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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편에 설 것인가?
32: 25-29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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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가 여러해 전에 길을 가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불러서 돌아보니까 머리가 다 하얗게 된 사람이 저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저 분이 혹시 나의 학교시절 은사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늙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늙었는가?” 그랬더니 국회의원 비서실에서 일을 하다가 이번 선거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직업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자네는 인생의 줄을 잘못서 있었던 것 같네, 나는 하나님 줄에 섰더니 지금도 할일이 지금도 많다네.” 오늘 우리가 나눈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잘못된 줄에서 나와서 줄 잘 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40일을 기도하고 계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40일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해서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신을 어떻게 만듭니까? 그리고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참 신이 되어 주겠습니까? 그런데 아론은 여론에 굴복을 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이었지만 모세를 통해 말씀을 받아서 대변하는 이차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대면을 한 모세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즉, 백성들의 여론을 이겨낼 신앙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론은 백성들의 금고리를 빼어 내라고 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을 보면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하면서 그 앞에 단을 쌓고 먹고 마시고 뛰어놀고 제사를 드립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그 광경을 보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이 백성을 다 죽이고 너로 인해 다시 민족을 이루겠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고 백성들을 살려 주십니다.
모세는 두 돌비를 안고 내려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상황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모세는 대노해서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깎으시고 쓰신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 버립니다. 내려가서 금송아지 우상을 갈아서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 우상은 갈아 마셔야 할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 아론에게 묻습니다.
21절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모세는 아론이 형일지라도 권위 있는 질문을 합니다. 아론이 대답을 합니다. 24절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 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이 아론의 변명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지도자는 변명하고, 백성들은 방자하여 우상숭배에 빠지고, 모세이 형 아론도 우상숭배를 주도하고, 칠십인 장로도 우상숭배에 앞장섰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오직 모세만이 우상을 부수고 갈아마시게 하고 백성들에게 도전한 것입니다. 26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우리말로는 길지만 영어로는 간단합니다. “for God to me!” 모세는 얼마나 담력 있습니까? 이 담력과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지금 모세는 폭풍우치는 바다 한 복판에 우뚝 솟은 반석과도 같습니다. 온 세상이 모세를 대적하고 욕하고 핍박해도 모세는 조금의 흔들림과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늘과 땅 사이에 참된 종교의 생명이 걸려있는 유일한 생명체였습니다. 만약에 모세마저 우상숭배에 동조하면 하나님의 편을 들어줄 자가 인간 가운데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대중의 방향을 홀로 용기와 담력을 가지고 뒤바꿔 놓았습니다. 우상숭배를 통해서 멸망의 길로 돌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생명 길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1. 모세의 담력, 용기의 기원
모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사람을 쳐 죽이고 누가 볼까봐 땅에 파묻은 사람입니다. 살인범으로 들통이 나니까 부리나케 도망간 사람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의 신세로 사십년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용기와 담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디서 그런 용기와 담력을 얻은 것입니까? 사십일 동안 산속에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하며 지낸데 이런 용기와 담력이 나온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인간을 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 사람은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 두려워하고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세가 능력을 받은 그 현장에서 능력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현장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독대하는 일대일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많이 가는 사람이 결국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용기를 얻게 되고 담력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모세의 명령이 요구하는 두 가지
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번째로 하나님 편에 서라고 하는 확고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인간 세상은 영적으로는 언제나 두 편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님 편 아니면 마귀 편입니다. 진리 편 아니면 거짓 편, 거룩한 편 아니면 죄의 편입니다. 우리는 이 두 편 가운데 어느 한 곳에 서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0절에 “나와 함께 아니하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사람들은 스스로 중도노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편도 아니고 마귀편도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자신은 중도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귀 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노선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양심이요 세상의 등불입니다. 우리가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활동한다면 이 사회는 소망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너는 어느편이야?” 할 때에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편이라고 말해야합니다. 이 결단은 중요합니다. 이 결단에 따라서 사람의 영원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사단 편에 서는 사람은 사단을 따라서 영영히 타는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고 사단을 따르는 사람은 이 땅을 떠나게 될 때에 영원을 영영히 타는 지옥 불에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빨리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시고 사단 편에서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이 진리를 이 세상에서 한 사람만이 믿고 있더라고 하더라고 그것이 진리입니다. 온 세상 수십억명이 모여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수십억명이 틀린 것이고 모세 한 사람이 옳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을 드는 우리는 하나님께 함께 영원토록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며 우리의 영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 편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결단은 가능한 한 빨리 내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에 의와 심판과 절제에 관해서 설교했을 때에 총독 벨릭스가 그 설교를 듣고 있다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시방은 가라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러나 저는 성경 어디를 봐도 벨릭스가 나중에 틈이 나서 예수 믿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이 걸려 있는 이 중요한 결단을 미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문제는 불투명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결단은 인생의 모든 다른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하고 결단한 사람은 술 먹고 방탕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도 하나님 편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왜 손가락질 당하는 줄 아십니까? 교회 와서는 기도도 잘하고 주일 낮에는 정말 신앙이 좋은 것 같다가 교회만 벗어나면 불신자만도 못한 삶을 살고, 마귀 편에 서서 살고, 교회는 교회고 세상은 세상이고, 하나님은 교회에만 나와 계시고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고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고 전도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서는 신앙은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거리와 시장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 결단은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주저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자시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보호자이신데 이분을 편들고 따라가기를 왜 주저합니까? 마귀를 따라가면 좋은 것이 있습니까? 그는 속이는 자요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결국은 인간을 끌고 영원한 지옥불로 가는 자 입니다. 하나님 따르시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생명길이요 우리가 이 땅에서도 복 받는 길이요 영원 내세에도 영원히 복 받는 길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마귀에게 속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명절 때 제사를 드리고 절을 합니다. 시아버지가 무섭고 시어머니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사람 무서워서 귀신숭배 합니까? 신앙문제에 관해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신앙 문제에 관해서는 부모와 자식도 별개인 것입니다. 신앙문제는 하나님을 따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부모가 무당이면 자식도 귀신을 섬겨야 합니까?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각각의 영혼은 각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옳은 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은 오는 복을 발로 차버리는 짓입니다. 그리고 밥을 주는 주인의 손을 무는 짐승과 같은 짓입니다. 스스로 기름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짓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고하게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면 마귀의 종입니다. 사람은 양이 아니면 염소입니다. 알곡이 아니면 가라지이고 좋은 고기가 아니면 나쁜 고기입니다. 천국이 아니면 지옥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로만 가톨릭은 거짓되게도 연옥이라는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에 단 한글자도 없는 연옥이라는 교리를 만들어 내서 천국도 못가고 지옥도 안가고 연옥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연옥은 없습니다. 성경에도 없고 실제로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 갈 길이 명확한데 왜 연옥에 갑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 편에 서면 천국에 가는 것이 확실한데 왜 연옥에 가는 것입니까? 로만 가톨릭은 하나님을 잡수시는 사람들입니다. 화체설은 무엇입니까? 포도주와 떡을 가지고 신부가 봉헌기도를 하게 되면 그 떡에 맛과 색깔과 향은 그대로 남지만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진짜 피와 살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짜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먹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이빨 사이에서 씹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화체설을 오랫동안 믿어왔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 신학의 근거는 성경이 아닙니다. 소위 옛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설에 근거한 철학신학이 그 근거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 침례교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중도노선에 애매히 서 있는 교리를 가진 곳에 가서는 안되겠습니다. 침례교는 성경대로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에게 침례를 주는 신자침수례를 강조합니다. 오늘 여러분, 우왕좌왕하지 마시고 확고하게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확고한 결단과 함께 두 번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확고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결단도 있어야 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가야 합니다. 모세는 세 가지를 백성에게 요구합니다. 첫째는 내게로 나오라 입니다. 우상숭배자들 사이에 우물쭈물 서 있지 말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으면서도 귀신을 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차려주면 집안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삶을 살펴보고 그런 우상숭배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한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삶에서 그런 짓을 깨끗하게 제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는 나에게 나와서 칼을 차고 네 형제 네 이웃을 도륙하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자 삼천 명을 죽였습
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모세는 복을 선언합니다.
29절에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것은 영적인 교훈입니다.
오늘날 예수 안 믿는다고 칼을 차고 다니면서 죽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나온 성도들은 영적인 무장을 하고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불신세력, 마귀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높이고,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불신세상을 향해 도전해야 합니다. 수많은 대중이 다 우상을 따르고 거짓을 따르고 우리 믿는 자들은 홀로 외로울지라도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중세기 때 토마스 뮌처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였는데 27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귀족들이 농민들을 억압하던 때였는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유럽과 독일에서 1524-5년까지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토마스 뮌처가 칼을 차고 자기가 기드온의 칼을 찼다고 하며 농민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귀족을 죽이러 가다가 자신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의 이름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알고 있습니까? 이 사람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들이 ‘프로레탈리아 혁명의 선두주자’라고 하며 많이 알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성경을 제대로 적용치 못한 정신 나간 목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바르지 못한 편에 서는 일은 없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단호히 서서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영적인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결단하면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주일날 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고 마는 사람은 신앙생활 망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한 가지는 봉사하시고 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편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목사의 말도 교회의 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칼을 들고 자기 형제와 이웃을 죽였습니까?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27절에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게 행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수가 와서 이야기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없어져버릴 인간의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이요, 순종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침례교는 성경주의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살고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세는 우리에게 하나님 편에서는 결단을 하고 하나님을 향한 행동을 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3. 오늘날 세상의 두 가지 문제
우리가 사는 21세기도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합니다. 사람들이 불상을 만들고 그리고 마리아상을 만들어서 절을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는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늘날 21세기에도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이 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 절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입니까?
여러분, 우상을 섬겨도 괜찮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힘들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은 세 가지 생애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의 제 1생, 칠팔십년의 삶이 제 2생, 그리고 영원이 제 3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꿈 깨시기 바랍니다. 제 3생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그 사람은 현세도 망하고 내세도 망합니다. 인생은 제 삼생이 있습니다. 그 3생을 구더기가 소금 치듯이 하는 지옥에서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 그곳에서 나와서 확고하게 예수 믿으시고 주를 위해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오늘날은 금송아지 우상이 최고입니다. 금송아지는 돈입니다. 물질입니다. 인간이 가진 인격이나 그의 판단이나 신앙으로 인간의 가치가 판단되지 않고 그가 얼마나 가졌는가 하는 금송아지에 의해서 인간이 판단되는 시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합니까? 맞습니다.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금을 따라가서 그것을 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해서 결단하고 행동하면 여호와께서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은 뒤따라오는 것이지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겨야 될 것은 아닙니다. 그 금으로 나중에 성막과 성전을 지으라고 한 것이지 금송아지 만들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금은 따라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돈은 “왜 나를 무시하십니까?” 하고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잘사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하는 결단과 행동, 행동 있는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결단 없는 행동은 돈키호테요 행동 없는 결단은 햄릿입니다. 결단과 행동, 두 가지가 우리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