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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예수회가 경영하는 콜롱고우스 우드 기숙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서민적인 예수회 계통 학교인 더블린 밸비디어 학교로 옮겼다. 1898년부터 1902년까지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다녔고, 1902년 현대어문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가 1904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일시 귀국했지만, 그해 노라 바나클이라는 여인과 함께 다시 유럽 대륙으로 떠났다. 1909년 아일랜드를 두 번 방문한 후 유럽 대륙의 트라에스테, 로마, 파리, 취리히 등을 돌아다녔다. 1914년 그의 첫 작품 <더블린 사람들>이 출판되었고, 1916년에 발표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문단에서 인정받았다. 40세 되던 해인 1922년에는 <율리시스>를 발표해 미국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말년에 알코홀 중독, 백내장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다가 1941년 취리히에서 십이지장 천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자매]
신부님이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벌써 세 번째 발작이니 말이다. 밤마다 나는 그 집을 지나치며(마침 방학 때였다)불 켜진 네모난 유리창을 살펴보았는데, 그때마다 불빛은 어슴푸레하고 은은했더랬다.
신부님이 돌아가시면 필경 어두워진 차양에 촛불 비치는 걸 보게 되려니 여겼는데, 시신 머리맡에 으레 촛불 두 개를 켜 두는 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이 세상 뜰 때가 다 됐어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곤 했지만, 난 그저 괜한 소리겠지 했더랬다. 이제 보니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밤에 유리창을 쳐다볼 때면 나는 으레 ‘마비‘라는 단어를 속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그 단어의 소리는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의 그노몬(평행사변형에서 한 각을 공유하는 닮은꼴을 떼어 낸 후에 남는 도형)이나 교리문답에 나오는 성직매매라는 단어처럼 언제나 귀에 설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어떤 죄 많은 못된 존재의 이름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그 단어를 떠올리면 공포심에 사로잡히면서도, 나는 그 곁에 더 바짝 다가가 그 마비란 놈이 저질러 놓은 죽음의 모습을 보고 싶어 애가 탔다.
저녁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코터 영감이 불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내 오트밀 죽을 푸는 동안 영감은 뭔가 하다 만 일을 잇듯이 말했다. 아니, 딱 부러지게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뭔가 괴이한 구석이..... 뭔가 불가사의한 구석이 신부님한테는 있었다니까.... 무슨 소리냐 하면..... 영감은 파이프를 뻑뻑 빨아대기 시작했는데, 영락없이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폼이었다. 지겨운 바보 영감 같으니!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영감이 하등 주정이니 증류기 나선관이니 하고 떠들어 대는 얘기는 그런대로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나는 이내 영감에게도, 끝없이 이어지는 영감의 양조장 얘기에도 싫증이 났다.
거기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이론이 있지. 영감은 말했다. 내 생각에 그건 그런....특이한 경우에 해당해....하지만 말로 옮기기가 어렵구먼....
영감은 우리한테 자기 이론은 들려주지 않고 다시 파이프를 빨아 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나에게 말했다. 그래. 네 노인 친구가 세상을 뜨셨다는구나. 네가 들으면 서운해 할 말이다 만. 누구요? 폴린 신부님 말이다. 신부님이 돌아가셨다고요? 여기 계신 코터 씨가 방금 알려 주셨단다.
아저씨가 코터 영감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 아이하고 신부님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답니다. 말도 마세요. 그 노인 양반이 저 애에게 가르쳐 주신 게 어찌나 많은지요. 사람들 말이, 저 애를 그렇게 예뻐하셨다는 군요.
코터 영감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벽난로 속으로 침을 퉤 밷으면서 말했다. 나 같으면 내 애들이 그런 사람과 너무 많은 얘기를 나누게 놔두지는 않을 거요.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코터 씨?” 코터 영감이 말했다. 내 말은 애들한테 좋을 게 없다는 거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린아이는 같은 또래 어린아이들과 뛰어다니며 놀게 해야지 , 행여.... 내 말이 맞나, 잭?
방안은 어두운데 그 중풍환자의 무거운 잿빛 얼굴이 상상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나는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잿빛 얼굴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중얼대는 모습이 내게 무언가를 고백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 영혼이 어떤 기분 좋고도 사악한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나 싶었는데, 거기서도 다시 그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얼굴은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고백하기 시작했는데, 미소는 왜 자꾸 지으며, 입술은 또 왜 그토록 침으로 젖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 얼굴이 마비로 죽었다는 생각이 떠오르더니, 그 성직매매자의 죄를 사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 또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잇는 것을 느꼈다.
부고장을 읽고 나니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왔고, 문득 심란해진 마음에 발길이 멈췄다.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나는 가게 뒤에 딸린 작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그분이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쓰고 불가 안락의자에 앉아 계신 모습을 찾으려 했을 터였다.
저녁에 아주머니는 나를 데리고 상가를 찾아갔다. 해가 진 뒤였으나, 서향집들의 창살은 거대한 구름층의 황갈색 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내니 할머니가 현관에서 우리를 맞았는데, 큰 소리로 말하는 건 경우가 아닌지라 아주머니는 할머니 손을 잡고 흔들어 주는 것으로 모든 할 말을 대신했다. 내니는 손짓으로 2층에 올라가 보겠느냐고 물어본 다음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앞에서 비좁은 층계를 끙끙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숙인 키가 난간 가로대 높이도 채 안되었다.
신부님은 이미 입관되어 있었다. 내니가 앞장을 선 가운데 우리 셋은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기도하는 척했지만 내니의 중얼거림에 산만해진 나머지 생각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내니의 치마가 등에 어설프게 매여 있는 꼴이라든지 헝겊 장화 뒤축이 온통 한쪽으로만 닳은 꼴이 눈에 들어왔다. 늙은 신부님이 저기 관속에 누워 미소 짓고 있는 환상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니었다. 우리가 일어나 침대 머리로 다가가서 보니 신부님은 미소 짓고 계시지 않았다. 신부님은 마치 제식을 치를 것처럼 신부복 차림으로 근엄하고 육중하게 누워 계셨는데, 커다란 두 손에는 성배가 살며시 쥐여 있었다. 얼굴은 아주 험상궂고 잿빛에다가 큼직했으며, 콧구멍이 시꺼멓게 뻥 뚫려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성긴 털이 하얗게 나 있었다. 방안에 무겁게 감도는 냄새의 출처는, 다름 아닌 꽃이었다.
내니는 내가 거절하자 다소 실망한 눈치를 보이더니 조용히 소파로 건너가 언니 옆에 앉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텅 빈 난로만 바라보았다. 일라이저가 한숨을 짓고 나서야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하기야 더 좋은 세상으로 가셨으니까요.”
일라이저는 마치 흘러간 시절과 얘기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멈추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요, 요사이 제임스에게 무언가 희한한 일이 일어난 눈치였다오. 내가 스프를 들여올 때마다 제임스는 시도서를 마룻바닥에 떨군 채 의자에 누워 입을 떡 벌리고 있었거든요. 일라이저는 손가락 하나를 코에 갖다 대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형편인데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여름이 가기 전에 날을 잡아 오로지 우리 모두가 태어난 아이리시 타운의 옛날 집 하나를 다시 보자고 마치 여행을 떠나겠다면서 나랑 내니도 태워 주겠다는 거예요. 오루크 신부님이 귀띰해 주신 그 소음 없는 신식 마차, 그러니까 바퀴에 바람 넣는 그런 마차를 저기 길 건너편에 있는 조니 러시 마차 대여소에서 값 싸게 할 세내어 일요일 저녁에 우리 셋이 함께 타고 가자고 말이예요. 그렇게 타령을 해 댔건만.... 가엾은 제임스!
언제나 너무 꼼꼼했지요. 일라이저는 말했다. 신부에게 딸린 책임이 너무 컸던 거예요. 그러더니만 인생이, 말하자면 꼬인 거지요. 그래요, 하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실의에 빠진 분이었어요. 빤한 일이지요.
우리는 일라이저가 입을 떼기를 공손하게 기다렸다. 한참을 쉬고 나서 이윽고 일라이저가 천천히 말했다. 그 복사 소년이 성배를 깬 탓이에요.... 그게 발단이라고요. 물론 사람들 말이야, 깨진 건 상관없다, 성배에는 아무것도 안 들어 있지 않느냐고들 하긴 했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 말이 그 아이 탓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불쌍한 제임스는 원체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으니, 하나님, 제임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심적인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 이후로 혼자 의기소침하게 지냈지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기만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심방 요청이 들어와 찾아봤더니 아무 데에도 없는 거예요. 여기도 찾아보고 저기도 찾아보고, 어디를 둘러봐도 그림자도 안 보이는 거예요. 결국 서기 말대로 예배실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했지요. 그래서 열쇠를 찾아 예배실 문을 열고 서기랑 오루크 신부님이랑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신부님 한 분이랑 제임스를 찾으러 등물을 들고 들어갔더니만.... 세상에, 아니나 다를까, 말짱하게 뜬 눈으로 혼자 웃는 것처럼 고해소 어둠 속에 덩그러니 가만히 앉아 있지 뭐예요.
[마주침]
우리에게 무법 서부 예기를 처음 해 준 건 조 딜런이었다. ~~~매일 저녁 학교가 끝나면 우리는 조네 정원에 모여 인디언 전쟁놀이를 짰다. 우리는 조와 조의 뚱뚱한 동생인 게으름쟁이 리오가 차지하고 있는 마구간 건초더미 구역을 빼앗으려고 기습 공격을 하기도 했고, 풀밭에서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조가 사제직을 지망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어느 날 버틀러 신부가 ‘로마사‘ 네 쪽을 보여주고 있을 때 칠칠치 못한 리오 딜런이<시시한 기적>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고 말았다. ~~~이 잡스러운게 뭐야? <아파지 추장>이라니! 로마사는 공부 안 하고 이걸 읽었단 말이냐?
그러다가 나는 여름방학을 얼마 안 남기고 단 하루만이라도 학교생활의 지겨움에서 벗어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워프 거리를 따라 배 있는 데로 간 다음,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피전 하우스 발전소를 보러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노스 스트랜드 거리를 따라 황산염 공장까지 걸은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 워프 거리를 따라 걸었다. ~~~우리는 노동자 두 명과 가방을 든 자그마한 유태인 한 사람이 함께 탄 나룻배에 삯을 내고 리피 강을 건넜다.
벌판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가 말없이 한참을 둑 위에 앉아 있는데 벌판 저쪽 끝에서 웬 사내가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잿빛 콧수염으로 보아 나이가 꽤 되려니 싶었다. ~~~사내는 우리 옆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네 왔다. ~~~사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웃는 입속을 가만히 보니 누런 잇새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때 사내는 우리 중에서 누가 더 애인이 많은지 물었다. ~~~사내는 미소 지으며 자기는 우리 나이 때 애인이 많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내애들은 모두 어린 애인이 있는 거야. ~~~사내는 우리에게 여자애들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머리카락이 기막히게 곱고, 손이 부드러우며, 모두가 제대로 알고 보면 겉보기만큼 좋은 건 아니라는 따위의 이야기였다. 자기는 멋진 젊은 여자의 멋진 흰 손이라든지 아름답고 고운 머릿결을 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고도 했다. 사내는 마음속에 외워 둔 무엇을 반복하고 있거나, 자신의 연설에 사용된 어떤 말들에 스스로 도취되어 같은 궤도를 마음속에서 천천히 끊임없이 돌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니! 저 사람 하는 짓 좀 봐!
~~~~아무래도 괴상한 꼰대야!
부득이 가야겠다는 말과 함께 직별 인사를 건넸다. 비탈을 태연하게 올라갔지만, 사내가 내 발목을 잡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애러비]
노스 리치먼드 거리는 막다른 길이어서 크리스천 브라더스 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을 빼고는 조용한 거리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2층집이 정방형 터에 있는 옆집들과 동떨어진 채 막다른 길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리의 다른 집들은 안에 사는 이들이 영위하는 점잖은 생활을 의식하며 차분한 갈색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 집의 전 거주자였던 신부는 안쪽 응접실에서 죽었다. 오래도록 닫혀 있었던 탓에 쾨쾨해진 공기가 방마다 감돌고 있었고, 쓰지 않는 부엌 뒷방에는 낡아서 폐품이 되어버린 종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착장이 눅눅하고 꼬부라진, 종이 표지의 책 몇 권을 찾아냈는데, 월터 스콧이 쓴 <대수도원장과>과 <경건한 성체 배령자>, <비독 회고록> 따위였다. 마지막 책이 제일 좋았던 것은 책장이 노란색이기 때문이었다. 집 뒤에 있는 황폐한 정원에서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관목 몇 그루가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고, 나는 그중 한 그루 아래에서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전 거주자의 녹슨 자전거펌프를 찾아냈다. 그분은 매우 온정이 넘치는 신부였는데, 유서를 통해 가진 돈 전액을 여러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가구는 누이에게 물려준 터였다.
낮이 짧은 겨울철이 오면 저녁을 채 먹기도 전에 어둠이 깔렸다. ~~~누나가 우리를 기다릴 때, 삐죽이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에 누나의 몸매가 뚜렷한 윤곽을 짓고 있었다. 동생은 항상 약을 올리고 나서야 누나 말에 따랐고, 나는 난간 옆에 서서 누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침마다 앞쪽 응접실의 바닥에 누워 맹건 누나네 문을 바라보았다. 내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새시에서 3센티미터도 안 되게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말이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신부가 죽은 안쪽 응접실로 들어갔다. 어스름 속에 비 내리는 저녁, 집 안은 쥐 죽은 듯했다.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는 빗줄기가 흥건한 땅바닥에 뿌려지는 소리가 깨진 창 하나를 통해 들릴 뿐이었다. 멀리서 등인지 불빛 어린 창인지 무언가가 내 아래로 반짝였다. 눈앞이 아예 안 보이다시피 했고,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내 모든 감각이 숨어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그 감각으로부터 막 빠져나올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나는 두 손바닥을 떨리도록 꼭 쥐고 “오, 사랑! 오, 사랑!”하며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마침내 맹건내 누나가 말을 걸어왔다. 누나가 내게 첫마디를 걸어왔을 때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는 내게 ‘에러비’에 갈 거냐고 물었다. 대답을 간다고 했는지 안 간다고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누나는, 멋진 바자 일 텐데 못 가게 돼서 아쉽다고 했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못 가?”
그날 저녁 이후로 나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생각에 자나깨나 머릿속이 어지러웠던가! 그날까지 남은 날들을 쓸어내 버리고 싶었다. 학교 공부가 짜증스러웠다. 밤이면 침실에서 낮이면 교실에서, 책을 읽으려고 애쓰는 내 눈앞에 맹건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러비라는 단어의 음절들이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던 정적을 뚫고 나타나 동방의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역을 향해 버킹엄 거리를 잰 걸음으로 걸으며 플로린 은화 한 닢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에블린]
처녀는 창가에 앉아 저녁이 한길을 엄습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는 유리창 커튼에 기댄 채였고 콧구멍 속에는 먼지 낀 크레톤 천의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처녀는 피곤했다.
행인이 뜸했다. 거리 끝에 있는 집에서 나온 남자가 귀가하느라 지나갔는데, 그 발걸음 소리가 콘크리트 포도를 따라서 타박타박 들리다가, 뒤이어 새로 지은 붉은 집들 앞 석탄재 깐 길에서는 저벅저벅 소리가 들렸다.
처녀의 아버지는 종종 인목 지팡이를 들고 아이들을 빈터에서 쫓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곤 했지만, 대개 꼬마 키오가 망을 보다가 처녀의 아버지가 오는 게 보이면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제법 행복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못살게 굴지 않은 데다, 어머니도 살아 있었으니까. 하긴 그것도 먼 옛날의 일이다. 이제 처녀와 남매들이 다 컸고, 어머니는 세상을 뜬 것이다. 티지 던도 죽었고, 위테네도 잉글랜드로 돌아간 터였다. 모든 것이 변한다. 이제 처녀도 남들처럼 멀리 떠날 참이었다. 집을 두고 말이다.
처녀는 멀리 떠나가자는 말에 동의를 해버린 터였다. 집을 두고 말이다. ~~~요즘 들어서는 아버지가 죽은 어머니 생각만 아니라면 벌써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며 처녀를 욱박지르기 시작했다.
처녀는 바야흐르 프랭크와 함께 또 다른 삶을 개척할 참이었다. 프랭크는 매우 다정하고 씩씩하고 솔직했다. 처녀는 프랭크의 아내가 되어 자기를 기다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집에서 함께 살기 위해 그를 따라 밤배를 타고 멀리 떠날 참이었다.
먼 타국에 가면, 딴판이겠지. 그때는 결혼한 신분이 되어 있을 테니까. 자기, 에블린이 말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자기를 공손하게 대해 줄 것이다. 과거 어머니 같은 취급을 받지는 않으리라. 열아홉이 넘은 지금도 아버지한테 손찌검을 당할 위험을 느낄 때가 간혹 있다. 가슴 두근거리는 병이 생긴 것도 그 탓임을 왜 모를까. 한참 나랄 때만 해도 여자인 자기한테 아버지가 해리나 어니스트 오빠에게 하듯이 달려든 적은 없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아버지가 죽은 어머니 생각만 아니라면 벌써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며 처녀를 욱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처녀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니스트 오빠는 죽었고, 교회 장식 일을 하는 해리는 어느 시골 구석에 내려가 아예 붙박이로 지내다시피 했다.
처녀는 자신이 번 급료 7실링을 몽땅 내놓았고, 해리 역시 항상 힘닿는데까지 돈을 보내왔지만, 아버지한테서 한 푼이라도 받아 내기란 예삿일이 아니었다.
거리에 저녁이 깊어 갔다. 무릎 위에 놓인 편지 두 장의 흰 색이 희미해졌다. 한 장은 해리에게, 또 한 장은 아버지에게 쓴 것이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었지만 처녀는 유리창 휘장에 머리를 기댄 채 먼지 낀 크레톤 천 냄새를 들이마시며 창가에 눌러앉아 있었다. 한길 저 멀리에서는 거리의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곡이었다.
처녀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공포를 느끼며 일어섰다. 탈출 하는 거야! 탈출해야 해! 프랭크가 구해 줄 거야. 정말이지 제대로 살고 싶었다.
처녀는 노스윌 부두 역에서 물결치는 군중의 틈바구니에 서 있었다. 청년이 처녀의 손을 잡았고, 처녀는 청년이ㅐ 선박 여행에 대해 뭐라고 자꾸 뇌까리며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배는 처량한 고동 소리를 길게 안개 속으로 불어 댔다.
종소리가 쨍하고 가슴 위에서 울렸다. 처녀는 청년이 손을 잡아 오는 걸 느낀다. 어서! 세상의 모든 파도가 처녀의 심장 주위에서 곤두박질쳤다. 청년이 처녀를 그 파도 속에 끌어들여 빠뜨릴 참이었다. 처녀는 양손으로 철제 난간을 움켜잡았다. 어서! 안돼!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처녀의 두 손이 쇠 난간을 미친 듯이 꽉 움켜잡았다. 처녀는 파도에 휩싸여 한마디 고뇌의 비명을 질렀다. 에블린! 에비! 청년은 철책 너머로 뛰쳐나가 처녀에게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경주가 끝난 뒤]
차들이 더블린을 향해 나스 거리의 바퀴자국을 따라 총알처럼 고르게 질주해 들어왔다. 인치코의 고갯마루에서 구경꾼들은 차들이 결승점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빈곤과 무기력에 찌든 이 경주로로 유럽 대륙은 부와 산업의 결정체를 몰고 들어왔다. 벌떼같이 모인 사람들은 억압받는 것도 고마운지 때때로 환호성까지 질러 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응원하는 대상은 파란 차들, 즉 우방 프랑스에서 온 차들이었다.
이 미끈하게 빠진 차들 중 한 대에는 일행인 청년 네 명이 타고 있었는데 현재의 의기양양한 태도는 성공한 프랑스인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청년은 대략 스물여섯쯤 되는 나이에 브드러운 연갈색 구렛나룻과 다소 순진해 보이는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청년의 아버지는 킹스타운에 정육점을 차려서 돈을 버는가 하면, 더블린과 그 근교에 가게를 내서 몇 차례나 더 돈을 벌었다. ~~~아들을 영국으로 보내 큰 가톨릭 대학에서 공부하게 했고, 그 후에도 다시 더블린 유니버시티에 보내 법학을 공부시켰다.
지미가 세구엥을 만난 것은 바로 케임브리지에서였다. 아직은 그냥 아는 사이에 불과했으나, 견문이 매우 넓은 데다 프랑스에서 제일 큰 호텔 몇 개를 소유했다고 소문난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지미는 큰 낙으로 삼았다. ~~~차는 흥에 겨운 젊은이들을 싣고 유쾌한 질주를 계속했다.
네 사람은 데임 거리로 차를 몰았다. 거리는 때 아닌 교통 혼잡을 이루고 있었고, 자동차 경주자들의 경적과 짜증난 전차 운전사들이 울려대는 종소리로 시끄러웠다. 세구엥이 아일랜드 은행 근처에 차를 세우자 지미와 친구들이 내렸다. 사람들 몇이 보도로 모여들어 부릉거리는 자동차에 경의를 표했다.
만찬은 탁월하고 훌륭했다. 지미는 세구엥이 매우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했다. 모임에는 전에 키임브리지에서 세구엥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미가 본 적 있는 루스라는 영국 청년이 합석했다.
카드 하자! 카드! 테이블을 치웠다. 빌로나가 조용히 피아노로 돌아가 오르간 독주곡을 쳐 주었다. 나머지는 과감하게 모험 속으로 몸을 던지며 끊임없이 놀음을 했다. ~~~판이 매우 커졌고 차용증서가 돌기 시작했다. 지미는 정확히 누가 따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달리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수시로 카드를 잘못 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차용증서 금액을 대신 계산해 줘야 할 정도였으니까. 참 대담한 친구들이다만, 시간도 늦어지고 있는데 이제 그만 했으면 싶었다. 누군가가 뉴포트의 미녀라는 이름이 붙은 이 요트에 건배하자고 제안했고 그러자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한판 크게 벌이자고 제안했다. 피아노가 이미 멈춘 것으로 보아 빌로나는 갑판으로 올라간 눈치였다. 지독한 판이었다. 청년들은 판이 끝나기 직전에 게임을 잠시 멈추고 행운을 비는 뜻으로 한 차례 건배했다. 지미는 그 판이 루스와 세구엥 사이의 싸움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팔리와 지미가 가장 많이 잃었다.
지미는 아침이 오면 후회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지만 당장은 다른 일들이 기뻤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덮어 줄 캄캄하고 멍한 머리가 기뻤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관자놀이의 맥박을 셌다. 객실 문이 열려서 바라보니 어슴푸레한 빛줄기 속에 헝거리 청년이 서 있었다. “동이 틉니다, 여러분!”
[두 건달]
따스한 회색빛 8월 저녁이 이미 도시에 깔려 있었고 포근하고 따스한 공기가 여름의 기억이 되어 거리에 맴돌았다. 일요일의 휴식을 위해 셔터를 내린 거리는 옷차림 밝은 군중으로 붐볐다.
두 젊은이가 러틀랜드 광장의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한 젊은이는 혼자서 한참 떠들어 댄 긴 이야기를 막 끝내 가는 참이었다. 보도 가장자리로 걸어가던 다른 젊은이는 무례한 친구에게 밀려 수시로 찻길로 내려서곤 하면서도 흥미롭게 듣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땅딸막하고 혈색이 불그레했다. 요트 모자가 이마에서 한참 뒤로 젖혀져 있었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물결치는 얼굴 표정을 코와 눈과 입의 언저리에서 터뜨리고 있었다. 배꼽을 쥔 몸에서는 킥킥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교활한 즐거움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친구의 얼굴 쪽을 쉴 새 없이 흘낏거렸다.
친구의 장광설이 끝난 것을 확신한 젊은이는 족히 삼십 초를 소리 없이 웃어 대고 나서 말했다. “야!....기막힌 얘긴걸!” 목소리에 박력이 모자라다 싶었는지 하던 말에 힘을 실으려고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별나고 희한하고, 뭐랄까, 기발하기까지 한 얘기야!”
레너헌이 물었다. 그래, 콜리. 자네, 그 여자를 어디서 낚었나? 콜리는 웹술을 혀로 날름 핥으며 말했다. 어느날 밤 말이지,.....
콜리는 경찰 수사관의 아들로 아버지의ㅐ 풍채와 걸음걸이를 물려받았다. 손을 허리춤에 얹고 몸은 꼿꼿이 한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걸었다.
둘은 나소 거리를 따라 걷다가 킬데어 거리로 접어들었다. 클럽 회관 현관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로에서 한 악사가 조그맣게 빙 둘러선 청중을 상대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다. 악사는 건성으로 현을 뜯으면서 사람이 새로 올 때마다 이따금 얼굴을 날쌔게 힐끗거리기도 했다.
콜 리가 말했다. “저기 있다!” 흄 거리 모퉁이에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푸른색 옷과 흰색 세일러 모자 차림이었다. 연석 위에 서서 한 손에 양산을 흔들고 있었다. ~~~그럼 잘해 봐. 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양산을 더욱 빨리 돌리며 발뒤꿈치로 몸을 반쯤 돌렸다.
11월이 되면 벌써 서른이 아닌가. 번듯한 일자리는 끝내 물 건너간 것인가? 오봇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생각은 공염불이란 말인가? ~~~친구나 여자들하고 거리를 쏘다니는 일은 이제 이력이 났다.
생각이 다시 바빠졌다. 콜 리가 성공적으로 일을 성사시켰는지 궁금했다. ~~~~어이 콜리. 콜리는 누가 부르나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전처럼 걸음을 계속했다. ~~~~어이. 콜리! 하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찌 됐어? 일은 잘 풀렸나? 콜리는 첫 번째 가로등에서 멈추더니, 꼼짝 않고 앞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엄숙한 동작으로 불빛을 향해 한 손을 뻗은 채 미소 띤 얼굴로 추종자의 눈앞에 천천히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에서 조그마한 금화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숙집]
무니 부인은 푸줏간 주인의 딸이었다. 매사 알아서 척척 해내는, 말하자면 다부진 여자였다. 아버지 밑에 있던 십장과 결혼하여 스프링 가든스 근처에 푸줏간을 차렸다. 그러나 무니씨는 장인이 죽자마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술독에 빠지고, 금고에 손을 대더니 삽시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금주 맹세를 시켜 보았지만 그도 헛된, 며칠을 못 가 다시 버릇이 터져 나왔다. 고객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와 싸움질을 하지 않나, 상한 고기를 사지 않나, 장사 망치는 일만 골라서 했다. 어느 밤에는 큰 식칼을 들고 달려드는 바람에 무늬 부인은 이웃집에서 자야 했다.
그 후로 부부는 따로 살았다. 무니 부인은 신부를 찾아가 아이들 양육권과 함께 별거 허락을 얻어냈다. 무니 부인이 돈이고 음식이고 잘 방이고 일체 끊어 버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남편은 군청의 사환 자리로 들어갔다.
푸주간 장사에서 그나마 남긴 돈으로 하딕 거리에 하숙집을 차린 무니 부인은 몸집이 위압적으로 큰 여자였다. 부인의 집에 묵는 뜨내기손님들은 리버풀이나 만 섬에서 온 관광객들이었고, 개중에는 음악당에서 온 연예인들도 더러 있었다. 붙박이 하숙인은 시의 관리들이었다. 부인은 하숙집을 영악하고도 야무지게 관리했고, 외상을 줄 때가 언제인지, 엄하게 할 때가 언제이고 대충 눈감아 줄 때가 언제인지를 알았다. 붙박이 하숙 총각들은 모두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일컬었다.
무니 부인의 하숙집 총각들은 숙식비로 주당 15실링을 냈다. 하숙 총각들은 취향과 직업이 같다 보니 서로 사이가 아주 좋았다.
부인의 아들인 잭 무니는 플리트 거리에 있는 중계업체 직원으로 망나니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폴리는 날씬한 열아홉 살 처녀로, 밝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작고 도톰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폴리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면 회색 바탕에 푸른빛이 감도는 눈을 위로 치뜨는 버릇이 있어서 마치 심술 굿은 어린 숙녀처럼 보였다.
무니 부인은 문득 폴리와 한 총각 사이에 감도는 수상한 기미를 눈치 챘다. 부인은 두 사람을 예의 주시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더위가 가까웠지만 아직은 바람이 시원한 초여름의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하숙집의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젖혀져 있었고, 레이스 달린 커튼은 올려진 창 틀 아래에서 거리 쪽으로 살며시 부풀어 있었다.
무니 부인은 생각에 잠긴 가운데서도 조지 교회의 종소리가 멎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벽난로 위의 자그만 도금 시계에 힐끗 눈길을 던졌다.
부인은 메리를 도런 씨에게 올려 보내 상의할 일이 있다는 말을 전하기 전에 모든 수를 읽어보았다. 승산은 확실했다. 도런은 진지한 청년으로 방탕하거나 허세 부리는 다른 청년들과는 달랐다. ~~~커다란 가톨릭 주류상에서 일한 지가 십삼 년이나 되는 도런의 처지에서 소문이 났다 하면 필경 직장에서 모가지가 떨어질 판이었다. 밤면에 합의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도런 씨는 주일인 이날 아침 정말이지 매우 초조했다. 두 차례나 면도를 시도해 보았으나 어찌나 손이 떨리는지 결국엔 단념하고 말았다. ~~~신부는 염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황당할 만큼 꼬치꼬치 캐묻자 못해 급기야는 그의 죄를 어찌나 부풀리던지 보상이라는 구멍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 되례 고마울 지경이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폴리와 결혼하거나 아니면 달아나는 것뿐, 이제 와서 달리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잡아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살림 차릴 돈이야 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집안에서 폴리를 업신여길 터였다. 무엇보다도 폴리에게는 평판 나쁜 아버지가 있었고 거기에다 폴리 어머니의 하숙집에 대해 모종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도런이 셔츠에 바지 바람으로 대책 없이 침대 가까이에 앉아 있는데 폴리가 살며시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폴리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남김없이 털어놓았으며 어머니가 그날 아침 도린과 담판을 지을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다 해 주었다.
도린이 야심한 시각에 들어올 때마다 저녁 식사를 데워 놓은 것도 폴리였다. 모두가 잠든 집에서 폴리가 홀로, 그것도 밤에,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느끼면서 식사를 하다 보면 무얼 먹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마음 씀씀이는 또 어떠했던가! 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하는 밤이면 어김없이 조그만 펀치 한잔을 어떻게든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폴리는 잠시 침대 가에 앉아 울었다. 그러더니 눈물을 흘리고는 거울 있는 데로 갔다. ~~~~마침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폴리는 벌떡 일어나 계단 난간으로 내달렸다. 폴리! 폴리! 네, 엄마? 얘 좀 내려오렴. 도런 씨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구나. 그제야 비로소 폴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생각이 났다.
[작은 구름]
팔 년 전 노스윌 부두에서 배웅하면서 행운을 빌어 준 친구였다. 갤러허는 출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박식해 보이는 태도라든지, 마름 잘된 트위트 양복이라든지, 당당한 말씨만 보아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만한 재능을 가진 친구도 드물었지만, 그렇게 출세하고도 좋은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꼬마 잰들러는 점심때부터 내내 갤러허와 만날 일, 갤러허의 초대, 갤러허가 살았다는 대도시 런던 따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꼬마 잰들러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평균 키보다 별로 작지 않은데도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있었다. 손이 희고 작았으며, 몸집은 가냘팠고, 목소리는 조용했으며, 태도는 세련되었다. 비단결 같은 금발과 구레나룻을 지극히 세심하게 보살폈고 손수건에는 향수를 지나치지 않게 뿌렸다. 속손톱은 완벽했고 웃을 때면 어린애같이 하얀 이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킹스 인스의 책상에 앉아서 꼬마 챈들러는 지난 팔 년 동안 달라진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남루하고 궁색한 차림으로만 알고 지내던 친구가 런던 언론계의 총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꼬마 챈들러는 따분한 필기를 하다 말고 수시로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늦가을 석양빛이 잔디 구역과 보도를 덮고 있었다. 석양빛은 옷차림이 말쑥하지 못한 간호원들과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쇠약한 노인들 위에 포근한 금가루를 쏟아 부었고, 움직이는 모든 형체 위에, 자갈길을 소리 지르며 뛰어가는 아이들 위에도, 정원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사람들 위에도 아른거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하다 보니, (인생을 생각할 때는 늘 그랬듯이) 슬퍼졌다. 슬며시 서글프고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운명에 맞서 발버둥 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인가 싶었던 것인데, 이는 세월을 통해 반복해서 터득한 지혜였다.
꼬마 챈들러는 자기 집 서가에 꽃힌 시집들이 떠올랐다. 총각 시절에 사 두었던 것들로, 저녁에 현관에서 떨어진 작은 방에 앉아 잇을 때면 수시로 한 권을 서가에서 꺼내 어떤 대목을 아내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늘 멋쩍은 나머지 그러질 못하고, 그러다 보니 시집들은 그냥 서가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따금 시 몇 줄을 혼자 되풀이해서 읽어 보곤 하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이제 서른 둘, 아직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기질적으로는 이제 막 성숙의 절정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운문으로 표현하고 싶은 상이한 기분과 인상이 너무나 많았다. 마음속으로 그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영혼이 시인의 영혼인지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우수가 자기 기질의 주조를 이루고 있으나, 그건 반복되는 신념과 체념과 단순한 환희에 의해 빛이 바랜 우수였다. 만일 그것을 한 권의 시집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줄 터였다. 결코 인기를 끌지는 못하리라는 것, 그쯤이야 알고 있었다. 대중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질이 비슷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야 호소력이 있을 터인데, 영국의 비평가들이라면 아마도 자신의 시가 지닌 우수 어린 어조를 보고 켈트파로 쳐주겠지. 어디 그뿐인가. 꼬마 챈들러는 인유(引喩)도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자신의 책에 내려질 서평에 들어갈 만한 문장과 구절들을 지어 보기 시작했다. 챈들러 씨는 유유하고 우아한 운문에 재능이 있다.... 이 시들에는 애틋한 슬픔이 깔려 있다..... 캘트파의 정조(情調)가. 자신의 이름이 좀 더 아일랜드 풍이 아닌 것이 안타까웠다. 어쩌면 성 앞에 어머니의 이름을 집어넣는 것이 더 나을 거야. 토머스 멀론 챈들러라고, 아니, T. 멀론 챈들러가 훨씬 낫겠군. 이 문제를 갤러허에게 상의해 봐야지.
워낙 맹렬하게 공상을 따라가다가 목적했던 거리를 지나치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콜리스 근처에 이르자 아까의 흥분에 압도되기 시작했고 문 앞에 멈춰 섰을 때는 망설여졌다.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야기 웬만큼 눈에 들어오자 이쪽을 쳐다보려고 고개 돌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저쪽에 이그네이셔스 캘러허가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쩍 벌린 채 서 있었다.
어이, 토미. 이 친구, 이렇게 보다니! 뭘로 할까? 뭘 마시겠나? 난 위스키 마시는 중인데 물 건너 저쪽 나라에 있는 것보다 낫다네. 소다? 리티아? 탄산수는 싫다고? 나도 그래. 입맛을 버리거든... 어이, 가르송, 여기 몰트위스키 반 잔짜리 두 개 가져다주겠나, ....자, 우리 마지막 본 이후로 어떻게 지냈지? 아니, 이런, 우리 나이 먹어 가는 것 좀 봐! 나도 나이 먹은 티가 나나? 응, 뭐라고 머리가 좀 세고 정수리에 숱이 적다고. 뭐?
콜리스 호텔에서 자리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듣고, 잠깐이나마 성공적인 유랑 생활 이야기를 듣는 모험으로 예의 예민한 성격은 평정을 잃었다. 자신의 삶과 친구의 삶이 보이는 대조가 뼈저리게 사무치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친구가 이미 이루었거나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다 나은 무엇, 허울 좋은 언론 활동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를 해낼 자신이 있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한탄스러울 만큼 소심하기는! 무슨 수로든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고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싶었다. 갤러허가 초대를 거절한 속마음을 꽤뚫어 보았다. 갤러허는 아일랜드를 찾아옴으로써 고국에 선심 쓰는 것과 똑같이 다정한 태도로 선심이나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꼬마 챈들러는 거실에서 떨어진 방에 앉아 아이를 안고 있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하인을 두지 않았고, 그 대신 애니의 동생인 모니카가 아침과 저녁에 각각 한 시간쯤 도와주러 왔다. 그러나 모니카가 집으로 간 지는 한참 되었다. 9시 십 오분 전이었다. 꼬마 챈들러는 차 시간이 지나 늦게 귀가한 데다, 집에 올 때 뷸리 상점에서 애니에게 줄 커피 꾸러미를 사오는 걸 잊어버린 터였다. 물론 애니는 단단히 골이 나 있었고 대꾸하는 소리도 퉁명스러웠다.
애니는 꼬마 챈들러가 어느 토요일 귀갓길에 선물로 사다 준 옅은 청색의ㅐ 여름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10실링 11펜스를 들인 그 옷을 사느라고 안절부절못하며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앞을 보니 탁자 위에 바이런 시집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아이가 깰까 봐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 수록된 첫 번째 시를 읽기 시작했다.
바람은 잠들고 저녁 어스름 고요하니,
덤블에 떠도는 미풍 한 줄기 없는데,
나 돌아와 마거릿 무덤을 바라보며
내 사랑하는 유해에 꽃을 뿌리네.
소용없는 짓이었다.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고막을 찔러댔다.
[대응]
요란히 울려 대는 벨 소리에 파커 양이 내선 전화기 있는 데로 가자, 사나운 목소리가 귀 따가운 북아일랜드 억양으로 고함을 질러 댔다. “패링턴 올려 보내!” 파커는 타자기 있는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서 뭔가를 쓰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알린 사장이 위층으로 올라오시라는데요.” 사내는 나지막이 “염병할 작자!” 하고 뇌까리며 의자를 뒤로 밀쳐 내고 일어섰다.
사내는 알린 사장 방으로 들어갔다. ~~~~4시 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일렀을 텐데. “하지만 셀리 과장님 말씀이....” 과장님 말씀 같은 소리 하고 있네.....~~~치솟는 분노에 잠시 목이 콱 메었다가 노기가 가라앉자 심하게 타는 듯 한 갈증을 느꼈다.
밖으로 나가려는 데 과장이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별일 아닙니다. 과장님. ~~~~바텐더는 담백한 흑맥주 한 잔을 그에게 가져왔다.
텔라쿠르 여사는 유태인처럼 생긴 중년 여성이었다. 소문에 알린 사장은 여사에게, 아니, 여사의 돈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여사는 막 향수 냄새를 풍겨 대고 사장 책상 옆에 앉아 우산 손잡이를 매만지며 모자에 달린 커다란 검은색 깃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내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날 밤만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 보겠다고 혼자 뇌까리며 템플 바의 좁은 골목을 잰 걸음으로 지나갔다. ~~~~사내는 손가락을 모아 동전을 작은 원통형으로 만들며 희희낙락 전당포를 나왔다.
\노시 플린은 데이비 번 술집의 평소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여태껏 얘기 들어 본 적이 없는 쾌거라며 패링턴에게 반파인트 짜리 한 잔을 샀다.
각자 마시고 싶은 술 이름을 막 대려는 순간, 누가 들어오는데 다름 아닌 히긴스가 안니가! 당연히 히긴스도 다른 친구들 틈에 끼어야 했다. ~~~~알린 사장이 패링턴의 얼굴에 대고 주먹을 흔들어 대던 모습을 히긴스가 보여 주자 모두 가가대소했다.
차가운 길 위에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발러스트 사무소에 이르렀을 때 패링턴이 스카치 하우스로 가자고 제안했다. ~~~스카치 하우스가 문을 닫자 멀리건으로 몰려갔다.
대결이 시작되었다. 삼십 초가량이 지나자 웨더스가 상대의 손을 천천히 탁자로 끌어내렸다. 패링턴은 이런 애송이한게 패배한 데 대한 분노와 굴욕감으로 적포도주빛 얼굴을 더욱 붉히며 말했다. “자네, 체중을 팔 뒤에 실으면 안 되지.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사내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치심과 불만감으로 취기도 못 느낄 판인데, 주머니에는 달랑 2페이 뿐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일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옆문으로 들어가서 보니 텅 빈 부엌에서 불이 다 꺼져 가고 있었다. 사내는 위층에 대고 소리 질렀다. “에이디! 에이디!” 아내는 체구가 작고 얼굴선이 날카로운 여자로, 남편이 깨어 있을 땐 남편을 욱박 지르다가 남편이 취해 있으면 도로 욱박을 당하곤 했다. 부부는 다섯 아이를 두었다. 작은 사내아이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사내가 어둠 속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거기, 누구냐?” 저예요, 아빠 누구냐? 찰리냐? 아뇨, 아빠 톰이예요. 네 어미는 어디 있냐? 성당에 갔어요. 그래.... 내 저녁밥 남겨놓을 생각은 했대? 네, 아빠, 제가.... 등불 켜라. 뭣 때문에 집 안을 깜깜하게 해 놓은 거냐? 다른 놈들은 자냐?
사내는 꼬마가 등불을 밝히는 동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 녀석의 둔탁한 말투를 흉내 내어 “성당에 갔어요, 성당에 간 것 같아요.”라고 혼잣말을 시작했다. 등불이 켜지자 사내는 식탁ㅇ에 주먹을 쾅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내 저녁거리;가 뭐 있느냐?” 꼬마 녀석이 말했다. “제가.....차려 드릴께요, 아빠”
사내는 분기탱천해서 벌떡 일어나 불을 가리켰다. “저 불에 말이냐? 너, 불을 꺼뜨렸겠다! 옳지, 다시는 그렇게 못하도록 본 때를 보여주마!” 사내는 문쪽으로 한 걸음 걸어가 문 옆에 세워져 있는 지팡이를 잡았다. 사내는 팔을 제대로 놀릴 수 있도록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불을 끄다니. 혼 쭐을 내 주마!” 꼬마는 아, 아빠! 하고 소리치고는 식탁 주위를 울먹이며 뛰었으나, 사내는 그 뒤를 쫓아 아이의 외투를 잡았다. ~~~~사내는 지팡이로 아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말했다. “맛이 어떠냐, 이놈 자식!” ~~~~아, 아빠 때리지 마요. 아빠! 저, 아빠한테- 성모송 불러줄게요....안 때리면 성모송 불러 줄게요..... 성모송 불러 줄게요....“
[진흙]
감독이 여자들에게 저녁 식사가 끝나는 대로 나가도 좋다고 허락해 준 터였으므로 마리아는 저녁 외출을 학수고대했다. ~~~마리아는 정말이지 아주아주 작은 사람이었지만 코는 아주 길고 턱도 아주 길었다.
여자들 저녁 식사를 6시에 마치고 7시 전에는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아이들이 모두 노래 부르고 하면 얼마나 멋진 밤이 될 것인가! 조가 술 취해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좋을 텐데. 술만 입에 댔다 하면 딴판으로 변하는 사람이니.
조는 종종 마리아에게 자기들과 함께 가서 살자고 했지만, 마리아는 스스로 천덕꾸러기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었고(조의 처가 그렇게 잘 대해 주었지만), 세탁소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참이었다. 조는 좋은 사람이었다. 마리아가 조와 알피까지 키웠더랬고, 그래서 조는 종종 말하곤 했다. “엄마는 그냥 엄마지만 진짜 어머니는 마리아야.”
가족이 갈라지고 난 후 아이들이 가로등 옆 더블린 세탁소의 일자리를 구해다 주었는데, 마리아는 마음에 들어 했다.
취사원이 모든 게 준비되었음을 알리자 마리아는 여자들 방으로 들어가 큰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자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들어오면서, 김나는 손을 옷에 닦고 김나는 붉은 팔위로 블라우스 소매를 끌어올렸다. 여자들이 커다란 머그잔들 앞에 앉자, 요리사와 벙어리는 이미 커다란 주석 통에다 우유와 설탕을 섞어 만든 뜨거운 차를 그 커다란 잔마다 가득 따라 놓았다. 마리아는 건포도 빵 나누는 일을 감독했고 여자들이 저마다 네 조각씩 받았는지 확인했다.
식사 도중 웃음과 농담이 왁자하니 터졌다. 리시 플레밍은 마리아가 틀림없이 반지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고, 플레밍이 만성절 전야에 그 소리를 한 것이 벌써 여러 해째임에도 마리아는 웃으면서 반지고 남자고 다 필요 없다고 말을 하는데, 웃을 때 녹회색 실망 어린 수줍음으로 반짝였고 코끝은 턱 끝에 닿으려 했다.
마리아는 작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이튿날 아침에 미사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탁상시계 알람을 7시에서 6시로 바꾸어 놓았다. ~~~거울 앞에 서서 ~~~제법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멋지게 매끈하고 아담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저녁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리라는 확신 속에서도, 알피와 조가 서로 말도 섞지 않는 냉담한 사이이니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년 시절에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그들 사이가 이제 와서 항상 틀어지곤 했다. 하기는 이런게 인생이었다.
마리아가 조의 집에 가자 모두 야, 마리아 왔다! 하고 말했다. 조는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었고 아이들은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마리아 할머니 감사합니다.
도넬리 부인(조의 아내)이 피아노를 쳐 주자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했다. 이어서 옆집에서 온 두 처녀가 견과를 죽 나누어 주었다. 아무도 호두까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조는 신경질을 내다시피 하면서 호두까기 없이 마리아가 어떻게 호두를 까겠느냐고 가족을 다그쳤다. 그러나 마리아는 호두를 좋아하지 않으니 자기 때문에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다.
이웃 처녀들이 식탁 위에 받침 접시를 갖다 놓은 다음 아이들을 눈 가린 채 식탁으로 데려갔다. 한 아이는 기도 책을 집었고 다른 세 아이들은 물을 집었다. 옆집 처녀가 반지를 집었을 때 도넬리 부인은 아하, 난 다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시늉으로 볼이 빨개진 처녀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이어서 사람들은 마리아를 눈 가리고 식탁으로 데려가 뭘 집는지 보자고 주장했고, 남들이 자기 눈을 가리는 동안 마리아는 다시 코끝이 거의 턱 끝에 닿도록 웃고 또 웃었다. 사람들이 웃고 농담하며 마리아를 식탁으로 데려갔고, 마리아는 하라는 대로 공중에 손을 쭉 뻗었다. 마리아는 손을 공중에서 이리저리 휘젓다가 받침 접시 하나에 손을 내렸다. 마리아는 손가락에 웬 물컹쿨컹하고 축축한 물질이 닿는 것을 느꼈는데 무슨 말을 하거나 자신의 눈가리개를 벗겨 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놀랐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도넬리 부인은 옆집 처녀에게 매우 화난 소리를 퍼붓고 나서 그 판은 무효니 당장에 그걸 치우라고 일렀다. ~~~이번에는 기도 책을 집었다.
도넬리 부인은 마리아가 기도책을 집었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수녀원에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조는 마리아에게 가기 전에 간단한 노래, 옛날 노래 하나를 불러 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도넬리 부인이 “그렇게 해 줘요, 마리아!”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 옆에 섰다. 도넬리 부인은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고 마리아 할머니 노래를 잘 들으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도넬리 부인은 전주곡을 치고 나서 “자, 마리아!” 하고 말했고 ~~~마리아는 나지막이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꿈속에서 산 집>을 불렀고 2절에 이르렀을 때 같은 부분을 다시 불렀다.
“내가 꿈속에서 산 집은 대리석 홀이라네.
하인과 노예가 옆에서 시중들고
거기 모여 사는 사람들 모두
나를 희망과 자랑으로 삼았다네.
나는 셀 수도 없는 재산에
드높은 조상의 명망을 이어받았네.
그러나 꿈속에서 제일 기뻤던 일은
그대가 아직도 나를 사랑해 준 것이라네.“
그러나 마리아의 실수를 굳이 지적하려는 사람은 없었고, 마리아가 노래를 끝마쳤을 때 조는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조는 먼먼 옛날만큼 좋은 시절이 없으며 누가 뭐라고 해도 불쌍한 발페의 음악만 한 음악이 없을 거리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찌나 많은 눈물이 눈에 맺혔는지 찾으려던 것을 찾을 수 없어서 R트내는 아내에게 포도주 병따개가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 했다.
마리아는 알피를 위해 덕담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는 알피가 형에게 다시 한 마디라도 건넨다면 벼락 맞아 죽을 거라고 소리쳤고, 그 바람에 마리아는 괜히 그 일을 입에 담아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도넬리 부인은 한 핏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남편에게 말했으나, 조는 알피가 동ㅅ애도 아니라고 말했고 끝내 이 문제로 한바탕 소동이 일 뻔했다.
[가슴 아픈 사연]
제임스 더피 씨가 채플리조드에 사는 것은 자신이 시민으로 속한 도시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기 때문이고 더블린의 다른 교외는 모두 천박하고 현대적이며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피 씨는 낡고 음산한 집에서 살았는데, 창밖으로 폐업한 양조장이 들여다보이고 위로는 더블린을 받치고 있는 얕은 강이 훤히 내다보였다.
서가의 맨 아래 칸 한쪽 끝에는 워즈워즈 전집이 꽃혀 있었고, 맨 위쪽 한쪽 끝에는 비망록 천 표지 안에 꿰매 넣은 <메이누스 교리문답> 한 권이 꽂혀 있었다.
더피 씨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병의 징후를 풍기는 것이라면 질색이었다. ~~~길죽하고 큼지막한 머리에는 물기 없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었고, 황갈색 콧수염은 그리 정이 가지 않는 입을 간신히 한구석만 가려 주고 있었다.
더피 씨는 배고트 거리에 위치한 민간은행에서 출납원으로 일한 지 여러 해였다. ~~~더피 씨에게는 말 상대나 친구도, 교회나 신앙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정신적인 생활을 영위하되, 성탄절이나 되어야 친척을 찾아가고 친척이 죽으면 공동묘지에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인생은 그저 평탄하게, 모험 없는 이야기로 굴러갔다.
어느 날 저녁 더피 씨는 로턴더에 가서 두 숙녀 옆에 앉게 되었다. 공연장은 한산하고 조용해서 비참하게 실패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옆에 앉은 부인이 썰렁한 공연장 주위를 한두 번 둘러보더니 말했다. “오늘밤엔 청중이 어쩜 이렇게 적을까! 빈 객석 앞에서 노래하려면 정말 힘들텐데.” 더피 씨는 그 발언을 얘기를 섞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놀랍게도 부인은 도무지 스스럼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얘기하는 동안 더퍼 씨는 부인을 영원히 기억 속에 담아 두려고 노력했다. 부인 옆에 앉은 처녀가 부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부인이 자신보다 한두 살 아래일 거라고 판단했다. 젊어서 분명 미인이었겠다 싶은 부인의 얼굴은 아직 초롱초롱했다. 이목구비가 아주 뚜렷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 눈은 짙은 암청색에 차분했다. 처음엔 당돌한 기색을 띠던 시선이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동공이 홍체 속으로 사라지자 흐릿해졌고 이 한순간 풍부한 감수성은 다시 신중함에 밀려났지만, 부인의 아스트라한 모피 재킷은 제법 부푼 가슴을 만들어 당돌한 기색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더피 씨는 보름 후쯤 얼스포트 테라스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부인을 다시 만나, 딸이 딴 데로 주의를 돌린 틈을 잽싸게 타 은밀한 얘기를 나누었다. 부인은 한두 차례 넌지시 남편 예기를 꺼냈으나, 그렇다고 경고조로 그러는 건 아니었다. 부인의 이름은 시니코 여사였다. 남편의 고조할아버지가 레그혼 출신이었다. 남편은 더블린과 네덜란드 사이를 왕복하는 상선의 선장이었고 둘 사이에 딸린 아이는 하나였다.
우연히 부인을 세 번째 만났을 때 더피 씨는 용기를 내서 만날 약속을 제안했다. 부인은 약속대로 나왔다. 이것이 숱하게 이어질 만남 중 첫 만남이었는데, 둘은 항상 저녁에 만나 가장 한적한 구역을 골라 함께 산책했다. 그러나 더피 씨는 떳떳지 못한 방식을 싫어하는 체질인지라 남몰래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부인을 졸라 자기를 집으로 초대하도록 만들었다. 시니코 선장은 딸의 결혼이 걸린 문제인 줄 알고 더피 씨의 방문을 권장했다. 선장은 아내를 쾌락을 나눌 상대로는 아예 제처 놓고 있던 터라 다른 누군가가 아내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더피 씨는 자주 더블린 교외에 있는 부인의 별장으로 갔고, 둘은 자주 오봇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사 년이 지났다. 더피 씨는 평탄한 생활 방식을 되찾았다. ~~~더피 씨는 부인을 만나게 될까 봐 연주회에 발길을 끊었다. ~~~어느 날 저녁 더피 씨는 양배추 콘비프 한 덩어리를 막 입에 넣으려다 말고 손을 멈추었다. 유리 물주전자에 기대어 놓은 석간신문 한 단락에 눈길이 멈추었다. 음식 덩어리를 접시에 도로 내려놓고 그 단락을 주의 깊게 읽었다. 그런 다음 물 한 잔을 마시고 접시를 한쪽으로 치운 뒤 신물을 양 팔꿈치 사이로 앞에 내려놓고 그 단락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더피 씨는 옆에 달린 주머니 밖으로 황갈색<메일>지의 모서리가 삐죽 고개를 내민 두툼한 짧은 외투를 꼭 여민 채, 짤막한 개암나무 지팡이를 또박또박 짚으며 11월의 황혼이 깔린 길을 걸어갔다. ~~~~단락 내용은 이랬다. “시드니 퍼레이드 역에서 부인 사망. 가슴 아픈 사연.”(오늘 더블린 시립 병원에서 부검 시관-레버럿 씨는 부재중-은 어제 저녁 시드니 퍼레이드 역에서 목숨을 잃은 43세의 에밀리 시니코 부인의 시체에 대한 검사를 실시했다. 증거에 따르면 고인은 철로를 횡단하려던 중 10시에 킹스타운을 출발하여 서행해 오던 기차 엔진에 치어 두부와 오른쪽 허리에 타박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피 씨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창밖으로 음울한 저녁 풍경을 내다보았다. 빈 양조장 옆으로 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이따금 루컨 도로변의 어떤 집에서 불빛이 깜박였다. 이렇게 끝나다니!
불빛이 꺼져 가고 기억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하자 더피 씨는 여자의 손이 자기 손에 닿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속을 뒤틀리게 했던 충격이 이제는 신경을 들쓰셔 댔다.
한 인간이 나를 사랑해 주는가 보다 싶어지자 그 여인에게 생명과 행복 주기를 거부해 버린 것이다. 그 여인에게 치욕의 선고를, 그리고 수치스러운 죽음의 선고를 내려 버린 것이다.
[담쟁이 날의 위원회실]
잭 영감은 판지 조각으로 뜬숯을 긁어모아 하얗게 변해 가는 봉긋한 석탄 더미 위에다 신중히 덮어 놓았다. 석탄 더미를 얇게 덮고 나자 영감의 얼굴은 도로 어두워졌으나, 다시 부채질로 불을 살리기 시작하면서 엎드려 있던 영감의 그림자가 반대편 벽으로 올라갔고 얼굴은 서서히 환한 빛을 되찾았다.
이제 좀 낫네요. 오코너 씨. 오코너 씨는 머리가 희끗하고 얼굴에는 종기와 여드름이 흉하게 덕지덕지 난 젊은이로 이제 막 연초를 매끈하게 담배로 말아 놓은 참이었으나, 상대가 말을 걸어오자 묵묵히 생각에 잠긴 듯 기껏 손으로 말아 놓은 담배를 풀어 놓았다.
오코너 씨는 카드를 한 장 골라 들고 거기에 인쇄된 내용을 읽었다.
시 선거
왕립 거래소 선거구
빈민 구제법 관리 위원 리처드 제이 티어니 씨가 왕립 거래소 선거구의 이번 선거에서 귀하의 한 표와 지원을 정중히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어머니]
에이레 아부 보험회사의 비서 보조인 홀러핸 씨는 일련의 연주회 계획을 짜느라고 손과 주머니에 너저분한 서류를 가득 지닌 채 한 달 가까이나 더블린을 쏘다니던 참이었다. 홀러핸 씨는 다리 한쪽을 절었는데 이 때문에 친구들은 절뚝발이 홀러핸이라 불렀다. 홀러핸 씨는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고 시간별로 거리 모퉁이에 서서 요점을 역설하며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준비를 하는 사람은 커니 부인이었다. 데블린 양이 커니 부인이 된 것은 앙심에서였다. 커니 부인은 고급 수녀원에서 교육 받았고 불어와 음악도 배웠다. 얼굴은 핏기 없고 자세는 꼿꼿해서 학창 시절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 혼기가 차면서 이 집 저 집에 보내 보았더니 연주 솜씨며 단아한 범절로 찬사를 받았다. 자신의 교양을 감상하는 썰렁한 모임 가운데 앉아서 어떤 구혼자가 화려한 생활을 제공하겠다고 용기 있게 나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만나는 청년들이라는게 고만고만해서 구혼을 부추기는 일 없이 남몰래 터키 사탕이나 잔뜩 먹어 대며 낭만적인 욕망을 달래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거의 한계에 이르면서 친구들이 쑥덕공론을 일삼기 시작하자, 오르몬드 부두의 구두장이인 커니 씨에게 시집을 가버림으로써 쑥덕공론을 잠재웠다.
커니 씨는 절도도 있고 겸손한 데다 경건했다. 매월 첫 번째 금요일에 성당을 나갔는데, 아내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혼자 다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첫 딸인 케슬린은 좋은 수녀원에 가서 불어와 음악을 배웠고 나중에는 왕립 음악원에도 다녔다.
어느 날 홀러핸 씨가 찾아와 자기가 속한 보험회사 후원으로 에인션트 콘서트룸에서 공연할 예정인 일련의 4대 독창회에서 따님이 반주자로 활동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오자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홀러핸 씨는 홍보물 문안 작성이라든지 프로그램의 항목 배열 따위의 섬세한 일에 초보자여서 코니 부인이 도와주었다.
독창회가 열리는 날은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이었다. 수요일 밤에 딸을 데리고 에인션트 콘서트 룸을 찾은 커니 부인은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탐탁지가 않았다.
대공연의 밤이 왔다. 커니 부인은 남편, 딸과 함께 연주회 시작 사십오 분전에 에이션트 콘서트 룸에 도작했다. 운이 안 따랐던지 저녁에 비가 내렸다. ~~~음악가들이 속속 도착했다. ~~~키니 부인은 이 두 청년 옆을 지나쳐 공연장을 살펴보기 위해 막 모퉁이로 갔다. 자리는 속속 채워지고 잇었고 청중석에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유쾌하게 들려왔다.
키니 부인은 딸의 보수가 언제 지급될 것인지 물었다. 홀러핸 씨는 그 문제는 피츠 패트릭 씨 소관이라고 말했다. 계약대로 딸아이 몫인 8기니를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애는 rPt고하지 않을 거예요. 8기니를 받기 전에는. 홀러핸 씨는 사색이 되어 청중이 손뼉 치고 발 구르는 홀 쪽을 가리켰다. 키니 씨와 캐슬린에게 사정햇다. 그러나 키니 씨는 연신 턱수염만 쓰다듬었고 캐슬린은 새 신발 끝을 움직이며 아래만 굽어보고 있었다. ~~~~얘는 돈을 받지 않으면 계속하지 않을 거예요.
홀러핸 씨는 키니 부인 손에 넉 장을 쥐어 주고는 남은 절반은 막간에 주겠다고 했다. 키니 부인은 말했다. 이걸로는 4실링이 모자라는데요.
[은총]
때마침 화장실에 있던 남자 둘이 사내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사내는 굴러 떨어진 계단 밑에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남자들은 용케 사내를 뒤집었다. 모자는 저쪽으로 2미터 남짓 굴러가 있고, 옷은 바닥의 오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잇는데 사내는 바로 그 위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잇는데 숨소리는 요란하게 그르렁댔다.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똑똑 떨어졌다.
지배인이 물었다. 혼자였나? 아뇨. 남자 손님 두 분이 함께 있었는데요. 그 손님들은 어디 있지? 안다는 사람이 없는데, 웬 목소리가 말했다. 그 양반 공기 좀 쐬여 줘요. 기절했구먼.
바 문이 열리더니 우람한 경관 한 사람이 들어왔다. 골목길로 그 뒤를 따라온 떼거리가 문 밖에 운집해 유리창 틀 사이로 들여다보려고 기를 썼다. ~~~자전거 복장을 한 청년이 둘러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청년은 다친 사내 옆에 재빨리 무릎을 꿇고 앉아 물을 요구했다. 경관도 돕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청년은 다친 사내의 입가에서 피를 씻어낸 다음 브랜디를 약간 갖다 달라고 요구했다. 경관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 지시를 반복했고 이윽고 바텐더가 유리잔을 들고 달려왔다. 사내의 목구멍 아래로 브랜디를 흘려 넣었다. 잠시 후 사내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내는 둘러선 얼굴들을 쳐다보더니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발을 딛고 일어서려고 힘을 썼다.
자전거 복장의 청년이 물었다. “이제 괜찮습니까?” 다친 사내가 일어서려고 애를 쓰며 말햇다. “아, 벨일 아이오.” 사내가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지배인이 병원이 어떻고 하는 말을 꺼내자 구경꾼 몇이 거들었다. 찌그러진 비단 모자가 사내의 머리 위에 얹혔다. 경관이 물었다. 어디 사십니까? 사내는 대답 없이 콧수염 끝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자기가 당한 사고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이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할 때 하얀 얼굴에 키가 크고 날렵한 남자 하나가 기다란 노란색 얼스터 외투 차림으로 바 저쪽 끝에서 다가왔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남자가 소리쳤다. 아니, 톰 형님 안녕! 대체 무슨 일이세요? 사내가 말했다. 아, 별일 아니야. ~~~~경관님 이분은 내가 집에 모셔다 드릴께요. 경관이 헬멧에 손을 올려 사의를 표하며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파워 씨.
덩말로 고마우다. 다시 뵐 날이 있겠디요. 내 이름은 커넌이오. ~~~~커넌 씨는 구식 외근 사원이어서 작업상의 체통을 깍듯이 지켰다. ~~~파워 씨는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으로 더블린 성에 있는 왕립 경찰 본부에서 근무했다.
마차가 글레스네빈 거리에 있는 작은 집 앞에 섰고 커넌씨는 부축을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커넌 씨의 아내가 남편을 침대에 누이는 동안 파워 씨는 아래층 부엌에 앉아 아이들에게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무슨 책을 공부하는지 따위를 물었다.
커넌 부인이 부엌에 들어와 탄식을 했다. “저게 무슨 꼬락서니람! 아니, 저러다가 결국 언젠가는 제대로 변을 당하고야 말지. 별 수 있을라고요.... 금요일부터 마셔대더니만.
커넌 부인은 집안싸움이 벌어졌을 때 파워 씨가 잘 무마해 준 일이며 적은 액수나마 긴요할 때마다 여러 차례 돈을 빌려 준 일 들을 떠올리고 말했다.
부인은 활달하고 현실적인 중년 여성이었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은혼식을 자축하고 파워 씨의 반주에 맞춰 남편과 춤을 추며 부부애를 새로이 한 터였다. 연애 시절만 하더라도 커넌 씨는 다정한 맛이 없는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커넌 씨는 이튿날 직장에 편지를 보내고는 자리에 몸져누웠다. 부인은 진한 쇠고기 국을 끓여 주면서도 모질게 야단쳤다. 부인은 남편의 잦은 폭음을 세상 풍조로 받아들이고는 남편이 앓아누울 때마다 착실하게 간호를 했고 항상 아침을 먹이려고 애썼다.
이틀 밤이 지나 남편 친구들이 문병을 왔다. ~~~커넌 씨는 개신교 집안 출신으로 결혼할 무렵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된 지가 이십 년이나 되는 터였다. 그것도 모자라 가톨릭을 빈정대기 일쑤였다. 이런 일에는 커닝햄 씨가 제격이었다. 커닝햄 씨는 파워 씨의 손위 동료였다. 정작 자신의 가정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해서 사람들의 동정을 무던히도 샀는데, 꼴사나운 구제불능 술주정뱅이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가련한 마틴 커닝햄은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철저한 분별과 영향력에 지성미까지도 갖춘 사람이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의 칼날, 즉 즉결 재판소와 오랜 인연을 맺으면서 갈고 닦은 천성적 날카로움이 보낸 철학이라는 넓은 물에 잠시 담금질을 하더니 부드러움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아는 것도 많았다. 친구들은 커닝햄 씨의 식견 앞에 고개를 숙이며 그 얼굴이 셰익스피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음모를 귀띔 받을 때 커넌 부인은 말했다. “모든 것을 일임하겠어요, 커닝햄 선생님.” 결혼 생활 사반세기 만에 부인에게 남은 환상이라곤 씨가 말라 버렸다. 종교를 습관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보니 남편 나이의 남자가 죽기 전에 얼마나 달라지랴 싶었다. 남편이 사고 당한 것이 묘하게도 차라리 잘됐다 싶었고, 몰인정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남편 친구들에게 남편의 혀는 끝이 떨어져 나가 짧아진대도 무탈할 거라고 불쑥 내뱉을 뻔했다. 그러나 커닝햄 씨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종교는 종교일 뿐이었다.
부인은 모든 가톨릭 근행중 성심이 모든 면에서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꾸준히 지켰으며 성사도 인정했다. 비록 부엌 안에서만 맴도는 신앙이라고 해도 사정에 따라서는 죽음을 예고한다는 밴시 요정과 성령까지도 믿을 판이었다.
머코이 씨는 한때 명성깨나 날린 테너였다. 소프라노였던 아내는 아직 어린아이들 상대로 싸구려 피아노 과외를 하고 있었다. 머코이 씨의 인생 경로는 썩 순탄하게 풀린 편이 아니었고 짧은 동안이나마 잔머리를 굴려 연명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여러 차례였다. 미들랜드 철도 화사의 직원, <아이리시 타임스>와 <프리맨스 저널>의 광고 영업 사원, 석탄 회사의 시내 외탁 외판원, 사설탐정, 부군수실 직원 자리를 전전하다가 최근에는 시 검시관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망자]
관리인의 딸 릴리는 문자 그대로 발바닥이 닳을 판이었다. 남자 손님 한 명을 1층 가사실 뒤에 있는 작은 식기실로 안내해 외투를 벗겨 주기가 무섭게 초인종 소리가 다시 숨 가쁘게 울려 대면 장식물 없는 복도를 허둥지둥 달려가 다음 손님을 맞아야 했다. 그나마 여자 손님들 시중까지는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케이트 여사와 줄리아 여사는 벌써 그 점을 염두에 두고 2층 욕실을 여성용 화장실로 개조해 놓은 터였다. 그 방엔 케이트와 줄리아가 자리를 잡고 서서 시시덕거리며 웃고 법석을 떨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쪼르르 계단 꼭대기로 걸어 나와 층계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며 릴리에게 누가 왔는지 소리쳐 물어보곤 했다.
모컨 집안의 연례 무도회, 그건 언제나 큰 잔치였다. 이 집안을 아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잔치에 왔는데, 거기엔 이 집안의 친척과 오랜 친구들, 줄리아의 성가대원들, 나이가 웬만큼 찬 케이트의 제자들, 그리고 심지어 메리 제인의 제자 까지도 몇몇 끼어 있었다.
오빠 팻이 세상을 뜬 후, 케이트와 줄리아가 하나 남은 조카딸 메리 제인을 데리고 스토니 매터에 있는 오빠 집을 떠나 어셔 아일랜드에 있는 어둡고 음산한 집의 2층을 그 집 1층에서 곡물 도매상을 하는 플럼 씨로부터 세내어 살기 시작한 이래로 한결같았다. 벌써 줄잡아 삼십 년 전 일이었다. 그때는 짧은 옷차림의 어린 소녀였던 메리 제인이 이제는 해딩턴 거리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 할 정도로 집안의 어엿한 대들보가 되어 있었다. 메리는 왕립 음악원을 나와 에인션트 콘서트 룸 2층에서 해마다 제자들의 연주회를 열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지난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케이브리얼 부부가 아직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인들은 프레디 말린스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나타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머, 코너로이 아저씨, 릴리는 케이브리얼에게 문을 열어 주면서 말했다. 케이트 할머니랑 줄리아 할머니는 아저씨가 아예 안 오시는 줄 알고 계세요. ~~안 봐도 뻔해. 하고 케이브리얼은 말했다. 하지만 이모님들은 여기 있는 이 사람이 옷 입는 데 장장 세 시간이나 걸린다는 걸 잊고 계셔. ~~~케이트 할머니, 여기 코너로이 아주머니께서 오셨어요.
릴리가 물었다. “다시 눈이 내려요, 코너로이 아저씨?”~~~케이브리얼은 릴리가 자기 성을 세 음절로 발음하는 것을 듣고 빙긋이 웃으며 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릴리는 호리호리하게 크고 있는 처녀로 안색이 창백하고 머리칼은 건초 색이었다. 식기실의 가스 불빛에 릴리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케이브리얼은 릴리가 맨 아래 계단에 앉아 헝겊 인형을 돌보며 놀던 유년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래, 릴리. 하고 케이브리얼은 대답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오늘 밤새도록 내릴 것 같구나. ~~~케이브리얼은 살지고 키가 훤칠한 사내였다.
이모들은 둘 다 케이브리얼에게 허물없이 키스했다. 케이브리얼은 그네들의 자랑스러운 조카로, 항만국에 근무하던 T. J. 콘로이에게 시집간 죽은 언니 엘런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저기 있는 제 집사람은 말이지요, 내버려 두면 아마 눈 속에서도 집까지 결어가려고 할거요. 콘로이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저이 말 귀담아 듣지 마세요, 케이트 이모님. 밤에 잘 때 톰 눈에 녹색 가리개를 해 줘라. 톰에게 아령을 시켜라, 에바에게 귀리죽을 먹여라. 하면서 어찌나 사람을 들들 볶아 대는지 아세요?” 불쌍한 우리 아기! 귀리죽을 보기만 해도 기겁을 하는 판에....~~~~크레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남편을 힐끗 훔쳐보았다. ~~~골로시 말이에요! 콘로이 부인이 말했다. 요사이 안달 부린 건 그거예요. 땅이 질기만 하면 저는 골로시를 신어야 해요. 오죽하면 오늘 밤에도 저더러 그걸 신으라고 했겠어요. 하지만 저는 말을 듣지 않았죠. 아마 다음번에는 저한테 잠수복을 사 줄 거예요.
여기 프레디가 왔어.~~~케이브리얼, 수고스럽겠지만 살짝 빠져나가 프레디가 괜찮은지 살펴보고 만일 술 취해 있으면 올려 보내지 마라. 보나 마나 취해 있을 거야. 빤한 일이지.
저 사람, 그렇게 많이 취한 상태는 아니지? 케이브리얼은 표정이 어두웠으나 이내 얼굴색을 풀고 대답했다. 아, 예, 별로 티는 안 나요. 케이트 이모가 말했다. 참, 한심하기도 하지! 불쌍한 저 사람 어머니가 설날 전날 저녁에 금주 맹세까지 시켰건만, 그건 그렇고, 자, 케이브리얼, 응접실로 들어가자.
프레디의 어머니는 뚱뚱하고 허약한 백발 노파였다. 목소리는 아들처럼 막힐 때가 있었고 약간 말을 더듬었다. ~~~케이브리얼은 노파에게 항해가 순조로웠는지 물었다. 노파는 글라스고에서 시집간 딸과 함께 살았는데 일 년에 한 번씩 더블린에 다니러 왔다. 노파는 바다 여행길이 더없이 순조로웠으며 선장이 아주 잘 돌봐 주었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노파가 혀가 장황한 얘기를 떠벌이는 동안 케이브리얼은 아이버스와의 사이에 있었던 불쾌한 사건의 기억을 모두 마음속에서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그 여자가 사람들이 있는 데서 자기를 친영파라고 부를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농담으로라도 말이다. 그 여자는 자기를 몰아세우고 똥그란 눈으로 노려보면서 우스운 꼴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아내가 왈츠 추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곁에 다가와 귀에 대고 말했다. 여보, 키이트 이모님이 여느 때처럼 당신이 오리 고기를 잘라 주지 않겠는지 궁금해 하시던데. 테일리 양이 햄을 자르고 나는 푸딩을 자를 거예요. 알았소.
케이브리얼은 아일랜드의 환대, 슬픈 추억들, 세 명의 미의 여신, 파리스, 브라우닝 시구 인용 등 연설의 소제목들을 훑어보았다. 서평에서 썼던 구절을 혼자 되뇌어 보았다.
케이브리얼이 물었다. 펄롱 양, 어느 부위를 드릴까요? 날개, 아니면 가슴살 산 조각? 작은 가슴 살 한 조각 주세요. 히긴스 양, 그쪽은요? 아, 아무거나 좋아요, 콘로이 선생님.
케이브리얼은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예전처럼 오늘 저녁에도 매우 즐거운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제 몫으로 떨어졌습니다만, 연설자로서의 재 변변찮은 능력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임무입니다. 브라운 씨가 말했다. 무슨 소릴, 당치도 않아! 그러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밤에는 의도에 못 미치는 행동일망정 가상히 여기시어 이 자리에선 저의 감상을 여러분에게 말로 표현하느라고 애쓰는 동안 잠시 경청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케이브리얼은 현관의 어둠 속에 가만히 서서 목소리가 노래하는 가락을 식별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올려다보았다. 아내의 태도에 기품과 신비로움이 어린 것이 마치 무엇인가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둠 속 계단에 서서 아련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자가 무엇의 상징이 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다. 자신이 화가라면 저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아내 모습을 그려 보련만, 아내의 파란색 펠트 모자는 어둠에 대비하여 머리의 청동색을 더 두드러져 보이게 할 것이고 치마에 댄 검은색 긴 천은 밝은 천을 돋보이게 하리라. 자신이 화가라면 그 그림을 <아련한 음악>이라 이름 붙이리라.
현관문이 닫히고 케이트와 줄리아와 메리 제인이 아직껏 마소를 띠며 현관으로 내려왔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케이트 이모. 그리고 즐거운 저녁 시간 감사했습니다. 잘 가. 케이브리얼! 잘 가, 그레타! 안녕히 계세요, 키이트 이모님, 정말로 너무나 감사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줄리아 이모님.
새벽은 아직 어두웠다. 노란 빛이 집들과 강을 희미하게 감싸고 있었고 하늘은 내려앉는 것처럼 보였다. 발에 밟히는 땅을 질퍽거렸고, 눈만이 지붕과 부두 난간과 지하실 출입구 계단 난간 위를 기다랗게 혹은 듬성듬성 뭉텅이 꼴로 덮고 있었다. 가로등 불은 어두침침한 하늘에서 아직 빨갛게 타고 있었고, 강 건너로는 법원 건물이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서 위협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훨씬 더 애틋한 기쁨의 물결이 게이브리얼의 가슴에서 빠져 나와 동맥을 따라 을 따라 뜨겁게 넘쳐흘렀다. 아스라이 쏟아지는 별처럼, 둘이서 함께 보낸 삶의 순간들이 기억 위에 환하게 펼쳐졌다. 아내에게 그 순간들을 상기시키고 싶어서, 아내로 하여금 둘이 함께 한 시간 중 무미건조한 세월을 잊어버리고 환희의 순간만을 기억하도록 만들고 싶어서, 애가 탔다. 그 세우러 동안에 자신이나 아내의 영혼이 메마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신은 글을 쓰고, 나내는 집안일을 돌보는 동안 둘의 영혼에 피어난 그 모든 애틋한 불길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차가 오코넬 다리를 건널 때 미스 오캘러헌이 말했다. 오코넬 다리를 건널 때 꼭 하얀 말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어요.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이번에는 하양 사람이 보이는 걸. 어디? 하고 바델 씨가 다시 물었다. 게이브리얼은 눈이 듬성듬성 덮인 동상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동상에 대고 알은체를 하느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게이브리얼은 쾌활하게 말했다. 안녕하시오, 댄?
마차가 호텔 앞에 이르자 게이브리얼은 밖으로 뛰어내려서는 바델 다시 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부에게 삯을 지불했다. 내야할 요금에 1실링을 얹어 주었다. 마부는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레타는 잠시 게이브리얼의 팔에 기댄 채 마차에서 내려 보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호텔 로비에서는 덮개가 씌워진 의자에서 노인 한 사람이 졸고 있었다. 노인은 사무실에서 촛불을 켜고 앞장서서 층계 쪽으로 갔다. ~~~수위가 앞장서서 복도를 따라가다가 객실 문을 열었다.
그래서 그 애는 집에 갔소? 네, 집에 갔어요. 그런데 내가 수녀원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그 애는 죽었고 가족들의 고향인 오터라드에 묻혔어요.
그레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간정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모네 만찬 탓일까, 어줍잖은 자신의 연설 탓일까, 아니면 술 마시고 춤 춘 탓일까.
창틀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에 게이브리얼은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로등 불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은빛의 거무스름한 눈발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쪽 여행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그렇다. 신문기사가 옳았다. 온 아일랜드에 눈이 내리는 참이었다. 눈은 어두운 도심의 벌판 구석구석에도, 나무 없는 언덕에서도 내리고 있었고, 보그 오브 앨런에도 사락사락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한 마이클 퓨리가 묻힌 고즈넉한 언덕 빼기 교회 묘지에도 빠짐없이 내리고 있었다. 휩쓸린 눈은 구부러진 십자가와 갓돌 위에도, 작은 대문 살 위에도, 앙상한 가시나무 위에도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서히 아득해져 가는 정신 속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라만상 사이로 아스라이, 그리고 모두에게 최후의 종말이 내린 듯, 모든 생자와 망자 위에 아스라이 내리는 눈 소리가. ■
[Review]
제임스 조이스의 총 열다섯 개의 단편소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은 작가의 태어난 고향으로, 그는 스무 살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후 아내 노라와 함께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을 전전하며 은행원, 교사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1년. 58세의 나이로 취리히에서 생을 마쳤다.
이 책은 1914년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 걸작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책이다. 조이스는 이 책에서 저마다 다른 주제와 소재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열다섯 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소설은 타락한 성직자의 죽음 이야기(자매)를 시작으로,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개구쟁이들이 못된 어른들의 성 착취 유혹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마주침), 맹건 누나를 흠모하는 풋내기 소년의 이야기(에러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난폭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던 딸이 드디어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고 몰래 집에서 탈출하는 이야기(에블린) 등을 통하여 다양한 인물들로부터 더블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어린 시절 살았던 고향을 떠나 살면서 그 시절 고향 풍경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코흘리개 친구들과 온종일 뛰놀던 동산이며, 어깨너머로 들은 이웃집에서 벌어진 소소한 이야기들뿐 아니라 눈으로 직접 목격한 풍경들이 단편으로 스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일들을 하나씩 글로 써 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은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우리와는 판이한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인’의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가깝게 느껴진다.
이 책은 두 번 읽었다. 평범한 소재를 너무나 흥미롭게 이어가는 작가만의 특별한 사물과 인물의 묘사에 감탄하며 읽었고, 또 한 번은 도대체 작가가 글에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토리를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읽었다. 그러나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아리송하기만 했다. 어찌 보면 그곳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도덕적 마비의 타락한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부정적인 삶의 양식을 계몽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독자의 생각일 뿐이다. 아무튼 이 책은 재미있다. 찰스 디킨스의 글처럼 유머가 넘쳐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내는 작가만의 솜씨에서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경주가 끝난 뒤) 빈곤과 무기력에 찌든 더블린 사람들에게 자동차 경기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경주에 참여한 청년들은 대조적으로 무절제하고 광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두 건달) 변변한 직업도 없는 두 건달이 여자들이나 건드리며 살아가는 모습.
(하숙집) 하숙집 주인은 이혼한 억척부인이었다. 그에게는 열아홉 살 되는 폴리라는 딸이 있었고. 어느 날부터 하숙생 총각과 눈이 맞았다.
(작은 구름) 팔년 전 고향을 떠나 출세한 친구가 고향을 방문하여 옛 친구와의 재회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서로 다른(내향적이고 소심함과 외향적) 인생에 대한 회한.
(대응) 다섯 아이를 둔 가장이 직장에서 사장에게 타박을 받고 저녁 시간에 친구들과 술집을 돌다가 늦게 집에 돌아온 후 아이들에게 화풀이 하는 서글프고 우울한 이야기.
(진흙) 마리아 할머니는 지난날 자신이 가정부로 자낸 가족과 보낸 하룻밤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곳에서 식구들과 놀이에서 눈을 가리고 마리아 할머니는 진흙이 담긴 접시를 잡았다.
(가슴 아픈 사연) 은행 출납원으로 일하는 ‘더피’ 씨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같인 사람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중년의 여인과 여러 차례 만나며 친분을 쌓았으나 여인이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오히려 그녀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어느 날 신문 기사에서 끝내 여인이 자살한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어머니) 키니 부인은 딸을 음악인으로 잘 길러내었다. 보험회사와의 계약으로 음악 콘서트를 열기로 했는데 회사 측에서 돈을 지불하지 않아서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 할 해프닝.
(은총) 술주정뱅이 ‘커넌’씨가 술에 취해 술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피를 흘리자 경찰이 달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온 커넌씨는 회사에 편지를 보내고 알아 누웠다. 아내는 주정뱅이 남편을 타박하지만 각계각층의 친구들이 병 문환으로 모여들고 위로하며 환담을 나누는 내용으로 예수회와 가톨릭을 싸잡아 해학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망자) 모컨 집안의 연례행사인 무도회에 모인 가족 친지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그들의 대화, 농담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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