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 장
제 3의 시선 (1)
(롬8:3-8)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모든 인간이 (역사와 인생을 통해 일관성 있게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것 = 자기 역사 만들기, 자기 역사 쓰기. / 이 세상 태어나는 아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역사와 인간을 도화지로 삼고 자신의 몸을 연필 삼아 ‘나’라는 존재를 깊게 새겨 넣고 싶어 한다. / 역사 보편의 격언 ->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연유에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총동원하여 '나 살아있음, 나 가치 있음’을 증명하는데 올인한다. 그 방법도 여러 가지 -> 열심히 돈을 벌어 …, 대단한 명예를 얻어 …, 훌륭한 인격을 자랑하여 …, 성숙한 인간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 / 인간과 역사가 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로 수렴. -> ‘나 가치 있음, 나 산 자임, 나 스스로 살겠음.’
- 모든 교육의 커리큘럼: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멋진 이름으로 살다가 괜찮은 이름 남기고 떠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다. ->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구원의 내용. // ‘사는 기술, 살아남기 위한 훈련, 끝까지 자기 힘으로 살기’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다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산 자가 되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 //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자신들이 평생을 걸려 쌓아놓은 스펙을 들이밀며 두려움을 해소해 보려고 한다.
열심 있는 종교생활, 도에 넘치는 선행과 구제, 청빈과 청렴, 인류에 대한 공헌과 기여, 훌륭한 학식, 등등 모든 인간이 죽음 너머의 어떤 삶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이 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쌓아놓은 스펙들이 죽음 너머의 삶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데 쓰이는 자가 발전기 배터리의 충전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스펙을 쌓은 이들은 자가 발전기 배터리 충전이 잘 되어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누가 봐도 허접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은 거의 방전되어 있는 배터리를 들고 서 있는 초라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도 그러한 인간의 자가발전기 충전이 신앙의 내용인 양 가르치고 배우기도 한다. -> 차등 상급론 //
- 사람들은 종교도, 심지어 십자가마저도 자기 스펙 쌓기의 도구로 이용한다. 훌륭하고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리저리 십자가를 휘둘러 댄다. 거기에서 충분한 자기만족도 얻어 내고, 자기만족에 부응하는 ‘하나님과 세간의 평가’도 은근히 기대한다. /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를 이용한다. =>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가발전 충전하도록 십자가와 예수를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소품으로 사용하신다.
->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계시하는 삶을 살게 되는 모든 인간은 반드시 ‘나 소품, 나 하나님 아님’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 하나님을 계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모든 노력과 열심을 다 쏟아 버리면 그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먼지에 불과한 ‘생기가 빠진 죽은 흙’의 소산일 뿐이다. / 죽은 흙들이 내어놓는 것은 전부 가시와 엉겅퀴에 불과하다. / 선지서: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에 가득 찬 것 = 질려와 형극. / 율법주의가 내어놓을 수 있는 것 = 가시와 엉겅퀴밖에 없다. / 하나님은 흙들이 내어놓는 그러한 가시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제시하는데 하나님은 산 자인 척하는 자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반드시 그들의 인생 속에서 죽여 내신다. 그게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날마다’의 죽음이다. 그런데 세상은 ‘날마다’ 살아난다. 그렇게 날마다 살아서 진짜 죽는다. 성경을 보면 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의 ‘다나토스’의 죽음이 세상에게도 쓰일 때가 있다. ->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은 불신자들에게서도 완성되고야 만다는 의미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은 끝까지 하나님의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두 번째 사망으로 끝이 날 것이라고 고지한다. -> 그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다. -> (세상사람들)이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면 그것이 바로 ‘네크로스’가 된다. / 성도의 ‘다나토스’의 죽음은 즉시 ‘영생’으로 환원된다. -> 첫 번째 사망이 어떤 이들에게는 ‘네크로스’의 죽음이 되어 두 번째 사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 번째 사망의 차단점이 된다. 그래서 ‘다나토스’의 죽음도 어떤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죽음이 될 수도 있다.
- 이 세상 아담들의 본성은 남의 죽음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도록 되어 있지 자신의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 우리 주변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인간들은 그들의 마음이 되어 함께 아파해 주기 전에 일단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도 힘을 내자’라는 자기 위로 속으로 먼저 들어간다. / 남의 죽음이 나의 힘이 된다. 남이 죽으면 내가 그만큼 살아난다. -> 저주받은 아담들의 본성. -> 아주 자연스러운 것. / 그런 인간의 육을 죽여 가는 것이 어찌 호락호락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해버리신다. /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여 위로를 챙겨 가진 세상에 하늘의 장자들을 보내신다. 그리고는 그들의 고기를 세상에게 양식으로 주신다. 그렇게 살찌운 세상을 ‘죽었다’라고 선언하신 후 심판해 버리시는 게 하나님이시다. / 따라서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던져져야 한다.
-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배터리를 검사하면서 ‘너 세상에서 네 배터리 얼마나 충전해 가지고 왔니?’를 묻는 분이 아니시다. / 오히려 자신의 배터리가 완전 방전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수혈이 아니면 도저히 존재로서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자만 찾으신다. / 그리고 그의 배터리에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생명을 충만하게 채워서 영생의 나라로 집어넣으신다.
-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의 배터리에 이런저런 스펙을 쌓아서 충전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내 자신의 자가발전 에너지를 빼앗기는 시간이어야 한다. / 그래야 이 저질 배터리가 방전되고 하나님 나라의 고급 에너지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생명이 ‘나’라는 몸에 충전된다, / 나의 스펙으로 충전된 배터리로 존재하는 몸이 ‘육신’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전이 된 배터리로 존재하는 몸이 ‘영’이다.
오늘 본문 - 영과 육신이 계속 반복되어 대조. / 육신=‘사륵스’, 영=‘프뉴마’ /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고 아주 많은 댓구를 이루고 있는 단어들. - 개역 성경: 육신(사륵스), 몸(소마), 목숨(프쉬케)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서 혼용하여 사용 -> 그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 영(‘프뉴마’) : 관사가 없이 쓰이면 ‘심령, 마음’으로 번역 / 관사가 붙으면 ‘성령, 말, 진리’ / 성경: ‘프뉴마’를 가진 이들 =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 마음 =‘카르디아’. -> 그들이 진짜 마음이 있는 자이다. / 그 마음이 없는 자= ‘악한 마음을 가진 자’ -> 하나님은 그들을 ‘짐승’이라고도 부른다. / 하나님의 마음인 ‘프뉴마’를 마음으로 가지지 못한 악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사실 마음이 없는 자들이다. / 그 마음이 없는 자들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얼빠진 자(어리석은 자), 짐승들이다. / 짐승들이 굴 파고 사는 것과 인간들이 아파트 짓고 사는 것이 본질적 측면에서 뭐가 다른가? 먹이를 날것으로 뜯어 먹는 하이에나와 양념치고 구워 먹고 쪄 먹는 인간이 뭐가 다른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목적은 똑같다. ‘나 왕 되기’이다.
-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인 ‘프뉴마’가 없으면 - 진리를 그 마음으로 갖고 있지 않으면 -> 마음이 없는 자, 악한 마음을 가진 자, 짐승이다. / ‘프뉴마’를 마음으로 가지면 그를 ‘호 프뉴마’, ‘진리, 말씀’이라고 부른다. / 그 마음을 갖지 못한 자들을 ‘사륵스’, ‘육신’이라고 부른다. / ‘사륵스’라는 단어도 원래는 ‘영’이라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진리가 되지 못한 비진리의 악한 영을 ‘사륵스’라고 부른다. 그것을 우리말 성경이 ‘육신, 육체’라고 번역했다.
- 성경에 나오는 몸(소마)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념이다. 그 몸(소마)이 은혜에게 점령당하면 은혜의 몸이 되고 죄에게 점령당하면 죄의 몸이 된다.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점령당하면 그 몸은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이 된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절대 나쁜 개념이 아니다.
(골1:18)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 여기에 쓰인 몸='소마’. / ‘몸’은 ‘사륵스’를 담느냐, ‘프뉴마’를 담느냐에 의해 좋은 몸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몸이 될 수도 있는 그릇의 개념이다. / 몸이 ‘사륵스’로 채워지면 ‘몸’으로 남는데 ‘프뉴마’에 의해 점령당하면 ‘프뉴마’로 연합되어 버린다. / ‘사륵스’와 연합되어 남은 몸은 나쁜 몸이다.
(롬6:5-6)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로 살 때 죄에게 점령당한 죄의 몸으로 살게 된다. 그게 육신(사륵스)이다. /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발생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점령하게 되면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동시에 영(프뉴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 버린다. -> 바울: 죄의 몸이 멸해지는 것 -> 심판의 대상이 되는 육의 몸이 사라져버리게 되고 거기에 용서가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