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지난해 봄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담도 치지 않고 울타리도 하지 않았으며 대나무를 쪼개 창문을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 세 칸의 집을 완성하고는 동쪽 방을 책 읽는 서실로 삼았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면 겨울에는 구들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대자리가 시원하였다. 나는 비좁다거나 누추하다는 생각은 잊어버린 채, 충분히 편안하게 지낼 만한 곳으로 여겼다
『매천집』권6에 나오는「구안실기(苟安室記)」의 한 대목이다. 구례의 산골 만수동으로 들어간 매천은 작은 집을 짓고 직접 농사지으면서 책도 읽고 여행도 하며 은둔자로 살았다. 이른바 ‘소확행’을 즐겼던 셈인데, 그때가 그에게는 “세상 근심 잊어서 꿈이 담박하고 가난을 먹고 살아 시가 고상하던”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 없다
▲1864∼1910년의 역사를 서술한 ‘매천야록’ 의 권1 내용.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록.
그러나 때때로 들려오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 소식에 언제까지 초연할 수는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발표되자, 매천은 여러 날 아무것도 먹지 않고 통곡만 하였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지사들의 자결 소식을 듣고는 눈물로「오애시(五哀詩)」를 지어 그 숭고한 뜻을 기렸다. 비분강개의 마음으로 우국시를 쓰고, 의병장들을 애도하는 시를 짓고,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워 신교육에 나섰으며, 또 보고들은 바를 토대로 계속『매천야록』을 집필해갔던 것이다.
이등박문은 이번에 올 때 300만 원을 가지고 와서 정부에 두루 뇌물을 주어 조약을 성사시키고자 도모하였다. 적신(賊臣) 중 약삭빠른 자는 그 돈으로 넓은 장원(莊園)을 구입하고 귀향하여 편안하게 지냈는데, 권중현 같은 자가 그러했다. 이근택과 박제순 또한 이 때문에 갑자기 거부가 되었다./ 7월 14일, 이등박문이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이용원은 성묘를 간다 핑계대고 앞서 출발하여 대전까지 가서 이등박문을 전송하였다.
『매천야록』 권4(1905년)와 권6(1909년)의 기록이다. 당시의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의 간교한 술수를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그 직필(直筆)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국정을 농단하던 권세가와 외척들, 무능한 위정자들, 심지어 임금과 왕비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했다.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왕후는 기민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는데, 정치에 관여한 20여 년 동안 점차 망국에 이르게 하더니 마침내는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하였다.”고 평했다. ‘매천의 붓끝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는 말이 실감난다.
#사진을 보며 55년의 인생을 돌아보다
▲매천의 나이 55세 때인 1909년에 김규진(金圭鎭)이 운영하던 서울 석정동(石井洞ㆍ지금의 소공동)의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초상화와 함께 2006년에 보물 1494호로 지정되었다. 개인 소장.
일찍이 세상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비분강개 토하는 지사도 못 되었네. 책 읽기 즐겼으나 문원에도 못 끼고 먼 유람 좋아해도 발해를 못 건넌 채, 그저 옛사람들만 들먹이고 있나니, 묻노라, 한평생 그대 무슨 회한 지녔는가. (『매천집』권7 「오십오세소영자찬(五十五歲小影自贊)」)
1909년 가을, 매천은 상해에서 잠시 귀국한 친구 김택영을 보려고 상경했으나 그가 출국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귀향하던 길에 천연당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고 시를 짓게 되는데, 위의 사진과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매천이 자결하기 한 해 전에 썼고 사진과 함께 남아 있어 그 의미가 더해진다. 상념에 잠긴 모습과 55년을 회고하는 시를 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최후를 준비하는 듯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매천이 음독 자결을 시도하기 직전에 쓴 친필 절명시.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되니 바람 앞 촛불만 하늘을 비추네./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하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매천집』권5「절명시(絶命詩)」)
매천이 자결하기 직전에 쓴「절명시」가운데 두 수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조약이 공표되고, 나라를 양보한다는 조서(詔書)가 구례에 도착한 날, 매천은 조서를 절반도 읽지 못하고 기둥 위에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9월 9일 새벽 4경, 문을 닫아걸고 앉아서 절명시 네 수와 자제들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다음 조용히 음독 자결을 시도하였다. 얼마 뒤에 급히 연락을 받고 온 동생 황원이 아이 오줌과 생강즙을 올리자, 그릇을 밀쳐 엎어버리고는 “세상일이 이리 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의식이 점점 혼미해지더니 9월 10일 새벽닭이 두 머리째 울 때 운명하였다.
지난 8월 29일이 바로 그 쓰라린 한일합병의 치욕이 있었던 날이다. “나라가 망한 날, 선비로서 죽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며 매천이 자결한 뒤, 절의를 가슴에 새긴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투쟁과 헌신으로 어렵게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로 시끄러운 현실을 볼 때, 참으로 비애를 금할 길이 없다. 이제 다시는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다함께 결연히 매천의 정신을 되새겨 보고 어떻게 해야 각자의 시대소임을 다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매천집(梅泉集)
원집은 매천이 서거한 이듬해인 1911년에, 속집은 1913년에 모두 중국 남통(南通)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간행되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상해의 김택영에게 유고가 보내졌고, 그의 편정(編定)을 거쳐 간행한 뒤 비밀리에 국내에 보급하였다. 이렇듯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문집이 간행된 것은 매천의 동생과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고 그 뜻에 호응한 영호남의 인사들이 정성을 합한 결과였다. 『매천집』의 번역은 그의 성인(成仁)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0년에 네 권으로 펴냈다. 강위, 김택영, 이건창과 더불어 한말 사대가로 평가받는 매천은 맑고 강건한 시와 예리한 필치의 산문을 다수 남겼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매천야록』은 그의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빛나는 불후의 명저이다.
▲한묵림서국 간행『매천집』과 한국고전번역원 간행 번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