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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집 할머니와 가을소풍
이원규
몇 집 안 되는 조용한 마을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옵니다.
마고정이라는 정자 아래 섬진강변으로 초등학생들이 가을소풍을 온 것이지요. 어린 시절 까맣게 잊고 있던 소풍의 기억들이 나를 설레게 합니다. 하낫 둘, 하낫 둘 호루라기 소리에 발맞춰 나도 그 아이들 틈에 끼어들고 싶었지요.
내 고향은 경북 문경이고 지금 사는 곳은 지리산의 전남 구례이니 참으로 멀리까지 왔습니다만, 가을소풍 혹은 가을운동회의 추억이 순식간에 거기와 여기, 40여 년 전과 바로 지금을 연결해주었습니다. 시공초월,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일이란 이처럼 순식간의 일이며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풍경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내내 가난했지만 가을소풍이나 운동회만큼은 언제나 풍성했지요. 어찌 그러지 않았을까요.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고 온몸에 생기가 돕니다. 어머니가 싸주는 김밥 두어 줄에 환타나 사이다 한 병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지요. 거기에다 ‘꺼먹 고무신’이 아니라 새 운동화가 생기거나 난생처음으로 형이 입던 헌옷이 아니라 초록색 옷의 팔다리에 세 개의 흰줄이 그어진 ‘츄리닝’ 한 벌이 생긴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차오르지요.
나만의 옷이 생겼다는 것, 그것도 그렇게 입고 싶었던 체육복이 생겼다는 것, 그 옷을 입고 밤잠을 설치며 어서 빨리 가을운동회의 새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던 더없이 행복한 밤도 있었지요.
지금은 폐교된 서성국민학교의 운동장에는 플라타너스와 건물 사이에 줄을 이어 만국기가 펄럭이고, 곤봉 매스게임을 끝낸 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불알친구들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지요. 가난했지만 행복했지요. 그날만큼은 달리기에서 넘어져 꼴찌를 해도 안타까웠지만 서럽지는 않았지요. 찐 고구마며 동네어른들이 운동장에 가마솥을 걸고 끓여주는 돼지국밥 등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넘어져도 탈탈 흙먼지를 털어보는 새 체육복이 있었으니까요.
도대체 알 수 없는 지독한 가난 앞에서 분하지 않고 울지 않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먹을거리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당당할 자 그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가을운동회날 만큼은 공납금 독촉을 받지 않고, 아침마다 돈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학교 안 갈끼다. 지금 당장 공납금 빌려오라카이!” 어깃장을 놓으며 홀어머니를 더 이상 윽박지르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가을운동회나 소풍은 축복받은 날이자 해방의 광복절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등교하자마자 담임선생이 친구들 앞에서 “뭐하러 왔노. 지금 당장 집에 가서 공납금 가져오라카이!” 망신을 당한다 해도 견딜 것 같았지요.
물론 나만 가난한 게 아니었으니 그것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을까요. 몇몇 친구들은 영영 국민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농사를 짓거나 겁도 없이 서울의 어느 변두리 공장으로 가출하기도 했지요. 나는 그나마 츄리닝이 다 낡아 떨어질 때까지 단벌 신사로 졸업을 했으니, 가을운동회의 그 달뜬 기억이 나를 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가난한 시절의 추억이란 게 거의 모두 ‘먹을 것’에 한정돼 있거나 그 ‘먹을 것’을 잊기 위해 맹물을 마시며 발버둥치는 놀이뿐이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집에는 먹을 게 별로 없으니 산으로 강으로 들로 야생의 짐승처럼 싸돌아다니며 찔레순이며 산딸기며 오디며 으름 등 온갖 열매를 따먹고 그것도 모자라면 시오리길 과수원까지 진출해 수박이며 복숭아며 사과를 서리하기도 했지요. 이따금 과수원집 무서운 아저씨에게 잡히기도 하지만 조금 망신을 당하면 그만일 뿐이었지요. 당시에는 누구나 서리의 선수들이었지요. 나 또한 서리의 달인이었구요. 어느 야산에 알밤이 떨어지고, 누구네 집 감나무에 홍시가 달려 있고, 누구네 밭에 감자가 익어가는지, 뉘집 우물가에 포도가 익고 어느 뒷마당에 토마토가 익어가는지 귀신처럼 알았지요.
지금도 시골마을의 감나무만 보아도 문득 높은 가지 끝의 홍시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던 그 아홉 살의 나를 만납니다. 일평생 고생만 하시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그 이후 고향을 등진 나는 떠돌이가 되어 지리산까지 흘러왔지요. 마음속 고향이 가까워질수록 내 몸은 더 멀리 내달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멀리 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내가 바로 도착한 곳은 또 다른 고향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고향 같은 시골마을로 접어든 것이지요.
가난하고 궁핍했지만 추석과 운동회와 소풍의 기억만으로도 가을은 언제나 풍요로웠습니다. 아직 어린 시절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남몰래 소원을 빌기도 했지요. 지금은 그 소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추억의 창을 열면 맨 먼저 서성국민학교가 보이고,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혼자 노는 소녀 하나가 있습니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숨어서 그 소녀 숙이를 훔쳐보던 소년이 또 하나 있고요.
지금도 콩닥콩닥 심장이 뜁니다. 대봉산에 보름달이 뜰 때도 꼭 그렇게, 콩닥콩닥 뜨지요. 그 누구의 얼굴인 듯 얼굴인 듯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불콰해집니다. 짝사랑의 추억도 없이 어찌 달이 뜨고 별이 뜨겠습니까. 누가 봐주지 않아도 구절초꽃이 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어디나 누군가의 고향이고, 또 누군가의 사랑과 추억의 장소라는 사실을 새삼 깨우칩니다. 나무 하나 바위 하나 모두가 예사롭지 않지요. 봄이면 앵두꽃이 피고 가을이면 먹감이 익어가는 시골집을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짝사랑의 추억은 오래 묵은 포도주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집은 그 누군가의 옛 애인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어찌 그러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다 무너져가는 폐가라 할지라도 예전엔 그 누군가의 애인이 살던 집이겠지요. 밤마다 소쩍새 울음소리를 내거나 잔돌을 던지며 첫사랑에게 신호를 보내던 간절한 집이었겠지요.
잠시 추억에 잠겨 있다 둘러보니 섬진강변으로 가을소풍을 온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사는 섬진강변의 아주 작은 마을 마고실은 시내버스가 하루에 겨우 세 번 들어오는 마을인데, 달랑 여섯 가구에 칠순이 넘은 동네 노인 일곱 분과 유일한 ‘영계’인 우리 내외, 그리고 강아지 ‘나무’를 합쳐야 겨우 열 명 뿐입니다. 이런 마을에 초등학교 3, 4학년 70여명이 소풍을 왔으니, 마을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가 될 수밖에요.
아이들의 함성소리에 일손을 놓은 할머니들이 마고정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강변을 뛰어다니는 손자손녀들을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모처럼 환해졌지요. 할머니들이라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을까요. 모두들 소녀처럼 웃으면서도 눈가에 촉촉한 그 무엇이 비치었습니다.
뒷집 할머니는 지난해 봄에 할아버지를 먼 곳으로 보냈습니다. 함께 이 마을에서만 꼭 60년을 살아 금강혼식을 치렀으니 얼핏 생각하기에 여한이 없을 듯도 한데, 그게 아니었지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구마 밭 옆에 할아버지를 묻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다녀옵니다. 밭일을 나가도 먼저 할아버지 무덤에 들려서 안부를 묻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도 그 무덤 옆에 앉아 하염없이 섬진강을 내려다보곤 합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어느덧 가을인데도 한결같습니다. 아직 젊은 내가 뒷집 할머니의 그 쓸쓸하고 외로운 심사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지요.
“함께 육십 년을 살다봉께, 한 몸이여. 영감이 먼저 갔다능게 안적 믿기지 않는당께. 종친회 같은디서 영감 앞으로 핀지가 옹게, 절대루 죽은 게 아니랑께.”
그렇지요. 그런 것이지요. 요즘 세상이야 이별도 쉽고 만남도 쉽다보니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할머니는 일평생 한 번의 만남에 꼭 한 번의 이별이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겠지요. 고구마를 캐도 영감과 함께 캐고, 감이 익어도 영감과 함께 익어갑니다.
소풍온 아이들이 김밥을 먹고, 마침내 보물을 찾느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돌을 들추어보고, 풀밭을 살피며 이리 저리 강아지처럼 뛰어다닙니다. 하나라도 보물을 찾은 아이들이야 펄쩍펄쩍 뛰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금세 새침해져서 울 것만 같습니다. 할머니들도 환하게 웃으면서도 “아이구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혀를 찹니다.
어째서 보물찾기는 공평하지가 않은지요. 언제나 못 찾는 아이들이 더 많고, 내 어린 시절의 보물찾기도 끝내 허탕이었지요. 금방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서운하고 또 서운했는지요. 내 인생을 돌아보아도 보물찾기는 어린 시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겨우 시인이 되었으니, 시가 나의 보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보물 또한 인생을 걸어도 찾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팔순이 넘은 뒷집 할머니는 일생의 보물인 할아버지와 더불어 육십 년을 살고, 그러고도 저리 한스러워 하는 것에 비하면 나의 보물은 찾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갈고 닦아도 여태 빛나지 않는 돌덩이입니다.
뒷집 할머니가 천상병 선생의 시 ‘귀천’을 어찌 알까마는, 시야 모른다 할지라도 할머니는 이미 시처럼 살고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무덤가에서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어딘가 어머니를 많이 닮은 뒷집 할머니를 훔쳐보며 딴에는 위로의 시 한 편을 썼지요 ‘먼 길’이라는 시인데, 이승이 소풍길이라면 저승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고향집이 아닌지요.
돌담 위의 굴뚝새야
앞 도랑의 버들치야
강 건너
산 넘어간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그곳에도
기다리는 이들이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이다
저승길이 대문 밖이니
인연이 다했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
저 세상에
더 많지 않겠느냐
어느새 소풍왔던 아이들이 돌아가고 마고실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습니다. 굴뚝마다 아궁이에 군불 지피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를 따라 오르는 것이 어찌 덧없는 인생뿐이며, 말 못할 그리움뿐이겠는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즐거운 소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뒷집 할머니보다 더 쓸쓸한 저녁이 어디에 있겠는지요. 우리네 삶은 가을소풍의 보물찾기 같은 것!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물찾기 이전에 아주 가까이 사랑하는 이들을 갈고 닦아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이 세상의 모든 집은 누군가의 옛 애인의 집이요, 굳이 따로 찾을 것도 없이 둘러보면 세상도처 두두물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들입니다.
이원규
경북 문경 출생. 1984년 『월간문학』,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빨치산 편지』. 산문집 『지리산 편지』,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등.
―『시에』2010년 가을호
첫댓글 적막함 뒤에 숨어있는 빛나는 보석... 생이 있는 한 "두두물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들입니다.' 깊이 공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