몰아내고서 당신의 양 떼를 불러 모으려 합니다. 우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브를 대신하고 또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사탄이 심어주는 안목의 정욕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하만국이 갑자기 추악하거나 훨씬 적은 나라들로 보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영광스럽게 보였으나, 주님은 하나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인간이 안목의 정욕 때문에 죄에 빠지는 일을 이기는 비결이 바로 그래야 한다는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만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을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만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창조하신 후에 매번 기뻐하셨고, 마지막으로 당신을 닮게 인간을 만든 후에는 아주 흡족해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뤄서 생육 번성할 수 있도록 생존 환경도 완벽하게 미리 마련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창조의 경륜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고, 하나님도 그런 모습을 심히 기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으로선 만물이 당신의 자식인 셈인데 어찌 아름답게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형상을 닮은 인간도 모든 피조 세계를 하나님과 동일한 심정을 품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거저 주신 선물이자 함께 공존 번성해 나갈 동료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이 주신 자연을 기쁨과 감사로 누림으로써,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꾸려나가야 합니다. 바꿔 말해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온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고도 선하게 보이게 됩니다. 마치 자기를 향해 함께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 같아집니다.
불행하게도 이브는 하나님의 관점을 버리고서 자기만 높이려는 헛된 욕심으로 선악과를 바라본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을 얽어매는 종교적 규율이 아니라, 인간을 당신의 품 안에 붙들어두려는 사랑의 울타리였습니다. 당신의 보호와 인도를 벗어나면 죽음뿐이니까 절대로 그러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비유컨대 부모가 친자식더러 제발 남의 집에 가서 아들 노릇하거나 밖에서 아비 없는 고아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키기에 너무나 쉬운, 아니 굳이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금령이었습니다. 아이가 자기에게 부모가 있다는 사실만 잊어버리지 않아도 되는데, 아이가 친부모인 하나님을 버리고서 사탄으로 부모를 바꾼 것이 원죄입니다.
겉만 보는 죄악
하나님의 시각으로 만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이 보시기에 좋아서 나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시24: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분이 부여해 놓은 고유의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니라”(마6:2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새에게 일일이 모이를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소한 생물이라도 자연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서 그분의 창조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라고 가르친 대로입니다. (롬1:20)
주님은 거기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한마디 더 보탰습니다. 인간은 당신의 대리인으로 세웠으니까, 생육 번성은 당연히 당신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없으면 바로 죽는 물, 공기, 햇빛 등을 무한대로 거저 주셨습니다. 인간의 의식주를 채울 수 있는 자원도 자연에 넘치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조화롭고 풍요롭게만 가꾸면 먹고 마실 것에 부족해질 리 없습니다. 바꿔 말해 자기만의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따로 채울 필요나 이유가 없으며, 그러는 순간 세상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가장 필수적인 공기 물 같은 것들은 무한대이고 공짜니까, 인간은 굳이 안목의 정욕을 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세상의 다른 것들에서 안목의 정욕을 채우려고 무한 경쟁을 벌리는 바람에 최근에는 그 여파로 공기와 물까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요 아무리 비천한 사람도 그분의 귀한 백성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서 자기만 높이려고 가난한 자의 소유를 빼앗고, 새들이 먹고 살아야 할 수풀조차 무차별로 벌목했습니다.
주님이 인용한 모세의 말은 하나님만 경배함으로써 가데스 바네야의 반역 같은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말라는 훈계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사실은 안목의 정욕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2, 33)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관점으로, 그것도 외모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했으니까, 외모로 판단했다기 보다는, 자기들 안목의 정욕을 채우려고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들도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민13:27)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땅이 정말로 아름답고 풍요롭다고 인정했습니다. 그곳의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서 둘이 막대기에 꿰어서들고 와서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들의 생각이 그 땅의 장대한 거주민과 견고한 성읍으로 옮겨지자 갑자기 너무 무섭게 보인 것입니다. 먹을 식량이 충분하여 육신의 정욕은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으로로 쉽게 정복할 수 있게 보여야만 안목의 정욕도 채워질 수 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이 사백 년 전에 선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었고, 당신께서 그 약속을 지킬 권능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애굽에서 열 재앙과 홍해의 기적과 광야의 만나로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빼버리고 가나안의 외적 방어 태세만 자기들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승리는 완전히 뒷전이 되었고 사탄의 농간대로 패배와 죽음만 눈앞에 보인 것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따라서 원죄의 멍에를 벗고서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만물을 자기만의 정욕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고귀한 피조물이자, 각각 특유의 가치가 있고, 창조 질서에서 맡은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새나 들풀도 그러한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물며 인간을 바라볼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고귀한 가치가 있으며, 특별히 그분께 구원받은 신자는 창조 사역을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라고 선언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서 신자가 된 후에 가장 큰 특징이 육신을 따라 사람을, 즉 그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로마 사형수로 죽었기에, 모세 율법의 문자적 규정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죄인이라서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성경도 외모로만 보다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봤더니,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서 53장이 예언한 대로 수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고치자, 자기들의 종교적 외모에 묶인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야단쳤습니다. (요7:24) 그리고 당신이 가르친 대로 인간 세상에서 외모로 차별 멸시 받는 자들을 주로 찾아가서 위로 치유 구원해 주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외모에 기준해서 판단 정죄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자기 속도 모르는 인간이 남의 속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이의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만 취하면, 즉 안목의 정욕만 채우려 들어선 오히려 자신의 추한 알맹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이 그래서 남의 눈에 티클보다 자기 눈의 들보부터 빼라고 훈계한 것입니다. (마7:1-5)
지금 사탄이 보여주는 천하만국의 영광이 아무리 화려하고 풍요롭게 보이며 사탄이 거저 주어도 주님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천하만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분의 것이니 그분께 돌려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천하만국의 왕 노릇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 없는 백성으로 살아도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간단히 풀면, 그것 하나만은 하나님의 것이니 절대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브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거나 흔들렸기에 따먹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은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떡만 먹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사탄의 조종 농간 유혹이 들어간 떡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무엇을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와 근거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라고 밝혔습니다. 미약하고 비천하며 죄 많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니 얼마나 엄청난 영광입니까?
우리처럼 연약한 신자라도 평소에는 사탄에게 절할 리 없습니다. 그러다가 네로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는 것 같은 경우가 닥치면, 어쩔 수 없이 쓰러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처절하게 회개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잘 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그런 아픔을 이기려고 사십 일이나 금식하면서도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으셨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만물을 보는 안목을 아름답게 고품격으로 가꾸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자연을 훼손 파괴하지 않는 한, 아프리카의 모든 주민들도 미국처럼 큰 집에서 살며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은 일이며 하나님도 바라는 바입니다. 기독교는 혼자서 의롭게 중용의 길을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조화롭고 풍요롭게 번영할 수 있는 길을 함께 가라고 합니다. 그것도 인간만의 노력으로는 반드시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손을 잡고 걸으라고 합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로워서 최선의 대책대책 같아여도 자기를 높이는 인간이 고안한 것이라면 절대로 온전한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가 그 진리를 증명해 줍니다. 또 바로 그런 잘못을 인간 스스로 고칠 수 없으없으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완전한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극심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현실적으로 큰 고난이 닥치면 육신의 정욕은 물론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유혹이 다가오며 그 앞에 한없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신자가 갖춰야 할 완전한 하나님의 관점을 정확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하나님을 빼버리면 어떤 환난도 장차의 소망보다 커 보이고, 하나님을 붙들고 있으면 환난으로 인한 매혹적인 유혹도 장차의 소망에 비하면 아무 가치 없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래서 만물을 그분의 시각으로, 특별히 그분의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으로 바라볼 때만 보암직한 안목의 정욕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3/15/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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