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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비밀을 보는 밝은 눈
--권예자 제3시집 『가문비나무 기록장』
양 애 경
같은 대전에 사는 인연으로 권예자 시인을 문학 모임에서 두어 번 뵌 적이 있다. 단아하면서도 씩씩해 보이는 선배시구나 생각하면서도 가깝게 모시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마침 이런 기회가 왔다. 애지의 반경환주간님이 원고를 보내시면서 작품이 너무 좋다고 하셨는데, 읽어보니 과연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하고픈 말들과 이야기를 담고 살지만, 때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풍부한 노래를 품은 분들이 있다. 권예자 시인도 그런 분이다. 권예자 시인은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국가공무원으로 평생을 복무한 후에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2002년에 수필로 등단하여 『내 안의 피에타』 등의 수필집을 엮어냈고, 원종린수필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시로는 2004년에 문학저널로 등단하였는데, 제1시집 『숲이 나를 보고』와 제2시집 『비밀 일기장』을 상재하였으며, 이번이 세 번째 시집이다.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느라 오래 기다렸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많은 작품들로 뿜어내신 것 같다.
권예자 시인은 예리하고 따스하고 젊은 감각, 어찌 보면 약간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함께 가지고 있다. 거듭하여 작품을 읽으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피상적으로 보고 넘기지 않는 예리한 시각, 그러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해방된 윤리관, 사람에 대한 따스한 연민, 삶의 비밀스러운 의미에 대한 통찰이 권예자 시인의 시의 특질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어찌나 맛깔스럽게 시 속에 이야기를 엮어내었는지, 역시 이분은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1. 그 이름 여자, 2. 사람에 대한 연민, 3. 삶의 비밀을 보다 의 3항목으로 나누어 권예자 시인의 제3시집 『가문비나무 기록장』의 의미들을 짚어보기로 한다.
1. 그 이름 여자
여자도 남자도 한 세상 살기에 각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유독 여자에게 행실에 대한 간섭과 제재가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자는 많은 여인을 유혹할수록 능력 있고 매력 있는 남자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여자는 여러 남자에게 매력을 풍기면 행실 나쁜 여자일 뿐이다. 남자에게는 사냥본능이 인정되며, 여자에겐 철벽방어만이 무난하다. 방어에 실패하여 남자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는 ‘쉬운 여자’라는 멸시를 받으며, 철벽방어에 성공한 여자는 매력 없는 여자로 배척된다. (얼마나 불공평한가!) 권예자 시인은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도사린 불공평함을 날카롭게 꿰뚫어 본다.
시 <어떤 장례식>에서 시인은 동네의 문제아였던 한 여인의 삶에 대해 말한다.
기와지붕을 뚫고 치솟아 오른
통곡 한 마당
스물여덟 숙자엄마 소리의 한복판을 가르고
이승의 옆구리를 걷어찼네
뾰족구두 파마머리 간들간들 고운 매무새
사내들 마음을 휘어잡고
여인들의 눈총에 만신창이 되던
단아한 웃음도 사라졌네
때론 중늙은이들에 머리채를 잡히고
점잖은 마나님 앞에 꿇어앉아 훈계를 듣고
피맺히게 종아리를 맞던 오기도 떠나갔네
한 번도 남의 눈에 띄지 않던 그 남자
한달음에 달려와 식은 몸뚱이를 끌어안았네
이틀이나 입관이 미루어져도
그들의 결속 떼어내지 못했네
손 한번 잡아보기 소원이던 마을 남정네들
상두꾼 되어 어깨에 그녀를 떠메고
어허 어하여, 어허 어하야
눈에 불 켜고 남편 단속하던 아낙네들
옷고름으로 눈물 찍어내며 뒤 따라갔네
아비가 애매하다는 세 살 숙자
이사람 저사람 품에 안겨 방긋거리던
그해 초봄
큰 기와집 숙자엄마 장례식
-- 시 <어떤 장례식> 전문
이 시에서 ‘숙자엄마’의 죽음은 많은 궁금증을 낳는다. 28세의 나이에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3살 딸이 있고, 유행에 따른 옷차림과 고운 매무새로 온 동네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으며 따라서 마을 여인네들의 공적公敵이 된 그녀는 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을까? 남자들의 욕망의 표적이 되었으며 보수적 질서의 질책에 시달리던 그녀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특히, 그녀와 스캔들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주검을 붙들고 이틀이나 놓지 않았던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도 그녀를 욕하던 마을 여인네들은 왜 눈물을 흘리며 상여를 따라간 걸까? 숙자의 아비는 누구일까? 시인은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독자의 판단과 상상에 맡길 뿐이다.
사실 시인이 이 시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미스테리에 대한 정답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숙자엄마로 대변되는, 남자의 보호 아래 있지 않은 매력적인 젊은 여자에 대한 세상의 판단이 얼마나 가볍고 진부한 윤리의식에 빠져 있는가에 대한 환기이다. 여자를 정숙하고 보호받아 마땅한 여인과 천하고 음란한 여인으로 나누는 이분법二分法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여자를 조강지처 감과 노리개로 구분하여 대하는 것이 남성 위주 가부장 사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여자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은 자주 여자들을 매우 괴롭힌다. 시 <요양병원의 파문>은 요양병원의 요양사 여인을 그렸다. 몸을 쓰지 못하고 정신도 아물거리는 노인들을 짜증도 내지 않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천사 같은 여인이다. 당연히 주변의 칭송을 받는다. 그런 그녀에게 위기가 닥쳐온다.
불혹에 혼자되어
어린 남매 키우며
궂은일 가리지 않는 꼿꼿한 그녀에게
슬금슬금 찾아든 털북숭이 손들
앞에서 웃어주고 뒤에서 꼬집으며
말이 말을 낳기 여러 번
음흉한 말끝이 파문波紋을 일으켜
파문破門 당하고만 그녀
병원 문을 나서며
웃었으면 꼬집지 말든지
밟으려면 손이나 내밀지 말든지
--시 <요양병원의 파문> 중에서
불혹 나이에 남편을 잃고 아이들 양육을 위해 힘들게 일하고 있는 그녀에게 뒷말이 수런거리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인정받던 천사 같은 요양사가 소문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웃었으면 꼬집지 말든지 / 밟으려면 손이나 내밀지 말든지”라는 씁쓸한 독백은 여자에게 유혹에 넘어올 것과 스스로를 방어할 것을 동시에 요구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사회를 꼬집는 말이다. 결국 억울하게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이런 처지에 놓이는 홀로된 여자가 결코 적지 않을 듯하다.
그녀는 서늘한 저녁을 피해
사막의 정오 땡볕 아래 물 길러 갔지
여섯 남자를 거쳐서도
제 남자를 갖지 못한 그녀는
사람들 눈이 두려웠거든
얼굴을 가리고 작은 물동이를 이고
주춤주춤 우물가로 갔지
거기 눈 깊은 남자가 말을 걸었네
나에게 마실 물 좀 다오
서로의 물을 나누어 마신 후
그녀는 종종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지
상대역이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네
일곱 번째 그 남자는
그녀의 유일한 남편이 됐거든
수돗물 좍좍 틀어 물 쓰는 여인들
샘물이 귀한 것 눈치도 못 채지
좋은 남편이 꼭 필요한 것도 모르지
부끄러워 얼굴을 가릴 줄도
때를 가늠할 줄도 모르지
낯선 이에게 물을 나누어 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지
여기저기 보이는 사마리아 여인들을
손가락 쑥 내밀어 찌르기는 잘하지
거침없이 돌팔매질도 하지
우물이 돌멩이로 가득 차 막혀버릴 때까지
--시 <그 여자의 샘물> 전문
시 <그 여자의 샘물>은 권예자 시인의 여성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사막에 사는 한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른 여인들은 서늘한 시간에 물을 길러 공동 우물에 가지만, 그녀는 땡볕에 물을 길러 간다. 구박과 학대를 피해서다. 그녀가 마을의 구박데기인 것은 6명의 남자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우물에서 만난 일곱 번째 남자에게 물을 나누어 준 후 그녀는 드디어 그의 정식 아내가 된다. 눈 깊은 그 남자와 운이 나빴던 겸손한 그녀가 함께 행복하기를!
시 속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씁쓰레함은 남는다. 사실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그녀를 노리개로 대우하고 버린 6명의 남자가 아니었을까. 여자의 삶이 남자에게 전적으로 행·불행이 달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것은 시대의 한계이리라. 시 후반부에서 시인은 현대의 여인들을 제시한다. 시대가 바뀌어 집집마다 설치된 수돗물을 편리하게 쓰게 되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처지에 처한-사마리아-여자들에게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자들끼리의 이해와 연민이 있어야만 공동체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시 <오류리 등나무>는 천연기념물인 오류리 등나무에 얽힌 전설을 시화한 것이다. 신라 오류마을에 살던 어여쁜 두 자매가 옆집 총각을 동시에 사랑하였고, 그 총각이 전장에 나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그 자리에 네 그루의 등나무가 돋아났다. 이후 그 총각이 화랑이 되어 돌아와 자매의 죽음을 듣고는 같은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후에 팽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네 그루의 등나무와 한 그루의 팽나무가 얽혀 있는 모습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천 년이 지나도 등나무들은 팽나무를 끌어안고 사무친 사랑을 고백해요. 오월이면 휘고 굽은 줄기마다 간절한 연서를 적어 두어요. 절절한 마음의 편지 잘 읽어보라며, 주렁주렁 보랏빛 등불도 환하게 밝혀놓아요.
보는 이들은 속도 모르고 팽나무가 등꽃을 피운다고 말하네요. 겨울엔 팽나무를 싸고도는 등나무의 모습이 끔찍해서, 얼키설키 휘감긴 몸을 억지로 떼어 지지대에 얹어줘도 등나무는 자꾸 팽나무에만 손을 내민답니다.
사람들은 알까요?
두 여자 사이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마음을
--시 <오류리 등나무> 중에서
흐드러진 등나무의 보랏빛 꽃처럼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옛 사랑 이야기이지만,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약간 착잡해질 수 있다. ‘두 여자 사이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는 두 여인을 똑같이 사랑했을까? 그들이 오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안타깝지만, 만약 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만났다면 과연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감될 수 있었을까? 한낱 전설로도 착잡해져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야 할 만큼, 우리는 편협한 윤리관의 간섭을 받으며 산다.
여성 간의 연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여성에 대한 이해와 연민, 그를 위해 약간의 윤리적 문제는 뛰어넘을 수 있는 포용력, 이것이 권예자 시인의 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여성관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람에 대한 연민
버려진다는 것은 슬프다. 한때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제는 세월에 밀려버린 것들. 물건도 그럴진대 사람이 버려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 <생각하는 TV>에서 권예자 시인은 버려진 아날로그 TV와 요양원의 노인을 대비시킨다.
요양원 창문에 기댄 백발의 노인
배롱나무 아래 버려진
뚱뚱한 아날로그 TV를 보고 있다
드라마 주몽 전원일기 태조 왕건
종합 4위 88올림픽 4강의 신화 2002월드컵이
꺼멓게 녹슨 뇌관을 비집고 빠져나온다
주름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미소
그의 시간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쓸만하지만 버려지는 것들이
생의 꼬리를 잡고 매달리는데
늘 바쁜 아들 외국에 영주권을 얻은 딸이
혹여 데리러 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성공한 자식들에게 노인의 자리는 없다
붉음이 끝난 걸 눈치챈 건 입원하던 날
물기 없는 손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외면하던
자식들의 곡진한 한마디
건강이 회복되면 꼭 데리러 온다고
화무십일홍을 모르는 백일홍이
여러 번 피고 진 병원 꽃밭 사이로
버림과 버려짐을 구별하지 못하는
낡은 TV와 노인의 희미한 동공이
오래오래 눈 맞추고 있다
--<생각하는 TV> 전문
주변에서 성공한 자식보다 성공하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끝까지 모시고 사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열심히 살며 교육에 매진하여, 서울로 가서 성공한 자식과 외국으로 이민 간 자식을 둔 노인들은 오히려 자식들과 떨어져 사는 까닭이다. 이 시의 노인도 성공한 자식들을 두었고, ‘건강이 회복되면 꼭 데리러 온다’는 약속 하에 요양원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번 요양원에 들어온 노인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일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한다. 다시 데리러 온다는 것은 선의의 거짓말인 셈이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가보면, 사람이 나이 들며 치매를 앓게 되는 것이 다행스러운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적인 자유를 잃고 정신적 자유도 유지하기 어려울 때, 정신이 계속 멀쩡한 것은 행운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만큼 나이 들고 세상에서 버려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요양원이 아니어도 노년의 삶은 녹록치 않다. 시 <노선을 변경하다>에는 질병으로 목뼈가 휘어진 노인을 다룬다. 그는 천사호-아마도 아파트 1004호-에 살았다. 아내는 아직 화려하게 나이든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는 병들어 고개가 구십 도로 휘어져 있다. 구부러진 남편이 창피한 아내는 함께 사람들 눈에 띄려 하지 않는다. 그는 15년 간이나 지팡이를 짚고 홀로 복지관을 오가며 쓸쓸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잠자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영정사진 속 사슴 같은 얼굴이
남은 자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아파트 문상객들 자꾸 고개 저었네
한 생을 부부로 살아왔으나
굽은 목뼈를 곧게 펴고 나서야
고운 아내의 남편으로 돌아와
천국 계단을 오르는 천사 호 그 남자
-- 시 <노선을 변경하다> 중에서
함께 살아도 아내의 마음에서 멀어진 시 속의 남자는 버려진 지 오래였다. 장례식에서야 그는 다시 시선의 중심이 된다. 영정사진 속의 그는 목이 비뚤어지기 전의 온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조문객을 맞는 아내는 다시 젊었을 때의 고운 그의 아내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를 곁에서 오래 봐왔던 문상객들은 그가 겪었던 소외와 외로움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꾸 고개를 젓는다. 인간적인 연민과 회한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 백년해로가 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예자 시인은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에 천착한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사-시 <고독사>, <녹슨 동행>의 경우-라든가, 갑이 을에게 행하는 권력형 학대-시 <분재연구논문>의 인분교수 사건-라든가, 앞 장에서 다룬 여성문제라든가가 그러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노년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시 <죽은 자의 랩> 속의 화자는 매사에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동차를 몰고 나간 길에서는 새치기 운전자 때문에, TV를 시청할 때는 이런저런 비리와 이기적인 이익집단들 때문에, 사는 아파트에서는 무례한 이웃들 때문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변한다.
소음 같던 음악 채널도 잠잠하다
음표는 소리를 잃고 허공을 떠다니고
말춤 막춤 스포츠댄스도 구성되지 않았다
앞동 뒷동에도 사람 하나 어른거리지 않는다
아니꼽고 메스껍던 그들은 사라졌다
드디어 찾아온 내가 꿈꾸던 세상
그런데 무섭다
흑백의 침묵이 무. 섭. 다.
나는 이미 금지된 선을 넘은 것인가
내 몸이 만져지지 않는다
--시 <죽은 자의 랩> 중에서
경쟁이 없고 소음과 간섭이 없는 세상. 그가 꿈꾸던 세상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는 만족스럽지 않다. 무섭기까지 하다. 색깔도 없고 소리도 없는 국면에 놓인 것이다. 그는 이제서야 자신이 산자의 세상에서 떠나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경쟁과 악다구니는 산자만의 것이다. 어쩌면 불만스러운 현실은, 살아있다는 충만한 행복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얼마간의 세금 같은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을 바꾼다면, 삶의 불만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시 <등이 꺼지다>는 한 가난한 어머니의 죽음에 바치는 헌사다. 화자는 딸이다. 이 작품에는 ‘조등弔燈’과 오랜 노동으로 ‘굽어진 어머니의 등’이 동음이의어인 ‘등’으로 표기된다.
엄마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이제는 등 쫙 펴고 사세요
절대 굽실거리지 마세요
목숨 줄 놓은 어미에게
저승 가서는 잘 살라는 딸
빈 박스를 줍고 엎드려 기도하며
날마다 겸손을 퍼 나르느라
일생 펴 본 적 없는 깊게 휘어진 등
그 등에 업혀 자라고
기대어 책을 읽으며
함께했던 많은 날들이
함몰되는 작별의 시간
한 개의 등이 꺼질 때
휘어졌던 그림자들 일시에 무너지듯
어둠이 왔다
바코드 하나 보이지 않았다
꺼진 것이 어느 등인지 알 수 없는
등과 등 사이로 떠나가는 영구차
--시 <등이 꺼지다> 전문
내 어머니가 아니어도, 박스를 가득 싣고 굽은 허리로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어머니라면 얼마나 더 애통할까.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등을 구부렸을 부모. 그 등에 업혀 자라고 그 등에 기대 책을 읽었을 아이들. 죽음의 순간에야 그 힘겨운 삶을 접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슬프고 따스하고 아름다운 노래다.
시인의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는 또 한 편의 시는 <탈을 쓴 여자>다. 대전 문학행사에서 가끔 목격하는 풍경으로 필자도 본 적이 있는데, 권예자 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시화전 개막식이 끝나고
다과회가 시작될 무렵
보랏빛 재킷의 여자 하나
엉거주춤 들어섰네
상석으로 올라간 그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네
먹음직한 음식들은 비닐봉투에
슬금슬금 집어넣었네
아는 시인이세요?
서로서로 물었지만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네
접시는 금방 바닥나고
시인의 탈을 쓴 여자는 사라졌네
-- 시 <탈을 쓴 여자>
시화전 막간에 간단히 집어먹을 수 있게 마련되는 다과는 원래 양이 많지 않다. 김밥이나 과자에 과일 몇 조각이 보통이다.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섞어 음료수 한 잔에 두어 쪽 집어먹으면 끝이다. 그런데 널름널름 비닐봉투에까지 옮겨 담다니! 음식접시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허무하게 비워지고 만다. ‘아는 시인이세요?’ 라고 서로 묻지만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고, 접시가 비자마자 그녀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 ‘시인의 탈을 쓴 여자의 약탈’이다. 웃음이 나온다. 음식 흔한 세상에, 하필 가난한 시인· 작가의 모임에 음식을 털러 오다니!
전시장엔 꽃향기가 넘치고
詩의 전령이 가져간 음식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었네
우리의 간단한 간식은
그녀의 여러 끼 식사가 됨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네
- 시 <탈을 쓴 여자> 말미
시인은 이 일을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는 ‘詩의 전령’에게 음식을 조공한 것이라고. 또한 우리에겐 간식일 뿐이지만 그녀에겐 여러 끼의 식사가 될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그녀를 잡으러 나서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리라. 시인· 작가들이 이렇게 악착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란 걸 알기에 단골로 그녀가 문학행사의 음식을 약탈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처럼, 약한 사람, 사라져 가는 것, 추억 속의 물건, 안타까운 인연, 힘겨운 이웃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을 시인은 시 <막연한 슬픔>에서 노래처럼 풀어놓는다.
안개 속에 흐르는 축축한 기타 소리
예고편을 스쳐간 자전거 바퀴 자국
도자기 찻잔에 어린 희미한 실금
이슬비에 무거워진 풀잎의 얼굴
모래 위에 새긴 지키지 못할 약속
떠난 이가 보낸 다정한 문자메시지
절룩이며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떠돌이 개 한 마리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가는
낯선 남자의 졸음
모창가수에 밀리는 원곡가수의 목소리
재활용품수거함에 담긴 반쯤 찢긴 결혼사진
벨 소리가 말라가는 전화기
창가에 무연히 기대선 요양원 노인의 미소
시집 한 권 남기지 못한 시인의 빈소
차마 부르지 못하는 당신의 이름
-- 시 <막연한 슬픔>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윤동주의 <序詩>가 생각난다. 결백하면서도 늘 부끄러움을 느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던 그 죄 없는 청년처럼, 권예자 시인의 시 <막연한 슬픔>에서는 짧은 시간을 살고 사라져가는 생명들의 소외, 단절, 고독, 좌절에 대한 시인의 깊은 이해와 애정이 읽힌다.
3. 삶의 비밀을 보다
시는 영감靈感에서 태어난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세상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 생각했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 존재는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 선지자, 신령한 무당이기도 하였지만, 시인이기도 했다. 권예자 시인은 삶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들려준다.
예를 들어 시 <주객이 전도되다>는 ‘말’을 경계한다. SNS나 언론을 통해 걸러지지 않은 추문을 부풀려 전파하거나, 독설로 사람을 해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평생 쌓아올린 좋은 평판을 하루아침에 파괴하고 그의 사회적 입지와 관계를 파멸시키는 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독한 말은 죽지 않는다
저를 낳은 어미를
물어뜯을 뿐
--시 <주객이 전도하다> 중에서
남을 해치려고 내뱉은 말이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자기 꼬리를 물어뜯는 뱀처럼, 말한 사람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이다. 그리고 진실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 것이라는 예언과 같은 노래도 있다. 시 <모래 메시지의 유효기간>은 바닷가 모래 위에 새겨진 연인들의 사랑의 맹세를 제시하며 다음과 같은 결말을 짓는다.
한 기억 위에 다른 기억이 겹쳐지는
해질녘의 바닷가
모래 메시지의 유효기간은 여섯 시간이다
-- 시 <모래 메시지의 유효기간> 중에서
관광지 바닷가의 백사장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과 추억을 새기고, 바닷물과 바닷바람에 그것을 지우는 곳이기도 하다. 사랑이 영원하라고 새긴 연인의 맹세는 6시간이면 지워진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과 망각이 번갈아 드나드는 모래밭. 허무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탄생과 소멸이 번갈아 진행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시 <꽃 그림 계단>에 이르게 된다.
산동네 까마득한 계단을
그믐달 같은 할머니가 오르시네
만나는 이 없어도 깊숙이 인사하며
계단마다 피어난
꽃 그림 밟으며 오르시네
죄 없이 고개숙인 제비꽃
서러운 며느리밑씻개
서리 맞은 들국화
낮에 피는 달맞이꽃
한물간 개불알꽃
허위허위 밟으며 오르시네
꽃물 다 빠진 할머니
꽃노을 계단을 오르시네
멈추거나 돌아서지 못하고
자꾸자꾸 오르시네
천국 문까지 곧장 가시겠네
-- 시 <꽃 그림 계단> 전문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보는데도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한 느낌. 이 시의 느낌이 그렇다. 산동네 까마득한 계단을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이 오르신다. 고개와 허리가 깊숙이 숙여져 있다. 할머니 지나시는 길 옆, 야생화들이 할머니를 영접하는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곱디고운 젊은 날을 지나, 수많은 삶의 괴로움을 겪어내 ‘꽃물이 다 빠진’ 할머니는 노을이 물든 계단을 오르신다. 자꾸자꾸 오르신다. 저 노을이 끝나는 곳까지 오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건 왜일까? 그저 저녁 무렵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삶과 죽음에 대한 장편 서사시 한 편을 본 듯 마음이 아리다.
마지막으로 권예자 시인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시의 근원을 대변하는 작품을 들고 싶다. 시 <가문비나무 기록장>이다.
알고 보면 이건 손바닥만 한 소우주
원시림처럼 빽빽한 길 사이
공간을 찾아 행성을 타고 드나들지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밑을 헤엄치지
사람들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행성의 정거장에 내리곤 하지
내가 모르는 지름길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 있네
신선한 말들은 금방 가슴을 적시기 마련
어떤 활자들은 병든 벌레 같아
죽은 나무 향기에 까맣게 몰려든 불청객
그럴 땐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
이 세상을 한 권으로 압축할 수도 있지
이 우주까지도
하늘을 안다고
산을 안다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은 다 복사판이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지
쉿, 조용히 해
여기, 누군가 들어와 있네
이 나무숲이 조심조심 흔들리는 동안
하나의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그가 안으로 들어왔어
소리 없이 활자를 삼키고 있어
천천히
--시 <가문비나무 기록장> 전문
숲이다. 가문비나무가 있다. 한 그루의 가문비나무 속에 우주가 있고, 한 권의 기록장이 있다. 그 안에 새겨진 활자들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 우주의 비밀을 보여준다. 거대하고 위대한 것들과 미세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동력은, 시인의 나이를 뛰어넘는 호기심, 천진성, 그리고 젊은 상상력이다. 그 젊은 상상력으로 신과 인간,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바로 시가 탄생하는 시간일 것이다. 이렇게 권예자 시인의 시는 삶의 비밀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