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바다에 집어등(集魚燈) 눈부시다. 집어등은 용도에 따라 수상, 수중으로 나뉘고 다시 잡을 어종에 따라 오징어, 구등어, 멸치, 갈치, 볼락으로 나뉘어 다양하다. 불배는 바다 너머 몸을 숨긴 고기떼와 숨바꼭질 하듯 한 줄 수평선을 들락거린다. 수평선은 일직선으로 보이나 그것은 관념이고 상상일 뿐 더 멀리서 바라보면 휘었다. 현미경으로 머리카락을 보는 것처럼 수평선은 매끈하지 않고 바람이 부는 세기와 물의 흐름에 따라 울퉁불퉁하고 거칠다. 달맞이고개가 끝나는 산마루, 동해의 아침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는 해마루 정자(亭子)에서 내려다보는 수평선은 더 멀리까지 우리를 데리고 나간다. 해마루는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에서 표현했듯이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다. 생각이 시작된 까마득한 곳에 가 닿고 싶은 그리움이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시야를 아무리 넓혀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바다의 양끝이 시야를 더욱 넓힌다. 막힘이 없이 툭 터진 공간이다. 바다는 그만큼 시원하고 광활하다. 오른쪽으로 미포와 달맞이 언덕, 그 너머 이기대와 오륙도, 태종대, 왼쪽으로는 대변항과 멀리 고리,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한 폭 그림같이 출렁인다. 운이 좋은 날이면 대마도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해파랑길’ 초입인 송정의 밤경치 중에 불배 늘어선 수평선이 일품이다. 송정 밤바다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는 불배는 줄잡아 스무 척이 넘는다. 수평선을 넘나드는 불배를 지켜보면 마치 오선지 위에 수놓은 음표나 건반악기의 아르코의 생동하는 움직임을 보는 것 같다. 파도의 장단에 맞춰 춤추는 수평선은 언제 보아도 그 너머에 바다의 비밀이 살고 있을 것 같다. 이 어두운 밤바다의 호기심을 맛보았는가? 밤바다는 항상 잠든 그리움을 충동질한다.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밤바다를 깨우는 해녀의 긴 숨비소리가 들린다.
아득한 곳에서 하늘과 바다가 포옹하는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찌든 일상이 가벼워진다. ‘해파랑길’은 장산이 활화산일 때 용암이 바다 밑으로 흘러 넘쳐 만들었다는 용호동 승두말이 낳은 다섯 섬, 오륙도로 부터 시작한다. 그 길은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변길과 숲길, 그리고 유서 깊은 갯마을 따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먼 길이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바다색깔 파랑색과 함께 라는 조사의 ‘랑’자를 합쳐서 만든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이란다. 동해와 남해의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로부터 송정에 이르는 ‘동해아침길’, 경주 봉길 해수욕장으로부터 포항 양포항에 이르는 ‘화랑순례길’, 영덕 강구항에서 고래볼 해수욕장에 이르는 ‘푸른 바다(영덕 블루로드)’, 강릉항에서 양양 광진리 해수욕장까지 ‘석호길’, 고성 성지호로부터 화진포 해수욕장까지의 ‘통일염원길’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해아침길’은 오륙도에서 갈맷길 따라 그 초입의 아름다운 숲길 이기대를 거친다. 이어 옛 어방이 있던 수영강 하구의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 굽이굽이 아름다운 포구를 품은 등대가 있는 그림 같은 갯마을 미포와 청사포, 구덕포를 거쳐 송정에 이른다. 60년대까지는 해송이 늘어선 고즈넉한 해변이었다. 송정의 옛 이름은 가을포. 가을포가 송정으로 지명이 바뀐 것은 구한말 과거에 급제해 왕명을 출납하는 좌부승지(左部承旨)에 오른 노경영이 자신의 고향이 한갓 갈대 우거진 포구가 아니라 노송(老松) 우거진 선비의 고장이라고 미화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예나 이제나 권력을 쥐면 고향의 이름도 바꾸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람과 물이 유난히 맑은 송정바다의 동쪽 끝에 작은 솔밭, 죽도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공원 정자 ‘송일정’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은 폭이 하도 넓어 차라리 막막하다. 수평선의 양끝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저 멀리 밤바다 수평선에는 고기떼를 부르는 집어등을 단 불배가 먼동 트듯 서성인다. 송정 앞바다에서 어둠을 밝히는 불배의 춤은 소리 없는 무용극이다. 오징어 채낚기 뱃전에서 밤바다를 읽는 어부의 눈길은 빛난다. 성어기(成魚期)면 갯마을 아낙들도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먼동이 트는 여명에 어김없이 바뀌는 풍향 따라 어부가 귀항채비를 서두르는 동안 뭍의 아내들은 바다를 바라다만 보아도 가슴 벅차다. 만선의 기대에 어부가 들뜨는 만큼 아내는 기다림에 가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어부는 수평선에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일으킨 해무 속에서 뜨거운 사랑을 속삭인다. 수평선에서 보는 해돋이와 해넘이는 시작과 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하루를 맞고 보낸다. 집어등 불빛 따라 맨 먼저 플랑크톤이 모여들고 그 플랑크톤을 보고 달려드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하나의 먹이사슬을 이루면서 어군(魚群)을 형성하는 것이다.
주광성(走光性)인 오징어나 고등어를 잡을 때는 불배 전체에 등을 밝히지만 멸치배는 배의 머리 부분에 집어등을 달고 멸치떼를 끌어 모은 뒤 그물을 던지는 권현망어법으로 고기를 뜬다. 별빛 초롱초롱한 그믐밤이면 집어등은 물 맑은 봄 바다를 대낮같이 밝히고 오징어와 멸치 고등어 떼를 뱃전까지 불러 모은다. 푸른 바다는 정녕 생명의 원천이고 원대한 자연의 고향이다. 휘영청 밝은 달밤이면 달빛에 피는 윤슬을 길게 끌고 다니는 불배의 모습이 화려하다. 밤이면 불배는 까마득한 수평선에서 어둠을 밝히는 한 점 촛불을 켜들고 바람 따라 홀로 춤춘다. 불배는 오직 빛으로 말한다. 등대불이 잠들지 않는 깊은 밤 수평선 위로 띄워 올린 달과 별은 어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두근거린다. 하늘과 바다는 바람, 파도, 구름, 햇살로 하나의 공간에서 수평과 수직을 엮고 직선과 곡선이 일러주는 무등(無等)의 이치를 깨닫게 한다.
불배가 어둠을 밝힌 밤바다에는 해와 달, 배와 새, 바람과 파도, 어부와 아내가 차례로 등장하는 자연과 생명의 공간이다. 하늘은 물속으로 침몰시키고 바다는 하늘 우러러 부푼 비상을 꿈꾸며 몸부림친다. 새 날이 밝아 별이 사라져도 별은 바다 그리워 눈감지 않는 하얀 반달과 더불어 온몸으로 서로에 사무친다. 수평선은 가까워질수록 파도가 거칠어진다. 그렇다. 수평선으로부터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태고의 숨소리와 원시의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긴 아우성을 친다. 수평선은 신기루처럼 나타나서 그 윤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가도 순간 변덕이 일어 시야에서 사라진다. 오늘도 불배는 뜬눈으로 어부의 귀항을 기다리며 새벽의 갯마을을 밝힌다.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는 고깃배의 뱃고동이 오늘의 삶과 애환으로 끝없이 메아리친다.
첫댓글 빨간 등대 앞에서 게 잡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만으로 '동해 아침길'을 걷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갑자기 밤바다가 보고싶어졌어요. 그래도 가끔은 동해안의 바다를 보곤했는데
요즘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건지, 진정 짬이 나지 않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