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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배우는 죽어서나 연기를 관두는 거야 파란만장 노익장 장인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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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2.0 2004-11-19 20:20] | ||
장인한 엊그제 시사회했다는데 난 못 갔어. 그날 따라 병원에 가는 날이잖아.
김세윤 기자 편찮으신가 봐요?
장인한 옛날에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라고, 그 영화에 나올라고 내가 생이빨 2개를 뽑지 않았겠어? 그 후유증으로 남은 이까지 하나 둘 성치 않더니만 기어이 아랫니 두 개만 놔두고 몽땅 다 뽑히지 않았나. 그래서 위, 아래 다 틀니로 갈아 끼우고 석 달 동안 하루 세 끼 죽만 먹었어. 죽을 맛이더라고. 엊그제부터 밥을 먹으니까 이제 겨우 좀 살겠어.(웃음)
장병원 기자 거기선 스님 역할이셨잖아요.
장인한 걔 이름 뭐지? 최진실이 동생 최…
김세윤 기자 …진영이요?
장인한 그래. 그 놈이 동승으로 나오고 내가 주지승으로 나왔는데 그때 내 앞니 두 개가 금니였거든. 근데 그게 사극이잖어. 웃을 때마다 금니가 번쩍 거리니까 정지영 감독이 아주 고민하더라고. 이에 검은 칠을 하면 가릴 수 있지만 촬영하다 음식 먹고 얘기도 하다 보면 그게 지워질 수도 있잖어. 지워진 줄 모르고 촬영하다가 금니가 나오면 그 필름을 다 들어내야 하니 어떡해?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역할도 좋으니까 뽑자. 그 길로 치과에 가서 그 두 놈을 뽑았지. 그러고 와서 정 감독에게 "어때, 괜찮아?" 하면서 보여 줬더니 내 손을 꼭 잡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웃음) 아이구, 연기에 절반 미친 거지. 누가 생니를 뽑으라면 뽑겠어?
김세윤 기자 지금까지 출연하신 영화가 모두 몇 편이나 되죠? 자료엔 600편이라고 나와 있던데요.
장인한 영화, 연극, 드라마까지 치면 한 800편 될까? 내가 열아홉에 연기를 시작했으니 이 생활 꼭 68년째지.
장병원 기자 열아홉 나이에 배우될 생각은 왜 하셨습니까?
장인한 내 고향이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인데 마침 가설 극장 하나가 망해서 쉬고 있었어. 어느 날 한 놈이 오더니만 극장 포장도 다시 세우고 세트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다는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 큰누이 몰래 집 문서를 꺼내 냉큼 잡혀 먹었어. 그래, 연극에 ‘연’자도 모르는 놈이 돈 좀 댔다고 바로 단장이 돼버린 거야.(웃음)
장병원 기자 집 문서를요? 아니,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 때문에 집을 덥썩 잡혔단 말입니까?
장인한 그때가 왜놈들이 한창 대동아전쟁을 일으켰을 때거든. 길거리에서 젊은 놈 봤다 하면 무조건 징용이다 징병이다 해서 잡아갈 때거든. 헌데 그 놈들도 양심은 있는지 예술인은 안 잡아갔다 이거야. 아, 연극 하면 안 잡아간다니 눈이 뒤집혔지 뭐.(웃음) 돈 좀 댔다고 바로 주연을 맡기는데 첫 작품이 <광산에 피는 꽃>이야. 시켜 주니 했지 뭐. 그래도 내가 젊었을 땐 눈에 쌍꺼풀도 있고 예뻤거든.(웃음) 그 뒤로 내내 주연만 한 거야.
김세윤 기자 처음엔 돈 때문이었다 쳐도 계속 주연을 맡길 정도면 재능을 인정받았나 보네요.
장인한 한 10년 , 20년 엑스트라하던 사람들에게 큰 역할 맡기면 어지간히 다 해. 그 식이나 마찬가지지 뭐. 연기야 자꾸 하다 보면 늘거든. 더구나 그 당시엔 무대 뒤에서 책 보고 읽어 주는 사람도 있어서 그대로 따라 읽으면 되는데 뭐 어렵나?
장병원 기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극은 참 배고픈 직업 아니었나요?
장인한 그랬지. 요즘 애들 출연료로 1억, 2억 받는다 하면 약이 올라. 우린 그런 호시절 못 누리고 살았잖아. 한 번은 지방 공연한다고 천막을 치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만 열흘 이상을 내리 쏟아지는 거야. 그땐 여관에서 밥도 해줬거든? 공연하느라 여관에 묵고 있는데 방값이 밀려 밥을 안 한다니 어떡해. 내가 하나 둘 셋 하거든 방문 다 열고 "배고프니 밥주시오" 하고 울면서 떠들라고 단원들에게 시켰지. 그래, 다같이 울고 떠드니까 주인이 맨발로 뛰어나와서는 제발 그만하시라고, 밥 한다고.(웃음) 밥도 안 해준다고 소문나면 그 여관이 무슨 망신이겠어. 그렇게 한 보름 있다가 장마가 끝나 겨우 연극을 올렸는데 손님이 꽉 들어찼어. 오늘 수입 좋아서 밥값 좀 치르겠다, 했는데 사업 부장, 지금으로 치면 제작 부장하던 놈이 표 판돈을 들고 혼자 날랐어. 이런 X새끼가 있나?(웃음) 결국 여관 주인 몰래 다들 야반 도주해서는 그 뒤로 평안남북도, 함경도, 나진, 남만주, 북만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내내 연극하면서 돌아다녔지.
김세윤 기자 만주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엔 왜 가셨나요?
장인한 거기 우리 동포가 많이 살았으니까. 말하자면 유랑 극단인 셈이지. 그렇게 떠돌다가 다시 조선 땅에 돌아오는 데 꼬박 14년이 걸렸어.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했지. 고향 서울엘 가고 싶은데 공산 치하에서 맘대로 넘어가게 해주나? 그냥 잡아서 몽둥이질만 하지. 그래서 매일 술 먹고 마작하고 그랬더니만 아주 낡은 사상이 박힌 사람이라고 이북 연극동맹에서 날 제명시킨 거야. 그런데 당시 <홍경래 전>을 쓴 작가하고 연출자가 "아니, 장인한이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작품을 썼는데 이러면 어떡하느냐"고 항의를 해서 겨우 연극동맹에 복귀는 시켜줬어. <홍경래 전>이 7시간짜리 공연이거든. 그걸 김일성이 와 가지구 검열한다고 시연회만 8시간을 하더라고. 뺄 거, 수정할 거, 보충할 걸 김일성이 일일이 체크해 고친 다음에 그 이튿날부터 공연을 했어. 그랬더니 극장이 대만원이야.
김세윤 기자 요즘으로 치면 대박이네요.
장인한 뭐, 입장료를 안 받으니까 대박날 수밖에.(웃음) 그 당시엔 혁명 과정이니까 전부 무료 입장이었거든. 이북에서 연극할 땐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까지 내 얼굴을 다 알았지. 그러니 더더욱 넘어올 재간이 있겠어? 안내원 통해서 월남하려다 잡혀들어가서는 죽도록 얻어터지고, 다시 황해도 해주 쪽으로 내빼다가 또 잡혀서 평양으로 압송되고. 그러다 1.4 후퇴 때 겨우 넘어온 거야. 넘어 오면서도 고생 많았어. 진남포항에서 피난 배를 타려니까 이미 떠나고 없어. 벌써 사람들 다 태워서 물 한가운데 떠 있는데 어떡해. 하는 수 없이 조그만 새우젓 배를 띄우고 한 70명 되는 단원들하고 그 가족들이 거기 올라앉았지. 그랬더니만 이건 뭐 순풍에 돛단 듯이 마냥 제멋대로 가는 거야. 그게 12월 5일이야.
김세윤 기자 12월이면 한창 추울 땐데. 더구나 이북땅은 더 춥지 않았나요?
장인한 뭐, 말도 못하게 추웠지. 우리 아들도 아직까지 모르는 얘길 하나 하지. 내가 이북 있을 때 예쁜 여배우하고 살림을 차리고 거기서 쌍둥이를 낳았어. 1.4 후퇴 때 갓 낳아서 이제 겨우 1백 일쯤 지난 핏덩이들을 데리고 내려오는데 하늘을 지붕 삼았으니 눈 오면 눈 맞고 비 오면 비 맞고 꼴이 꼴이 아니지. 그러다 쌍둥이 두 놈이 모두 폐렴에 걸렸어. 마이신만 있으면 살려 보겠지만 약이 어딨어? 그냥 꼭 껴안고만 있는데 후배 하나가 "형님, 애가 왜 이래요?" 그래. 이렇게 보니까 벌써 싸늘해. 죽은 거지. 당시 육지는 이미 중공군이 다 밀고 내려온 터라 그 아이를 묻어주려고 뭍으로 나왔다가는 단원들 70명이 몽땅 포로가 될 판이야. 그러니 어떡해? 그애 발목댕이 두 개를 요렇게 잡아보니까 딱 한주먹 밖에 안돼. 그걸 붙잡아서 고개 돌리고 그냥 바다에 휙 던졌지. 물 위에서 장례 치른 거지. 그 순간, 내 기분이 어땠겠어. 그 "풍덩" 하는 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울려. 조금 있자니 지 어미가 안고 있던 놈마저 갔어. 그래서 걔도 풍덩 던져버렸지 뭐. 걔들을 던져버리고 얼마 안 있어 풍랑을 만나 겨우 배를 댄 것이 무인도야. 배가 바위에 부딪쳐서 가라앉는 통에 의상이니 세트니 싣고 온 짐도 다 잠겼지.
장병원 기자 그 와중에도 의상과 세트를 다 챙겨서 피난을 갔나요?
장인한 그것들 챙기느라고 배 시간을 못 맞춘 거지. 그렇게 허탈하게 무인도에 앉아 있자니 저 무연한 수평선에 시커먼 산덩어리만한 게 하나 보여. 미국 군함이 각 섬마다 잔여 피난민들을 구하러 다니는 거야. 입고 있던 옷에다 불 붙여서 연기를 내고 난리를 쳤더니 겨우 우릴 알아 보더라구. 그래 이제 고향에 가나 했더니만 인천항도 벌써 중공군이 다 차지했다면서 전라도 군산에 우릴 내려놓은거야. 거기서 피난 생활을 했지.
김세윤 기자 그럼 연기는 언제 다시 시작하신 건가요?
장인한 피난민 신세가 돼서 한 초등학교에 마련한 임시 피난민 수용소에 있는데 누가 군산에 연극 단체가 들어왔다 그래. 그게 ‘황금좌’야. 성광현 씨가 단장이었는데 날 보더니 고생하지 말고 극단으로 들어와라 해서 후배 배우들 한 서너 명 데리고 들어갔어. 그 극단 따라 겨우 서울로 올라온 거야. 14년 만에 고향에 가보니까 일가 친척이 하나도 없어. 다 죽었어. 전쟁통에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 다 돌아가고 없어. 졸지에 전쟁 고아가 되고 말았다고. 그때 예전에 같이 연극하고 돌아다니던 장동휘, 황해, 허장강 이런 친구들이 이제 영화 세상이니 같이 영화하자고 하더라고. 난 피난민에 고아거든? 당장 오늘 먹고 잘 데가 없는 처진데 무슨 영화고 지랄이야. 그래도 연극을 해야 재워주고 먹여 주니까 하는 수 없이 연극을 다시 했거든. 그러다 영화는 한참 뒤에 시작했어.
장병원 기자 줄곧 연극만 하다가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을 바꿔 잡수신 건 어떤 연유로?
장인한 당시에 지방 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극장들까지 죄다 영화 튼다면서 무대를 다 뜯어버리고 스크린을 내려버리니까 무대 장치를 세울 수가 없잖아. 그러니 연극을 올리고 싶어도 못 올리지, 연극을 못 올리니 여관 밥값이 밀려서 내쫓기지. 결국 부산 영도 다리 건너 영도극장 앞에 세트며 의상이며 다 쌓아놓고는 석유 끼얹고 불질러 버렸지 뭐. 안 한다 이 자식들아, 니들 영화나 실컷 해먹어라, 그러면서.
김세윤 기자 그게 언젠가요?
장인한 5.16 혁명 이후니까 아마 1961년일 거야. 그래 놓고 서울 올라왔는데 뭐 할 게 있나? 입에 풀칠은 해야 할 판인데. 마침 아는 사람 하나가 정창화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이라는 영화에 날 추천한 모양이야. 그 영화로 처음 시작한 거야. 당시만 해도 현대물은 드물었어. 물론 <청년 이승만><안중근> 뭐 그런 영화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맨 사극들이지. <장화 홍련>이니, <춘향전>이니, <폭군 연산>이니, <숙영 낭자전>이니, 전부 이따위 사극만 했다구. 사극에 젊은 두 년놈 뽑고 나면 나 같은 노인네들은 단역밖에 더 있어? 그렇게 단역만 30년을 한 거야.
김세윤 기자 연극할 때는 남부럽잖은 주연이었는데 뒤늦게 영화하면서 단역만 전전할 땐 마음이 편치 않으셨겠어요.
장인한 웬걸. 단역도 황송하지. 우선 그거라고 해야 밥을 먹지 않아? 금호동 산꼭대기에 월세 1천 원짜리 단칸방 하나 얻어놓고 냄비 몇 개에다 젓가락 숟가락 놓고 혼자 자취하다가 우리 집사람을 만났지.
김세윤 기자 어? 그럼 북에서 같이 내려온 쌍둥이 엄마는요?
장인한 서울 올라와서 병으로 죽고 말았어. 에이구, 참. 하여튼 그 뒤로 그냥 혼자 사는데 후배들이 형님,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궁상맞게 자취가 뭐유. 하나 얻으우,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얻으면? 얻으면 어떡하라고. 이 나이에 내 생활이 이런데 여자를 얻어가지구 어린애라도 낳으면 어떡해? 안 그래도 전쟁 통에 죽은 쌍둥이 땜에 맘이 짠해서 애는 절대 안 갖기로 굳은 결심을 한 판인데. 그러면 어린애 못 낳는 여자를 얻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지금 집사람하고 살림을 차린 거야. 아, 근데 몇 달 있다가 어린애가 떡하니 들어섰어. 어린애 못낳는다고 거짓말하고 시집을 온 거야.(웃음) 그래서 쉰 하나에 얻은 아들 놈이 하나 있어.
장병원 기자 그렇게 오래 단역 배우 하시면서 생계를 꾸릴 만한 형편은 되셨나요?
장인한 생활이야 엉망이지 뭐. 단역한테 몇 푼 줘? 그나마도 작품이 많이 있나? 한 작품 끝나면 또 한 작품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는 동안에 뭘 먹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어. 이래 갖고는 먹고살기가 막연해. 그래서 이중 직업으로 영화 분장을 시작했다고.
장병원 기자 분장을요? 분장은 주로 여자들이 하지 않았나요?
장인한 아니, 분장하는 사람 중엔 여자가 없었어. 그때만 해도 맨 사극인데 젊은 애들이 수염 붙일 줄 모르니까 분장사가 필요하다 이 소리거든. 그래서 우리 친구하고 나하고 둘이서 분장을 시작했는데 한 작품에 2만4천 원을 줘. 1천 원이면 방을 하나 얻는데 2만 4천 원이면 어떻게 돼? 엄청, 큰돈이지.
장병원 기자 그럼 분장 일은 언제까지 하셨나요?
장인한 그때부터 한 20년 했지. 내가 분장하는 영화엔 또 단역으로 한 번씩 꼭 출연하니까 일석이조지.(웃음) 그랬더니 배우협회해서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해. 분장 하면서 단역까지 하니까 단역 배우들이 굶는다 이거야. 그래서 내가, 너흰 기술 없어 못하는 걸 왜 나한테 이러니? 최무룡이나 신성일이 야간 무대에 나가서 노래 부르는 건 이중 직업 아니니? 그 사람들이 안 나가면 다른 가수들이 불러 먹고살 거 아니야. 마찬가지야. 나 분장하면서 영화 한 컷 나가는데 너무 그러지 마라, 싸움도 많이 했지.
장병원 기자 아드님도 지금 메이크업 아티스트인데, 그럼 가업을 잇는 셈인가요?
장인한 배우 하겠다 그랬으면 배우를 시켰을 텐데 배우는 안 하겠대. 분장하겠대. 아버지가 지금까지 자기 공부시킨 게 남의 얼굴에 수염 붙여 가지고 그런 걸 아니까 그랬나 봐.(웃음)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분장사 알기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야.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라도 분장을 해야 연극을 하든 영화를 하든 할 거 아냐. 집으로 말하자면 분장이 기초 공산데. 분장사는 그 인물이 농민 출신이냐, 그렇지 않으면 고관대작의 아들이냐 출신 성분에서 가족사까지 다 꿰뚫고 있어야 제대로 분장을 한단 말이야. 농사나 짓고 시커멓게 할 놈을 허옇게 해줘 봐. 그게 말이 안돼잖아. 그래서 분장이란 게 중요한데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
장병원 기자 그렇게 죽 충무로에서 활동하시다가 언젠가부터 TV 드라마에 나오시더라고요.
장인한 <모래시계>를 만든 김종학 PD가 연극하던 시절의 날 알거든. 그래서 MBC가 <조선왕조 오백년>할 때 나한테 대감 역할을 하나 맡겼다RH. 그랬더니 KBS에서 보고는 어, 저 노인네 못 보던 노인네인데 누구냐, 하면서 <우리는 중산층>에 날 불러. 그러다 SBS가 문을 연 뒤로는 3개 방송국을 왔다 갔다 하느라 꽤 바빴어. 지난해에도 김종학 PD가 하는 <대망>이라는 사극에 출연했잖아. 그렇게 연극 한 20년, 영화 한 30년, 드라마 15년… 웬만한 사람 한 평생 살고도 남는 68년을 연기한다고 허무하게 보내놓고 나이 여든 일곱 되니까 누가 알아 줘? 한동안은 홍경래도 하고 홍도 오빠도 하고 주인공만 하던 놈이 뒤늦게 영화로 넘어와서는 무명 배우가 되고 말았다 이거야. 요즘 방구석에 자빠져 있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심해.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싶은 생각도 들고.
김세윤 기자 이름은 널리 안 알려졌지만 그래도 얼굴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나요?
장인한 영화 30년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못 알아보더니 드라마 한 5~6년 하니까 다 알아봐.(웃음) 한번은 전철을 탔는데 어느 역에선가 여자들이 우르르 탔거든. 보아 하니 날 보고 맞다, 아니다 수군수군거려. 그 중 한 여자가 와서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TV에 나오는 그 할아버지 맞죠?" 하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봐라, 맞다면서 호들갑을 떠니까 그 차안에 탄 사람들이 전부 날 쳐다보는 거야. 아이구, 등에 식은땀이 쫙 흐르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김세윤 기자 왜요? 알아보면 기분 좋지 않으세요?
장인한 탤런트쯤 되면 자가용 타고 다니지 누가 전철 타고 댕겨? 그 생각을 하니까 식은땀이 나더라고. 버스에서도 한 번 그랬고. 그 뒤로 내가 전철 하고 버스를 안 타잖아. 근데 택시를 탔더니 또 택시 기사들도 날 알아봐. 어떨 땐 돈도 안받는 경우가 있어. 유명한 탤런트 분을 태워서 영광이래.
장병원 기자 <불어라 봄바람> 이후에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오랜만에 출연하신 거죠?
장인한 뭐 집에서 그럭저럭 놀고 있는데 영화 하자고 찾아왔어. 대본 읽어 보니까 역할이 괜찮아. 그래 하자. 현장 가보니까 분위기도 괜찮고. 스탭들이나 배우들이나 늙었다고 노인 대우 해주더라고.(웃음)
장병원 기자 요즘 까마득한 후배들 보시면 어떠세요?
장인한 뭐, 어중간한 중간층 선배라야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따라다니지. 나처럼 늙어 꼬부라진 사람한테는 선배고 뭐고 할 게 있나. 배울 게 없는데 뭘.(웃음) 내가 가르칠 것도 없구. 내가 가르친다고 해봐야 옛날 썩어문드러진 정신밖에 없지. 오히려 내가 요즘 젊은 애들한테 배워야지.
장병원 기자 연세도 많으신데 현장에 나가시는 게 육체적으로 힘들진 않으세요?
장인한 한 2년 전에 담석 때문에 두 달 입원한 뒤로 뭐 콩팥에 나빠졌대나 해서 지금까지 약을 먹잖아.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얼마 전부터 지팡이 짚고 다녀. 그래도 몸은 그럭저럭 별로 힘들 건 없는 데 제일 어려운 게 대사 외우는 거지 뭐. 이리 외면 저쪽으로 새나가고 저리 외면 이쪽으로 새나가고.(웃음) 그래도 다른 것 잊어버리는 데 비하면 대사는 잘 안 잊어버리는 편이지. 휴대전화는 어디다 놓고 왔는지 늘상 잊어버리거든. 그러게 이게 천직이라는 거야.
장병원 기자 얼마를 더 하실 지 모르지만 연기는 계속하실 거죠?
장인한 하고 싶은 데 시켜줘야 말이지. 이 나이에 뭘 시킬 거야. 드러누워서 아고, 나 죽겠네 하는 병자 노릇이나 시키면 모를까 이 늙은이 데려다 송장 치우려고 데려가겠어?(웃음)
김세윤 기자 후배들 중엔 벌써 세상 뜨신 분도 많은데 그 연세에 계속 활동하시는 것만도 대단하죠.
장인한 하긴. 황해, 허장강이 다 같이 연극하고 돌아다니던 후배들 다 세상 뜨고 없지. 허장강이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축구하다가 죽었잖아? 그게 내 무릎 위에서 죽었다고. 전후반 15분씩 뛰기로 했는데 전반 15분 뛰고나서 15분 더 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래, 심장마비로 쓰러졌지. 앰뷸런스 안에서 '정신 채려, 정신채려' 하면서 깨웠는데 결국 병원 가는 도중에 가더라고. 내 무릎 위에서, 참.
김세윤 기자 이젠 장성한 아드님도 있고 먹고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힘들게 연기 안 하셔도 되잖아요?
장인한 화가가 붓대를 버리지 못하듯이 연기자가 연기 못하면 죽는 거지. 죽어서나 못하는 거지 죽는 그 순간까지는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연극하면서 한 맹세가 있거든. 난 무대 위에서 막을 뜯어 덮고 죽으면 죽었지 딴 거 안 하겠다고. 지금 이 나이에 연기하겠다고 지팡이 짚고 다니는 것도 다 그 맹세를 지키려는 거야. 연기, 죽을 때까지 버릴 수 없다는 거지.
장병원 기자 집에서 쉴 때는 뭐하세요?
장인한 그냥 TV 하고나 싸우고 앉았지.(웃음) 예전엔 책도 좀 봤는데 이젠 눈이 나쁘니까 돋보기 쓰고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면 줄이 두 줄로 보여. 그러니 책도 못 봐. TV나 보고 앉아서 세월 보내는 거야.
김세윤 기자 약주는?
장인한 술은 저절로 끊었어. 예전엔 촬영 끝나고 술도 많이 마셨는데 요즘은 촬영 끝나고 내가 "어이 감독, 집에 갈 거야? 술 한잔 안 해?" 그러면 아이고, 왜 이러시냐고, 얼른 들어가 쉬시라고 떠밀어. 하긴, 아무래도 젊은 친구들끼리 먹는데 늙은이가 끼면 재미가 안 나겠지. 같이 마실 술 친구가 없으니까 저절로 끊게 되더라고.(웃음)
장병원 기자 요즘도 영화 제의는 더러 들어오나요?
장인한 오늘도 어느 영화사 가서 감독을 만나고 왔는데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봐. 아유,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많이 야위셨어… 그러더라고. 이빨 때문에 석 달 동안 죽만 먹었으니까 살이 더 빠졌지 뭐. 내가 자기가 원하던 모양이 아닌가 봐. 아무래도 이번엔 안될 거 같애. 허허.
사진 맹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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