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이사야 40장 3-9절
설교제목 : 광야의 소리
평화를 만드는 사람
그리스도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강추위와 폭설로 한반도가 매서운 겨울을 보냈습니다. 자동차 바퀴가 수축되어 공기압이 빠져서 경고등이 켜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맹렬한 추위를 막아줄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낍니다.
지난 주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팔레스틴 가자 지구에서 떨어진 폭격장면에서 한 아이가 건물의 잔해에 깔리고 손이 들린 채 죽어간 장면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일깨워주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땅 위에서 어서 속히 평화가 도래하길 기도합니다.
그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살아내야만 하는 삶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또다른 한 장의 사진을 함께 보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길거리의 잔해물 곁에 큰 거울을 세워놓고 아이의 머리를 자르는 이발사?의 모습은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것임을 희망차게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폐허로 변했지만, 생에 대한 희망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불안과 절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는 사람들보다 희망의 바이러스로 다시금 삶의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도모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평화를 만들고 희망을 누군가에게 넌지시 선물로 주는 자들이야말로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마땅히 불리워질 것이고,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화의 사람은 하나님과 진정한 친족 관계가 형성되고, 그러면 우리의 삶은 든든함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탄생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평화와 희망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탄생하여 평화를 만들어가고, 희망을 선물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
오늘 본문은 포로 생활의 압제 속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전하는 말씀입니다. 40장 1절에서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포로 생활 속에서 자유를 잃고, 어둠과 절망 속에서 비탄에 빠진 이들을 위로를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됩은 선택된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 대한 하나님의 분노였고 심판이었습니다. 이는 한 개체와 하나님, 전체 정신의 핵인 자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엄중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됨은 자아의 불안전하고 제멋대로의 태도, 자아의 욕망으로 매혹된 거짓 신을 걷어내는 변환을 위한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런 포로됨의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위로를 기다리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정신적으로 사로잡힘 현상 속에서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대중 속에 깊이 스며든 권력과 부의 신에 매혹된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소리가 외칩니다(3). 관주에 보시면 “광야에서 한 소리가 외친다”로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소리가 말하여집니다. 왜 광야에서 소리가 선포될까요? 광야는 의식적이고 문화화된 영역이 아닙니다. 낯설고 귀신이 출몰하는 기존의 토대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인 영역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소리는 기존의 체계 밖에서 혹은 세대 밖에서 들려지는 소리입니다. 익숙한 곳, 기존의 전통과 인습에 젖어 들었던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우리를 집단의 체계 유지와 집단과 종교적 가치를 신봉하며 그것을 추구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광야의 소리는 우리의 일방적이고 강박적이고 인습적 체계를 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변환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입니다. 대림절을 통하여 우리는 세대 밖에서 들려지는 광야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광야의 소리 1 – 길을 닦아라
광야의 소리가 선포합니다. “광야에 주님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라(3).”
여러분, 광야와 사막에 주님 오실 길을 닦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사막같은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불모의 땅, 외로움의 땅, 추위와 배고픔의 땅, 두려움과 고통의 땅, 피하고 싶은 땅, 곧 무의식의 영역에 주님이 오시는 길을 곧게 내라고 하십니다. 길을 닦는 행위는 의식화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길을 곧게 내는 것은 자아가 하나님께 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올 수 있는 연결, 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관계할 수 있는 길은 종교적 방법으로는 기도와 명상, 예배, 꿈을 살피는 일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의 길, 내가 투사한 하나님에게 가는 길을 닦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어떤 형태로든 길을 닦으며 살고 있습니다. 자아가 그리는 이상과 기대를 투사하여 우리는 자아의 왕국에 길을 내려한다면, 우리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길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 길 위에서 배회하여 갇히고 말 것입니다. 광야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실 길을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내며 살고 계신가요? 주님이 오실 길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들려지는 목소리를 들고, 주님께서 오실 길을 곧게 닦으면 주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희망이 되실 것입니다.
또한 곧게 내라는 말의 함의를 치곡致曲과 지성至誠의 태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용의 23장에서 사람의 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한 측면을 극진하게 밀고 나아가는 일이다. 한 측면에서도 성실함을 지닌 수 있으니, 성실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뚜렷해지고, 뚜렷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며 변하고, 변하면 교화된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함이라야 교화시킬 수 있다(변화시킬 수 있다)”[주희 엮음, 김미영 옮김, 《대학, 중용》, 홍익출판사, p90]
치곡은 소소하고 작은 일을 지극히 해내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한 측면을 극진히 밀고나아가는 태도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든 곡진하게 작은 일을 잘 해내는 태도, 성실함으로 하나의 일을 해내는 마음이야말로 광야에서 주님이 오실 길을 곧게, 곧게 닦는 자의 모습입니다. 치곡의 태도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오실 수 있도록 곧게 길을 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광야의 소리 2 – 평탄케 하라
광야의 소리가 4절에서 들립니다.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이것은 길을 내는 방식, 의식화의 방식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깊은 곳은 메우고, 높은 곳은 깎아내고, 험한 곳은 평탄하게 하여 길을 고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도, 치우치지 아니함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용 4장에 보면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안다. 현명한 사람은 너무 지나치고 못난 사람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시기를 하지만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子曰 / 道之不行也 / 我知之矣 / 知者 / 過之 / 愚者 / 不及也 / 道之不明也 / 我知之矣 / 賢者 / 過之 / 不肖者 / 不及也 / 人莫不飮食也 / 鮮能知味也
이것은 바로 정신의 균형과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시하는 구절들입니다. 어떤 것이 높이 서 있는지, 어떤 것이 미치지 못한 것인지를 판별하여 그 균형을 잡은 것이야말로 광야의 소리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메시지입니다. 자신의 모자람과 과다함을 인식하는 자만이 정신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정신의 균형을 찾으며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중용 4장 2절의 문구가 너무나 와닿습니다. “누구나 먹고 마시기는 하지만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여러분, 수많이 먹고 마시지만, 맛을 이해하며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자는 적다고 말합니다. 아마 메우고 깎아서 평탄케 하라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경험적으로 의식화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길을 닦을 수 없습니다. 길을 평탄케 하면서 그 길 속에 맛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의 소리 3 – 외쳐라
그리고 광야의 소리, 무의식의 소리는 “너는 외쳐라(6)”고 선포합니다. 무엇을 외쳐야합니까? 물으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아름다움은 꽃과 같아서 언제든 마르고 시드는 유한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목소리를 힘껏 높여서 말하기를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광야의 소리를 들어야할 1차 청중은 바로 예언자 자신일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며, 생의 제한성을 만드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확고히 선포합니다. 또한 두려움과 고통 속에 있지만 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심을 외치라고 일러주십니다.
여러분, 무엇이 영원합니까? 무엇과 연결되기 원하십니까? 그 물음 앞에서 서라는 이 광야의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에 오늘 이 광야의 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고 설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고, 우리 안에서 태어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