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19:17)-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님의 새로운 기름 부으심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아모스서 9장에 보면 이것은 다윗의 장막이 회복될 때 부어지는 기름 부으심입니다."[암9:14, 한글 성경의 '단 포도주'는 원문의 의미로는 '새 포도주'(new wine)를 의미합니다.]
다윗의 장막은 시27:4에 나타난 다윗의 고백처럼 신랑 되신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신부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때의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심지어 계22:17에는 이러한 교회를 가리켜 직접 '신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 포도주가 부어질 때 이것을 담아내기 위해선 새 가죽부대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낡은 가죽부대로는 새 포도주의 발효하는 작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부의 영성을 담아내기 위한 새 가죽부대는 무엇일까요?
교회사를 보면 2세기 무렵 교부 이레니우스에 의해 감독과 장로의 이원화가 나타납니다. 본래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감독과 장로는 동일 인물인데, 이레니우스는 이것을 분리시켰습니다. 감독을 최고의 권위자로, 장로는 감독을 돕는 위치로 분리시킨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담임목사와 장로 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조상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역을 바라보는 두 그룹의 관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는 신학을 전공한 전임사역자의 관점에서, 장로는 자신의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면서 소위 평신도의 시각에서 교회 사역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20세기 후반부터 에베소서 4장에 기록된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자"(우리 말 성경에는 목사로 번역되어 있으나 정확한 번역은 목자입니다.), 교사 등의 오중직임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오중직임의 회복을 위해 수고한 여러 선구자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이로 인해 많은 교회들에서 그동안 외면했던 사도, 선지자의 사역에 대한 관심과 인정 그리고 그 실재가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로는 새 포도주를 담아내기 위한 새 가죽부대로 미흡함이 남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행전은 글자 그대로 성령님께 순종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들 간에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담임, 수석, 부(副), 대표, 총무 등의 서열적인 직임은 없었습니다. 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그들의 관계는 한 몸 안의 지체됨에서 나오는 유기체적인 관계였습니다. 때로는 다리가 앞서 나갈 수 있고 때로는 손이, 또 때로는 가슴이 먼저 나갈 수 도 있습니다. "(달리기 경기의 결승선에서 선수들은 가슴을 가장 앞으로 내밉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첫 교회의 문을 열 때는 베드로가 앞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행 13장에서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 때는 바울이 앞서 나갔습니다. 반면에 유대인 크리스찬과 이방인 크리스찬의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야고보가 권위를 가졌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수석 사도였고, 야고보가 부 사도, 바울이 총무 사도... 이런 식의 인위적인 구분이 매겨져 있었다면 사도행전의 폭발적인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 20여 마리의 기러기가 V자로 날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V자의 꼭지점에 있는 기러기가 바람의 저항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다른 기러기가 서고 원래의 기러기는 뒤로 빠집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다른 기러기가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 구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