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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북경에서
내가 조선에서 본 것
조선의 산중에서, 영국의 어머니들의 아들들이 바람을 맞아 썩어가며, 머리 위를 선회하는 커다란 독수리 떼의 식사가 되었다. 이들이 왜 여기 누워 있는지, 극동의 이 위험한 상황전개가 치달을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말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일간 노동자The Daily Worker』의 특파원으로서, 직접 사실을 발굴해서 영국 대중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조선에 도착한 것이 7월 16일이었고, 이후 5주간을 체류했다.
물론, 여기 오기 전부터 미국인들이 심하게 폭격을 하고 있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Syngman Rhee 군대가 다 흩어져서 “남한군”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 전쟁은 사실상 미국과 조선 사이의 전쟁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세계적으로 덜리 알려진 상식들이지만, 내가 새로 발견한 것들은 정신적 준비가 없이는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5년 전, 나치와의 전쟁에서 우리 영국과 러시아, 미국은 동맹이었다. 그러고 나서 루스벨트와 그의 동료들은 떠났고, 원폭 외교가 자리를 대신했다. 그럼에도, 조선에서 본 미국인들의 소행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들후들 떨리게 만들었다. 나는 평생 미국은 문명국이라는 선전을 듣고 자랐고, 일정 부분 그 선전에 젖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바로 정확히 나치가 하던 짓을 미국인들이 하고 있으리라고는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코번트리Coventry를 악의적이고 무의미한 폭격의 사례로 거론하지만, 미국인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 이미 나치들을 아득히 능가했으면서도 그것을 “융단폭격”Saturation Bombing이라는 말랑한 용어로 흐리고 있다. 미국이 조선에서 벌이는 전쟁의 방식은 나치와 같은 패턴이되, 나라의 규모를 생각할 때 더욱 야만적이고 또 멍청하다.
원산Wŏnsan은 코번트리보다 훨씬 작은 읍락으로, 규모가 런던 교외의 월섬스토Walthamstow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첫 번째 대규모 공습이 있었던 7월에 B-29 슈퍼포트리스들이 이 소도시에 500 톤 이상의 고폭탄을 투하했다. 10년 전 그 끔찍한 밤에 코번트리가 얻어맞은 것보다 60 톤이나 더 많은 수치다. 표적도 없는 무차별 폭격이었다. 맥아더MacArthur는 성명에서 “짙은 구름”이 있어서 “공습의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사실, 폭격 당시에 세차게 비가 와서 시계가 무(無)nil였다. 코번트리에서는 1,000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원산은 제1차 공습 때 1,249 명이 죽었고 도시의 북쪽 절반이 소멸했으며, 8월에 반복된 폭격에서 나머지 절반도 소멸했다. 이 소도시가 철도 중심지라는 것 말고는 군사적 목표물은 없었다. 수천 톤의 폭탄을 쏟아부어 도시 하나를 지워버렸고, 4,000 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수만 명의 이재민과 유가족을 발생시켰다. 고작 철로 좀 망가뜨리겠다고 이 짓을 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영국의 어느 도시도 이런 식의 폭격은 겪었던 적이 없다. 나는 코번트리도 보았고, 블리츠blitz 당시 런던에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원산을 보았다. 나치가 저지른 최악보다도 훨씬 더 끔찍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이런 식의 완전한 소멸이 더욱 흔해진다. 평택Pyŏngtaek, 조치원Chŏchiwon, 대전Taejŏn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 였던 것 가장자리에 폭탄 맞은 가옥 몇 채가 남아 있을 뿐이며, 그 가옥 곁에 서서 보면 도시 반대편 가장자리의 마찬가지로 박살난 가옥들이 보일 정도로, 도시가 공터가 되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미국인들은 아직도 돌무더기 위에 폭격을 퍼붓고 있다.
이 소도시들이 도로와 철도가 지나가는 곳들이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며, 이런 식의 폭격이 그러한 군사적 목표물을 파괴하는 데 있어 가장 비효율적인 수단이라는 것도 역시 비밀이 아니다.
미군의 군사폭격과 기총소사의 군사적 실패에 대해서는, 보안이 해제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총소사 역시 폭격과 비슷한 식이다. 나는 전폭기들이 10-15분 동안 망설이듯이 선회하다가, 가벼운 대공포화로 방어되는 군사적 목표물을 때리러 가서, 효과적인 급강하폭격을 하기에는 너무 높은 고도에서 짐덩어리를 대충 던져 버리고 귀환하는 것을 보았다. 전쟁이 위험하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미군기들이 들판이나 길을 따라 날면서, 300 피트 이하 고도에서 기관총 탄창을 싹 비우고 심지어 로켓까지 발사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지상에 있는 것이 민간인들, 오두막 몇 채, 그리고 도랑에 누워 몸을 숨긴 나 뿐이었다.
수천 마력의 추진력과 초당 발사수가 100발이 넘는 기관총으로, 냉혹하게 고의적으로 여자와 아이들을 쏴 죽이려면, 순수한 나치 멘탈이 필요하다. 나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도랑으로 몸을 던졌기 때문에, 길에 있는 것은 그 여자 한 명이 유일했다. 그것은 결코 조종사의 실수일 수 없었다. 눈이 좋다면 1마일 밖에서도 여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등에는 아기를 업고 있었고, 머리에 커다란 짐을 진, 길고 풍성한 흰 치마를 입은 전형적인 행색이었다. 조종사는 자신이 여자와 아이를 터뜨려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하게 총좌를 열고 발사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독일인을 몇 명 안다.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설마 어떻게 나치짓을 할까?”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미국인들을 몇 명 안다. 좋은 사람들이다…….
남조선의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그 주변에서 많은 수의 “정치범들”이 살육당했다는 얘기를 계속 들었다. 서울에서 대전 사이의 지역들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 대전 한 곳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 누구는 3,000 명이라 하고, 누구는 4,000 명이라 했다.
조선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미국인들과 그 괴뢰들의 악마적인 잔혹함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이 소문보다 더 무시무시했다.
낭월 죽음의 계곡
[사진 1] 좀 작은 처형구덩이들 중 하나가 이 사진에 보인다. 학살자들이 남긴 밧줄들에 주목하라. 왼쪽에 보이는 것은 내 통역 최태룡씨다. 그는 서울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정치범 중 한 명으로, 인민군에게 구조되었다. |
낭월Rangwul계곡은 대전에서 동남쪽의 영동로Yongdong road를 따라서 5 마일쯤 떨어진 데다. 평평한 땅에서 급격하게 폭 100 야드, 길이 ¼ 마일의 구릉들이 솟아 있는 곳이다. 계곡 가운데는 미군이 흘리고 간 탄피만 조심하면 안전하게 걸을 수 있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얕은 토사로 되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7,000 명 이상의 남녀의 시체가 이 얕은 토사로 덮여 있다. 내 일행 중 한 명은 딛은 땅이 꺼지면서 썩어가는 살덩이들이 엉덩이 높이까지 올라왔다. 몇 피드마다 표토에 균열이 일어나서 그 규녈 사이로 살과 뼈의 덩어리들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유형의 무언가의 악취가 목구멍으로 스며들었다. 냄새가 배어서 그 뒤로 며칠이나 따라다녔다. 거대한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왁스 같은 죽은 손발, 무릎, 팔꿈치, 일그러진 얼굴, 총알을 맞고 터진 머리통들이 흙에 처박혀 있었다. 벨젠과 부헨발트의 나치 학살수용소들에 대해 읽고, 어떤 곳들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내 상상력이 졌다.
죽음의 구덩이가 여섯 개 있었는데, 깊이는 모두 6 피트였고, 너비는 6 - 12 피트였다. 가장 큰 것은 길이가 200 야드였고, 두 개가 100 야드, 가장 작은 것들은 30 야드 길이였다. 현지 농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밀어 구덩이를 파도록 시켰다 하며, 나는 이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7월 4일, 5일, 6일, 대전 안팎의 감옥들과 수용소들에서 모든 수감자를 끌어내 트럭에 싣고 계곡으로 끌고 갔다. 철사로 묶여 의식을 잃은 채 정어리처럼 차곡차곡 쌓았다고 한다. 그런 트럭들을 몰아 계곡으로 갔고, 총을 쏘았고, 구덩이에 던져넣었다. 구덩이가 가득차면 농민들에게 시켜 흙으로 덮게 했다.
이후 열흘 동안 다른 곳들의 수감자들을 끌고 와서 텅 빈 감옥에 수용했고, 농민들은 또다른 구덩이를 팠다.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 방어선을 깨뜨리자 7월 17일 새벽부터 나머지 수감자들에 대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날 하루만 트럭 37대분에 각각 100명 이상을 실어날랐다. 즉 3,700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피해자 가운데 여성도 많이 섞여 있었다.
미군 장교들이 괴뢰군 장교들과 함께 매일 지프를 타고 가서 이 도살장을 감독했다. 모든 목격자들이 이 사항에 대해 증언이 일치한다. 나는 지프가 어디 와서 섰고 미군들이 어디 서 있었는지 보여 달라고 여러 번 개별적으로 물어 봤다. 텅 빈 미국 담배 껍질이 널부러져 있었다. 지상에 굴러다니는 1,000 발 이상의 탄피는 모두 미제였다. M1과 카빈 탄피들을 한 움큼 쥐어 보았다. 그 탄피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의 애국자들을 쏴죽인 흉탄들이었다.
이것은 미국의 지시에 의해 자행된 학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모든 도시, 모든 촌락마다 학살당한 민주주의자들이 있어 상중(喪中)이었다. 6월 25일 이후로 죽은 정치범의 수를 가장 낮게 잡아 20만 명이지만, 최대 40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 시간관계상 내가 직접 조사할 수 있었던 사례는 몇 건 뿐이지만, 다음 기록들의 정확성을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인천Inchon: 6월 29일에서 7월 3일 사이에 1,800 명이 학살됨. 수원: 1,200 여명이 학살됨. 이들은 악명높은 서대문형무소의 두 지소의 수감자들이었다. 내가 수원에 갔을 때 도시 주변의 동구들에 숨겨진 시체들이 260구 발견되었고, 여전히 수색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직접 그 동굴들을 찾아가 보았다. 평택: 아주 작은 마을. 130명 학살됨. 조치원: 비슷한 크기. 156명 학살됨.
서울 함락 이후 미군과 이승만의 본부가 소재했던 수원에서, 나는 수원인민위원회 위원 홍궁운을 만났다. 홍은 미군들이 도망치던 날 밤 버려진 소총을 쥐고 경찰서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너무 늦었다. 그가 구하려 했던 수감자들은 이미 유치창 한 칸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 세례로 죽임당한 뒤였다. 홍이 도착했을 때 서른여덟 명 가운데 말이라도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세 명 뿐이었고, 살아남은 것은 둘 뿐이다. 나는 문제의 유치장, 기관총을 맞고 쪼개진 목재, 굳은 혈흔을 다 보고 왔다. 이 범죄명령이 발령될 당시 미국 대사 존 J. 무초John J. Muccio와 미국인 고문관들이 이 도시에 소재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모두들 이 무시무시한 사진들과, 노획된 “기밀” 비망록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그 비망록의 원본을 보았는데,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8개월 전에 작성된 것이었다. 비망록은 조선의 애국자 예순아홉 명이 제식탄약으로 사살당하는 것을 미군 장교들이 어떻게 지휘했는지 기록하고 있다. 낭월에서 그들은 7,000 명을 사살했는데, 내가 본 시체들은 모두 각각 한 발의 총알만 맞고 (역주: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단 한 방에 사살당했다는 뜻) 죽었든 살았든 구덩이로 던져넣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철사로 묶여 있지도 않고, 의식을 잃은 상태도 아닌 전쟁터에서는, 미군은 더 후퇴할 데가 없을 때까지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미군 포로 여러 명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미국 정부의 행동을 옹호하려는 이, 또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군 병사가 내게 무슨 권리로 질문하냐고 묻는 경우는 없었다. 조선군 경비병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의 정신이 나가버린 미군 포로들을, 어리둥절해서――거의 동정하면서 바라보았다.
해방된 조선에 며칠만 있다 보면, 좀 똑똑한 포로들은 미군 방송과 만화 쪼가리가 숨겨왔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사진 2] 흙을 뚫고 튀어나온 발. 계곡에서 흔하게 보인 광경이다. |
[사진 3] 팔 한 쪽과 백골화된 나머지 팔. 서로 묶여 있었다. |
[사진 4] 흙 아래의 시체들이 침강하면서 희생자들이 드러났다. |
미군 포로들과의 대화
제63야포대대 소속 찰스 T. 바터Charles T. Barter 소령은 인디애나주 마운트버논Mount Vernon 출신으로, 미육군에 19년째 복무하고 있다. 그의 말이다. “나는 처음 포로로 잡혔을 때,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듣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말로 들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직접 볼 수 있으니까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하는 짓에 속이 메스껍습니다. 남조선인들은 북조선으로 가고 싶어하고, 인민군은 남하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얻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로이벤 K. 킴벌 주니어Reuben K. Kimball, Junior 이등병은 텍사스주 베이타운Baytown 출신이다. “엉클 샘의 공군”이 하는 짓에 대한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 미친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봤습니까? 반경 수 마일 안에 아무런 군사적 목표물도 없는, 밭밖에 없는 마을들을 봤습니까? 공군이 그 밭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쏴죽이고, 소 한 마리도 못 집어넣을 만큼 조그만 오두막들에 기총소사를 하는 걸 봤습니까?” 킴벌 본인도 인민군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행군하던 도중 미군기의 기총소사에 몇 번이나 죽을 뻔 했다. 그는 계속 말한다. “후방에서 어떤 조종사한테 들었습니다. 걔네들이 받은 명령은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은 멈춰라! 멈춰 있는 것은 날려라!’였다고 합디다. 그 때는 농담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밭 하나에 농민 아홉 명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밭에는 세 명이 죽어 있었고요. 제 생각에 공군은 트리거 해피trigger happy입니다. 군사적 목표물은 내버려두고, 마을을 폭격하고, 농민들을 쏴죽이는, 무슨 놈의 이따위 전쟁이 다 있습니까?”
제24사단 소속 A. H. 브룩스A. H. Brooks 소위는 방송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조선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진작 끝났을 것이고, 조선은 다시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이승만의 군대를 전혀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왜 싸우는지 모른다
만나는 모든 미군포로마다 물어 보았다. “당신은 왜 조선에서 싸우고 있는가?” 아무도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부분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일부는 “국제연합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승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이는 소수였다. 김일성Kim Ir Sen에 대해 들어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졸병들은 거의 모두 십대였는데, 한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세상 구경을 하려고”, “징집당해서”, “돈을 저축하려고”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이들이 조선의 전쟁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시각은 산베르나르디노 출신의 19세 이등병 에드워드 소리아Edward Sorea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그냥 여행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전쟁 끝나고 평시였잖아요. 도대체 누가 전쟁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습니다.”
단 한 명의 미군 병사도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조선인들이 전쟁을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이기든 지든, 미국인들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이런 병사들이 잘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38도선 근처의 금천Kumchon에서 대로를 타고 영동을 거쳐 남쪽의 대구Taegu까지 오는 길에 그 광경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탱크, 트럭, 지프, 총포 등 군장비들이 셀 수 없이 굴러다니고 있다. 모두 미제이고, 서울 남쪽에서 주로 미군들이 장비한 것들이다. 개중에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헤아려 보라.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심지어 탱크마저 포탑만 북쪽으로 돌리고 남쪽으로 역돌격을 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포로 킴벌은 거침없이 말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한 가지는 고립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산밖에 없는 나라인데, 길로 다니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항상 어깨너머로 뒤를 살펴야 했습니다. 뒤에서 총소리가 나면 바로 돌진할 수 있게요. 이 조선인들은 마치 등 뒤에서 땅에서 솟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조선인들이 전쟁에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물러설 데 없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격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점령지가 1마일 늘어날 때마다 문제만 커질 뿐입니다. 우리는 산을 탈 수 없고, 길로만 다닐 수 있는데, 조선인들은 무장한 채로 산을 건너다니니, 우리를 분단시키고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이 젊은 미국인의 관찰력이 대단하다. 그가 옳다. 나는 미국이――그리고 이제는 영국도――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목격했고, 그것은 “희망이 없다” 그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아무리 폭격을 때리고, 기총소사를 하고, 장비들을 쏟아붓더라도, 중국인이 그러했듯 조선인들도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시작 이래로, 미군은 사실상 마음대로 폭격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조선 지도를 보면, 남쪽으로 가는 경로가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조선인민군은 무지막지한 무게의 야포와 박격포를 쏘면서, 각종 장비를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 산간지역에서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끌고 갈 수 없고, 실제로 그들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거기까지 끌고 간 것이다.
매일 저녁이면 조선의 시골은, 특히 남녘의 시골은 생기가 넘쳐흐른다. 수십만 명의 농민들과 시민들이 도로로 나와서, 무한하고 자발적인 인간 노동의 순수한 무게로 전날 입은 폭탄 피해를 몇 시간 만에 복구해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또다른 수십만 명은 새벽에 멈추었던 소달구지를 다시 끌고 남쪽으로의 여정을 재개한다. 무수한 소달구지에 식량과 군수품이 실려 있다. 이 모든 재건 및 수송 노동자들은 자발적이고, 무급이며, 자기들의 식량과 자재를 제공하고, 낙오한 적군을 만날 경우를 대비해 민병대를 갖추었으며, 자급자족하고, 지형에 익숙하다. 이런 노동자들이 지금 조국의 외세 강점에 끝장을 내겠다 결심을 하고 나선 것이다.
폭격기에 항거하는 인민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 대중적 행동 앞에 항공기들은 무력하다.
미국의 제공권에 인민들이 항거하고 있다. 트루먼Truman이 민주주의를 지껄이며 인민들을 폭격하는 한편, 인민들은 마지막 남녀 1인까지 모두 나서서, 자기 손과 발과 삽으로 투표하고 있다. 미국은 물러가라고 투표하고 있다. 미군 포로들은, 자기네들 비행기로부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야간에,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이런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킴벌이 “우리는 길로만 다닐 수 있는데 …… 희망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며, 바터 소령이 “인민군은 남하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모든 인민들이 전쟁수행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인상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남북에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직접 확인한 곳들에서, 사실상 모든 남자들과 많은 여자들이 민방위에서 역할을 맡아 수행하고 있었다. 위선(역주: 38도선) 바로 아래 있는 서울 근교의 고양Koyang군에서는 12일간 총인구 180,000여명 가운데 54,085명의 남자들이 자원봉사에 나섰다. 인민군이 이 일대에 진주하자 현지 인민위원회는 하룻반 사이에 1,000 대의 소달구지를 동원해냈다. 내가 만나본 농민들 가운데, 노약자를 제외하면 어떤 식으로든 인민군을 돕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수천 명의 재건 노동자들이 삽, 빠루, 밧줄을 들고 모여든다. 그 중 적어도 절반이 여성들로, 공습 때 구조와 소방이라는 가장 고되고 위험한 작업에 있어서도 물러나기를 거절하고 있다.
조선인들은 ‘코카콜라 군인’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이 전쟁에서 한 모든 짓들은 의도와 반대의 결과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가 아니므로, 폭격을 퍼부어 봤자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가옥과 생활이 끔찍하게 파괴당한 전 국민의 분노만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과거 미국을 옹호하던 이들도 이제는 미국의 쓰라린 적이 되었다.
길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백이면 백 이렇게 말한다. “집이 폭탄을 맞고 …… 그래서 처자식을 시골의 친척에게 보내고 나는 자원해서 나섰다.” 원산 출신 노동자 완원추Wan Wun Chu는 일하러 나간 사이 공습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다”고 완은 말한다. “내가 죽는다 해도 그건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저 살인자 개새끼들을 내 조국에서 몰아내고 복수할 수 있다면 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칠 것이다. 나는 생산에서 자리를 배정받았고, 인민군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생산할 수 있도록 뼛속까지 열심히 손가락을 놀릴 것이다.”
내가 방문한 모든 마을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인민군에 들어갔는지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자원자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지 자렁스럽게 말해주었다. 조선을 뒤덮은 수천 봉우리 산맥에서 나고 자란 사내들이, 왜 전쟁에 이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자원하고 있다. 정예한 투사들이 모자랄 일이 없다. 인민군에는 위아래를 막론하고 징집당해 끌려온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1945년 이전에 일본을 상대로 한 유격전이라는 고된 훈련을 거쳤다. 이 사람들은 코카콜라 군인이 아니다. 그들은 진지하며, “신발끈만 있으면 싸울 수 있다“. 한 미군 포로가 후회하며 내게 말한 바와 같다. 그들은 산악지대에서 싸울 수 있는 장비를 잘 갖추고 있으며, 미군들처럼 껌, 비타민 알약, 초콜렛, 여벌 속옷 따위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인민군은 모든 조선인 민간인들이 인민군에 도움과 정보를 제공하면서, 외세 침략자들에게는 그러기를 거부하는 동맹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25마일이나 산행을 한 뒤 전투를 벌이는 것은 이 강인한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어려움도 아니며, 그들의 위장은엄폐 솜씨는 미국인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다. 포로들은 분명히 “텅 빈” 계곡에서, 은엄폐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수백 명의 병력이 튀어나와 사격을 가하고, 머리 위로 무시무시한 정확도의 박격포탄이 떨어지더라고, 거의 경외심을 담아 증언했다. 인민군의 제복은 시골의 녹색과 갈색 속으로 완벽하게 어우러지도록 디자인되었다.
미국 옹호자들은 이 조그만 농업국가가 고도로 산업화된 강대국의 군대를 맞아 이렇게 잘 싸우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물론 진짜 이유가 아니다――를 찾아 바닥을 긁느라 손톱이 다 뽑혀나갈 지경이다.
그들의 펜은 이렇게 말한다: “지속될 수 없는 기적”, “준비 부족”, “믿을 수 없다”, “미군의 장비가 열악해서”, “조선인들이 발목을 잡아서” 등등.
북위 38도선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전혀 불가사의하지 않다. 소련군이 조선 땅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낸 이후, 38도선 이북과 이남에서 각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와 함께 빠르게 살펴보자.
소련이 점령했던 38도선 이북에서는, 인민들이 인민위원회를 선출하고, 자기 정부를 직접 선출했다. 그 정부의 수반 김일성은 일본과 싸운 유격대 지도자 출신이다. 소비에트 연방은 여러 차례 미국과 소련의 점령을 동시에 물리자는 제안을 반복했으나, 실패하고 1948년에 소련군만 철수했다.
토지개혁이 시행됨에 따라, 비옥한 토양이 그것을 일구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이제 농민들은 지대를 내지 않아도 된다. 토질에 따라 작물에 부과되는 세금만 내면 된다.
일본인들 및 부역자들이 보유했던 산업체가 모두 국유화되었고, 새로운 산업체들이 만들어졌으며, 물가는 안정되었고, 화폐개혁과 임금인상이 이루어졌다. 1950년 노동생산성은 1946년의 3배로 올랐다. 공업노동자의 수가 4분지 1이나 증가했다.
북조선의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혜택을 권리로서 누린다. 여성에 대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유급휴가, 자유시장보다 낮은 가격의 생필품, 노동보험과 노동자들의 안전수단 통제, 무료 의료.
질 좋은 맥주에서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 생산된 값싼 국산 제품들이 상점에 가득하다.
노동조합, 정당, 여성단체, 청년단체들이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
학교들이 세워지고, 새로운 대학들이 문을 열어,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읽고 쓸 수 있다.
북조선 사람들은 이 자유와 번영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공장 노동자들은 생산량을 최대 30%까지 늘렸을 뿐 아니라, 밤이면 자원해서 철야 민방위에 힘쓰고 있다.
이남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미군 점령당국은 도착하자마자 남측에 이미 선출되어 있던 인민위원회를 금지시키고, 미국의 훈련된 예스맨 이승만――조선판 장개석――의 정부를 세웠다.
대대급 이상 단대에서는 미군 장교들(“고문들”)이 괴뢰군을 지휘했고, 아직 남아 있는 괴뢰군 잔당들도 미군이 지휘하고 있다.
남측으로 국경을 넘어 오면, 사람들의 행색이 여위고 초라한 것부터 보인다. 상점들은 엄청나게 비싼 농산물과 미국산 제품들을 제외하면 텅 비었고, 그 가격이 너무 비싸 절대 다수의 남조선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다.
커다란 미제 자동차들――이제는 전쟁에 투입된――이 도처에 널려 있다. 도로변 광고판들은 코카콜라를 사라고 야단이다――그야말로 마셜화(化)Marshallisation의 피할 수 없는 징후다. 글래머 여자들이 암내B.O.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아직 문맹인 대중들에게 이 펜 저 펜으로 글 쓰는 즐거움을 광고한다.
한강을 건너 우회전해서 인천으로 향하면, 그 가는 길에 남조선 산업의 70%를 다 볼 수 있다. 모든 공장이 문을 닫았고――또는 문짝이 없어서 “열려”있으면 창문, 지붕, 기계가 사라지고 없는데, 단 하나도 폭격을 맞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거래의 일환으로 남조선에 유입된 미국 제품들은 남조선의 산업을 파괴했다. 5년도 안 되어 1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이래서 6월 5일에 한 미군 장성이 외신에 대고 “조선에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조선에 투자한 것을 잘 지켜낼 번견인 군대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납세자”를 “독점재벌”로 바꿔 읽어라.
남조선의 시골에서, 농민들은 길러낸 작물의 아주 조그만 일부만 갖고 먹고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지대외 세금으로 뜯겼다.
반 헥타르(1.25 에이커)를 소작하는 가정은, 풍년이면 쌀 24 가마니의 가치가 있는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평균 14 가마니가 지대로 빠져나가고, 최소 3 가마니를 세금으로 내고 나면, 7 가마니만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쌀 한 가마니의 무게는 약 150 파운드(역주: 67 킬로그램)다. 농장 노동자(역주: 머슴)의 임금은 연봉으로 쌀 4 가마니를 받는다.
하루 하루 생활이 나아지고 있는 북측으로 인민들이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북에서 민족 통일과 선거, 미국 지배의 종식을 부르짖자 남측 인민들이 거기에 호응한 것도 당연하다! 지난 5월 선거에서 경찰을 동원했음에도 이승만의 당이 209석 중에서 불과 22석만 얻은 것도 당연하다! 참고로 이승만은 이 선거를 하기 전에 야당 후보 22 명을 체포해서 자기 정권에 반대하는 기미가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옥과 수용소에 보내 버렸고, 그 사람들 모두 지금은 학살당해 죽었다.
이승만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승만과 미국을 받치는 썩은 권력기반 전체가 무너져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6월 25일, 미국의 직접명령을 받는 괴뢰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침공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북측을 정복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었다. 정치적 반대로 인한 출혈을 전쟁의 화염으로 지져 막을 수 있다. 북측의 인민민주주의의 눈부신 범례를 꺼뜨려 버릴 수 있다. 조선의 국산 제품들을 미국의 코카콜라와 데오도란트로 대체할 수 있다.
누가 이 전쟁을 시작했는가?
누가 이 전쟁을 시작했는지 착각하면 안 된다!
나는 38도선 북측의 추양Chu Yang과 용출리Yongchuli에서 괴뢰군이 남기고 간 전투의 흔적을 보았다. 미군 장교의 지휘를 받는 괴뢰군이 북조선 영토로 찔러들어왔다가 격퇴당했을 때 생긴 것이다. 포탄 떨어진 구덩이, 초토화된 땅, 불에 탄 가옥, 남측에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들었다는 현지 농민들의 목격담들이 있다. 미국에서 인쇄된 군사지도가 인민군에게 노획된 것을 내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지도에는 이북으로의 침공 전술에 대한 표시들이 있다. 나는 전선을 따라 여러 지점에 북조선 위조지폐 뭉치들이 쌓여 있는 것도 보았는데, 괴뢰군의 진격 이후 경제적 침공을 위해 준비해둔 것일 터이다. 이남에 내려온 뒤 나는 주민들에게 6월 25일 바로 전에 군대가 대규모로 북쪽으로 이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북측 지도자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이승만이 오랫동안 “북벌”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왔으니, 깨어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 인민들의 지도자 된 의무다. 남측이 부챗바람을 불자, 북측은 태풍으로 갚아 주었다.
만약 이 문제를 조선 인민들에게 맡겨 두었다면, 미국이 괴뢰들에게 아무리 많은 무기를 넘겨주었다 하더라도, 사태는 더 빠르게 끝났을 것이다.
뉴햄프셔 출신의 L. R. 던햄L. R. Dunham 소령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9년간 미 육군에 복무했고, 24사단 소속이었다. “민간인들은 우리를 싫어했고, 북측과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내버려뒀다면 전쟁은 열흘 안에 끝났을 것이고, 아마 미국에 사는 사람 몇 명이 돈을 많이 잃었겠지요. 이기든 지든, 미국 민중들은 이 전쟁으로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폭격 때문에 동양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증오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으로 사실에 눈을 뜬 미국인의 견해다. 소수의 미국 금융쟁이들이 돈을 많이 잃겠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조선의 전쟁에 걸린 이해가 없다. 이 전쟁은 미국과 영국의 납세자들이 낸 세금으로, 수만 명의 조선인, 미국인, 영국인의 목숨을 대가로, 미국 사업주들의 투자금을 지켜주기 위해 치러지는 전쟁, 극동 인민들을 위협하고 조선 땅에 미군의 극동 군사기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적나라한 제국주의 전쟁이다.
언론재벌들의 선전을, BBC 아첨꾼의 번지르르한 목소리를, 호전적인 『미국의 소리』를 멀리하고 사실을 보라.
전쟁이 터지기 불과 1주일 전에, 이승만의 6개 사단이 집결한 38도선을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방문하고 왔다.
이틀간의 포격 준비를 마치고, 6월 25일 일요일 미명을 기하여, 남조선군――미국인이 훈련하고, 미제 장비를 지급받고, 대대급 이상은 미군 장교를 고문으로 두고 있는――이 3개 지점에서 38도선을 넘었다.
같은 날 오후 3시, 북조선 인민군이 그들을 격퇴하고 역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국이 5년 넘게 공들여 온 미국의 전쟁기계는 불과 며칠 만에 인민군에게 산산조각이 났다. 정권 전체가 부패하고 썩어 있었다는 분명한 징후였다.
마치 훈련받은 물개처럼, ‘국제연합한국위원회’를 자칭하는 불법단체가 북조선이 일요일 오후에 공격을 개시했음을 증거한다고 주장하는 문건을 미국에 보냈다. 그 소위 증거는 남조선 정부와 이승만의 일방적 진술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다음 날 정오, 트루먼은 몇 날 며칠을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연설문을 꺼내 읽었고, 망가진 줄인형을 구제하기 위해 미군 비행기, 함정, 군대를 보내는 한편, 대만을 봉쇄하여 중국 문제에도 끼어들었다. 극동 전체에 마치 찌라시를 뿌리듯 군사적 위협을 흩뿌렸다.
같은 날 오후, 안전보장이사회는 궁둥짝을 떼고 미국인들에게 허겁지겁 끌려가서, 러시아와 중국이 부재한 상황에서 불법적으로 행동했다. 트루먼이 이미 취한 행동들을 추인했고, 사실관계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미국 제국주의 군대에 국제연합의 깃대를 꽂아 주었다.
같은 시각, 이승만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고, 수만 명의 서울시민들이 화환과 깃발을 들고 모여 진격해오는 인민군을 환영했으며, 미국은 조선인들에 대한 전쟁을 이제 공공연히 시작하게 되었다.
‘누름 단추’ 전쟁이 아니다
이것은 괴뢰들에게 군사기계를 공급해서 대신 싸우게 만드는 미국의 기본 정책에 정통으로 타격을 준 것이었다. 그런 전쟁을 나는 소위 “누름 단추push-button”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이 단추를 누르면, 남들이 싸우는 것이다. 이제 미국인들은 스스로 싸우게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애틀리Attlee가 영국군 2개 대대를 파병하게 만들었고, 전쟁이 더 길어진다면 틀림없이 월가의 밤톨을 불 속에서 꺼내기 위해 더 많은 영국인들을 또는 다른 나라 국민들을 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영국인들이 조선에 갈수록, 더 많은 영국인들이 죽거나 포로수용소에 들어갈 것이다.
조선은 이승만과 미국인들을 거부했다. 조선 인민들이 원하는 것은 조선을 다시 하나로 합쳐서 조선인들이 다스리는 것 뿐이다. 인민에게 거부당하는 정권은 실존할 수 없으며, 이 전쟁은 중국에서의 전쟁이 인민의 승리로 돌아갔듯이 조선인들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20세기의 철칙들 중 하나다.
중국에서도 똑같은 패턴이었다. 장개석이 이끄는, 가장 부패하고 증오받는 인민의 적들을 미국이 지지했고, 그들에게 60억 불 이상을 대 주었으며, 군사지원과 고문단을 보냈다――그리고 대실패를 겪었다. 영국은 간섭하지 않은 덕에 코가 깨지는 것을 면했다.
이제 미국인들은 잃어버린 위치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 먼저 조선에 대한 공개적인 개입을 통해, 그리고 이제는 대만 침공에 이어 중국 본토의 영공을 침범하여 전쟁의 확대를 획책함을 통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야 그들은 “토큰” 영국군 2개 대대를 조선의 모험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은 어디로 향하는가?
이 사태가 어떻게 끝날까? 이 “토큰”이 사단 내지 야전군과 맞바꿀 “토큰”일까? 영국이 이제 미국의 자살적 극동 정책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의미의 “토큰”인가? 무엇이든 그것은 확실히 영국이 미국의 명령에 복종함을 보여주는 토큰이다.
영국 인민들은 멀리 떨어진 이 작은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침략군이 조선 인민들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폭격을 하고, 기총소사를 하고, 포격을 때려도, 그들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항복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승만 패당 아래에서 살아온 삶보다 죽음이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종류의 거대한 군대가 풀려났다. 미국인들이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군대다. 미국이 아무리 융단폭격을 퍼부어도, 이렇게 깊숙한 남쪽까지 오는 야포 한 문, 탱크 한 대, 박격포 한 개조차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조선은 어딜 가나 50 봉 이상의 산봉우리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나라다. 이 나라의 벗이라면 그 산맥이 아름다울 것이요, 적이라면 끊임없는 매복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조선인들은 모든 침략자의 적이다.
만약 조선에서의 싸움이 격화된다면, 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영국은 조선에서 미국의 공범으로서 더 깊이 관여하게 될 것이고, 워싱턴에서 꾸미고 있는 또다른 미친개 같은 음모에 영국은 또 끌려들어갈 것이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위험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다시 한번 영국 인민들이 세계평화의 열쇠를 쥐었다. 1939년 뮌헨에서 내다 버렸던 그 열쇠 말이다.
지금 호전적인 지배민족Herrenvolk들이 폭격기로써, 살인수용소로써, 그리고 자기네 젊은이들을 가학적 살인자로 만듦으로써 이 지상에 군림하려 한다.
조선은 세계 만방에 대고 여기가 새로운 게르니카라고 비명지르고 있다. 조선은 월가의 나치들이 무기를 시험하고,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는 민중들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벌려놓은 새로운 에스파냐다.
열쇠는 영국이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것이 바로 월가의 큰손들이 조선에 5년동안 준비해둔 피바다에 우리 인민들도 끌고 나오라고 압력을 가한 이유이며, 그것이 바로 종 같은 애틀리가 미국인들에게 “토큰”을 약속하자마자 그들이 중국에 항공기를 보내 전쟁영역을 확산시킨 이유다.
미국이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모건Morgan과 록펠러Rockefeller, 듀폰Dupont과 철강재벌들의 이해를 수호하기 위해, 봉건지주들의 지배를 회복하기 위해, 인민들을 다시 빈곤으로 내몰고, 평화로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전쟁의 근거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조선을 침공했다.
영국의 젊은이들이 이런 비열한 목표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가? 영국은 새로운 히틀러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미국의 종이 되어서 새로운 세계대전의 공동 기폭제가 될 것인가?
영국의 노동조합들, 노동당 지구당들, 진보적 단체들, 모든 부문의 인민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으며, 즉시 이렇게 답해야 한다.
모든 외국 군대는 조선에서 물러나라!
중국에서 손을 떼라!
세계 평화를 옹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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