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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묵상글 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어머니 정귀례 데레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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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날씨가 더워지면서 산보 가는 길에 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보온병에 얼음을 넣고 레몬을 썰어 넣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쉼터에 도착하면 물을 한 모금 마십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땀을 흘리고 갈증이 났을 때 마시는 물은 꿀맛입니다. 목마르지 않았다면, 땀을 흘리면서 걷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물맛이었을 겁니다. 작년에 이태리의 돌로미테로 산행을 갔을 때도 경험했습니다. 높은 산을 오르고 또 올라 정상의 산장에 도착해서 산 아래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물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뒤에 올라오는 분들에게 건네주는 물은 정말 단물이었을 겁니다.
예루살렘의 시장 길에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3번씩이나 넘어지는 십자가의 길에 위로가 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타는 목마름을 적셔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성모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시끄러운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순례를 합니다. 십자가의 길 5처와 6처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걸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3번에 걸쳐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막장수였던 프리스카와 아퀼라가 있었습니다. 자색옷감 장수였던 리디아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들처럼 여겼던 티모테오와 티토가 있었습니다. 옥중에서 시중들던 오네시모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바오로 사도의 열정적인 선교는 많은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주문모 신부님과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이 사목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부님들을 도와 드렸던 협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두만강을 몇 번씩 건넜던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있었습니다. 사제를 집에서 모신 복자 강완숙 골롬바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있으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LA에 갈 때면 늘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고, 신문 홍보에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애틀랜타에도 도움을 주시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신문에 복음 묵상을 그려 주십니다.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에는 교구 신부님들이 있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달라스에는 동창신부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지난 1월에 성지순례를 함께 갔었던 교우들도 있습니다. 뉴욕은 신문사가 있는 곳이고, 옆에는 퀸즈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주일 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고, 신부님들께서도 가족처럼 대해 주십니다. 제가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기에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교리와 법을 만들어낸 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수위권을 이어받은 교황님들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말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어온 이름 없는 순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행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굳센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사랑의 열매를, 희망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나의 믿음이 흔들리는 믿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동생 수녀님은 한국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였고, 저는 미국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미사 봉헌하고, 연도를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기도하니 어머니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기억하고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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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중
주윤 (yjoo8517) 대댓글2020-09-11
찬미예수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예전 감곡 성당 임가밀로 신부님 얘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되어 한국 땅에서 선교하면서 어머님 임종 소식을 듣고도 가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우셨다는 사연입니다.
해외 근무에 더구나 코로나로 인해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장례미사에도 함께 하지 못한 자식으로서 서운함을 누군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만은
오늘 여기저기 들리는 얘기를 들어 보면 많은 분들이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고,
정귀례 데레사 자매님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는 기도가 여러 곳에서 들립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이 사제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셨고 그런 사제를 길러낸 어머님의 노고를 하느님께서,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어머님의 마지막 여행길을 멀리에서 보낸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에게 위로 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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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 우리들의 묵상/체험에 강만연님이 올린 글.
(강만연 [fisherpeter] 2020.09.12. 01:38 ㅣNo.140701)
모친상 중에 계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께 드리는 글
가브리엘 신부님의 마음을 한번 묵상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부족한 한 이름 없는 평신도이지만 먼 타국 땅에서 어머님의 영혼을 주님의 품에 보내드리는 애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에 펜을 들었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굿뉴스에 들어갔다가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다가 후반부에 모친상을 알리는 내용을 보고서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댓글을 남겼습니다. 댓글을 남기고 나서 꼬빡 밤을 세웠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짧은 화살기도를 올리고 나서 신부님께 놀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묵상글을 올리면서 어머님의 소식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분명 소식을 아시고 묵상글을 작성하셨을 텐데 어찌 초반에는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을 정도로 작성하시다가 마무리 부분에서 소식을 전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제가 만약 신부님이었더라면 매일 해 오신 묵상글을 올리는 걸 양해와 이해를 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그러지를 않으셨습니다. 또한 한국에 나오셨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조금 전에 묵상글을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신부님께서는 미국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서 더더욱 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개인 사정을 알 수가 없기에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단순히 제 나름 상상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사목하셨더라면 당연히 어머님과 같이 어머님의 마지막을 지켜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팬데믹인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것인지 아니시면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께 봉헌된 분이시기에 대의를 위해 마음이야 애통하신 마음 금할 길이 없으시겠지만 기도로 어머니 영혼을 위해 하느님께 봉헌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상상하니 한 인간으로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제라는 신분이기 이전에 신부님께서도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저희와 같은 분이십니다. 영혼을 낳아주신 분이야 하느님이시지만 육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님을 여의셨는데 마지막 어머님의 육신을 뵙고 싶은 마음이 오죽하시겠습니까?
오늘 묵상글을 통해서 동생 수녀님과 신부님의 기도로 기뻐하실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리셨지만 물론 그렇게 표현하신 신부님의 마음 이면에는 가슴에 슬픔이 숨어 있어리라고 미루어 짐작을 해봅니다. 지금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신앙인의 전형적인 전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섣불리 판단을 할 수가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신부님의 가슴속에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뵐 수가 없는 마음이 극에 달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가슴속으로 하느님께 어머님의 영혼을 위해 비통한 심정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어머님의 영혼을 절규하시며 기도를 올리실 것입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는 사도로서 누릴 특권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복음 선포를 위해서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겸손되이 하느님께 자신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마저도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상으로 여긴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주님을 뵙고 처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정작 한 번도 뵙지 못한 예수님을 박해했다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사도 자신은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그 자체를 예수님과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사도로 불림을 받을 자격이라고는 전혀 없는 비천한 몸인 자신을 사도로 삼아주신 걸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이 한 고백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이미 이런 죄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창세 전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아니고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은혜가 아니였더라면 바오로는 그 당대의 한낱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박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어쩌면 성경에 기록되는 불명예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 자신을 하느님께서 택해 사도로 뽑아주신 은총을 주셨기에 자신의 남은 생애를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바친 바오로 사도는 그게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상이라고 자위하며 참수형을 당하는 마지막 순교하는 순간까지 오롯이 하느님께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맡긴 사도의 삶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아마도 지금 신부님의 마음은 모르긴 몰라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득권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천륜에 호소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신부님 자신을 내려놓으신 모습에서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분명 신부님께서 지금 처하고 계신 슬픔과 아픔의 위로를 그때 하느님으로부터 분명 받으실 겁니다.
분명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사제로 당신께 봉헌하신 당신의 딸에게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은총을 내려주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 그 어떤 말로 신부님의 마음을 대신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부족한 한 평신도가 슬픔 속에 계신 신부님께 전해드리는 소박한 저의 작은 마음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주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의 어머니 정귀례 데레사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심연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ps: 신부님, 존칭을 생략했습니다. 압존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점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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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한상우 신부님.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 44)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실행이다.
우리는
어떤 나무이며
어떤 열매인지를
묻게되는 힘겨운
가을이다.
좋은 삶은
좋은 실행에
있다.
실행없는
열매가 있을 수
없듯이 뿌리없는
나무또한 있을 수
없다.
나무가 자라야
열매가 열린다.
자라나야 할
우리자신이다.
나무와 열매는
분리될 수 없다.
열매는
사람을
향한다.
열매가 익어가듯
나무도 익어간다.
열매를 주는
나무가 좋은
나무이다.
열매는
속이지 않는다.
좋은 열매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나무의 힘은
열매로
드러난다.
열매와
함께하는
나무처럼
실행과
함께하는
우리 신앙이길
기도한다.
열매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듯
실천이 있는 삶에
익어가는 신앙이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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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나무와 열매의 인과 관계는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환기합니다.
누구인가 그러더군요. 머리에서 발까지가 가장 긴 여행이라고요.
‘생각이 실제 움직임으로 곧장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
무작정 실천하는 경솔함도 함께 고민해 보아야겠다 싶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고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모든 것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바꾸어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설익은 생각들이 부지런한 행동으로 이어질 때, 공동체는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고 소모적 논쟁으로 몸살을 앓고는 합니다.
어쩌면 생각을 단단히 다지고 공고히 하는 숙성의 시간이 공동체에게는 필요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상에 앞장서 저 멀리 ‘장밋빛 인생’을 제안하는 힐링 센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치고 나가며 흩어 놓은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사유하고 보듬는, 그래서 비가 온 뒤 적셔진 대지가 더욱 단단히 굳어지듯, 세상의 어설픔과 경솔함으로 갈라진 틈을 단단히 메꾸어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반석’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해하는 데 꽤 멋진 비유입니다.
우리의 행실로 맺은 열매는 반석처럼 굳건해야 하고,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는 실천은 우리 삶처럼 단단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흔들릴 바에야 세상의 논리에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오히려 솔직한 모습이겠지요.
지난 시간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그리고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굳건히 다시 세워 보아야겠습니다.
잘하려 들기보다는 똑바로 할 수 있도록 지금의 생각부터 차근차근 다듬어 보아야겠습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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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43-49: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
오늘 복음에서 ‘좋은 나무’는 성령을 나타낸다. ‘나쁜 나무’는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와 반대는 가시나무와 엉겅퀴, 즉 불명예스러운 욕정들이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44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에게서 고상함을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이와 반대되는 자는 자기 속에 깊이 감추어졌던 것을 내놓는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지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의 삶 속에 신앙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신다. 덕이 있는 자는 그 품위에 맞는 말을 하고 사악한 사람은 은밀한 곳에 숨겨 둔 더러운 것들을 게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 행위를 보면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 그 자세가 어떤지 예를 들어주신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43-44절).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자세에 따라 그 신앙생활도 진실한지 아닌지,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삶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삶이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입으로만 헛되이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47~48절)라고 하셨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사랑이 드러나고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즉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아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체험을 원하게 되고 그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삶으로 하느님을 이 세상에 더욱 깊이 확산시킬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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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연중 2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실행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말에서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둔 것은 언젠가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도 마음이 한번 흔들리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일상 안에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마음 안에 좋은 것을 담아야 좋은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거를 건 거르고, 삭힐 건 삭히고 담아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따르는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마음보다 형식과 겉모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선할 때 선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6,45).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교만, 어리석음…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인데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럽힌다(마르7,21이하).
그야말로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법입니다(루가6,44). 그러므로 닦고 가꾸어야 할 것은 말보다 먼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고운 말도 나오고 바른 행동도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개소리만 합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강아지 얘기만 합니다. 그 강아지에게 마음 쓰는 만큼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터인데…. 동물 애호가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분에게는 듣기 싫은 소리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마음속에 강아지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는 남 얘기만 합니다. 자기 속을 보지 않고 남의 사생활을 속속들이‘콩 나라 팥 나라’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온통 남의 흉, 허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놓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으라 하시는 데 남의 흉, 허물, 험담 위에 집을 짓고 있으니 그 집이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습니다’(루가6,49).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성경말씀과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 예수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기쁘거나 위기가 닥칠 때나 어느 때이든 그분 것이 우리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눈을 깨끗하게, 귀를 조용하게, 그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지키십시오”(토마스 머튼). 잠언에서는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4,23).라고 말합니다.“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주님을 마음에 담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신앙은 매사에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논리와 현실의 이해관계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성당 안에서뿐 아니라 일상 안에서 직접 몸을 움직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을 마음껏 이웃을 향해 봉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실행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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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반석 위의 인생 성전聖殿 집 - 말씀과 기도, 성찬례 실행의 생활화 -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의 예수님 평지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참행복선언과 불행선언, 그리고 사랑에 관한 감동적인 설교후,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라는 대목에 이어
‘말씀을 실행하여라’라는 대목으로 끝낱니다.
반면 제1독서 코린토 1서는 성찬례와 이교제사에 대한 내용으로 주님성찬과 이방인 제사식사는 양립불가함을
말합니다. 복음과 독서 말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선적으로 마음이 깨끗해야,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듯이 마음이 예쁘면 다 예쁩니다. 작든 크든 뚱뚱하던 말랐던 젊었던 늙었던 남자든 여자든 외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예쁘면 다 예쁩니다.
사실 좋은 사람은 함께 있어도 편하고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이렇게 믿고 살 수 있는 것도 근본적으로 서로의 선의를 착함을 순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순수와 열정은 우리 수도자의 기본 자질이며 자랑이기도 합니다.
깨끗한 마음, 깨달음, 깨어 있음, 모두가 ‘깨’자 돌림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의 순수요,
깨끗한 마음에서 깨달음의 지혜도 나오니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깨끗한 마음, 좋은 마음, 착한 마음이 우선입니다. 마음이, 사람이 좋아야 합니다.
학식도 건강도 젊음도 다 사라지고 맨나중 까지 남는 것은 선한 마음 하나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가 좋듯이 마음이, 사람이 좋으면 글도 말도 행동도 좋습니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 때 영어선생님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덕산중학교 3년 동안, 담임하시며 저를 각별히 아껴 주셨던 최종훈 선생님이 지금도 그립습니다.
“밖보다는 안이 깨끗해야 한다. 겉옷보다는 속옷이, 속옷 보다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사실 마음이 좋으면, 마음이 선하면,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이 착하면 겉은 저절로 좋아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좋고 기품있으면 무슨 옷을 입어도 저절로 잘 어울립니다. 화장도 성형수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빛과 향기는 저절로 정직하게 밖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부부생활 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얼굴 예쁜 건 3년이란 유효기간이 있지만 마음 예쁜 건 평생으로
유효기간이 없다 합니다. 예수님의 종합적 결론 말씀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저절로 마음의 순수는 없습니다.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는 마음의 순수이고 궁극의 목표는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의 모든 평생 수행이 목표로 하는 바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 실재입니다.
끊임없이 깨어 노력하는 수행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한결같은 말씀과 기도, 성찬례의 실행과 생활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기본에, 기초에 충실한 삶이요 반석 위에 자리 잡은 삶이요, 이들 수행은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항구한 수행과 더불어 순수한 마음에 주님 반석 위에 견고히 자리 잡는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충격적으로 마음에 꽂칩니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서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하루하루, 말씀의 실행으로 평생 지어가는 반석 위의 인생 성전 집임을 깨닫습니다.
완성된 인생 성전 집이 아니라, 얼마동안 벼락치기 날림 공사로 짓는 삶의 성전 집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지어가야 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성전 집이 바로 반석 위에 자리 잡은 우리 각자, 공동체라는 성전의 집
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강조하는 바 말씀의 실행입니다. 말씀의 실행에 힘쓸 때 비로소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 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졌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 졌다.”
안으로부터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말씀의 실행에 충실한 기본에, 기초에 충실한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항구한 말씀의 실행이 있어 순수한 마음, 갈림없는 마음입니다.
말씀의 실행에 이어 항구한 성찬례와 공동시편 성무일도의 실행이 우리를 순수하게 합니다.
반석 위에 각자의 인생 성전 집을, 공동체 성전 집을 마련해 줍니다.
오늘 제1독서가 갈림없는 순수한 마음에 성찬례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매일 공동 미사 성찬례입니다.
“빵은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린토 교회는 내적 분열에 처해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치 성전에서 미사도 드리고 무당 집에 가서 굿하는 경우와도 흡사합니다. 마치 삶의 중심이 둘인 꼴이니
내적 분열은 필연이요 내적일치, 내적평화, 내적안정은 요원합니다.
정말 삶이 힘들고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은 이렇게 마음이 갈리는 내적 분열로 ‘마음의 순수’를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코린토 교회 현실이었던 듯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만 이렇게 삶에 주인이,
중심이 둘 일 때 내적분열에 정체성의 위기는 필연이요 이보다 더 큰 재앙도 없습니다.
결코 반석 위의 인생 성전 집을, 공동체의 성전 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리 공동체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러니 반석 위에 지어진 견고한 성전의 집이 될 수 있도록 항구한 말씀과 기도, 성찬례 실행의 생활화로 늘 마음의 순수를 견지함이 필수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1.기도와 2.말씀공부와 3.노동’의 기본에 충실한 우리 수도승의 삶이, 또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시편전례기도와 이 거룩한 공동전례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당신 반석 위에 아름답고 견고한 성전 집을 지어 줍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시편116,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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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새벽을 열며.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빠다킹신부님.
직장 상사로부터 잦은 질책과 비난을 받아서 자존감이 엄청나게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편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코칭을 공부하면서 ‘상대방은 무조건 맞다’라는 전제로 코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 말처럼 직장 상사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진 것이라고 맞장구쳐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렸을 때, 제 형님이 저를 너무 많이 혼냈어요. 그래서 그때 이후 자존감이 엄청나게 낮아졌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형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나중에 살짝 돌려서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을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로 골탕먹으라고 혼낸 것이 아니라, 더 잘되라고 조언을 해준 것이었습니다. 이를 질책과 비난으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제대로 듣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이것은 이렇게 해야지. 자꾸 실수를 반복하면 어떻게?”라는 말을 “너는 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존재야.”라고 듣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제대로 말해주지 못해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상대방과 당시 상황의 진실만 제대로 파악해도 자신을 쓸데없이 괴롭히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요?
이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탄탄해야 합니다. 그 기초는 주님 안에서 완성할 수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이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분께서 짓는 집은 교회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놓은 튼튼한 기초는 예수님의 교의적 가르침, 성조들,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적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밭에서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공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런 기초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기초 없이 과연 집이 제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강물로 상징되는 고통과 시련이 오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립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세운 집이 무너지고 있다면 분명히 주님이라는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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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책임을 다하면 꼭 성공한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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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맛있게 먹는 비결
제가 아는 신부님 중에서 고기를 구울 때는 반드시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고기 굽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고깃집에서 직원이 구워주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잘못 굽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특히 이 신부님의 고기 굽는 법은 자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 자주 뒤집으면 고기의 육즙이 증발해서 맛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과 함께 강원도에 한우로 유명한 고깃집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한우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곳으로, 고기 굽는 것을 사장님께서 직접 해주십니다. 이 사장님 역시 남이 고기 굽는 것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잠시 뒤에, 이 사장님의 고기 굽는 법과 앞서 말씀드린 신부님의 고기 굽는 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사장님은 고기를 계속 뒤집는 것입니다. 그래야 육즙이 고기의 한가운데 모이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전혀 다른 고기 굽는 법이지만 두 방식 모두 맛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맞는 것일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네요.
“고기는 무조건 맛있는 것 아냐?”
자기 방식만 맞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고,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고기를 제일 맛있게 먹는 비결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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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미 좋은 나무이면서, 마음에 선한 곳간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자신과 이웃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
우리는 나무를 보면서 열매를 떠올리고, 또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기억합니다. 나무와 열매의 인과 관계는 명확하지요. 좋은 열매를 맺었다면 나쁜 나무일 수 없고, 나쁜 열매를 맺었다면 좋은 나무일 수 없습니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루카 6,47)
좋은 나무로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향해 다가오지요. 마음에 가득 찬 선한 내용들이 선하신 주님을 향해 본능적으로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듣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과 마음에 귀기울여 경청합니다. 그의 존재를 타고 들어오는 주님의 모든 것이 곧 들을거리입니다.
이어서 그는 들은 것을 실행합니다. 주님에게서 전해진 모든 것은 지식으로 축적되거나 스스로 향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존재를 통해 외부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를 열매라고 하지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루카 6,48)
"땅을 깊이 파기"
세상 중심에 계시고 또 내 존재의 가장 심부에 계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들고 고통도 따르는 지난한 여정입니다. 세상과 이웃의 이해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요.
"반석 위에 기초 놓기"
바위이신 주님께 내 존재를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바위이신 그분에게서 흘러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석청으로 배불리며 온전히 그분께 밀착하는 과정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바위를 뜷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온갖 소음들 속에서 그분 목소를 감지하고 알아듣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될 때까지, 무수히 반복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적과 같을 겁니다.
"집을 짓기"
이제 비로소 집을 짓습니다. 결과가 겉으로 보여지는 과정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바위 위에 기초를 놓는 노력이 가시적 열매로 드러나는 겁니다. 모든 수고를 다 해놓고도 정작 집을 짓지 않으면, 주님에게서 받은 온갖 선하고 좋은 선물은 고작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인간적인 재능 정도로 제 안에서 고여 있다가 스러지는, 아직 열매도 은총도 되지 못하고 쭉정이 씨앗으로 사라질 뿐이지요.
"홍수가 나서 강물이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루카 6,48)
주님께 다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에까지 이른 사람은 모진 세파와 혼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7) 하는 아가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아가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절정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주님께 다가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과정을 편의상 따로 떼어서 설명했지만, 실상은 사랑의 행위 안에 녹아들어 막힘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분께 이끌리는 갈망이 부단한 노력을 거쳐 실행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되지요. 마음에 넘치는 것이 사랑으로 육화되어 세상에 주님 현존이 되고 사랑이 되는 신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이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21)
영혼에 선한 곳간을 지닌 이가 일부러 악의 곳간을 헤매고 다니지 않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우리는 축복의 잔을 마시면서 이미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고, 빵을 떼어 나누면서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좋은 나무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주님께 다가가 그분을 듣고 들은 바를 실천하는 우리 안에는 이미 성삼위 하느님께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 이 사랑의 일치 안에서 우리는 어쭙잖은 금액으로는 환산 불가능한, 선하고 좋은 열매를 세상에 낼 수 있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안에는 어떤 강물도 휩쓸어 갈 수 없는 열렬하고 굳건한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주님께 다가가 듣고 실행하는데 지치지 않는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맺는 이 맛깔스런 열매를 맛보시려 자기 정원에 찾아오십니다.(아가 4,16 참조), 우리는 주님과 함께 목마르고 허기진 세상을 향해, "먹어라, 벗들아.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하고 초대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열매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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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창조시기 12일째-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6,46)
'순교의 삶!'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소중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본받기를 다짐하는 달입니다.
'순교'(殉敎)는 말 그대로 신앙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칼 아래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
'믿음과 희망!'
그들 마음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막연한 믿음과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순교신앙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교의 삶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조그마한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쉽게 흔들리고, 쉽게 기쁨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미사가 재개 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미사가 재개되도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코로나가 무섭기는 정말 무서운 가 봅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하고, 또한 정부의 방역지침도 잘 준수해야 합니다.
저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더 조심합니다.
만약 지금 우리에게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때의 상황이 찾아온다면 신앙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 목숨을 신앙과 맞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9월 순교자 성월을 보내면서,
순교자들이 간직했던 신앙을 우리도 간직하고, 그들이 바라보았던 곳을 우리도 바라보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깊이 머무는 기도를 하고, 순교자들처럼 영원한 생명을 정말로 그리워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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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은 좋은 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예레 17,10;21,14;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오늘 <복음>은 이를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곧 ‘말’과 ‘행실’ 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루카 6,43-45)
<첫 번째 열매>는 우선 입으로 하는 말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어떤 말들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입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의 곳간이며, 말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말은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향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열매>는 몸으로 하는 ‘실행’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그렇습니다. 말씀의 ‘실행’이야말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그러니, 우리 역시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며,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일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가?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인가?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4)
주님!
나무에 붙어 있게 하소서!
붙어 있지 않고서는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려나가기 전에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게 하소서!
찬란해 보이는 잎도 아름다워 보이는 꽃도 버려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껍데기 위선을 벗기고 숨겨둔 기만을 도려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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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꽃이 될 것인가, 열매가 될 것인가?
한국의 2015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10만 명당 58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OECD 평균 18명보다 훨씬 높고 심지어 2위인 35명보다도 압도적으로 앞선 1위입니다. 노인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는 경제적, 정서적 독립이 부족한 것을 꼽습니다.
그런데 가난하면 다 자살해야 할까요? 사실 코로나가 발생하고 자살률이 줄었다고 합니다. 힘들수록 더 어떠한 목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편안해지면 오히려 자살률이 증가할 것이라 합니다. 사람은 힘이 좀 들어야 삶의 에너지가 생기는 모양입니다.
켈리 맥고니걸의 『움직임의 힘』에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는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그는 자살하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땀이나 실컷 흘려보고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다음 날 죽기로 하고 오늘은 헬스장을 찾았습니다. 벤치프레스를 했는데 80킬로가량 들 수 있었습니다. 땀을 쭉 빼고 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몇 킬로까지 들 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목표가 생기니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5년 뒤 그는 140킬로까지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표란 ‘고통’이란 것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내가 어떠한 목표를 위해 받을 고통을 거부한다면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목표를 위해 고통을 참아 받는 능력을 키울 때 삶의 활력이 넘칩니다.
쥐를 가지고 한 실험입니다. 꼬리에 전선을 연결해서 수시로 전기 자극을 줍니다. 쥐는 언제 자극이 올지 모르고 자극이 와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쥐는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소위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쥐를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 넣으면 헤엄을 치지 않습니다. 가만히 물에 가라앉는 익사를 선택합니다.
다른 그룹의 쥐는 전기 자극을 주는 것은 같지만 그 쥐가 옆에 있는 쳇바퀴에 올라타 돌리면 자극을 중단합니다. 자극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이 쥐는 그 자극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땀을 흘려 고통을 감내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그룹의 쥐는 절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이 가득한 양동이에 넣어도 힘이 다 빠질 때까지 헤엄을 칩니다.
사람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더는 살아봐야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감은 꽃이 되려는 목표로 살았기 때문에 올 수 있습니다. 꽃은 화려할 때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꽃은 시듭니다. 그러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자살하는 일부 노인들은 어쩌면 꽃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되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만약 그 모습이 꽃과 같다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떠한 모습을 기대하십니까? 타볼산에서 변모하시는 멋진 모습입니까, 아니면 양식이 되어 오시는 모습입니까? 아무리 예쁜 꽃밭이 있더라도 굶은 사람에겐 배를 채울 수 있는 과일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젖을 만지다가 가끔은 어머니 팔뚝을 물기도 했었습니다. 왠지 먹고 싶었습니다. 식인종도 아닌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어른들도 아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손과 발을 입에 넣고 깨물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부모가 아기들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쁜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꽃은 한계가 있습니다. 열매를 원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먹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말과 행동’임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시는 것은 ‘말’에 관련된 것이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남을 먹일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나무가 되려면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뜻이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반면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신앙의 목적을 미사나 기도에 둡니다. 미사하고 기도하면 구원받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은 받아들이는 시간이고 그 말씀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연습해야 하는 것은 고통을 참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을 할 수 없으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 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겠습니까? 당신이 식욕이 강하면 양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먹는 사람이 되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꽃이 아니라 열매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 달라기를 하는 사람들은 ‘러너스 하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힘든데 쾌감이 찾아오는 느낌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목적으로 성장하지 꽃을 목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크나큰 고통입니다. 잘 다져진 반석이란 아마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먹히는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조금 힘든 운동을 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면 더 좋습니다. 꽃에서 열매가 되는 중간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내가 열매가 되어 누군가에게 계속 먹힌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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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루카 6장 43-49절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삭디 삭은 봉고 트럭
언젠가 이사를 가시면서 "쓸 만한 것들이 꽤 있다"는 한 고마우신 형제님의 말씀에 트럭을 몰고 댁으로 향했습니다.
다들 삐까번쩍한 대형 자가용들만 줄지어선 주차장에
삭디 삭은 1톤 짜리 봉고트럭을 몰고 들어가니 관리하는 아저씨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처음 들어갈 때부터 "삭은 트럭이 감히 어딜 들어오냐?"는 표정이었는데, 양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아예 반말에다, 바라다보는 눈빛이 얼마나 깔보는 듯한 눈빛이었는지...
너무나 속이 상했던 저는 직접 아저씨 면전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짐을 트럭에 실으면서 "그 아저씨, 얼굴도 되게 웃기게 생겨 먹어 가지고 엄청 딱딱거리네?" 하며 괜히 혼자서 투덜거렸습니다.
짐을 싣고 돌아오는데, 기분이 정말 영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르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면 그 사람이나 나나 거기서 거기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저 역시 지난 세월,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과오를 범해왔었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면이나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뒷전인 채 단지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서 작고 약한 사람들을
얼마나 마음속으로 무시해왔는지 모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 복음의 길이며
우리 교회와 수도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 삶 안에서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은연중에 얼마나 자주 무시해왔었는지?
부족하고 덜떨어진 아이들이 가장 우선적인 사랑의 대상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안 그래도 교회의 이중적인 모습, 차별대우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마음으로 환대하고 다독여야함을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상황 앞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해 왔음을 뉘우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살아있는 신앙인,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인,
행동하는 신앙인, 일어서는 신앙인, 세상의 혁신을 위해서 과감히 투신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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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연중 제 23 주간 토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축복의 잔과 빵은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 주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반석의 기초에 집 짓는 이' 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고,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의 잔도 마실 수는 없는 것이다.고 전합니다. 루카 복음은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좋은 나무. 곧 주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 그는 반석위에 기초를 놓고 튼튼한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 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자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시게 하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다는 말입니까? 1코린 10,14-22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을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 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 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루카 6,43-49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축복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이가 우상, 어둠의 대상을 섬길 수 가 없습니다. 주님의 일과 제헌은 거룩함이고 우상, 그것은 다른 잡신들과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잔과 빵을 먹고 마시는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선한 사람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열매를 내는 좋은 나무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배신하게 하는 우상을 멀리합니다. 우상의 가치들이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고, 영예롭게 하는 것을 알아도, 하느님께서 선과 진리, 정의와 공정에서 생명을 주시는 주님임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우상의 가치. 그것을 떨쳐버리며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찾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좋은 나무와 열매인 선한 사람이 주님 말씀의 순종하며, 그를 칭찬합니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이며 홍수가 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좋은 나무와 그 열매가 되십시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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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2일 토요일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_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집전
https://youtu.be/hEjq6kjHF68 (32:47)
•2020. 9. 12.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의정부교구 고양동 본당 주임) 집전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3-49
*** 신부님 강론 10분 10초부터 17분 20초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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