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 하아~ 언제 적 얘기던가 기억도 안 나지만... 아무튼 울렁거리고, 심박이 고조되고, 이곳저곳 막 달아오르고, 정신조차 아득해지는 것이 첫 키서(?)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그럼 외간 남녀가 첫 키스에 도달/성공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내 경우엔 음... 많은,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요즘의 청춘들에겐 아닌 모양이다. 영화에서도 그렇고.
영화 <만추>
감독 김태용 개봉 2011.02.17
주연 탕웨이(애나 첸), 현빈(훈)
시애틀의 한적한 주택가. 눈두덩이 시퍼런 여자가 걸어온다. 뒤돌아 뛰어간다. 집에 들어서니 남자의 시체가 있고 여자는 단서가 되는 무언가를 삼킨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잦아들면 수인번호 2537, 여자가 수감되어 있다. 애나는 모친의 부고에 72시간의 가석방을 얻어 버스에 오른다. 시애틀로 향하는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비와 안개의 도시- 시애틀스럽다(못 가보았지만 뭐 그렇다고 하니까). 이름 모를 정류장에서 대한민국 3빈의 1인- 현빈이 버스에 오른다. 헌데 모양 빠지게 버스비가 모자라다는. 당황한 와중에 예쁜 동양 처자가 보인다.
“저기요, 혹시...”
아뿔싸,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 음울한 안색으로 보아 차이니즈가 유력하다.
“아이 로스트 마이 월릿. 두 유 해브... 메이비 30벅스?”
이 자식이 언제 봤다고! 하지만 말없이 30불을 건네는 애나.
애나는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인 죄수고, ‘그런 거 무서워하면 이 일 어떻게 하냐’가 모토인 훈은 제비로 후렸던 누님들의 남편들로부터 쫓기고 있다. 빌린 돈은 꼭 갚겠다며 손목시계를 떠안기는 훈의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애나는 오빠 집으로 간다.
장례식이 코앞인데 식구들은 잘 못 새겨진 묘비와 집을 파는 문제에 더 관심이 있다. 답답한 집구석을 벗어나려는데 예전에 죽고 못 살던 애인과 마주친다. 오빠의 친구이자 옛 애인은 이미 애 딸린 유부남이 되어있다. 자신이 살인자가 되는 단초를 제공했건만 뻔뻔한 남자는 이미 다 잊은 듯하다. 기분을 업-시키려 새 옷을 사 입고 막힌 귓불에 귀걸이까지 해보지만 가석방 죄수의 소재를 파악하는 전화 한 통에 다시 엉망이 된다. 어디론가 떠나보려 하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터미널 외곽에서 애나는 다시 훈과 마주친다. 훈에게 도발적인 한마디를 던지는 애나.
“두 유 원 미?”
쉬었다가는 모텔 방. 거사를 위한 탈의 순간 여자는 거칠게 제비를 밀어낸다. 7년의 옥살이는 귓불만 막은 게 아닌 모양이다. 아까운 대실비만 날린 남녀. 뻘쭘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시내 구경에 나선다.
“왓 두 유 두?”
“왓에버 쉬 원”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데 (희미하긴 하지만) 애나가 처음으로 웃는다. 영화 시작하고 44분만이다. 버스가 보트로 변하는 수륙 양용 탈 것에 올라 시애틀 투어에 나선 남녀에게 운전자겸 가이드가 폼나는 멘트를 던진다.
“좋은 시절은 후딱 갑니다. 마음을 열고 즐기세요, 사랑하세요.”
철거 직전의 놀이동산에서 범퍼카를 타다가, 멀리 다투고 있는 남녀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는 주인공들.
“그건 사랑이 아니야, 추억이고 집착이야.”
“그런 식으로 보지 마세요. 왜 그렇게 변한 건가요?”
“내가 기억하는 건 오직 하나,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사과나 용서 따위가 아니에요. 사랑이라구요.”
남들은 공포체험을 하는 고스트투어-마켓 고깃간 앞에서 애나는 자신이 가석방 중인 죄수임을 밝힌다. 이어 사랑했던 남자와 꼬인 삶에 대해 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얘기를 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하오! 하오!”
다시 웃는 애나.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하던 그녀가 웃는다. 정체불명의 한국제비 앞에서.
손목시계를 남겨두는 것으로 작별을 고한 여자와 이대로 보낼 수 없는 남자. 훈은 안면몰수 장례식장을 찾는다. 그곳에서 훈은 애나의 뻔뻔한 옛 남자와 한판 제대로 붙는다. 이를 계기로 애나의 응어리가 터진다.
“왕징, 왜 이 사람의 포크를 썼죠. 왜 다른 사람의 포크를... 사과했어야죠. 설사 모르고 그랬더라도. 말해봐. 대답해보라고. 왜, 왜...”
모친의 장례를 마친 여자는 죄수 신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들던 남자는 결국 버스에 오른다.
“반가워요. 훈이라고 합니다.”
“애나예요.”
뿌연 시애틀의 하늘을 배경으로 버스가 출발하고, 짙어진 안개 때문에 휴게소에서 쉬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남자 제비는 괴한들에게 끌려간다.
“얼굴 한번 보고 싶었지. 마누라가 너랑 있으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궁금했거든.”
“위 져스트 톡트.”
“그게 다야? 그런데 왜 죽였지?”
“옥자씨 어디 있어!”
마누라의 바람에 열 받은 사내는 훈에게 정부 살해의 누명을 씌운다. 잡혀가기 직전 훈은 애나가 출감하는 날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다. 2분이 넘는 몽롱한 첫 키스 후 잠깐 수면을 취한 여자. 그러나 눈을 떠보니 남자가 없다. 시계만 남겨두고.
2년이 지나 출감한 여자는 약속장소로 간다. 적막한 카페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 남자.
“하이, 스펜 어 롱 타임.”
쓸쓸한 독백과 희미하고도 아련한 미소. 이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만추>는 여러 번 리메이크된 영화다. 첫 작품은 1966년 문정숙-신성일 주연으로 이만희 감독이 만들었다. 지금은 원본 필름이나 복사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스틸 사진과 스토리로 전해지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지 한일 양국에서 도합 4번이나 리메이크 되었다. 소개한 <만추>는 그 중 마지막으로 리메이크 된 2011년 김태용 감독의 작품이다.
마음을 굳게 닫은 여자와 작업이 직업인 남자. 첫 키스의 미션에 주어진 시간은 최대 72시간이다. 113분으로 압축된 모순(矛盾)의 대결에선 창이 이겼다. ‘작업의 정석’을 꿰고 있는 노련한 제비의 창이 여죄수의 방패를 쉽게 뚫어냈다.
“<만추>는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은 여자와 그 여자가 만난 선물 같은 남자의 이야기다. ‘마음을 여는 그 순간’에 대한 영화다.” - 김태용 감독
김태용 감독은 영화 <만추>를 통해 첫 키스(사랑?)에 긴 시간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저 ‘순간’이라고. 그리고 증명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탕웨이를 낚아채 평생 배필로 삼아버렸으니... 그녀를 연모하던 팬들은 동감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