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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리수필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거사
포은과 포항
이 상 준(향토사가,수필가)
우암 송시열은 ‘영일’을 가리켜 “군자지향 가가충효(君子之鄕 家家忠孝)”라 하였다. 군자의 고향이므로 집집마다 충신과 효자가 가득하다는 것이다.1) ‘군자’란 곧 포은 정몽주를 지칭한다.2)
포은은 본관이 오천이다. 오천(烏川)의 ‘오(烏)’ 자는 태양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고대인들은 태양 속에 있는 흑점을 보고 해 속에 세 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고 믿었다. 그 까마귀를 삼족오(三足烏)라고 하였다. 삼족오는 곧 태양숭배사상의 표현이다. 포은의 탄생설화에도 해와 달이 등장한다. 후대 사람들은 포은이 영일 출신임을 태몽에 대한 설화로 은유해 놓았다. 해와 달을 머금고 태어난 포은은 자신이 지은 시문의 끝에 “오천 정몽주 ”라고 적음으로써 고향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대단했음을 보여주었다.
포은이 영천 외가 집에서 태어난 것은 맞다. 어머니가 산달이 되어 친정집에 가서 포은을 낳았다고 하는 설이 있고, 고려시대 결혼풍습에 남자가 결혼을 하면 처갓집에서 일정기간 ‘처가살이’하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포은을 영천에서 낳았을 것이란 설이 있다. 그렇지만 영천은 잉태하여 출생한 곳, 즉 포은의 ‘태생지’는 아니기 때문에 포은의 출생지를 포항 오천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오늘날 영천 임고면은 포은의 출생지이자 고향으로 각광받으면서 국가의 막강한 재정적 지원 아래 숭모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안병권․이정호 포항시의원을 비롯한 오천청년회와 박남희 회장을 주축으로 한 포은문화연구회, 배용일․이상준을 중심으로 한 향토사가 등이 포은의 출생지이자 고향이 포항(오천)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하기 전까지는 포항은 포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으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다.
이제 와서 포은의 출생지를 포항으로 바꾸자는 억지 주장은 절대 아니다. 다만 선생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오천에 대해서도 영천과 같이 알리고 싶은 것이다. 오천 구정리에 있는 포은의 유허비와 문충리 생가 터, 오천서원 등도 영천에 있는 임고서원이나 효자비 못지않다는 것을 홍보하고 싶은 것이다. 포항이 충절의 고장임을 알리고, 포은의 사상이 현재까지도 형산강의 저 도도한 물결처럼 포항사람들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은 것이다.
포은의 포항관련 자료
1).『포은선생문집』의 「관향(貫鄕)」 편
포은이 오천(烏川) 출신이라는 것은『포은선생문집』의「관향(貫鄕)」편3)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앞에 것은 생략하고)...... 포은은 오천이 고향이므로 호를 따로 ‘오천(烏川)’이라고도 하였다.4) 지주사(知奏事) 선생 때부터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으며 중간에 영천으로 이주하였다. 포은선생이 자신이 지은 시에서 “영천 들판 논에는 벼가 잘되고, 오천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있어, 나에게 두 가지가 모두 있건만, 돌아가는 글은 짓지 못하는 구나” 라고 한 것이 있다. 이 시구(詩句) 밑에 “영천과 오천 두 고을은 경계가 잇대어 있는데 모두 내 고향이다”라고 직접 주석(註釋)을 달아두었다. 이는 곧 포은이 거주했던 집이 오천과 영천 두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그 유허지(집터)가 어디인지 확실히 모를 뿐이다. (포은선생문집)
(원문:貫鄕 烏川。本迎日縣。新羅斤烏支縣。在今慶州東北四十里。東濱海。距京八百里以烏川。在其地故。別號曰烏川。自知奏事先生。世居于此。中移永川。圃隱先生有詩曰永野田宜稻。烏川食有魚。我能兼二者。但未賦歸歟。先生。自註永川烏川二邑連境。皆吾鄕里云則其有居宅。可知而但今未的其遺墟耳)
2).포은의「행장(行狀)」
포은의「행장」은 그의 장남 종성(宗誠)이 1410년 당시 보문각제학이던 함부림(咸傅霖)에게 의뢰하여 작성하였다. 함부림은 포은의 문인(門人)이었다. 포은이 돌아갈 때 종성(宗誠)은 19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학문이 깊었던 함부림을 의존하였던 것 같다. 함부림은 포은의 가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밝았다고 보아지고, 포은선생문집 『초간본』 발간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함부림이 작성한「행장」은『초간본』이래 모든『포은선생문집』에 실려 있다. 이는『고려사』나 포은의「연보」를 작성하는데 1차 사료(史料)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영일현읍지』5)와『교남지(嶠南誌)』6)에도 그 내용이 일부 언급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행장」에는 포은이 “慶州府 迎日縣人”이라고 되어있다. 어떤 이는 관향(貫鄕:본관)이 영일이라는 것을 함부림이 ‘영일현인(迎日縣人)’이라 표기했다고 주장한다. 허나 관향을 표기할 때는 그냥 ‘영일인(迎日人)’이라고 하지 ‘영일현인(迎日縣人)’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앞에 경주부(慶州府)까지 붙여서 ‘경주부 영일현인(慶州府 迎日縣人)’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영일현인’ 대신에 “오천인” 이나 “연일인”이라 해두었다면 그게 본관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앞에 ‘경주부’를 넣고 ‘현(縣)’자를 삽입한 것은 태어난 곳 또는 출신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는 영일정씨는 조선 시대에 평균 41면마다 한 차례씩 모두 8회에 걸쳐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 족보들은 모두 정몽주의 파계(派系)에 해당하는 지주사 공파에서 편찬한 것이다. 영일 정씨 최초의 족보였던『가정계축보』(1553)의 서문에서 편찬자였던 정세필은 ‘영일정씨’가 아니라 ‘오천정씨’라고 쓰고 있다. 또 조선 중기에 편찬된『오천원파록』(1649)이라는 영일정씨 족보의 이름도 ‘오천’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영남 지방의 영일정씨 족인들 사이에서는 집안에 따라 영일․연일․오천이라는 본관을 혼용하고 있지만, 이 족보들이 나온 17세기 까지는 오천과 연일이라는 본관만 쓰였지 ‘영일’이라는 본관은 적어도 족보상에서는 어디에도 쓰인 흔적을 찾을 수 없다.7) 『태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때에도 역시 ‘오천’이라는 본관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읍지의 인물 란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인물 란에 정씨의 본관을 ‘영일인’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거의 없다. 거의 ‘오천인’으로 표기했고 가끔씩 ‘연일인’이라 표기해 두었다. 더 중요한 것은 포은 자신도 여러 서책에서 자신을 ‘오천’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족보 중에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이라 알려져 있는『오천원파록』에는 관향인 ‘오천’에 대하여 서술한 내용이 많다. 이 족보의 서문에는 당시 오천이라는 곳에서 “시조인 정습명이 태어나고 그 10세손 되는 정몽주가 살았기 때문에 정문(鄭門)의 고향이 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해 두었다.
(원문: 鄭克後, 「烏川源派錄序」,『烏川源派錄』,“昔我先祖 樞密院知奏事 滎陽公 出於烏川 及其十世孫 圃隱先生 又爲烏川人 烏川是鄭公鄕 鄕人追募於百年之後 爲建書院廟而享之事 聞于朝錫以烏川書院之額”)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 함부림이 쓴 위 포은의「행장」에 “慶州府 迎日縣人”이란 문구가 본관을 표기한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경주부 영일현 사람(출신)”임을 기록한 내용이다. 이「행장」의 기록은 당대(當代)의 사람이 입증해주는 가장 정확하고 공식적인 자료다.
3).『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포은이 영천 ‘우항리’와 관계있음을 최초로 기록한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조선 중종)이다. 이 책의 영천군 편【우거】란과 영일현 편의 【인물】란에 정몽주가 같이 소개되어 있는데, 영천군편 ‘우거’ 란에서 처음으로 ‘우항리’란 말이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사람에 대한 기록방법은 명관, 인물, 우거, 효자, 열녀 란을 별도로 만들어 구분하였다. ‘우거(寓居)’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책 영천 편 ‘우거’란에 정몽주가 소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정몽주가 결코 영천사람이 아니고 누군가의 집(외가)에 임시로 몸을 붙여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은은 어디 사람인가? 이 책 영천편의 우거 란의 문구를 그대로 옮겨보면 저절로 해답이 나온다. 여기에는 “鄭夢周, 生於郡東亏項里 詳見 迎日 人物”이라고 적혀있다. 이를 해석하면 “정몽주는 군 동쪽에 있는 우항리에서 살았다, 상세한 것은 영일현 편의 인물 란을 보라”는 말이다. 위에 적힌 ‘생(生)’ 자에 대한 해석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영천 출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를 ‘날 생’자로 본다. 그래서 우항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낳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천군편 우거 란에 정몽주를 소개한 것만 봐도 태어난 게 아니라 살았다는 게 명백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항리에서 태어난 걸 표현한 것이라면 郡東亏項里生이 되어야 뜻이 맞고, 生於亏項里는 於(어조사)의 쓰임새로 보아 ‘우항리에서 살았다’고 해석해야 맞다는 것이다.8)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일현 편【인물】란에는 정몽주의 업적과 이력들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인물 란을 본관을 중심으로 실었는지 출생지를 중심으로 실었는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사한 바로는 단지 본관만으로는 그 지역 인물 란에 실리지 않는다. 본관이 그곳이고 그곳에서 출생을 했다거나 적어도 그곳에서 벼슬을 한 연고가 있어야 그 지방 인물 란에 실리게 된다. 점필재 김종직은 출생은 밀양에서 했지만 본관이 선산이고 선산에서 선산부사를 지냈으므로 선산도호부의 인물 란에 실려 있다. 단지 출생만한 밀양현 편의 인물 란에는 김종직이 실리지 않았다.
이 책의 단양군편 인물 란에 소개된 우탁(禹倬1263-1342)의 경우는 정몽주의 경우와 흡사하다. 우탁은 단양에서 난 고려 문신으로서 단양에 많은 일화와 설화가 전해 온다. 자는 천장 또는 탁보, 호는 역동, 익호는 문희, 본관은 단양이다. 우탁은 단양에서 태어나 안동 예안현에서 한때 살았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안 편을 살펴보면【우거】란에 우탁을 기록해 두었고 “상세한 것은 단양군편 인물 란을 보라”고 해 두었다. 단양군편 인물 란에는 선생의 일대기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 정몽주와 똑 같은 경우이다. 그렇다고 예안현의 ‘우거’란에 적힌 우탁을 보고 예안현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포은도 영천군편의 ‘우거’란에 기록되어 있고 상세한 이력은 영일현 편 인물 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새겨볼 일이다.
한편, 위 『신증동국여지승람』【우거】편에서 처음 등장한“ 生於郡東亏項里”란 문구는 조선 선조 중년에 발행된 포은선생의 문집인 『교서관본』의 연보에 “十二月戊子日 先生 生於郡東亏項里” 라고 다소 변형된 문구로 인용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발행된 초간본(세종21년), 신계본(중종28년), 개성구각본(명종․선조년간) 포은선생 문집에는 우항리 출생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인 신계본에는 “至元三年丁丑十二月公生”(1337년12월22일 공이 출생했다)이라고 적혀있고, 오천정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첩(家牒)에는 “至丁丑生”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1392년 포은이 죽고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출생에 대한 기록이 약간씩 왜곡되거나 누군가에 의해 구체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한편 1584년, 서애 유성용은 포은선생 ‘연보고이’를 만들면서 위 『교서관본』문집에 적힌 내용을 인용하고 뒤에 약간 내용을 첨부시켜 “十二月戊子日。先生生於永川郡東愚卷里。初。妣卞韓國夫人有娠。夢抱蘭盆驚墮。寤而生公。因名夢蘭。”라고 적었다. 이 연보고이는 그 후 『영천구각본』(1607년) 포은선생문집 등에 정착되어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까지 영천 출생설의 단단한 지주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일정씨 가첩(오천 문충리 출신 정태수 소장),포은의 출생에 대해 “至丁丑生”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4).포은이 직접 지은 포항(오천)관련 시들
포은이 직접 자신의 고향이 오천임을 밝힌 ‘저성역 야우(諸城驛 夜雨)’란 시(詩)가 있다.
-諸城驛 夜雨。(저성역의 밤비)-
今夜諸城驛。오늘밤 저성역에서
胡爲思舊居。어찌하여 고향옛집 생각이 나는지
遠遊春盡後。멀리 와서 봄은 지고
獨臥雨來初。홀로 누워 우기 맞네
永野田宜稻。영천 벌 논에는 벼가 잘 되고
烏川食有魚。오천(烏川) 내에는 먹을 만한 고기 있어
我能兼二者。나에게 두 가지가 모두 있건만
但未賦歸歟。돌아가는 글은 짓지 못하는 구나
(永州烏川二邑連境皆吾鄕里也。영주와 오천 두 고을은 경계가 잇대어 있는데 모두 내 고향이다)
※諸: 두꺼비 저
이 시는 포은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때 저성역에 잠시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고향의 옛집이 생각난다'는 문구와 '오천 내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있다'란 구절에서 포은이 오천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임을 의심치않게 한다. 시구(詩句) 말미에 “永州烏川。二邑連境。皆吾鄕里也” 란 소주(小註)를 선생이 직접 달아 놓은게 더욱더 그렇다. ‘영주(永州)’란 영천의 고려시대 때 명칭이다. 그래서 “영천과 오천 두 읍은 경계를 물고 있는데, 모두 내 고향이다”란 말이다.
이 시외에도 포은은 오천의 고향과 관련된 시들을 많이 지었다. 그가 고향에 대한 시를 지은 것은 주로 명나라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면서 지은 시들이었다. 누구나 집 떠나서 객지로 가면 외롭고 쓸쓸한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가족과 고향이 그리워진다. 시심(詩心)에 젖어들어 시를 짓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포은이 오천의 고향을 생각하며 직접 지은 시들은 아래와 같다.
-4월1일에 고밀현(高密縣)에서 꾀꼬리 소리를 들으며-
日午來過古縣城。한낮에 고현성(古縣城)11)을 지나서 오면
綠陰深處暑風凉。푸른 그늘 짙은 곳 바람 시원해
慇懃拂壁題詩句。은근히 벽을 털고 시구(詩句) 적으니
起取流鶯第一聲。꾀꼬리 고운소리 먼저 들리네.
(영일읍지)
-일조현(日照縣)에서-
海上孤城草樹荒。바닷가 외로운 성에는 초목이 황량한데
最先迎日上扶桑。동쪽바다 해 뜨는 곳은 영일이 제일 일세
我來東望仍搔首。내가 올 때 동녘 보며 시름하였지
波浪遙應接故鄕。물결은 먼 고향땅에 닿아 있겠지
(포은선생문집)
-영주 고우(永州 故友)-
露冷驚秋夕。이슬 차가우니 추석된 것 깨닫고
雲飛戀故丘。구름 날려가니 고향마을 그립구나
魚肥香稻熟。고기 살찌고 벼 다 익어가고
鳥宿翠林稠。우거진 푸른 숲엔 새가 깃드리
(포은선생 문집)
-일본에 사신 가서 지은 시-
夢繞鷄林舊弊廬。꿈꾸는 건 계림12)의 우리 옛집뿐인데
年年何事未歸歟。해마다 무슨 일로 돌아가지 못하나
平生苦被浮名縳。반평생을 괴로이 허무한 공명에 묶여
萬里還同異俗居。만 리 밖 풍속 다른 나라에 있네
海近有魚供旅食。바다가 가까워서 먹을 고기 제공하나
天長無雁寄鄕書。하늘 멀어 소식 전할 기러기 없네
舟回乞得梅花去。배 돌아갈 때는 매화를 얻어 가서
種向溪南看影疏。양지바른 남쪽에 심어 성긴 모양 보리라
5).제현(諸賢)들의 시(詩)와 글
포은의 고향이 오천임을 나타내는 간접적인 사료(史料)들은 많다. 여러 선비와 관료들이 남긴 시와 글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믿을 수 있는 자료들을 추려내어 연대순으로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우선 점필재 김종직, 모재 김안국, 지족암 오겸의 시가『교남지』와『영일현읍지』13)에 전한다.
○점필재 김종직14)(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의 시
-詠文忠公靑林舊基 (문충공의 청림15) 옛터에서)-
赴北曾經孤竹國。지난날 북에 있는 고죽국(孤竹國)16)을 가봤고
南來今見鄭公鄕。지금은 남에 있는 정공 고향 이르렀다.
此身南北還多幸。이 몸은 남북으로 어딜 가나 다행해
景仰千秋拜耿光。천고에 길이 빛날 충혼을 배알 했네.
○모재 김안국17)(慕齋 金安國 1478~1543)의 시
蕭條迎日海之傍。호젓하고 쓸쓸한 영일 바닷가 들러니
聞說文忠公故鄕。문충공의 고향 있다네.
節義文章傳不朽。절의와 문장이 길이길이 전하리니
千秋此地亦煇光。천추에 높이 빛날 이곳이라네.
○지족암 오겸18)(知足庵 吳謙 1496~1582)의 시
-詠文忠公靑林舊基 (문충공의 청림 옛터에서)-
吾東道學此淵源。우리나라 유학은 여기가 근원인데,
節義文章不足論。절의와 문장이야 말할 것 없소
舊宅荒凉無處問。사시던 집 허물어져 물을 곳 없어
晩風斜日可銷魂。늦바람 저문 날에 혼백조차 시들라.
○송월재(松月齋) 이시선19)(李時善:1625~1715)의 시20)
-延日圃隱村 (연일 포은촌)-
大賢遠出南溟邑。대현(大賢)이 먼 남쪽 바닷가 촌락에서 태어났으니
千載英名蓋八垓。천년토록 훌륭한 이름 온 누리를 덮었네.
舊址空餘人指點。옛 터는 사람 없는 빈 곳이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고,
黃雲落日獨徘徊。해 저문 저녁놀 아래 혼자 배회하노라.
○강좌(江左) 권만21)(權萬:1688~1749)의 시22)
-烏川書院。望圃老靑林遺墟。(오천서원。포은의 옛 청림 유허지를 바라보며)-
烏院淸秋月。오천서원에 가을 달이 맑고
靑林薄暮煙。청림에는 저녁연기 얇게 피어오르네.
滄波東海上。푸른 파도 일렁이는 동해 위에서
遠憶魯仲連。저 멀리 노중련을 생각하노라.
※魯仲連-전국시대의 義士. 圃隱이 대의를 지킨 것을 노중련에 비유함(필자 주).
○운와(雲窩) 정하원23)(鄭夏源:1762~1833)의 시24)
-청림(靑林)-
往跡滄茫倒幾年。지난 자취는 세월 흘러 창망하고
短碑三尺寂無言。삼척(三尺) 작은 비석은 말없이 적막 하네
煙霞不遂先生去。선생 가셔도 안개 놀 그치지 않고
留年尋常百姓村。세월은 흘러도 마을은 변함없네.
맺는말
포항은 포은의 고향이다. 아버지가 영천에서 ‘처가살이’하면서 선생을 낳았다고 쳐도 출신지는 엄연히 포항 오천이다. 그가 살았던 오천 구정리 집터에 유허비가 있다. 선생의 자작시 ‘저성역야우’에서 “영천 오천 둘 다 내 고향이다”라고 주(註)를 달아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아마 후에 일어날 영천과 포항 사람들의 출생지에 대한 논란을 예지한 듯하다. 굳이 정리하자면 “포은은 영일현 사람으로서 영천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은이 어디서 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남긴 사상이 지역의 올바른 정서 형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가 더 중요하다. 포은 사상의 첫째는 의리와 절개이다. 포항 사람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어김없이 나가 싸웠다. 임진왜란 때 경주로 달려가 경주성 탈환에 일조를 하였던 저 유명한 김현용․김원용 형제, 이대임, 서방경, 서극인 등은 임란 항쟁사에 길이 빛날 지역의 의병장 이름들이다. 구한말에는 흥해, 장기, 죽장, 기계 사람들이 ‘산남의진’을 만들어 일본에 대항하였다. 일제 때는 송라 사람들을 중심으로 3.1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런 충절정신은 6.25 때 펜을 놓고 뛰쳐나온 포항지역 학도의용군들의 활약으로 맥이 이어진다.
포은의 충절사상이 아직까지도 고향사람들의 정서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증거가 바로 이런것들이다.
1) 『영일읍지』
2) 포은학회,『포은선생집속록』,한국문화사,2007.pp98~105
3) 포은선생문집간행소, 『포은선생문집』,회상사,1961, p187
4) 정몽주의 호는 ‘포은’이라고도 하고, ‘오천’이라고도 하였다.
5) 포항문화원,『영일읍지 국역본』,삼양문화사, 2003, p 69
6) 정원호,『교남지 7권』,1939, 영일군편 인물란의 정몽주 참조
7) 정의천.「영일정씨 족보편찬에 관한연구」.경상대학교. 2005. p5
8) 정연채씨 등 주장
9) 최문현,『신편 포은선생집』, 1914
10) 『한국사상대전집(포은집)』,양우당, 1988, p 31~32
11) 포항 오천읍 원리에 있는 성이름
12) 경주의 옛 이름, 포은의 고향인 영일은 경주부에 속했었다.
13) 포항문화원,『영일읍지 국역본』,삼양문화사, 2003, p 82
14) 경상도병마사, 형조판서 등 역임.(인터넷,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15) 경상도 영일현 치소 동쪽에 있는 청림촌(靑林村)으로 여기에 포은선생의 구택(舊宅)이 있었다고 한다.
16) 은나라 때 백이․숙제의 고향, 백이․숙제는 주나라의 음식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은거, 굶어서 죽었다. 대표적인 충절을 나타냄(인터넷, daum 검색 백과)
17) 공조판서를 거쳐 1517년 경상도 관찰사 역임(인터넷,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18) 1558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 우의정 역임(인터넷,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19) 인터넷,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한국국학진흥원,영남유학인물자료
20) 인터넷,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한국국학원소장『송월재선생집』
21) 정조 때 양산군수 역임((인터넷,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22) 권만,『강좌선생문집 1권』, p 209, 연세대학교중앙도서관, 소장번호 811.98
23) 강의공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호군공(護軍公)의 후예(영일정씨 세보)
24) 『남성재지(南城齋誌)』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