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금도와 도초도 여행
정확히 3년 전 이맘때 12월의 여행지로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를 추어올린 바 있다. 당시 백령도를 소개하면서 ‘연말’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 꺼둘리지 않고 달뜬 마음을 다스리려면, 그리고 맹성과 희망의 넉넉한 시간을 누리려면 한갓진 겨울 섬이 제격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겨울 섬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할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연말의 시간과 연말의 약속과 연말의 사람들 앞에서 흥청흥청하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정리와 준비 없이 새해를 맞는다. 설령 돌아봄과 내다봄이 있다 하더라도 어수선산란한 분위기에서의 반성은 무릇 관대해지기 쉽고, 새해 설계는 지나치게 과대해지기 마련이다. 중언부언이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난 한 해 살이를 찬찬히 되씹어보려면 섬의 겨울, 혹은 겨울의 섬으로 표연히 떠나야 한다. 어떤 이들은 겨울 섬이 맛적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재미나 흥미가 거의 없어 싱거운, 그 맛적은 겨울 섬에서 진한 매력을 길어 올린다.
고운 모래, 호젓한 바닷가 서해 아래쪽, 남해가 시작되는 곳이 신안 바다다. 전라남도 신안군은 82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한국의 지중해라 불리는 곳이다. 섬으로만 형성된 군은 신안 이외에 옹진과 울릉을 더 들 수 있는데, 역시 신안에 가장 많은 섬들이 몰려 있다.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따져도 3201개의 섬 가운데 25.8퍼센트를 거느리고 있으니, 신안을 섬 공화국이나 섬 천지 혹은 섬들의 고향으로 불러도 무방하겠다. 827개 중 유인도는 74곳인데, 양명한 섬들만 열거해도 꽤나 여럿이다. 예로부터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던 흑산도는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과 면암 최익현 등이 흔적을 남겼고, ‘다도해의 보석’ 홍도는 일찍이 섬 여행의 일번지로 성가가 높다. 또 암태도는 일제 때 소작쟁의로, 임자도는 섬 속의 사막과 전장포 백하로, 압해도는 목포에 가장 가까운 섬이면서 뻘낙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이 밖에도 기려하고 완서한 무명의 섬들이 부지기수다.
신안의 바다는 편의상 ‘소지중해’와 ‘흑산 바다’로 구분한다. 목포에서 가까운 압해도를 비롯해 증도, 임자도, 자은도, 암태도, 안좌도, 장산도, 하의도, 도초도, 비금도, 우이도 등 11개의 섬들을 중심으로 새끼 섬들이 울멍줄멍 놓인 곳이 소지중해. 우이도를 경계로 그 너머의 흑산도, 홍도, 상·중·하태도, 가거도, 만재도 등 7개의 큰 섬들이 몸을 누인 곳이 흑산 바다다. 소지중해는 크고 작은 무수한 섬들이 서로 울타리가 되어 파도를 막아주기 때문에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 쾌속선을 타고 흑산 바다로 달음질하면 아름다움을 넘어 엄숙한 풍경을 만날 수 있는데, 의기가 만만했던 선조들의 목숨을 건 귀양의 한이 이곳에 눌어붙은 까닭이다.
‘목포는 항구다’의 목포항에서 배를 타면 소지중해의 여러 섬으로 쉽게 연결된다. 타고 온 차도 함께 싣고 갈 수 있다. 그중 비금도와 도초도는 연도교로 이어진 섬들로 신안 소지중해의 관문 노릇을 한다. 먼저 들르게 되는 비금도는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의 경관도 빼어나다. 색의 조화가 오묘한 바위들이 홍도의 비경에 버금한다. 섬의 가산선착장에 내리면 우선 해안가를 가득 메운 염전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염을 생산한 곳답다. 지금이야 외국 소금이 수입되고 화학 소금이 쏟아져 나와 옛 경기는 다 잃었지만 한때 ‘돈이 날아다닌다’라는 뜻의 ‘비금도 飛金島’라고 불릴 정도로 염전 사업이 호황을 탔다. 정확한 이름은 ‘飛禽島’라 쓰는데, 섬이 새가 날아오른 형상을 닮았다 해서 지어졌다.
(왼쪽) 겨울에 찾은 신안의 섬들은 세상의 소음과 뭍의 악다구니로부터 천연덕스럽게 물러나 있다. 항구, 사찰, 해변, 거리, 갯벌 그 어디에서도 조조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순연한 풍경을 바라보면 딱히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말갛게 가라앉는다. 종일 산책과 독서와 명상으로 해를 지워도 마음과 기분에 꺼림칙한 적자가 생길 까닭이 없다.
(오른쪽) 겨울에 찾은 신안의 섬들은 세상의 소음과 뭍의 악다구니로부터 천연덕스럽게 물러나 있다. 항구, 사찰, 해변, 거리, 갯벌 그 어디에서도 조조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순연한 풍경을 바라보면 딱히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말갛게 가라앉는다. 종일 산책과 독서와 명상으로 해를 지워도 마음과 기분에 꺼림칙한 적자가 생길 까닭이 없다.
비금도에는 명사십리와 하누넘이라는, 비교하여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해수욕장이 두 곳 있다. 비금도 북쪽, 원평항 동쪽에 위치한 명사십리는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길게 펼쳐진 해변이 곱디고운 곳이다. 명사십리 明沙十里라는 이름이 허투루 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모래사장은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차진데, 행여 점토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숙부드럽다. 하누넘은 비금도 서남쪽 해안의 절경을 끼고 있다. “언제 여자친구랑 오면 좋겠다”는 포토그래퍼의 말랑한 감상에 “엉뚱한 상상부터 한다”며 짐짓 퉁을 놓았지만, 호젓하고 내밀한 하누넘의 분위기는 ‘둘만의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서산사는 비금도 유일의 사찰이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는데, 다만 고려 후기인 1390년에 내월리 선왕산 뒤편에 처음 세워졌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조선시대 억불 정책으로 위축되었던 포교 활동을 1898년 목포 개항과 함께 다시 시작하려 했으나 산길이 너무 험해 1920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사찰로서의 규모를 갖추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중창했으며, 현재의 법당은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법당과 요사채와 탑이 어우러진 정경이 소박하고 정겹다. 인사 잘 여쭈면 스님께서 차 한 잔 따라주신다. 비금도 이곳저곳을 어슬거리다 보면 돌담을 쉬이 발견하게 되는데, 바람 잘 날 없는 섬의 특성 탓이다. 간단없이 짓쳐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농가들은 튼실한 돌담의 보호를 받는다. 밭에도 돌담이 둘려 있어 언뜻 보기에는 산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척박한 땅을 한 뙈기라도 더 일구기 위해 돌담을 두르고 호미와 곡괭이를 열심히 놀렸을 섬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이 자연스레 포개진다.
섬, 평야를 품다 비금도에서 도초도로 건너려면 서남문대교를 타야 한다. 937미터에 이르는 교량으로 우리나라 연도교 중에서 가장 길다.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배를 타고 오가다 보면 자연스레 마주친다. 무엇보다 다리 위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바라본 정경이 아름다운데, 때맞춰 어선 몇 척이 지나면 한 폭의 정물화가 만들어진다. 다리 개통 이후 비금도와 도초도를 한데 묶어 ‘비초도’나 ‘도금도’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만큼 두 섬은 가까워졌다.
도초도에는 다른 섬에서 볼 수 없는 넓은 들판이 있다. 섬의 중앙 저지대에 펼쳐진 고란평야가 그곳으로, 마치 육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광활하다. 고란평야 덕에 도초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쌀 수확량이 넉넉해 외지로 반출되기도 한다. 고란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것 중에 석장승 또한 독특하다. 원래는 나무로 만든 장승이 있었는데, 1938년 석장승으로 대체되었다. 길쭉한 얼굴에 눈은 툭 튀어나와 있고 양미간은 좁은 편이다. 치아를 드러내놓고 있어 위압감을 주면서도 친근한 형상이다. 석장승은 외상마을 입구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고란리 장승이 그래도 점잖은 편이라면 외상리의 것은 턱밑에 작은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어 다소 익살맞다.
도초도에는 비금도의 명사십리와 함께 신안 4대 해수욕장으로 꼽히는 시목해수욕장이 있다. 바다가 거의 360도 만입한 자리에 모래가 쌓여 형성된 곳으로,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야산과 들판이 막고 있어 절로 푸근한 느낌이 든다. 해변 길이는 2.5킬로미터에 달하며 물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 주변에 감나무가 많다고 해서 시목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흑산 바다로 떨어지는 해거름 또한 장관이다. 1만 평 규모의 청소년 야영장이 바로 인접해 있으며, 인근 섬과 섬 사이에서 갯바위 및 배낚시를 즐길 수 있다. 몇해 전부터 신안군의 섬들은 겨울 낚시 포인트로 인기가 높다. 양양한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에 말을 걸며 미래를 그리는 세밑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취가 있다.
노중훈 여행 작가와 김종현 사진가는 지난 6년 간 <도베>가 가장 편애했던 외부 스태프였습니다. 그들의 결과물은 언제나 출중했고, 그 덕분에 <도베>의 여행 꼭지는 깊고 향기로울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그들에게 <도베>의 영원한 우정과 감사를 보냅니다. 본 기사는 <도베> 독자들의 반응이 특히 좋았던 것으로 <도베>의 휴간을 아쉬워하며 여기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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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까지는 일단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간다.
목포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비금도와 도초도행 배편을 이용하면 된다. 오전 7시와 10시 20분, 오후 1시 등에 출발하는데, 때에 따라 시간이 변경되므로 반드시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안좌도와 팔금도를 거쳐 비금도 가산선착장에 도착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두 시간 정도. 요금은 승객이 5800원, 차량은 수송료를 포함 2만7000원이다. 비금도와 도초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이동하기 편리하다. 비금도 명사십리에서 서남문대교를 건너 도초도의 시목해수욕장까지 이르는데, 40분에서 50분 정도 걸린다. 섬의 숙박 시설로는 민박과 여관이 있는데, 비금도 수대리선착장과 도초도 불섬선착장 부근에 몰려 있다. 2만원 안팎이다. 문의 목포항 (061)243-0116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