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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아내/남편
제목 :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아내와 남편
성경 : 벧전 3:1-8
찬송 : 449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416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벧전 3: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세상의 나그네로서 고난당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순교나 대대적인 핍박의 상황처럼 항상 어떤 극적이고 장엄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던 당시의 상황도 교회를 향한 로마 사회의 핍박이 공식화되기 이전이었습니다. 부딪힘과 오해, 적대와 비방, 거절과 따돌림, 불이익과 험담, 이런 갈등들은 거의 대부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고난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일상적인 삶을 그분의 자취를 따라 잘 걸어감을 의미합니다. 일상을 접어두고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을 보내면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실감했습니다. 갑자기 선교지에 가서 순교하겠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교해야 하는 현장은 특별한 선교지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현장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서신을 보면 아내들에게는 여섯 절을 기록하여 권면했고, 남편들에게는 단 한 절만 기록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초점은 불공평한 데 있습니다. 2:22-24절에서 불공평의 절정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들아 순종하라!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남편들에게는 크게 거슬리지 않겠지만, 아내들은 이 본문에 대해 상당히 껄끄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혹시 순복한다고 해도, 남편이 무지막지한 인간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폭력을 행사하거나 못된 짓을 해도 순복해야 한단 말입니까? 성경은 남성우월주의를 가르치는 것입니까?
급한 대로 대답하면, 성경은 남성 우월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악하게 하는 경우, 그것에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아니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본문은 남편이기 때문에 순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2절, 주를 두려워하므로) 그 질서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 곧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 질서는, 남편이 우월하고 아내가 열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사실 당시 흩어진 교회들이 속해 있던 주변의 로마의 문화 속에 퍼져 있었던 사상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남성이 본성적으로 우월하고 여성이 열등하다. 그래서 남성이 지배하는 자이고, 여성은 지배 받는 자가 된다.”고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런 관점은 그레꼬-로망 세계의 ‘집안 규율’을 다루는 데 있어 일반적인 정설로 여겨졌습니다. 유대 전통해서도,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가 여성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지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필로는 뱀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에게 접근한 이유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속아 넘어가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여자는 그 부드러움 때문에 진리를 닮은 그럴듯한 거짓에 쉽게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여성이 생래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논조가 강한 문화적 배경에서,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참으로 색다릅니다. 물론 신약 전반에 걸쳐,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요청은 다르지 않습니다(골 3:1; 엡 5:22-23; 딛 2:5). 하지만 그 이유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논조는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질서이고 역할일 뿐입니다. 아내와 남편 모두가 그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통해 피차 복종하는 관계입니다(엡 5:21, 25-29).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남편과 아내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약한 아내 쪽에 더 많은 권면을 주며, 아내에게 영적, 도덕적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주체적인 역할을 맡기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영적, 도덕적 변화의 열쇠는 그 가정의 가장인 남편이 아니라, 그의 주권 아래 놓여있는 아내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약한 자가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서 ‘이와 같이, 아내들은’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 앞에 있는 문맥을 받는다는 표시입니다. 즉,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분을 ‘목자요 감독으로 삼은 것 같이’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표현하면, ‘그가 인도하시는 길로 가야 하므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써 불의한 고난을 참고 견디는 ‘억울한’ 길이 아닙니까! 자발적인 약함을 통해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사실은 강함의 길이 아닙니까! 악의 횡포 앞에서 도리어 약함으로 그 악의 추악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의 방식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더 확실하게는 21절에서 선포한 대로,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라는 말씀에 걸립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신자가 세상에 사는 이유는 복 받고 잘살게 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혹은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만사형통하게 하려 하심도 아닙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한 가정의 믿는 아내는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생활을 통해 그녀가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21절이 선포한 답은 아닙니다.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은 같습니다. 어떤 부르심입니까? 가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부르심입니다.
말 없는 행실
벧전 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그렇다면 믿는 아내는 어떻게 믿지 않는 남편을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할까요? 본문은 남편에게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로 하지 않고, ‘말없이’ 행동으로 그 남편을 설복시키는 방식을 권면합니다. 특별히 어떤 행동인가 하면,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남편이라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아내의 경우에는 ‘말없이’라는 표현을 넣었을까요? 종들의 경우에는 ‘참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을까요? 그렇다면 아내의 경우는 말을 참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도 ‘말없이 행실로’라는 문구는 우리에게 적실한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상대하면서 말로 복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며 항상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말로만’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나오는데, 믿지 않는 남편을 ‘말씀’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믿는 아내가 ‘말없이; 말로하지 않고’ 그 행동으로 그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게 하는데, 그 복음을 말로 전하지 않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지 않는 남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내들이 자신들에게 순복하는 그 현상뿐입니다. 즉 귀로 듣는 복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들은 믿는 아내들이 믿지 않는 자신들에게 오히려 잘 순복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 놀랍고 신기한 명품(名品)화장법(6~6절)
그렇다면 아내의 ‘정결한 행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핵심을 말한다면 2절에서 언급하고 5절에서 확인하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 자체가 아내의 ‘정결한 행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내의 순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화장을 하고 단장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아마도 우리 여성도님들도 오늘 아침에 예배 참석하러 오실 때 최소 10분이상은 얼굴 화장을 하는데 시간을 소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남편과의 관계에서 여성이 갖는 가장 최고의 아름다움, 화장, 치장, 단장, 그 무엇보다도, 남편이 보고 반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치장은 도저히 ‘당치도 않은’ 남편에 대한 기꺼운 순복이라는 것입니다.
벧전 3: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성들의 단장에 대한 베드로의 권면은 당대의 일반적 가르침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외모를 꾸미는 것은 당시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행위였습니다. 1세기의 초상화와 조각상에서도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상류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세련된 머리치장과 과시적 장식으로 외모를 꾸미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것은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이루어지며 오직 ‘하나님 앞에’ 값진 것입니다. 썩지 아니하는 단장의 특성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1:4)과 연결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은 종말론적 심판자 앞에 선 모습을 연상시킵니다(고후 5:10). 하나님이 종말의 심판 때에 성도들(특히 아내의 역할을 맡은 성도들)에게 찾을 것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특징으로 하는 경건한 성품입니다.
베드로가 장신구 착용이나 머리 장식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 곧 내면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권면의 근거로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예를 언급합니다.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 값진 단장을 했던 거룩한 부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의 삶과 행함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제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리더십에 순종해야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면서까지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거룩한 부녀의 예로 사라를 듭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칭하며 순종했습니다. 성경은 아내에게 남편의 리더십을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인은 불신 남편에게도 두려움 없이 순종하는 선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 여지를 갖게 되고,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단장이 됩니다. 사라의 거룩한 행실을 따르는 자가 그의 딸입니다.
아내와 ‘함께’ 살기(7절)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에 대한 권면과 같이 ‘남편들아 이와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내들에게 권면한 원리를 남편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남편들에게 베드로가 주문하는 바는, 한 마디로 하면 ‘배려와 존중’입니다. 앞서 아내에게는 온유와 화평을 요구했는데, 왜 지금 남편에게는 온유와 화평이 아니라 배려와 존중을 권면할까요?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하고, 사회적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와 화평을 아내에게 강조하는 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아내의 약한 부분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온유의 반대는 사나움입니다. 쉽게 화평을 깨뜨리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에 대하여 배려와 존중에 대한 권면을 받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대하려는 유혹에 훨씬 더 쉽게 빠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아내에게 배려와 존중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사회적으로나 본성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성향입니다. 그래서 지금 본문의 말씀은 사실 남편의 가장 약한 부분이요 또한 가장 악할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리는 셈입니다. 이렇게 아내와 남편에게 각기 강조되는 약한 부분과 그에 해당하는 덕목을 안다는 것은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어떻게 아내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먼저, 본문에는 남편이 아내와 ‘함께 집안 생활을 꾸려나가는’ 자세에서처럼 ‘함께’라는 개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편은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자로 대하여 존중해야 함을 권면합니다. 이처럼 본문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같이 남편이 주인이고 아내가 종으로 여겨지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집안을 만들어 가는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남편이 아내와 ‘함께’ 집안을 꾸려 나갈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잘 알아야 합니다. 동반자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아내가 여성임을 아는 지식을 따라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육체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부부 사이의 뗄 수 없는 이 육체적, 영적 ‘공동성’은 남편의 기도생활, 즉 영적 생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않는데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영적으로 커다란 손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평안하십니까?
하나님이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편의 권위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아내는 남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모든 가족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남편을 존중하며 필요할 때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남편이 불신자인 경우, 성도인 아내는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아내 된 성도는 성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살피며 따뜻하고 안정적인 마음을 갖는 아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아내로 인해 가족들은 기쁨과 쉼을 누립니다. 남편 된 성도는 자신의 아내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이 왜 중요하고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아내를 귀중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아내가 생명이 은혜를 함께 이어 받을 자이며, 부부간의 불화로 기도가 막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항상 천국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