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업보는 있지만, 짓는 자는 없다”의 해석 문제>를 보충하는 글이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인연법 가운데 윤회의 참여자의 성품을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중음/중유‘와도 관련이 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비달마는 ‘무아’로 해석하는데, 이러한 ‘무아’는 ‘인연법적 공(무자성)’에 포섭되는 무아이다.
이러한 아비달마의 공과 무아의 개념은 용수의 <중론>과 대승불교의 공과 무아의 용법으로 이어진다.
[참고]
1. 공의 두 얼굴: 인연법적 공(무자성)과 인연법 너머의 공(제일의공)
2.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경전의 ‘무자성’, 그리고 아함경의 ‘무아’와 ‘공’
++++++++++++
<아비달마구사론_3. 분별세품 ②, 중유, 5온의 상속(12연기), 12연기법의 뜻과 해석>
[중음과 자아]
여기서 ‘아(我)’를 주장하는 외도가 말하기를,
“만약 유정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아를 주장하는 유아론이 된다”고 하였다.28)
이제 이 같은 주장을 막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아로서, 오로지 온갖 온(蘊)만이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되어
중유의 상속으로 말미암아
입태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
[업이] 인기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惑]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은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그대들이 주장하는 자아의 상은 어떠한가?
능히 이 같은 온(蘊)을 버리고서 능히 그 밖의 다른 온을 상속하는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 puruṣa)이다.
이와 같은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색(色)이나 안(眼)처럼 [그 자성이나 작용이]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29)
세존께서도 역시,
“업도 있고 이숙도 있지만, 그 작자는 인식될 수 없다.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온을 버리고 아울러 능히 그 밖의 다른 온을 상속하는 것이니, 오로지 법가(法假)만은 제외된다”고 말씀하였던 것이다.30)
법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31)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는 것이니, 널리 설하면 연기(緣起)를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아(我)가 부정되지 않는 것인가?32)
오로지 제온(諸蘊)만이 존재할 뿐이니, 이를테면 온에 대해 일시 ‘아’라는 명칭을 설정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제온이 능히 이 세간(현세)으로부터 다른 세간(후세)으로 전지(轉至)하는 것은 인정하는가?
온은 찰나에 소멸하여 [다른 세간으로] 전지하는 공능이 없을지라도,33) 자주 익힌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중유의 온이 상속하고 입태하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등불의 불꽃은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다른 불꽃이] 능히 상속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제온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전지한다’고 말해도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따라서 비록 자아가 없다고 할지라도 번뇌[惑]와 업에 의해 제온은 상속하고 입태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제온은 업이 인기(引起)한 순서대로 더욱 증장(增長)하여 상속하며, 다시 번뇌와 업의 힘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게 된다.’34)
이를테면 인기된 일체 제온의 증장과 상속에 길고 짧음[修促]이 있어 그 양이 같지 않은 것은 목숨[壽]을 인기하는 업인(業因)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5)
즉 능히 인기하는 업의 세력이 증장하거나 미약해짐에 따라 [인기된 수명이나 신근 등은] 다 같이 그러한 때에 순서대로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순서가 어떠한가?
성교(聖敎)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최초에는 갈라람(羯邏藍)이고
다음은 알부담(頞部曇)이며
이로부터 폐시(閉尸)가 생겨나고
폐시에서 건남(鍵南)이 생겨난다.
다음이 발라사가(鉢羅奢佉)이며
그 후 머리카락과 터럭과 손톱 등과
아울러 색의 근(根)과 형상이
점차로 더욱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36)
즉 모태 중에서 다섯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니,
첫 번째는 갈라람의 상태이며,
두 번째는 알부담의 상태이며,
세 번째는 폐시의 상태이며,
네 번째는 건남의 상태이며,
다섯 번째는 발라사거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태 중의 화살[箭, 아이를 말함]은 점차로 증장하여 이윽고 유색(有色)의 근과 형상이 원만하게 된 상태에서 업에 의해 일어난 이숙의 풍력(風力)으로 말미암아 모태 중의 화살은 산문(産門)으로 나아가게 된다.37)
그리고 마치 딱딱하게 굳어진 변을 양에 넘치게 볼 때처럼 속이 답답하고도 껄끄럽게[悶澁] 산문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니, 그 때의 극심한 고통은 참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혹 어느 때 몸가짐[威儀]과 음식을 분수에 넘치게 취하거나38) 혹은 그 아이가 지은 숙세의 죄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태내에서 죽기도 한다.
그 때 해산의 법도[産法]에 대해 매우 능통하고 애기를 잘 받을 줄 아는 여인이나 혹은 의사가 있으면 따뜻하게 소유(酥油)나 섬말리(睒末梨)나무의 즙을 손에 바르고 작고 예리한 칼을 잡고 [탯집의 아이를 끄집어내게 된다.]
그러나 그 속은 항문[糞坑] 속처럼 악취가 지독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찼으며, 어두컴컴한 곳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천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또한 항상 나쁜 액체가 흘러나와 반드시 잘 대처해야 한다.
즉 정혈과 기름 때로 썩어 문드러져 부정(不淨)이 흘러 넘치며 비루하고 더러워 차마 보기 어려운데, 구멍이 뚫려 누설되는 얇은 거죽[皮]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즉 숙업에 의해 인기된 [이와 같은] 몸(어머니의 몸)의 창공(瘡孔,産門 즉 자궁을 말함) 속으로 [손을 넣어 태아의] 지절(支節)을 분해하여 밖으로 끄집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태아는 숙세에 지은 순후수업(順後受業)을 받게 되는데,39) 그가 나아가는 취(趣)에 대해서는 참으로 알기 어렵다.
혹은 또한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생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몸은 마치 부스럼이 막 돋아난 것과 같으며 가늘고 연약하여 다루기 어려운데,
어떨 때는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혹 어떨 때는 다른 여인(유모)이 칼과 같고 재와 같은 거칠고 투박한 두 손으로 아이를 잡고서는 씻기고 닦아 그를 편안한 곳에 눕힌다.
그런 다음 맑은 소유(酥油)를 먹이고 모유를 먹이며, 점차 부드러운 음식과 거친 음식을 섭취시켜 익숙하게 한다.
그리하여 점차 순서대로 증장하여 근(根, 여근ㆍ남근)이 성숙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다시 번뇌를 일으켜 온갖 업을 쌓으며, 나아가 이 같은 [현세의] 몸이 괴멸하고서 다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중유가 상속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혹(惑, 즉 번뇌)과 업을 원인으로 삼아 생(生)이 있는 것이며, 생이 다시 원인이 되어 혹과 업을 일으키며, 이러한 혹과 업으로부터 다시 생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有輪:즉 생사를 윤회하는 4有의 轉生]는 돌고 도는 것으로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시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시작에는 마땅히 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시작에 이미 원인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밖의 다른 것도 [원인이 없이] 마땅히 스스로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 싹 등을 보건대 그것은 씨앗 등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으니, 생겨나는 장소와 시간이 모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40)
또한 불 등에 의해 숙변(熟變) 등이 생겨나니,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결정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상주(常主)하는 원인을 설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앞(본론 권제7)에서 이미 비판한 바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는 결정코 시초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사의 끝[後邊]은 있으니, 그 원인이 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생은 원인(즉 惑과 業)에 의지하기 때문에 원인이 멸하여 허물어질 때 생이라는 결과도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종자가 멸하여 허물어질 때 싹은 필시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_변연기품_2. 유정의 종류와 그 전생, 중유의 존재증명: 경전상의 근거 등>
2.4. 무아(無我)와 윤회상속
여기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저 세간으로] 가 입태(入胎)하는 것인가?
어째서 ‘누구’라고 묻게 된 것인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즉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 세간으로부터 중유의 온을 타고 저 세간으로 가 입ㆍ주ㆍ출태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 puruṣa,내적 자아)가 존재하여 그것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가 입ㆍ주ㆍ출태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83)
그 같은 주장을 막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아로서,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된 제온(諸蘊)만이 존재할 뿐으로
중유의 상속으로 말미암아
입태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
[업이] 인기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惑]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은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저 세간으로] 가 입태하는 실유의 자아[實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색(色)이나 안(眼)처럼 그 자성이나 작용[作業]이 획득(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84) 즉 소의와 소연에 근거하여 식(識) 등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그대가] 주장한 별도로 작용하는 실유의 자아는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토끼 뿔 등의 경우처럼 별도의 작용이 이미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명료하게 인식될 수 있는 자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세존께서도 역시 [외도가] 주장하는 ‘작자와 향수자로서, 능히 후세로 가는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획득될 수 없다.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온을 버리고서 그 밖의 다른 온을 능히 상속하는 것이니,……(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85)
다시 ‘[외도가] 주장하는 작자 등으로서의 실유의 자아는 실로 획득(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자아] 자체는 실유이지만, 그 근거를 획득할 수 없거나 획득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종의에서는 결정코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획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니,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1) 유아론(有我論) 비판
자아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다음의] 네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는 자아는 존재하지만 바로 온(蘊)을 본질[性]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는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 중에 머문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셋째는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과는 다른 법 중에 머문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넷째는 온과 다른 것으로서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실유이지만 획득될 수 없다’는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주장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먼저 ‘자아는 존재하지만 바로 온을 본질로 한다’는 주장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개별적인 온을 자아라 하든 [5온] 전체를 자아라 하든 모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자아는] 각기 개별적인 온의 자상(自相)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며, [5온 전체는] 마땅히 가설로서의 [자아(假我)만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아는 존재하지만]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 중에 머문다’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자아] 자체를 영원한 것이라고 하든 무상한 것이라고 하든 모두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찰나 찰나를 각기 달리함으로 단일한 자아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사멸하고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는 즉 마땅히 작자[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작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경우라도 온을 떠나 생성 소멸하는 법은 획득(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아는] 마땅히 전변(轉變)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고, 생ㆍ노ㆍ병ㆍ사도 다 성취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마땅히 별도의 다른 취(趣)로 나아가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며, 애호하거나 애호하지 않는 경계대상과 화합할 때라도 자아는 마땅히 고락에 따라 전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역시 또한 고락과 상응하는 번뇌에 의해 시달리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번뇌에 의해 시달리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에 의해 법(즉 선)과 비법(즉 불선)을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런 즉 미래세의 애호하거나 애호하지 않을 소의신도 [그것을 초래할 만한] 원인(법과 비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생겨날 리가 없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아 자체는 비록 영원할지라도 소의신이 개전(改轉)함에 따라 자아가 변이(變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한다면, 자아 자체는 자신(自身)의 생ㆍ노ㆍ병ㆍ사나 번뇌와 업의 결과인 온갖 취(趣)에서의 고락에 따라 전변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본래부터 완전[畢竟]히 해탈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영원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는 달리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을 떠나 제3의 취(聚)로서 존재하니, 그것을 자아라고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예컨대 허공(虛空) 등의 온갖 무위법은 그 자체 온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온 중에 머물지 않는 것처럼,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온 중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자아는 존재하지만]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과는 다른 법 중에 머문다’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염오하거나 청정한 온의 법과 이미 서로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같이 분별한 자아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니, 이미 온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거늘 어찌 비온(非蘊, 온과는 다른 법)에 의지할 것인가? 자아와 비온도 서로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아는 존재하지만] 온과 다른 것으로서, 무위법의 경우처럼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다’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 허물이 앞에서와 같기 때문이며, 또한 마땅히 본래부터 영원히 해탈한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같이] 주장된 자아는 이미 머무는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색신(色身)이나 고락 등의 수(受), ‘크다’ ‘작다’는 등의 상(想), 선악 등의 행(行), 색이나 소리 등에 대한 식(識)과 어떠한 경우라도 서로 관계하지 않을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본래부터 5온을 원리(遠離)한 것이어서 어떠한 공용(功用,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 스스로 그러하여 해탈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도가] 주장한, 능히 이 세간을 버리고 다른 세간으로 상속하는 작자로서 실유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획득(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자아] 자체는 실유가 아닐 뿐더러 그 근거를 획득할 수도 없고, 획득할 만한 근거도 없기 때문에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외도들은 어떤 소연(대상)에 대해 자아관념[我執]을 일으키는 것인가? 비록 모든 온[諸蘊]을 떠나 별도의 자아[我性]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연을 [자아로] 집착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모든 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자아] 관념을 일으키니, 계경에서 “모든 유정이 자아 등에 대해 집착하는 바를 관찰해 보건대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비록 그러한 외도들이 설하는 바와 같은 진실의 자아[眞實我]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성교(聖敎)에서는 세간에서 설하는 바에 따라 자아를 가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 진실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자아를] 가설할 것인가?
비록 진실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세간[언설]에 따라 [5]온을 일시 자아라고 가설하는 것이다.
어떠한 인연에서 자아는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 다른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인가?
염오하거나 청정한 법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자아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즉 모든 잡염(雜染)은 다만 모든 온에 근거하여 찰나로 상속하는 것으로,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인기된 중유가 상속함으로써 모태로 들어갈 수 있다. 비유하자면 등불이 찰나에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르는 것처럼 모든 온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령 아직 욕계의 탐을 떠나지 않았을 경우, 내(內)ㆍ외처(外處)를 연(緣)으로 하여 비리작의(非理作意)를 일으키면 이로부터 탐 등의 번뇌가 생겨나고, 저열하거나 중간이거나 수승한 사(思, 의지)와 아울러 식(識)도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서는 능히 당래 비애(非愛)의 결과를 견인하며, 역시 또한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生緣)이 된다. 그리고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은 동류(同類)나 이류(異類)인 전 찰나의 구생연(俱生緣)을 관찰하여 그 생기를 획득할 때, 혹은 선한 성질인 경우도 있고, 혹은 염오한 성질, 혹은 무기의 성질인 경우도 있는데, 일어나서는 다시 능히 자신의 당래 결과를 인기하며, 아울러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이 된다. 이와 같이 연이 되어 그 다음다음 찰나에도 계속하여 능히 두 가지의 결과(非愛의 결과와 무간의 식)를 견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온의 상속은 전생[先世]의 번뇌와 업에 의해 인기된 수량(壽量, 수명의 길이) 등의 법을 영납(領納)하였지만, 그 이숙의 세력이 다하여 없어질 때 죽어서 식과 소의가 다같이 소멸하는 상태[滅位]에 이르게 되면 능히 중유(中有)의 식 등을 낳는 연이 된다. 그리고 중유의 모든 온은 [다시] 전생의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마치 환영(幻影)이 상속하듯이 태어날 곳으로 가 어머니의 뱃속에 이르게 되며, 중유가 소멸할 때 다시 능히 연이 되어 생유(生有)의 온을 낳으니, 비유하자면 등불이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능히 전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무간에 전전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다.86)
따라서 비록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온은 찰나에 소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후세에 나아간다고 하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모든 온은, 이를테면 전세의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인기되어 순서대로 점차 증가하여 일기(一期) 동안 전전 상속하였듯이 다시 번뇌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인이 다르면 결과에도 다름이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온갖 인업(引業)의 과량(果量)은 동등하지 않다. 즉 수명의 과보가 길고 짧은 것은 업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성[增]하거나 미약[微]한 업[의 세력]에 따라 인기된 수명과 신근 등은 계속하여 서로 의존하며 갈랄람(羯剌藍)ㆍ알부담(頞部曇) 등 그 뒤의 온갖 상태로 점차적으로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갈랄람 등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이 상속 전변하는 상태는 동일하지 않은데, 이와 같이 점차로 증장하여 근(根, 감관)이 성숙한 상태[熟位]에 이르게 되면, 내(內)ㆍ외처(外處)가 작의 등의 연과 화합하여 탐 등의 번뇌를 발생시키고, 온갖 종류의 업을 조작하여 증장시키니,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다시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유가 상속하여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87)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존재의 수레바퀴[有輪, 즉 생사를 윤회하는 4有의 轉生]에는 시작이 없다. 즉 번뇌[惑]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온갖 업을 조작하고, 업의 힘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생을 인기하며, 생이 다시 원인이 되어 번뇌와 업을 일으키며,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부터 다시 생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으로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시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시작에는 마땅히 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시작에 이미 원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것도 마땅히 스스로 생겨나야 할 것이니, 달리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관찰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모순 되는 것이다.88)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결정코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능히 원인이 되는 영원한 법[常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 자재천(自在天)을 논파하면서 이미 널리 부정하여 비판하였었다.89)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는 결정코 시초가 없으니, 비유컨대 곡식 등이 전전 상속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생사의] 끝[後邊]은 있으니, 그 원인(즉 번뇌와 업)이 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자 등이 다하게 되면(썩어 문드러지면) 더 이상 싹 등을 낳지 않듯이 [번뇌와 업이 다하여] 생사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의 청정(즉 열반)이다.
따라서 염오함과 청정함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
<아비달마장현종론_4.2. 유정의 종류와 그 전생(轉生)[3], 중유의 4종 입태, 무아(無我)와 윤회상속>
4) 무아(無我)와 윤회상속
여기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저 세간으로] 가 입태(入胎)하는 것인가?
어째서 ‘누구’라고 묻게 된 것인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즉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 세간으로부터 중유의 온을 타고 저 세간으로 가 입태ㆍ주태ㆍ출태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puruṣa:내적 자아)가 존재하여 그것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가 입태ㆍ주태ㆍ출태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79)
그 같은 주장을 막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아로서,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된 제온(諸蘊)만이 존재할 뿐으로
중유의 상속으로 말미암아
입태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
[업이] 인기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惑]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은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저 세간으로] 가 입태하는 실유의 자아[實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색(色)이나 안(眼)처럼 그 자성이나 작용[作業]이 획득(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80)
세존께서도 역시 [외도가] 주장하는 ‘작자와 향수자로서, 능히 후세로 가는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획득될 수 없다.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온을 버리고서 그 밖의 다른 온을 능히 상속하는 것이니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81)
그리고 [외도가] 주장한 네 종류의 자아에 대한 비판은 『순정리론』 제24권에서와 같다.8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외도들은 어떤 소연(대상)에 대해 자아관념[我執]을 일으키는 것인가?
비록 제온(諸蘊)을 떠나 별도의 자아[我性]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연을 [자아로] 집착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제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자아] 관념을 일으키니,
계경에서
“모든 유정이 자아 등에 대해 집착하는 바를 관찰해 보건대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비록 그러한 외도들이 설하는 바와 같은 진실의 자아[眞實我]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성교(聖敎)에서는 세간에서 설하는 바에 따라 자아를 가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 진실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자아를] 가설할 것인가?
비록 진실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세간[언설]에 따라 [5]온을 일시 자아라고 가설하는 것이다.
어떠한 인연에서 자아는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 다른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인가?
염오하거나 청정한 법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자아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즉 잡염법(雜染法)은 다만 제온에 근거하여 찰나로 상속하는 것으로,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조작된(인기된) 중유가 상속함으로써 모태로 들어갈 수 있다. 비유하자면 등불이 찰나에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르는 것처럼 제온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령 아직 욕계의 탐을 떠나지 않았을 경우, 내(內)ㆍ외처(外處)를 연(緣)으로 하여 비리작의(非理作意)를 일으키면 이로부터 탐 등의 번뇌가 생겨나고, 저열하거나 중간이거나 수승한 사(思:의지)와 아울러 식(識)도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서는 능히 당래 비애(非愛)의 결과를 견인하며, 역시 또한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生緣)이 된다.
그리고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은 동류(同類)나 이류(異類)인 전 찰나의 구생연(俱生緣)을 관찰하여 그 생기를 획득할 때, 혹은 선한 성질인 경우도 있고, 혹은 염오한 성질, 혹은 무기의 성질인 경우도 있는데, 일어나서는 다시 능히 자신의 당래 결과를 인기하며, 아울러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이 된다.
이와 같이 연이 되어 그 다음다음 찰나에도 계속하여 능히 두 가지의 결과(非愛의 결과와 무간의 식)를 견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온의 상속은 전생[先世]의 번뇌와 업에 의해 인기된 수량(壽量:수명의 길이) 등의 법을 영납(領納)하였지만, 그 이숙의 세력이 다하여 없어질 때 죽어서 식과 소의가 다 같이 소멸하는 상태[滅位]에 이르게 되면 능히 중유(中有)의 식 등을 낳는 연이 된다.
그리고 중유의 제온은 [다시] 전생의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마치 환영(幻影)이 상속하듯이 태어날 곳으로 가 어머니의 뱃속에 이르게 되며, 중유가 소멸할 때 다시 능히 연이 되어 생유(生有)의 온을 낳으니,
비유하자면 등불이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능히 전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무간에 전전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다.83)
따라서 비록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제]온은 찰나에 소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후세에 나아간다고 하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제온은, 이를테면 전세의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인기되어 순서대로 점차 증가하여 일기(一期) 동안 전전 상속하였듯이 다시 번뇌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인이 다르면 결과에도 다름이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온갖 인업(引業)의 과량(果量)은 동등하지 않다.
즉 수명의 과보가 길고 짧은 것은 업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성[增]하거나 미약[微]한 업[의 세력]에 따라 인기된 수명과 신근 등은 계속하여 서로 의존하며 갈라람(羯邏藍)ㆍ알부담(頞部曇) 등 그 뒤의 온갖 상태로 점차적으로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갈라람 등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이 상속 전변하는 상태는 동일하지 않은데, 이와 같이 점차로 증장하여 근(根:감관)이 성숙한 상태[熟位]에 이르게 되면, 내(內)ㆍ외처(外處)가 작의 등의 연과 화합하여 탐 등의 번뇌를 발생시키고, 온갖 종류의 업을 조작하여 증장시키니,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다시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유가 상속하여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84)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존재의 수레바퀴[有輪,즉 생사를 윤회하는 4有의 轉生]에는 시작이 없다.
즉 번뇌[惑]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온갖 업을 조작하고, 업의 힘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생을 인기하며, 생이 다시 원인이 되어 번뇌와 업을 일으키며,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부터 다시 생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으로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시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시작에는 마땅히 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시작에 이미 원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것도 마땅히 스스로 생겨나야 할 것이니, 달리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관찰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85)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결정코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능히 원인이 되는 영원한 법[常法]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능히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 자재천(自在天)을 논파하면서 이미 널리 부정하여 비판하였었다.86)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는 결정코 시초가 없으니, 비유컨대 곡식 등이 전전 상속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생사의] 끝[後邊]은 있으니, 그 원인(즉 번뇌와 업)이 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자 등이 다하게 되면(썩어 문드러지면) 더 이상 싹 등을 낳지 않듯이 [번뇌와 업이 다하여] 생사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의 청정(즉 열반)이다.
따라서 염오함과 청정함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