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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코로나의 상황이 종료된 것과 같이,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붑빕니다. 하지만, 코로나의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강원도 철원에서도, 확진자가 첫 발생했다고 합니다. 또, 코로나로 인하여, 매년 열리던 벚꽃 축제가 취소가 되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캠페인을 하지만,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찾던, 윤중로 벚꽃길에서 여의나루 역까지는, 여전히, 벚꽃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성내천 거리도 마찬가집니다. “2미터 거리두기”라는 캠페인 현수막까지 걸렸습니다. 참으로, 코로나는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갔습니다. 완치자들 가운데는, “코로나 트라우마”로 “나 때문에”라는 “죄책감으로 인한 비관”이 생겼고, 또, “코로나 블루”라 하여,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을 겪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모두가 심리적 상처로 인해, 위로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장신대 목회 상담학의 이상억 교수는 “코로나19로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가족이다”면서, “코로나19 이후, 가정폭력, 언어폭력, 신체적 학대와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시 43: 5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오래된 고서이지만, 성경 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의 저서인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에서, “슬픔 속에서 외로워하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과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사람들로부터 버려져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집에서 멀리 떠나 있는 사람들,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서 위험 가운데 있는 사람들, 주여, 은혜로 그들을 도와주옵소서. 저는 주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있음을 압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며, 저에게도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라며, “힘들게 사는 이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이 시기야 말로,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연약한 손을 잡아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 곁에서 “힘내!”라고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파괴했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쇠사슬을 채우고는, 머나먼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힘들었고, 고달팠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삶이었지만, 본문 속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부르고, 구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창 6: 9을 보시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의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순종하는 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위로, 받고자 하는 위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음으로, 더욱 힘찬 생활을 하시며, 이번 고난주간을 거쳐, 영광의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혼자있을 때, 그를 부르고, 창성케 함으로 위로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내게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자가 소수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마치, 마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심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비유로 시작하셨지만, 곧 이어, 풀이해 주셨습니다. 곧, “반석”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묵한 구덩이”는, “이스라엘을 낳은 사라”라고 합니다. 이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이라는 많은 민족의 조상인, “열국의 아비”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혼자였다는 겁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 누구도,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노인이었고, 유랑하는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혼자였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창 28장을 보시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임으로, 두려움 속에 있던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지금, 야곱은 혼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켜 주겠다는 위로를 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일어나자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2미터의 거리를 두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다음의 3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황폐화 된 시온 즉, 예루살렘을 위로하며, 그 곳을 에덴과 같게 하며, 하나님의 동산과 같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이 예루살렘에 이루어졌던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코로나로 인한 염려가운데 있습니다. 코로나가 처음에는, 폐렴이라는 육체적 질고로 찾아왔지만, 이제는, 우리의 심리적 상황까지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다정했던 사이라도, 거리를 두고 만나야 하며, 반가움으로 포옹하거나 악수하던 것이 이제는, 상대에게 염려와 불안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녀를 만남에 있어서도, 2미터의 거리를 두고 만난다는 가족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장신대 기독교 교육학의 이규민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고 싶은 본능이 있다”라며,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 속에서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 속에 살다가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구하는 우리의 본질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에, 우리는 심리적으로, 불안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안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아브라함이 느꼈던 불안이며, 또, 혼자있는 야곱이 느꼈던 불안입니다. 이러한 불안에 대해, 하나님은 2절 끝에서,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의 보이는 표적이, 3절에서 말씀하시는 예루살렘의 회복입니다. 황폐화된 예루살렘이 에덴과도 같고, 하나님의 동산과도 같아지며, 그 곳에서, 사람들의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이, “여호와 삼마”의 자리 즉,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전하는 아브라함의 개인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혼자였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의 근원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없이, 홀홀단신으로 유랑길에 오른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으로 창성케 하셨다면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적은 수이며, 우리가 처한 환경은, 바벨론의 포로라는 비참한 환경이지만,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축복하실 것이라는 희망과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럼,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무리를 이룬 자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면, 그 많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무리를 이룬 자들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창성될 것은 시간문제라는 겁니다. 여러분,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감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시고, 회복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겪는 절망, 염려, 고통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황폐화된 예루살렘을 회복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우리로 하여금, 내일을 바라보며, 마르지 않는 은혜의 강물을 마시며, 새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실 겁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후 1: 10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하며, 딤후 4: 18에서는,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전 세계 위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곳에, “여호와 삼마”로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라며, 위로하십니다.
황폐한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의 약속으로, 이스라엘을 위로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을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로 제시되는, “율법, 공의, 구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확실하니, 의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4절에서의 “공의”와 5절에서의 “공의”가 우리 한글성경으로는 같은 단어로 되어있지만, 원어적으로 보면, 다릅니다. 먼저, 4절에서의 “공의”는 법적용어로, “재판이나 법에서의 의”를 말하며, 다음으로, 5절에서의 “공의”는 도덕적 용어로, “의로움, 정직함으로서의 의”를 말합니다. 이렇게, 법적인 용어와 도덕적 용어가 섞임으로, 강조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4절을 보시면, “내 백성이여 주의하라 귀를 기울리라”며, 하나님의 말씀듣기에 집중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문 속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제는,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5절을 보시면,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때에 행해지는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입니다. 이러한 순종은, 우리나라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전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받는 자에게는, 구원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본문 이하의 6절을 보시면,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견고하며, 확신에 차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속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공식 종료될 것에 대해 확신을 합니까? 지금, 우리나라와 전 세계를 덮고 있지만, 곧, 그 세력을 잃고, 종식될 것을 확신합니까? 주중교회의 연제국 목사는, “코로나 사태가 지나간 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찾아오는 변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고 했습니다. 또, 이규민 교수는, “코로나 이전의 프리 코로나 시절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외쳤다면, 지금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를 외친다. 그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외침은 무엇일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코로나가 지금은, 아무리 강하게 확산된다할지라도, 그 종식은 반드시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선악과 사건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의 환경이 파괴되었고,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약에서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한 구원역시, 실패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부활로 인하여, 빈 무덤을 만들었고, 창세기에서 닫혔던 에덴은,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개장하여, 다시 열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진행에 있어서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습 3: 17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를 보시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합니다. 또, 아삽은, 시 73: 28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코로나에 대한 방역실천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각 가정에서, 가정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주간에 있게 될 고난 주간 특별 새벽 기도회와 부활 주일 새벽 기도회는, 예배당에서 드리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코로나로 인하여, 비록, 사회적으로 거리두기, 2미터 거리두기를 외치며, 실천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두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바라며, 아삽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복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합니다. 주변 환경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위로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바라는 신실한 자들에게, 확신에 대한 위로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1절과 비교해 보면, 1절에서는,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으로 시작했으나, 본문에서는,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으로 시작합니다. 1절과 7절의 차이는,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서 구하는 “구도자”와 하나님을 찾아서 알고 결단한 “결신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결신자는, 바벨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신실하게 살아온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 곳의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조소, 훼방, 비난, 핍박의 고통을 경험했고, 때로는, 낙심하기도 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십니다. 그것이, 8절의 “좀에게 먹히는 옷”과 “벌레에게 먹히는 양털”에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허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은, 세세토록 영원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지난 주 중에, 현재 교회의 사역자로 사역하시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자신은, 약 30년 전인 20대에는 하나님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신학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을 통해 들은, 사역에 대한 그 분의 열정이 뜨거웠기에, 아직은, 사역의 초기에 있지만, 그 분과 만난, 그 시간이 참으로 소중했습니다. 그 분을 대하는 가운데, 지난 나날 속에서 비춰진, 신학생들의 모습으로 실망했던 것에 대해, 위로를 받으며, 아직은 이러한 사역자들이 있기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의 말처럼, 저 역시, 제가 이렇게, 제 삶의 대부분 시간들을, 복음을 전하는 목회 현장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꾸었던 청운몽이 있었고, 그것을 향해 달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그 청운몽은 “좀에게 먹히는 옷”과 “벌레에게 먹히는 양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만이 저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저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저와 그 사역자를 위해 준비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위해서도 준비하셨고, 우리 신목교회를 위해서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 10: 28을 보시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또, 지금의 시대적 상황이 우리를 어렵고 힘든 자리로 몰고 가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것은, 우리를 향해 펼치신 하나님의 팔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코로나로 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날마다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다음 한 주간도 더욱 힘차게 생활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