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가 참변을 당한 건청궁 옥호루의 옛 모습.
죽어야 하는 운명 1857년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우범선은 당시 일본 교관이 지도하는 별기군의 간부로 일하던 중 극심한 모멸을 당하자 사직한다. 이 같은 굴욕이 민씨 일파 등 수구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을 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우범선에게는 처와 딸 둘이 있었다. 그는 훈련대 해산이 결정되자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1896년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요시찰한국인거동(要視察韓國人擧動)’ 자료에 따르면 우범선의 망명 뒤 행적은 미우라 등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일본인사들과 유대관계를 계속 이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우범선은 도쿄의 혼고에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하녀인 사카이 나카라는 열다섯 살 어린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미우라는 나카의 중매인이 우범선의 인품에 대해 묻자 “좋은 친구이지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사내야. 이 점을 감안해서 중매를 서주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우라는 우범선이 조선에서 온 자객에게 언제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4월 장남 장춘이 태어난 후, 우범선은 1898년 11월 가족을 데리고 처의 언니 부부가 사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와쇼마치로 이사했다. 고영근의 복수 1854년생인 고영근은 상민 출신으로 민씨가(家)의 실력자였던 민영익가의 청지기, 즉 시중꾼으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2품직인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1903년 10월28일, 고영근이 구레시에 있는 우범선의 집에 나타났다. 고영근은 자신이 결코 자객이 아님을 열심히 설명했고 우범선이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자 자신도 구레에 살고 싶으니 방을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풀어진 우범선은 고영근을 자신의 집에 사흘간 기숙시키며 살집을 알아봐주기도 했다. 그 사이 고영근은 은밀히 오카야마에 있는 노윤명에게 연락했고 11월13일 노윤명이 구레에 도착했다. 1903년 11월24일 저녁 6시경, 고영근과 노윤명 그리고 우범선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새로 구할 방을 결정하고 집주인과 계약을 마친 것을 이유로 고영근이 우범선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제안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한 시간쯤 경과한 뒤 고영근이 슬며시 일어나 품속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우범선의 오른쪽 목을 찌르고 몸으로 우범선을 덮쳐 턱과 목 등을 수차례 더 찔렀다. 그 순간 노윤명이 준비해두었던 쇠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난타했다. 우범선은 즉사했다. 당시 우범선의 나이는 47세,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만 8년1개월, 일본으로 망명한 지 7년 10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고영근은 49세였고 노윤명은 30세였다. 둘은 우범선을 살해한 뒤 곧바로 인근 와쇼마치파출소로 찾아가 자수했다. 고영근은 조사과정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 다음날인 11월25일, 우범선의 처 나카는 집으로 찾아온 신문기자들에게 “우범선이 평소 자객에 대해 상당히 조심했으나 결국 고영근에게 당한 것은 우범선의 운이 다한 것이다. 고영근의 계략에 당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고종, 이토에 고영근을 부탁 히로시마 감옥으로 이송된 고영근 등에 대한 재판은 신속히 진행됐다. 12월24일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고영근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심결정서를 읽어본즉, 그대로 해도 좋으나, 단지 ‘모살죄’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의 여덟 자를 넣어야만 본뜻이 되며, 또 노윤명을 공모자라고 그러는데 그는 전적으로 종범으로 단지 방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변호인들은 고영근, 노윤명을 의사(義士)라고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충신효자의 모살죄는 경감해주는 판례가 있다며 형량 경감을 주장했다. 우범선 살해 소식이 알려진 뒤 서울에선 고영근의 죄를 사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종은 직접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했다. 그해 12월26일, 고영근과 노윤명은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해 고무라 외상은 다음날 하야시 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양인은 다분히 상소할 것으로 보이나 만약 사형으로 확정된다면 한국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특사를 (천황에게) 상주하여 한 등급을 감형하여, 목숨을 건지게 하는 것을 고려 중이므로 그 뜻을 (한국) 황제폐하에게 내밀히 상주해주기 바란다.” 고영근의 감형을 외교카드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1904년 2월4일, 히로시마 항소원(고등법원) 제2심 재판에서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노윤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12년으로 각각 감형되었다. 고종은 그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로 방한하자 고영근의 한국 송환을 특별히 부탁했다. ‘씨 없는 수박’은 허구?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살해됐을 때 우범선의 일본인 처 나카는 임신 중이었다. 우범선이 살해된 다음해(1904년) 봄, 나카는 유복자인 사내아이를 낳았다. 우범선은 장남인 장춘에게는 ‘우’란 조선 성을 붙여주었으나, 나카는 남편이 사망하고 난 뒤 태어난 차남을 자신의 먼 친척 M의 친자로 입적시켰고 성도 M으로 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범선 사후 20여 년간, 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상당한 액수의 학비를 지급했고 일본인 처 나카에게도 지원금을 보냈다. 우장춘은 1950년 3월 한국으로 와 1959년 여름, 숨질 때까지 농업 발전에 기여했고 그 공로로 문화포장을 받았다. 대다수 한국인은 우장춘을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대학의 기하라 히토시 교수가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이었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시범 ‘재배’한 것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고종이 이토에게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한 것이 주효했는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고영근은 감형되어 1909년(일자는 미상) 형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고종 승하(1919년) 후 2년여가 지난 1921년, 고영근은 금곡리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에 임명됐는데 그는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고종 승하 후 4년 가까이 홍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를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高宗太皇帝’ 등 여덟 자를 더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운 것이다. 난처해진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의 궁내성과 협의한 끝에 다음해인 1923년 1월,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3·1만세운동 직후 능비문제로 다시 조선인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참봉직에서 물러난 다음해 병으로 죽은 그의 마지막에 대해선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금곡 숲속에 초가집을 짓고, 무관(無冠)의 참봉으로 만년을 보냈는데, 병으로 죽자 뼈를 태왕(고종)의 능 밑에 묻었다.” (곤도 시로스케,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 초센신문사, 1925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그 발밑에 뼈를 묻었다는 고영근. 그는 이렇게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끈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끝) |
댓글 13인쇄 |스크랩(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