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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감각으로 여는 봄날의 언어
성재봉의 시
오홍진(문학평론가)
시집의 첫 시로 실린 「한 토막의 바람을 갈고 쪼고 닦다」에는 시인으로서 성재봉이 추구하는 시작(詩作)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람을 낚아챈 푸른 매가 토막 낸 바람결을 갈고 쪼고 닦으며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갈고 쪼고 닦으며”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절차탁마(切磋琢磨)를 시 쓰기의 근원으로 제시한다. 절차탁마는 옥이나 돌 따위를 갈고 닦아 빛을 낸다는 뜻으로, 부지런히 학문이나 덕행을 닦는 걸 말한다. 좋은 시는 시어 하나하나를 절차탁마한 결과로 탄생한다. 시인은 아무 단어나 시어로 시를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람결을 갈고 쪼고 닦은 바로 그 힘으로 푸른 매는 “새파랗게 얼어붙은/ 창공의 밑바닥을/ 뚫어내는 순간”과 마주한다. 새파랗게 언 창공의 밑바닥을 뚫으려면 갈고 쪼고 닦은 힘을 한꺼번에 쏟아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믿지 못하면 그 힘은 쉬이 스러져버린다. 시인은 푸른 매가 순간적으로 내보이는 이 힘으로 “깨어지지 않던 나의 절망”을 완벽히 깨뜨린다. 절망의 뿌리가 깊을수록 그것을 깨뜨리는 힘 또한 강력해야 하는 법이다.
「섬, 멍들다」에서 시인은 마음 깊이 새겨진 절망의 뿌리를 정맥주사를 잘못 맞은 탓에 생긴 시퍼런 멍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 “시퍼렇다는 것은 아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퍼런 멍 자국을 보며 시인은 어린 시절 형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형은 동생을, 동생은 형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형에게 “좋아한다는 건 잘못된 것을 고쳐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형은 잘못된 것을 고친다는 명분으로 동생을 때렸다. “저항도 꿈틀거림도 가라앉은 섬의 심연”에서 동생은 소리 없이 울었고, 때리는 형은 벅찬 소리를 내지르며 울었다. 시인은 아주 먼 옛날(?)에 벌어진 이 사건을 “작은 섬”에 새겨놓고 하얀 배꽃이 피는 날이면 어김없이 떠올리고 있다. 진저리나게 아픈 이 사건에는 형과 동생만 있을 뿐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는 시절이란 지독한 가난과 통한다. 가난이 아프고 아픈 작은 섬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아이는 시퍼렇게 멍든 섬 하나를 마음 깊이 새겼다.
기울어진 가세는 삶의 터전을
읍내에서 낙동강 칠백 리
제일 끝자락으로 내몰았다
빨간색 완행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삼십 리 비포장길을 달려야 했던
중학교 시절
낡은 차부(車部)에서의 야윈 닭발 튀김은
단돈 오십 원으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마른버짐 가득한 아이의 탐미였다
마지막 발톱을 삼킬 즈음
늙은 소 같은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온
아버지와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토바이만 짖어댈 뿐
부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닭발」 전문
위 시에서 성재봉은 가난을 빨간색 완행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삼십 리 비포장길을 달려야 했던 중학교 시절의 삶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난은 관념이 아니다. 정말로 가난을 경험한 이는 마음 깊은 곳에 가난의 감각을 품고 있다. 시인은 “낡은 차부(車部)에서의 야윈 닭발 튀김”을 운명처럼 떠올린다. 가난한 아이는 먹고 싶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먹는다고 해도 단돈 오십 원짜리인 ‘야윈’ 닭발을 먹는 게 전부다. 배불리 먹는 것도 아니고 그저 허기를 달랠 수 있을 뿐이다. “마른버짐 가득한 아이의 탐미였다”라는 시인의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먹는 게 부실한 아이의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가득 피었다. 그 얼굴로 아이는 허기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야윈 닭발을 물어뜯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가난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야윈 닭발이 탐미(耽味/耽美)의 대상이 되는 데서 성재봉 시로 가는 단서가 피어난다. 그는 가난의 감각을 맛보고, 그 감각을 통해 아름다움으로 가는 시의 길을 연다.
시인이 말하는 가난의 탐미는 동시에 그 상황을 슬프게 바라보는 아버지/어머니의 눈과 이어져 있다. 야윈 닭발 튀김을 다 먹을 즈음 아이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는 “늙은 소 같은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야윈 닭발 튀김을 ‘탐미’하는 아이의 마음을 아버지가 모를 리 없다. 아이가 겪는 가난을 아버지 또한 겪고 있을 테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도 아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아버지는 식구들이 하루 먹을 양식을 벌었을까? 아무런 말이 없는 아버지를 어린 아들은 이해한다. 마른버짐이 퍼진 아들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아버지는 오토바이가 가는 길목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말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의 귀에 오토바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가면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겪은 가난(의 감각)을 아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가난을 온몸에 새긴 아버지에게 아들 몸에 새겨진 가난은 끔찍한 고통과 같다.
“작은 섬”(「섬, 멍들다」)에 갇힌 자식들을 향한 아련한 마음은 「엄마의 눈물」에도 그대로 표현된다. 눈에 들어간 티끌이 아기를 괴롭히면 엄마는 보드라운 혀로 씻어 주었고, 복숭아를 서리한 소년이 주인에게 꾸지람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포근히 안아 주었으며, 거친 세상의 풍파에 상처 입은 청년을 보고 엄마는 별것 아니니 힘내라고 웃어주었다. 엄마의 이 힘으로 아기의 눈은 맑고 깨끗해졌고, 소년의 마음은 선해졌으며, 청년의 심장과 머리는 튼튼하고 강해졌다. 엄마의 이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마흔이 훌쩍 지나서야 시인은 이 속에 숨겨진 ‘엄마의 눈물’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아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집에 갔듯, 엄마 또한 아무 말 없이 씻어 주고, 안아 주고, 웃어주었다. 성재봉의 시는 작은 섬에서 펼쳐지는 고통과 온몸으로 이를 끌어안는 아버지/엄마의 눈물 사이에서 피어난다.
노을이 유난히 붉게 떨어지던 그날
마을 어귀에 사과 난전이 펼쳐졌다
몸빼 차림의 순영이 엄마
새끼 소를 높은 값에 팔고 돌아오는 종관이 아버지
면사무소에서 먹물 더미를 한 바가지 싣고 온 마을 이장님
모두 노을빛 사과를 한 아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집집마다 빨간 향의 아삭한 말들로 새콤달콤한 과즙이 톡톡 터져 나왔다
이장댁 밭일을 마치고 바쁜 걸음으로 도착한 그녀
꼬깃한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사과가 맛없어 보인다고 잔가시 가득한 손으로 시쿰한 된장국을 차려내었다
누군가 깎아놓은 사과껍질 마냥 길고 길었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새콤달콤 터진 과즙이 그녀의 눈물과 섞여 비로 쏟아졌다
다음 날
비에 젖은 꽃잎이 아침 햇살을 품은 채 견디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 「사과」 전문
가난은 관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표출된다고 했다.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늘 가난을 상상한다. 관념으로 가난을 그리고 관념으로 가난을 극복할 단서를 찾는다. 가난을 감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다르다. 가난의 감각은 몸에 새겨져 있어, 관념으로는 도무지 그 가난을 표현할 수 없다. 위 시에서 시인은 “노을이 유난히 붉게 떨어지는 그날”의 감각으로 가난을 불러낸다. “집집마다 빨간 향의 아삭한 말들로 새콤달콤한 과즙이 톡톡 터져 나왔”지만, 이장댁 밭일을 마치고 집에 이른 여인은 꼬깃한 지폐를 만지작거리다가 사과가 맛없어 보인다며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잔가시 가득한 손으로 시쿰한 된장국을 아이들 앞에 차려놓은 여인의 이 마음을 시인은 노을빛 사과와 새콤달콤한 과즙의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다. 새콤달콤한 과즙 대신 시쿰한 된장국을 먹는 아이를 시인은 온몸을 떨며 떠올린다. 애써 그 상황을 외면하는 어미의 심정이야 달리 말해 무엇 할까.
시인은 노을 진 그날을 “누군가 깎아놓은 사과껍질 마냥 길고 길었던 그 밤”으로 기억한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빨간 사과의 감각은 이미 마음 깊이 새겨져 있다. 사과를 볼 때마다 시인은 이날의 감각을 떠올릴 테고, 그에 맞추어 몸 또한 반응할 테다. 하필이면 이날 비가 내렸나 보다. 시인은 새콤달콤 터진 과즙과 여인의 눈물, 그리고 쏟아진 비의 감각으로 이날을 떠올리고 있다. 과즙-눈물-비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은 “다음 날/ 비에 젖은 꽃잎이 아침 햇살을 품은 채 견디고 있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면 비에 젖은 꽃잎은 이내 마를 것이다. 시인은 이를 통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희망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다. 시인은 다만 주어진 상황을 견디는 서민들의 아픔을 아침 햇살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비에 젖은 꽃잎과 더불어 아침 햇살을 기억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어미의 눈물과 섞인 새콤달콤한 과즙을 떠올릴 터이다. 그것이 바로 성재봉이 그리는 가난의 감각이다.
「그늘을 눕다」를 따르면, 시인에게 가난은 사물을 뒤덮은 그늘과 유사하다. 그늘은 살아오면서 쌓인 시간의 흔적을 가리킨다. 우리는 살면서 그늘에 그늘을 얹는다. 시간이라는 그늘에서 살다가 시간이라는 그늘 속에서 죽는다. 시인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섣달 그믐밤에 몰래 심었다는 버드나무 한 그루”에 주목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버드나무 아래로 수만 겹의 그늘들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버드나무만 그럴까? 적막한 곳에서 죽은 듯이 숨 쉬는 늙은 잉어도 그렇고, 할머니가 몰래 사랑했던 도둑고양이도 그렇다.
지금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생명의 그늘들이 모여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이 세계가 만들어졌다. 시인은 손등에 쌓여가는 “오래된 그늘과 근자의 그늘”을 말하고 있다. 오래된 그늘 위로 근래 만들어진 그늘이 쌓이고 있다. 생명이 살아온 내력이 모이면 그늘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무거워진다. 그늘의 깊이와 무게는 그 생명이 살아온 깊이와 무게를 나타낸다.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는 “내가 어제 믿었고 내일 의지해야 할 무거운 깊이”에 갇혀 사는지도 모른다. 성재봉의 시를 가로지르는 가난의 감각에는 무엇보다 이러한 생명의 깊이와 무게가 들붙어 있다. 깊고도 무거운 그늘을 품고 그 그늘을 어떻게든 펼치며 사는 게 우리네 삶이라는 걸 시인은 시를 통해 분명히 내보이는 것이다.
시간의 무게를 견딘 눈이 내린다
눈은 오염되지 않은 순결 덩어리
그러나 그것은 환몽(幻夢)
순결을 가장한 오염 덩어리
살아온 날들이 하얗게 덮혀진다
시간을 굴리고 뭉쳐보면 순백일까
태초의 어둠일까
바다가 죽으면 소금이 되듯
삶을 견디지 못한 하늘이 눈이 되어 흩어진다
어둠의 중심이 사라지듯
시간은 중심을 찾지 못하고 떨어지고 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솟는 허구의 서사들
무덤을 뒤덮은 눈을 굴린다
죽기를 갈망하는 너를 일으켜 세우며 중심을 잡는다
태양이 뇌수를 내뿜기 시작한다
모든 중심이 사라지고 있다
- 「시간의 무게는 순백일까」 전문
한 생을 가로지르는 깊이와 무게를 끌어안으려면 생에 드리워진 시간의 무게를 끊임없이 견뎌야 한다. 아무나 이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다. 위 시에서 시인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내리는 눈에 주목한다. “눈은 오염되지 않은 순결 덩어리”면서 동시에 “순결을 가장한 오염 덩어리”이다. 완전하게 순결한 사물도 없고, 완전하게 오염된 사물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생명은 순결하면서 오염된 삶을 산다. 시인은 묻는다. “시간을 굴리고 뭉쳐보면 순백일까/ 태초의 어둠일까”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을 사는 모든 사물은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순백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순백으로 가는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시인은 “삶을 견디지 못한 하늘이 눈이 되어 흩어진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늘도 견디지 못하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 그리고 그토록 힘든 삶을 받아내는 대지는 또한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다른 건 몰라도, 삶의 무게가 무겁고 삶의 깊이가 깊을수록 더욱더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삶은 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은 둘이면서 하나라고 말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생명의 중심은 삶에 있는 것일까, 죽음에 있는 것일까?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고, 죽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느 때는 삶이 생명의 중심으로 작용하지만, 어느 때는 죽음이 생명의 중심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눈이 내리면 지상에는 순백의 세상이 펼쳐지고, 해가 뜨면 저마다의 사물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낸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밀려오면 사물은 어둠에 묻혀 가만히 숨을 쉰다. 밝은 세상에서는 빛이 세상의 중심이 되지만, 어두운 세상에서는 어둠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시인은 “모든 중심이 사라지고 있다”라는 시구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눈에 덮인 세상은 눈이 세상의 중심을 이루고, 햇살이 내리쪼이는 세상은 태양이 세상의 중심을 이룬다. 시간은 어느 하나의 중심에 매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수많은 중심이 다채롭게 펼쳐진다는 걸 의미한다.
누구나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며 허구의 서사들을 상상한다. 자신을 중심에 세우면 다른 사물은 모두 주변이 된다. 누군들 악당이 되고 싶을까? 무자비한 악당이 있어야 영웅의 서사가 빛을 내는 법이다. 태초의 어둠이 자리해야 비로소 순백의 빛이 더욱더 밝아진다. 시인은 「마이너리티」에서 절벽에서 몸을 던져 새로운 별로 탄생하는 생명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시든 꽃은 푸른 꽃이 될 수 없고, 한 마리 뱀은 밤하늘의 별로 거듭날 수 없다. 사람들은 늘 시든 꽃은 어떻고, 뱀은 어떻다며 사회통념을 불어넣는다. 마이너리티, 곧 소수자로 명명되는 사물들을 배제함으로써 사람들은 다수자가 지배하는 세계를 공고히 한다. 가난한 이를 대하는 일 또한 다르지 않다. 가난한 이의 맞은편에 부자가 있다. 부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가난한 이는 태어날 때부터 마이너리티가 될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중심을 허무는 서사가 자기 목숨을 거는 일과 다르지 않은 까닭은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지금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뜻을 가만히 음미해 보라.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 우리 앞에 드러나는 세상은 달라진다. 탐욕에 물든 눈으로 보면 탐욕에 물든 세상이 드러나고, 무심(無心)의 눈으로 보면 차별 없는 세상이 온전히 드러난다. 시인은 「바라본다는 것」에서 이런 무심의 시선에 어린 맥락을 시화하고 있다. 바라보는 것은 우선 “보이지 않는 선을 잇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선은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들여다봐야 드러난다. 때 묻지 않은 마음은 “마음의 울림을 헤아리는 일”로 이어지고, “손을 맞잡지 않고도 온기를 느끼는 일”로도 이어진다. “헤어져 있어도 멀어지지 않는 일” 또한 이 마음과 이어져 있다. 성재봉의 시안(詩眼)은 보이지 않는 사물의 심연을 올곧게 들여다보려는 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생명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말은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꽃은 지면서 젖은 향을 내리고
아지랑이는 피면서 마른 향을 올리고
그 사이 홀로 균형을 찾으려는
취한 나비의 아질아질한 몸부림
- 「율동의 시초」 전문
오래된 매화나무에, 갓 부화한 나비의 흰 날개 위에, 바위의 거친 표면에, 바위에 앉은 고양이의 수염에, 고양이를 쓰다듬는 아이의 손등에, 새벽이슬 같은 소녀의 맑은 눈물 위에, 찾아올 봄보다 보낸 봄이 많은 할머니의 주름 사이에, 연못의 고요한 수평 위에, 옆으로 나란히 쭈그리고 앉은 새싹들의 뾰조록한 부리 끝에,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의 볼록한 곡선에, 잠에서 깬 새들의 음률 속에, 햇볕에 놀란 신록의 떨림 사이에......
- 「환대」 부분
지친 몸
병든 마음
감로수에 씻기우니
이제사
날다람쥐
똘망똘망 눈 맞추네
- 「산사의 아침」 부분
운무를 불러와 바람에 얹히고
산새를 불러다 구름을 잠재운다
보리암 삼층 석탑 위
나와 석탑은
업(業)과 눈물이 닮아
기도가 하나의 바람이다
- 「남해를 보다」 부분
성재봉 시에 나타나는 무심의 시학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가난의 고통을 스스로 절제할 때 비로소 피어난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물을 들여다보는 게 바로 무심이다. 그것은 사물에 헛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사물을 그 자체로 들여다볼 뿐이다. 위에 인용한 「율동의 시초」를 먼저 보자. 젖은 향을 내뿜으며 떨어지는 꽃이 있고, 마른 향을 올리는 아지랑이가 있다. 그 향에 취한 나비는 유유하게 허공을 날고 있다. 꽃과 아지랑이와 나비가 어울려 저마다의 율동을 내보이고 있다. 꽃은 꽃대로, 아지랑이는 아지랑이대로, 나비는 나비대로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생명의 리듬을 표출한다. 한 생명의 리듬은 다른 생명의 리듬을 타고 펼쳐진다. 모든 생명은 살아 있는 한 리듬을 타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질아질한 몸부림”은 오로지 살아 있는 생명만이 표현할 수 있다.
「환대」에는 모든 생명을 공평하게 대하는 봄바람의 자연이 뚜렷이 드러난다. 환대는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마음을 가리킨다. 생명의 바람인 봄바람이 사물을 차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물은 제대로 그 생명력을 피우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을 지닌 자연(自然)에 걸맞게 봄바람은 때가 되면 불어와 자연 속 사물들을 거듭 살린다. 시인은 오래된 매화나무에서 봄바람을 느끼고, 갓 부화한 흰 날개 위에서도 봄바람을 느낀다. 할머니의 주름을 간질이던 봄바람은 이내 고요한 연못의 수면을 간질이다가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의 볼록한 곡선에 가 닿는다. 봄바람이 머무는 자리마다 새로운 숨결이 피어난다. 서로를 환대하는 자연 사물과 만남으로써 가난의 고통에 울부짖던 시인은 “새로운 경계”(「프리즘」)를 경험한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면 새로운 경계로 나아갈 수 없다. 마음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은 여기서 다시금 증명된다.
탐욕이 들끓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환대의 반대편에 탐욕이 있다. 그렇다는 건,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무심(無心)이나 시심(詩心)의 밑자리에는 환대가 서려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물을 환대하는 마음 없이 무심과 시심을 논하기는 힘들다. 「산사의 아침」에 표현된바 그대로, 지친 몸과 병든 마음을 감로수에 씻어야 우리는 비로소 날다람쥐의 똘망똘망한 눈과 마주칠 수 있다. 날다람쥐가 내보이는 심연과 마주하려면 시인 스스로 날다람쥐가 되는 시적 과정이 필요하다. 거듭 말하지만, 사물이 되지 않고는 사물의 심연으로 뛰어들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이란 무엇보다 자기를 내려놓고 사물이 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시작(詩作)은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사물의 심연을 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데서 시 쓰기는 이루어진다.
「남해를 보다」에도 사물과 하나가 되어 사물을 보는 시인의 마음결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시인은 “산과 바다는/ 말과 마음이 닮아/ 바람이 하나의 숨결이다”(같은 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말과 마음이 닮은 산과 바다는 둘이면서 하나다. 바람의 숨결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산과 바다는 운무를 불러와 바람에 얹히고 산새를 불러서는 구름을 잠재운다. 산은 바다의 마음과 이어져 있고, 바다는 산의 마음과 이어져 있다.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으므로 산과 바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산과 바다만 그런 관계를 맺는 게 아니다. 시인과 보리암 삼층 석탑 또한 업(業)과 눈물이 닮았다는 점에서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업이 닮았다는 점에서 시인과 석탑은 한자리에서 묵묵히 제 삶을 견뎌왔다. “기도가 하나의 바람이다”라는 결구에 드러난 대로, 시인과 석탑은 올곧은 자세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성재봉은 지금 산과 바다와 석탑의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산-바다-석탑이 되지 않고 어떻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의 그날 밤
석가의 제자 가전연(迦旃延)**도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는 요한사도와 국수를 먹으며 스승들의 사랑과 자비를 논하였다
그들이 함께한 국수는 지중해를 거쳐 시칠리아에서 파스타로 부활하였고, 메콩강 줄기를 따라 안남국에서는 쌀국수로 환생하였으며, 만리장성 산해관을 벌하고 토문강을 건넌 후 이곳 극동에서는 잔치국수로 해탈하였다
오늘 밤 잔칫상의 포도주는 끈적한 밑바닥을 드러냈다
하지만 탁발승의 염화미소를 보았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시기와 질투와 탐욕으로 꼬여버린 뱀들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혼인잔치의 기적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 「가나 혼인잔치의 승소(僧笑)」 전문
위 시에서 성재봉은 스승들의 사랑과 자비를 논하는 가전연과 요한 사도를 시 세계로 불러내고 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 그 날에 그들은 만나 국수를 먹으며 스승들이 전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론한다. 그들이 함께 먹은 국수는 이후 파스타로, 쌀국수로, 잔치국수로 해탈하였지만, 정작 국수를 먹으며 끊임없이 담론을 나누었을 가전연과 요한 사도의 후손들은 사랑과 자비의 언저리에도 닿지 못하였다. 부처와 예수가 실천한 사랑과 자비는 타자를 온전하게 환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자기를 중심에 세우면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곧 자기 욕망을 내려놓은 자만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했고, 부처는 무주상(無主相) 보시, 곧 보시하는 마음조차도 내려놓아야 비로소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승들이 온몸으로 실천한 사랑과 자비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과연 이루었을까? 시인은 잔칫상의 포도주가 끈적한 밑바닥을 드러냈지만, 탁발승의 염화미소를 보았다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염화미소는 말 없는 깨달음을 가리킨다. 부처가 꽃을 들어 올리자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헤아리고 웃음을 지었다. ‘승려의 미소’인 국수를 먹으면서도 사람들은 염화미소에 이르지 못했다. 오로지 “시기와 질투와 탐욕으로 꼬여버린 뱀들만 꿈틀거릴 뿐이었다”. 염화미소는 지식으로 이를 수 있는 깨달음이 아니다. 부처와 마하가섭은 마음으로 통했다. 무언가에 매인 마음이 아니라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마음으로 그들은 서로 미소를 지었다. 성재봉은 시를 통해 이 마음에 이르려 하지만, 질투와 탐욕에 물든 뱀들이 지금 이곳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가 발 딛고 있는 곳과 그가 추구하는 시 세계는 완연히 다르다.
이를테면 「한 남자의 숲」에는 남자가 사랑하는 “회색 숲”이 나온다. 익룡을 닮은 비행체들이 날아다니고,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는 “불멸의 꽃”로 넘쳐나는 이 화려한 숲을 남자는 자랑스러워했다. 어느 순간, 40주야 간 비가 쏟아져 회색 숲은 큰물에 잠겼고 남자는 깊이 잠들었다. 그 속에서 신의 부름을 받은 남자는 인간의 손발이 미치지 않는 태초의 숲을 찾았다. 히말라야 수행자들의 묵언 독백이 나무의 숨결을 채우고, 지배를 모르는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지만, 남자는 그 숲이 참으로 불편했다. 시인은 “남자는 눈을 뜨지 못했다”라는 시구로 이 시를 맺고 있다. 남자가 제대로 눈을 뜨고 있으면 회색 숲은 자랑스러운 세계가 되지만, 남자가 잠에 빠져 눈을 뜨지 못할 때 회색 숲은 먹구름이 세상을 뒤덮는 어둠의 세계로 돌변한다. 중요한 것은 눈을 뜨고 똑바로 회색 숲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야 회색 숲에 서식하는 “불멸의 꽃들”이 제대로 보인다.
가진 것은
짧은 언어
그마저도
살기 위해
잊은지 오래
절대고독
종달새
垂
直
落
下
가난한 시인은
봄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 「낙화」 전문
사물이 내보이는 모든 의미를 담아낼 수 없다는 데서 인간 언어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 언어에 뿌리를 둔 시어라고 다르지 않다. 사물은 늘 언어 바깥으로 달아나 시인을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몰아넣는다. 공포가 없이 어떻게 사물을 올곧게 대할 수 있으며, 공포가 없이 어떻게 사물의 깊은 자리로 뛰어들 수 있을까? 위 시에서 시인은 떨어진 꽃을 수직으로 낙하하는 종달새에 비유하고 있다. “가진 것은/ 짧은 언어”라는 시구에 드러나듯, 떨어지는 꽃이나 낙하하는 종달새나 단말마의 짧은 언어로 자기 생을 표현한다. 여기에 인간의 의미가 묻을 리 없다. 인간의 언어는 애초부터 짧은 언어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인간은 사물에 의미를 붙여 한사코 지배하려고 한다. 언어로 사물을 지배하는 게 가능했다면 시어(詩語)가 따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물을 지배할 수 없다고 깨달은 인간들이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시어가 탄생했다.
짧은 언어를 남기고 땅으로 떨어지는 꽃을 보며 시인은 “절대고독”을 떠올린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꽃이 진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은 자연 현상일 뿐이다. 종달새가 하늘을 나는 일 또한 자연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사는 생명은 긴/많은 언어가 필요 없다. 자연 앞에 문명을 맞세운 인간만이 길고도 많은 언어를 개발해 자연을 지배하려고 한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다. 화려하고 풍족한 삶을 위해서다. 자연이 파괴되든 말든 인간은 이 목적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가 왜 사물을 의미에 가두려고 하겠는가. 시를 쓰는 일은 이리 보면 사물을 인간의 언어/의미로부터 해방하는 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의미에서 해방된 사물은 종달새처럼 하늘 높이 날며 “절대고독”을 즐긴다.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언어로부터 해방된 시인만이 언어, 정확히 말하면 시어로 시를 쓸 수 있다.
성재봉은 “가난한 시인”을 말하고 있다. 가난한 시인은 꽃잎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를 듣는 존재이고, 종달새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내뱉는 함성을 듣는 존재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듣느냐고 물을 필요가 있을까? 사물을 향한 지배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시인은 꽃잎이 되고, 종달새가 된다. 꽃잎과 종달새가 되어 그들이 내뱉는 짧은 언어로 시를 쓰는 상황을 시인은 “가난한 시인은/ 봄말을/ 내뱉기 시작했다”라는 시구로 표현한다. 봄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탄력(「탄력의 한 가운데에서」)으로 온갖 사물을 환호케 한다. 봄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뜨거운 생명을 품고 있다. 떨어지는 꽃이라고 다르지 않고, 수직으로 낙하하는 종달새라고 다르지 않다.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헤아리는(「무량사」) 게 시작(詩作)이라면, 성재봉은 가난한 시인의 봄말로 보이지 않는 사물의 “절대고독”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의 시를 관류하는 가난의 감각은 여기서 한 가난한 시인의 마음 깊이 새겨진 회색 숲을 표현하는 언어로 거듭난다. 물리적 가난을 뛰어넘은 자리에서 가난한 시인의 마음, 곧 시심이 뻗어 나온다. 가난한 시인은 늘 타자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려고 한다. 가난의 고통에 갇혀 사물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쉬이 빠지지 않는다. 성재봉의 시가 가난한 삶의 기억에 의존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는 늘 가난 너머에서 빛나는 따뜻한 마음결로 그 기억을 갈무리하려고 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가난이 고통을 넘어 새로운 경계를 낳는 시적 힘으로 작용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새로운 경계에 선 자만이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 성재봉은 지금 그리로 가는 길을 찬찬히 탐색하고 있다.
--오홍진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