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구름이 만드는 석양 보며 '노을이 물드는 언덕'서 한해 마무리
12월이면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진다. 바삐 살아온 것 같지만, 해놓은 게 별로 없다. 한해를 차분하게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아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올린다. 한 해 동안 어깨를 짓누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 조용한 어촌마을과 옛 이야기, 바다와 산, 노을이 어우러져 만든 자연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해를 정리하기에 좋은 거제시 사등면 가조도와 '노을이 물드는 언덕', 그리고 남부면 여차~홍포 해변을 연말 여행지로 권한다. 글 김석규 명예기자(거제시 문화공보과) 사진 최춘환 편집장
겨울에 찾는 가조도 넉넉함이 묻어난다 한적한 섬 '가조도(加助島)'는 이름 그대로 거제도를 돕고 보좌해 유익함을 더한다. 더불어 섬사람의 모습에서 넉넉함이 묻어난다. 가조도는 행정구역상 거제시 사등면 창호리에 속한다. 창호리는 가조도와 계도(닭섬)의 2개 유인도와 범벅도, 취도(독수리섬)의 2개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거제도에 딸린 섬 가운데 칠천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이 가조도다. 거제 본섬의 사등면 성포항과 가조도 진두를 잇는 가조연륙교가 2009년 7월 개통되면서 섬 속의 섬 가조도는 육지와 바로 연결됐다. 성포항과 진두를 다니던 뱃길도 이 때 사라졌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은 남쪽에 백석산이, 북쪽에 옥녀봉이 자리해 그 자락을 넓게 펼치고 있다. 중간의 창촌 고개는 잘록한 목의 모양을 하고 있어 하늘에서 보는 섬의 형상은 장고(杖鼓)와 비슷하다. 가조도는 남북으로 길이가 4.8km에 이르러 제법 길다. 옥녀봉의 날개가 펼쳐진 북단부의 폭은 2.2km, 남쪽 백석산의 날개는 1.9km다. 면적은 부속섬인 계도와 범벅도, 취도를 포함해 5.82㎢이고, 해안선 길이는 25.7km에 이른다. 1973년 5월부터 공사가 시작된 '8'자 모양의 섬 일주도로가 30여 년 만인 2004년 완공된 후 자전거 라이딩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이 도로는 섬의 북쪽 옥녀봉을 중심으로 바닷가를 따라 창촌-계도-신교-유교-실전마을을 거쳐 돌아 창촌 목에서 합쳐졌다가 섬의 남쪽 백석산을 중심으로 신전-진두-답곡을 돌아 군령포로 이어진다. 가조도에 딸린 섬 계도에 조성된 체험장은 바다낚시, 가두리낚시, 갯벌, 통발손맛보기, 멸치잡이, 노배 낚시, 젓갈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가조도를 자전거로 천천히 돌다보면 섬이 주는 넉넉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선군과 옥녀의 한 맺힌 사랑을 품은 '옥녀봉' 거제 본섬에서 가조연륙교를 지나 섬 속의 섬 가조도에 들어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옥녀봉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가조도 북단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이 산은 누구나 오르기 쉬워 30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옥녀봉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 거제 본섬의 계룡산 봉수대와 고성 벽방산 봉수대, 진해 천자봉 봉수대를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런 만큼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진해만이 한 눈에 들어오고, 거제 본섬이 손에 닿을 듯하다. 옥녀봉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활량들이 놀았다는 활량터, 선군(仙君)이 칠선녀를 데리고 내려왔다는 칠선녀바위, 옥녀가 목욕했다는 약수터(옥수터), 장구통바위, 아홉질바위, 공깃돌바위, 탕근바위, 칼바위 등이 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듯하다. 그 가운데 옥녀와 선군의 한 맺힌 사랑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그 벌로 인간세상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천년 동안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말고, 순결하게 지내야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서... 기약했던 천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옥녀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마지막 근신(謹身)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옥황상제가 옥녀를 시험하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제일 잘난 남자 선군(仙君)을 내려 보내 옥녀를 유혹하게 했다. 옥녀와 선군은 서로 사랑에 빠져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다. 명을 어기고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옥황상제는 화가 나 옥녀와 선군을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섬으로 변한 옥녀와 선군의 짧고 진한 사랑은 억겁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향기가 남아 옥녀봉을 감싸고 있다.
포탄에 찢겨 살점 떨어져나간 '취도' 가조도 북단에서 동쪽으로 1㎞ 남짓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전체 해안선 길이가 200m에 불과한 자그만 섬이 떠있다. 독수리섬으로 불리는 '취도(吹島)'다. 아주 작은 섬이지만 큰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지적공부상 취도의 면적은 1884㎡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실제 면적은 165㎡에 불과하다. 섬의 면적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조선말기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 해군기지를 두고 함포사격 연습을 했다, 그 목표물이 바로 취도였다. 일본의 함포 사격에 섬이 조금씩 부서지면서 지금의 면적이 돼 버린 것이다. 이 자그만 섬 중앙에 2.7m 높이의 시멘트 기단 위에 사각탑신 구조로 된 탑이 하나 서 있다. 탑신 위에 90㎝ 높이의 포탄이 얹혀 있다. 1935년 8월 23일 진해 해군요항사령부가 건립한 것이다.
탑의 앞면에는 '취도기념(吹島紀念)'이라 쓰여 있고, 그 옆에 '해군중장(海軍中將) 소림성삼랑서(小林省三郞書·고바야시 세이자부로)'라고 새겨져 있다. 뒤쪽에는 소화 10년(1935년) 8월 일본 해군중장 이치무라 히사오(市村久雄)가 쓴 '취도회고(吹島懷古)'라는 제목의 비문과 시가 적혀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탑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2005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시민단체가 "취도기념탑은 러일전쟁 승리를 미화했고, 일본 동양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를 영웅으로 부각시킨 일제 잔재"라며 탑 철거에 나섰다. 이에 사등면 주민들은 "산 역사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고,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취도기념비를 활용하자"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서쪽 하늘이 아름다운 '노을이 물드는 언덕' 찬바람이 형형색색 단풍을 밀어내더니 어느새 겨울이다.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을 보며 한해를 정리하고, 다음해를 맞을 생각에 괜스레 마음만 바빠진다. 이런 때 찾아갈만한 곳이 가조도 '노을이 물드는 언덕'이다. 이곳에서는 바다와 배, 산, 그리고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시뻘건 노을을 볼 수 있다. 물론 운이 따라야 한다. 매일 시뻘건 노을을 만들어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가 서서히 바다 멀리 통영과 고성 경계의 안정국가산업단지와 그 뒤 벽방산 위에 가까워질 무렵 하늘은 서서히 붉어진다. 주위를 붉게 만들더니 어느 틈에 바다와 제법 먼 하늘까지 붉은 마수(?)를 뻗쳐 바다와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여 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시뻘겋게 변한다. 그렇게 해는 서쪽 바다 건너 산 너머로 장엄한 하루의 삶을 마감한다. 서산 너머로 지는 노을을 보며 올 한해를 정리해보자. 한 해 동안 힘들게 지고 온 삶의 무게를 노을과 함께 내려놓자. 마음의 묵은 때도 노을에 흘려보내자. '노을이 물드는 언덕' 전망대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나 자신임을,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내가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선 해안길 탁 트인 바다 보며 마음 비운다
거제 남쪽 끝에서 최고의 바다 조망 12월 한해를 마무리하기 좋은 또 다른 거제의 여행지는 여차~홍포 해안길이다. 거제시 남부면 여차마을에서 홍포마을로 이어지는 3.5㎞ 비포장 길로 해안절경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여차몽돌해변과 홍포마을 어디에서 출발해도 좋다. 곧은길이 아니어서 걷기에 더할 나위 없다. 다만 위험지구 공사 중이라 내년 2월 중순까지 일주를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다행히 홍포에서 '병대도 전망대'까지는 길이 열려 있어 한해를 마무리하는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홍포를 출발해 조금만 걸으면 이름 모를 섬들과 대소병대도가 곧바로 반긴다. 남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발길을 옮길 때마다 그림을 바꾼다. 아름다움에 매료돼 정신없이 걷다보면 어느새 '병대도 전망대'에 다다른다.
'병대도 전망대' 오르니 홍도가 지척에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바다는 하얀 파도와 대소병대도, 그리고 오가는 배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림은 가히 환상적이다. 여기에 바람과 안개가 더해지면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거제시가 설치한 전망대는 2층으로 돼 있다. 1층은 비를 피할 수 있어 비 오는 날 바다와 대소병대도가 연출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2층은 자연과 하나 되기 좋게 바다 쪽으로 데크를 조금 더 빼놓았다. 대병대도, 소병대도, 매물도, 소매물도는 물론 날씨가 좋으면 저 멀리 홍도까지 지척에 보인다. 하얀 파도와 배가 긋는 바다빗금은 파랑과 하양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망대에서 저 먼 바다를 바라보면 어느새 마음의 짐은 벗어지고, 혜민 스님의 책 제목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푸른 바다가 오렌지색→연분홍→선홍빛으로 해질 무렵이면 다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한낮에 보는 아름다움이 '환희'였다면 해질녘의 아름다움은 '비움'이다. 노을이 만들어내는 엄숙하면서도 장엄함에 자신을 비워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석양을 느낀다. 석양은 조금 전에 봤던 그림과는 전혀 딴판이다.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지는 해가 뿜어내는 영험함에 자기 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간다. 푸르디푸른 바다가 조금씩 오렌지색이 되더니 연분홍으로 바뀌고, 다시 선홍의 붉은 빛으로 바뀐다. 해가 서쪽바다로 넘어가면서 만들어내는 이 장엄함을, 이 엄숙함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쁘고 즐거웠던 일, 후회나 잘못,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일들을 비워냄으로써 지금 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워진다. 모두 내려놓고, 마음이 모두 비워졌을 무렵 잠재돼 있던 그리움이 조금씩 움튼다. 또 다른 세상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를 느낀다. 왼쪽 산자락 위의 망산에 올라서면 북쪽에 거제의 명산 노자산, 동쪽에 해금강, 서쪽에 한려수도가 시작되는 한산도 앞바다, 남쪽으로 남해바다가 펼쳐진다. 2014년 한해를 정리하며, 다가올 새해를 설계하는데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