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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발견하는 또 하나의 태도
-유머와 위트의 시학
임현준
“쏟아져 흐르는 저 낭만들”
‘시가 뭔데?’
시를 쓰는 사람이건 시를 읽는 사람이건 시를 싫어하거나 모르는 사람이건 이 질문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게 말문이 막힌다. 애초에 시라는 것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령 시라는 언어예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이데아를 점령했다손 치더라도 어차피 시를 설명할 말의 문이 없는 불가지론적 상황에서 우리가 떠들 수 있는 건 ‘대개’라는 부사를 통해 통념하는 어렴풋한 개념밖에는 없다. 그래서 대개는 시에 대해 이렇게 이해한다.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감정이 움직이는 가운데 나타나면 말이 되고 말이 부족하면 탄식하게 된다.”라고 『시경』의 「대서(大序)」는 말한다. 서양에서는 “시는 강한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다. 시인은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생각하고 느낀다.”라고 워즈워스가 『서정민요시집』을 통해 말하고 있다. 결국, 시에 대해 말문이 막힌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대강은 ‘시인의 마음속 감정이 말로 분출되는 것이 시’라는 어설프고 애매한 어림짐작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필사적으로 문학에 대한 이론을 생성해 내고 시에 대한 창작론을 습득하려는 것은 어설프고 애매한 어림짐작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편을 넘어 불안과 공포를 감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닿을 수 없는 무언가에 매력을 느끼거나 집착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문학을 연구하고 연습하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알아도 못 쓰고, 몰라도 잘 쓸 수 있는 것이 시니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시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해 시시포스적인 도전을 끊임없이 해야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모순적 현실이 우리의 최선이라는 점이다. 더불어 시인의 올바른(?) 태도로서 ‘시란 이런 거야!’라는 오만과 자만이 또 하나의 시적 모색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시의 새로움이 돌출될 수 있다.
시의 정체를 어두운 눈으로 더듬어 보기 위해서는 ‘시인은 뭐하는 사람인데?’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그나마 시인은 실체가 있으니까.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서 “별들과 함께 뒹굴”던 중에 “시가 날 찾아 왔다”라는 경이처럼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라고 말한 건 안도현의 시작법에서였다. “우주”라는 말은 무궁하므로 ‘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시인은 시를 찾고 발견하고 경험하고 읽고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시는 찾아지는 것이고 발견되는 것이고 경험되는 것이고 읽히는 것이고 쓰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라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우주’는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하고 우주의 질서나 진리이기도 하면서 ‘나’라는 실체일 수도 있고 ‘나’의 내면에 생멸하는 우주, 범아(梵我)일 수도 있다. 강조하지만, 시는 ‘우주’라는 세상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심오하고 거창한 것으로서의 철학·종교적 사유뿐만 아니라, 생활의 모든 소소한 감각과 생각과 행동과 마음도 시의 본질이 될 수 있다.
그 수많은 시의 ‘우주’에서 이돈형 시인은 작은 별이나 별 가루 같은 생활의 편린들, 일상의 감정들, 소소한 현상들에 집중한다. 생활이나 감정이나 현상들은 일상다반사로 세상에 가득하니 시인에게 시적 현실은 “쏟아져 흐르는 저 낭만들”의 세계가 된다. 시인은 다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돈형은 일상과 생활의 밋밋한 평면에 돌출된, 손거스러미의 작은 통증을 감지하는 듯한 섬세한 시적 관찰을 통해 돌연 시를 길어 올리는 재주가 있다. 그에게는 평범한 세계에 대한 어떤 이질감이 시적 소재가 된다랄까. 그 시적 소재를 통해 감지되는 이질감이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시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이러한 시적 욕망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삶의 본질을 뽑아내려는 이돈형만의 시적 탐구의 에너지원임은 분명한 것 같다. 때문에 그의 시는 자연스럽게 문장의 위트와 시적 정황의 유머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개념과 지각 간의 불일치가 웃음을 유발한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이돈형에게 범상한 세계에서 “쏟아져 흐르는 저 낭만들”을 감지할 때 시적인 장난기가 유발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딴에는 “쏟아져 흐르는 저 낭만들” 같은 별세계 앞에 장난기가 발동되지 않는 건 오히려 시인으로서 무례하다고 이돈형은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시의 새로움을 돌출하려는 시인만의 오만과 자만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끝내는 피를 보고 만다”는 유머
속이 속이 아니라고 눈부터 뻐근해지는 날이면 오늘은 그만 쉼이 필요하다고 소파에 누워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나를 만나 허구한 날 가난에 찌든 생의 근육들을 풀어보는데 근육들은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초병의 눈처럼 놀라 있거나 돌멩이로 내리쳐도 찢어질 것 같지 않은 근육들뿐이라 우선은 손톱을 세워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며 쳇기가 속절없이 내려가기를 바라지만 쳇기도 징글맞은 나로 인해 맷집이 생기고 근성이 생겨 서랍을 열고 실과 바늘을 꺼낸다
끝내는 피를 보고 만다
검다
― 「쳇기」 전문
「쳇기」는 하나의 연이 시 전체를 아우르는 것처럼 보이는 긴 호흡의 시이다.(표준어는 ‘체기’이나 시의 맛을 위해 사이시옷을 넣어 세게 발음하는 것이 좋다.) 시의 본체를 이루는 1연 자체가 한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시인 특유의 문체를 형성하는 자조 섞인 유머이기도 하다. 물론 「쳇기」의 목적지는 “끝내 피를 보고 만다”는 2연의 첫 번째 행에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 이르게 하는 본질적 원인으로서의 ‘나’가 ‘나’를 괴팍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1연의 긴 문장은 유머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본래 유머(humour)는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생리학 용어로 개개인의 기질과 관계되는 혈액·점액·담즙·흑담즙 같은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어떤 호르몬이 과다하면 거기에 관련된 기질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여 괴팍한 사람이 된다는 식이다. 우울한 기질의 사람은 흑담즙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사람인데, 이런 괴팍한 기질의 사람을 희곡에 의도적으로 등장시킨 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서 활약했던 극작가 벤 존슨이었다. 이후로 문학에서는 비정상적인 기질의 인물이 유발하는 유머가 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습고 재미난 것이라는 통념이 생겼다. 이상섭은 『문학비평 용어사전』에서 “유머는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고 …, 유머는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공감적 태도”라고 설명한다.
이돈형은 이 시에서 “징글맞은 나로 인해 맷집이 생기고 근성이 생”기는 “쳇기”를 의인화시킨다. “찌든 생의 근육”의 ‘나’와 분리된 “쳇기”는 “바늘”을 꺼내 자아가 자아를 찌르게 만들어 “끝내는 피를 보”게 한다. 이 과정에서 “근육들은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초병의 눈처럼” 시인의 성격적 기질을 반영하기도 하고,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푸념하면서도 “손톱을 세워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는 태도와 동작을 통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허무적 공감에 동참시키기도 한다. 결국 피로하고 아픈 ‘나’의 고군분투가 ‘나’ 안의 또 다른 ‘나’에게서 직감되는 이질감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 유머인 것이다.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보고 웃는 것은 조소일 뿐이지만, 자기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직시하다 웃게 되는 것은 유머의 부드러운 면모이다.
“쳇기”는 ‘나’를 대상으로 ‘나’의 부질없음을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드러내는 희극적 유머로 보여준다. 이때의 유머는 자조 섞인 공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아 시선과 자아의 피로함의 감각을 분리하는 자아 분열적 인식을 통해 유머의 단초를 마련한 것뿐이다. 보통의 자아 분열적 인식을 다루는 시들은 내심 심각해지거나 형이상학적 내면에 함몰되기 마련이지만, 이돈형이 추구하는 언어적 방향성은 말놀이 또는 언어유희의 유머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지극히 철학적이어서도 단순히 개그여서도 곤란하달까.
“이 마음 헤아려 주시길” 바라며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는 위트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자는데 가긴 가야겠는데 손잡이 하나 없는 비행기 타는 게 겁이 나 비행기 타고 가다 흔들릴까 봐 겁이나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 자빠질까 봐 자빠지고 자빠지다가 까딱 잘못해 떨어질까 봐 떨어져도 하필 육지도 아닌 섬도 아닌 바다 저 밑바닥일까 봐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자는데 자꾸 가자는데 갈 수 없는 이 마음 헤아려 주시길 헤아릴 수 없다면 태울 비행기에 손잡이 하나 달아주시길
― 「손잡이」 전문
「손잡이」는 소모성 시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모적인 위트가 폭죽처럼 번뜩이는 시이다. 한 번 읽으면 두 번 다시 안 읽어도 될만한 시이지만, 긴 호흡의 변명과 핑계로 점철된 위트는 이 시를 오래도록 각인시킨다. 다시 안 읽어도 기억나게 만드는 시, 다시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시는 소모적인 위트를 위시하여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오랫동안 생각하게 하는 이돈형표 만평 같은 시이다. 시에서 생략된 사건의 구체적 정황이 어떠하든 간에, 불편하고 꺼림칙한 제안에 대해 말장난에 가까운 핑계와 변명으로 거절하는 화용론적 언사는 그 자체로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정황상 인간관계 안에서 생기는 거절의 기술을 재치 있게 보여주는데, 상대방과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말장난을 통해 관계성을 지키는 품위를 위트 있게 “헤아려 주시길” 부탁하는 작품이다. 일견 “비행기에 손잡이 하나 달아주시길” 바라는 시인의 재빠른 재치와 판단력은, 18세기 영국 비평사에서는 언어 구사 능력과 재빠른 판단력, 기발한 이미지의 발견 능력 등을 문학의 본질적 요소로 보기도 했음을 상기하게 한다. 차갑고 냉정한 우리 사회에서 웃음 짓게 하는 거절의 위트를 생각하면 시인의 농이 단순한 농이 아니라는 걸 헤아리게 된다.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 중략 …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서움도 아닌 달고 맵고 신맛이 어우러진 양념에 설핏설핏 물드는 면발
… 중략 …
살과 살을 비벼도 타들지 못하고 사람에게 맨 마음 비벼 봐도 비벼지지 않을 때가 많아
비빔국수를 한 젓가락 휘휘 감아 돌리는 동안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
― 「비빔국수」 부분
위트(wit)는 타고난 우수한 두뇌, 즉 정신 능력을 뜻했다고 한다. 원래는 사람의 오감을 뜻하던 것이 차차 두뇌의 기능으로 의미가 바뀌다가 르네상스 이후에는 재빠른 두뇌 사용, 식별력, 언어 표현 능력을 뜻하게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위트의 함의는 우스운 말의 일종이라는 뜻으로 격하되었다. 이상섭은 “위트는 지적인 것…, 위트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위트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격언 같은 압축되고 정리된 말로 능숙히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비빔국수」는 시 전체를 이루는 여러 문장이 “살과 살을 비벼도 타들지 못하고 사람에게 맨 마음 비벼 봐도 비벼지지 않을 때가 많”다는 8연을 향해 사유가 합집했다가 9연의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를 통해 사유의 무게가 이산하는 이합집산의 시이다. 이 시는 인간관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담아내면서 결국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눙치는 태도로 일관한다. 서로 다른 사물에서 남이 보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지적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유머가 아닌 위트의 시이지만, 딱 거기까지만 인식한다. 이론적으로 위트는 문학적 요소와 적절히 혼합되면 형이상학적인 시를 낳을 수 있는데, 현대의 주지주의적 경향의 시인들이 지향하는 매력적인 성취이지만, 위트는 위트일 뿐이므로 어떠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돈형은 시가 시일 수 있는 선(線)을 넘지 않는 시인이다. 인간관계의 내면을 더 파고 내려가면 사회학이 되거나 철학이 되는데 그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시는 시여야 한다. 특히 이돈형이 지향하는 시는 사물에서 생활에서 느껴지는 시적인 이물감을 깨닫게 되는 데까지이다.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의 위트는 일견 시인 특유의 유쾌함으로 보이지만, 「손잡이」처럼 소모성 짙은 위트로밖에는 안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농담과 위트에는 자조와 비난과 조롱이 “달고 맵고 신맛이 어우러진 양념”처럼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위트에는 주지주의적인 인식이 깔려 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 주지주의적인 인식은 “비빔”이라는 현상과 언어에서 오는 미묘한 느낌을 합치면서 발생한다. “비빔”은 그냥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아닌 것이다. 사물과 언어의 온전한 합치, 이를 통해 시인은 “국수”와 “양념”의 단순한 뒤섞임이 아니라, “비빔” 너머의 인식을 감지해 낸다. 그 인식 자체가 시적 진실이 된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이다. 여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기대고 연결되어 있다는 석가모니 식의 통찰과 깨달음의 깊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나는 비빔국수가 왜 좋을까”에 대한 질문은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와 같은 위트로 점철된다.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하는 장난기가 시의 발동 원인이었고 사유의 영역이다.
“삼가 명복을” 비는 유머와 위트의 콜라보
訃告
故 이상진
아무리 봐도 고인의 이름은 낯선데 상주 이름이 사촌이다
할아버지는 4대 독자이시며 유복자셨으니 조상께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아들 딸 구별 없이 하냥 낳으셨으니 포도나무에 포도송이 열리듯 줄줄이 낳으셨으니 아들 넷에 딸 일곱을 살리셨으니 할머니의 강철 같은 체력과 할아버지의 투철한 정신이 해마다 의기투합하셨으니 딸 하나를 둔 나에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위대한 神이셨으니 그 살아남은 11남매도 두 분의 뜨거운 정신을 이어받아 줄줄이 낳으셨으니 경주 이씨 국당공파의 한 줄기가 융성하고 융성하였으나 고모는 산중고모 신산고모 짝가고모 등등으로 불려 故 이상진 부고를 받아들고 이 낯설고 서러운 이름은 누구십니까 어리둥절할 수밖에
돌아가시고 나서야 처음 불러보는 이상진 고모
삼가 명복을 빕니다
― 「신산고모」 전문
위트는 날카로우나 유머는 부드럽다. 위트는 기술이고 유머는 자연이다. 유머는 공감적 태도에서 발산되는 식으로, 위트는 안으로 파고들어 지적인 비판을 가늠하는 식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비난과 조소만 있으면 유머와 위트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위트와 유머는 구별되지만,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면에서 동질의 것이기도 하다.
「신산고모」는 신작 시들 중 단연 돋보이는 시이다. 이 시가 “산중고모 신산고모 짝가고모” 같은 시어로 백석의 「여우난곬족」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유머와 위트가 적절히 혼재되어 있는 것을 넘어, 좋은 시가 빚어낼 수 있는 유머와 위트의 제대로 된 경지를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쳇기」처럼 「신산고모」도 한 개의 연이 한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긴 호흡의 시이다. 앞선 시에서도 그렇지만, 이돈형은 시적인 장난기가 발동되면 문장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 안에 재치와 기발함을 첨가하여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빚어낸다. 특히 3연은 시인 자신의 누대의 가계를 하나의 문장으로 길게 뽑아내는데, 구성진 묘사와 진술 말고도 연결 어미 “-으니”의 반복으로 마치 변사가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시의 운율을 맛스럽게 빚어내는 것이 압권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언어적 위트 안에는 혈연이라는 전체성과 소홀히 여겨지는 개체성을 대비시키는 유머가 자연스럽고 “어리둥절”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름”이라는 개체성보다는 뿌리와의 연결이라는 전체성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정서이지만, 이 보편적 정서를 곰곰이 되짚다 보면 낯선 기분을 목도하게 된다.
가까울수록 개체의 내면과 개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족 또는 혈연의 모순이다. “故 이상진 부고를 받아들고 이 낯설고 서러운 이름은 누구십니까” 하는 이질감은 누구에게나 보편적 경험이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유머에 해당한다. 혈연이라는 전체성이 소홀히 여겨져 온 개체성이라는 모순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적 모순과 문화적 불경이 가장 날카로운 유머와 위트로 점철된 문장은 시의 마지막 대목 “삼가 명복을 빕니다”이다. 시인에게 “삼가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관용 표현은 애별리고(愛別離苦)의 결별이 아니다. 이는 일상다반사의 생활과 별것 아닌 현실 속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시적으로 감지하고 승화하는 작업이면서, ‘나’와 관련된 인연과 사회질서와 생활의 면면에 도사려 있는 “쏟아져 흐르는 저 낭만들”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는 탄성이다. 이러한 유머와 위트가 절묘하게 또는 날카롭게 스며들어 있는 시가 이돈형이 추구하는 방향성일 것이다.
이돈형 시인에게 세계는 생활의 조각들이고, 그 조각들은 세계의 진실을 맛보게 하는 보석들이다. “쳇기”, “이름”, “비빔”, “손잡이” 같은 비시적인 일반명사는 오히려 “쏟아져 흐르는 저 낭만들”로 반짝이는 시어들이다. 거기에는 생의 고단과 직면한 자아의 고통, 전체성 뒤에 가려진 개체에 대한 인식, 소통과 관계의 불가지론, 세계에 대해 거절하기 등과 같은 나름 깊은 사유를 전제로 한다. 다만, 그 깊은 사유에 빠지는 험악한 꼴을 겪지 말라는 듯 시인은 꾸준히 눙친다. 마치 이돈형 시인에게 ‘시가 뭔데?’라고 물으면 “죄다 시여!”라고 술잔을 비워버리듯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