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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 신문에 이런기사가 나왔습니다.
원금의 3배나 돌려받고도 잔금이 남아있다며 채무자를 협박한 송모씨와 돈을 기일내에 갚지않는다며 채무자를 납치감금한 유모씨등 2명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송씨는 95년부터 6년여 공모씨(여)에게 1억7천여만원을 빌려준뒤 공씨가 복리이자로 계산한 4억5천만원을 갚았으나 잔금 4천여만원을 갚지않는다며 신체포기각서를 강요하는등 협박한 혐의다.
원금의 3배나 갚고서도 계속 잔금이 있다며 협박받고, 감금당하고, 신체포기각서까지 강요당하는 피해자 공씨가 6년동안이나 악몽같은 악한 사람들에게 당한 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그러나 경찰의 개입으로 법의심판을 받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호소한번 해볼곳이 없어 눈물만 흘리면서 보호를 받기는커녕, 보호해 주어야할 권력까지 몽땅 가해자편이 되는 현실의 모순을 우리는 너무나 흔히 볼수있는 것이 이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모순덩어리입니다.
"어찌 이런일이.."
탄식하는 그런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어찌되려고..."
너무 심해 이젠 혀한번 끌끌차고 돌아서 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모순된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는 까닭에 사람들은 이제 놀라지도 않고, 큰일로 생각지도않는 이상한 풍조가 또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다면 이런 모순, 이런 풍조, 이런 잘못된 세상속에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자세로 의미있는 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만고 불변의 사회적 모순을 1-3절에서 지적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나 없이 필경은 죽어야할 죄인들이면서도 잠시 세상 사는동안 혹 권세를 가졌다하여 타인을 괴롭히는 자가 속출함으로 이 모순은 시작됩니다.
억누르는자가 있습니다.
원금을 3배나 받고서도 신체포기 각서를 강요하는 착취자가 있습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실족할뻔 하였으며 결음이 미끄러질뻔 하였다”고 시편기자는 고백합니다.
평생을 악한 일만 하고, 평생을 남의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인생을 살았건만 그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였습니다.
그는 흔한 병하나 걸리지 않았으며 먹는대로 소화도 잘시켜 눈이 솟아날 지경으로 살이 쩠으며 평생의 사업은 언제나 형통하여 그가 원하고 소원하는 재산보다 언제나 많은 재물을 벌어드렸습니다.
그는 교만하여 언제나 하나님 윗자리를 차지했으며 그의 내뱃는 모든 언사는 선한사람들에 대한 악담뿐이였습니다.
보기에 이들은 악인임에 틀림이 없는데 항상 평안하고 그위에 재물을 더하더라는 말입니다.
어찌 이를 보고 실족치 아니하며 어찌 이를 보고 미끄러저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도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통받음을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숫한 사람들이 이유없이, 억울하게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며 불의한 일을 당하나 호소할 곳, 위로할 곳 조차 찾지 못하는데, 학대하는 자들은 자신의 악행을 거리낌없이 행할뿐 아니라 이와같은 악행을 보호하고, 정당화 시켜줄, 권세까지 가지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이 죽었다고도 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 외면하시는 하나님, 졸고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비방하며, 비하하며, 부인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교만하게 되어지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으로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은즉, 악인은 반드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집단이 안하무인에 무례방자합니까?하고 있는 중입니다. 패망의 길로 달음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공연히 미워해 죄지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쓸대없이 눈꼴시다 죄지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기자도 19절에
"저희가 어찌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고백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들은 갑작스럽게 꼬꾸라지며 무시무시한 종말을 맞게되었나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처럼 사람의 방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그러나 반드시 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볼 때 70년 80년은 굉장한 세월같지만 하나님 계획안에서는 눈 깜짝할 찰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심판이 더디온다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베드로사도는 아주 쉽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있어서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사실입니다.
에스키모들에게는 늑대사냥에 대한 그들만의 비법이 있다고 합니다.
늑대는 동물의 피를 제일 좋와합니다. 그래서 아주 날카로운 칼날위에 먹음직스런 고기를 꽃아놓고 그위에 늑대가 좋아하는 피를 흠뻑 뿌린다음 꽁꽁 얼려서 늑대가 다닐만한 길목에 던져놓습니다.
늑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피묻은 고기를 먹기위해 사정없이 혓바닥으로 고기를 핧게되고 얼마후 얼음의 냉기에 혀의 신경이 마비되며, 어느새 날카로운 칼날에 혀는 잘려진체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모든 비리가 그렇습니다.
온갖 군침도는 먹이감속에 감추어진 덫을 발견 하지 못하는 점에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도 어리석은 늑대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모든 악인의 형통함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고 형통하다 하는 시점이 늑대처럼 먹음직한 고기를 좋와하는 피와 함께 혓바닥으로 핧고있는 상태까지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이런 고기를 핧지 못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환경으로 못하게 하실 것이며, 때로는 남에게 빼앗겨 못하게 하실 것이요, 때로는 내게 주지 않으심으로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원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갑자기 날씨를 덥게해 이 아까운고기를 썩히십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해 억울하고 분하게 이고기를 빼앗깁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악인들에게 주는 저 맛있는 고기를 제겐 안주십니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오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역사를 운행하시고, 천하만물을 섭리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조금의 오차나 조금의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며, 더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 심판을 늦추고 계신 하나님이 그 사랑과 긍휼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여러분! 얼마나 정교하며 치밀하며 틀림없으신지 믿어야 합니다.
미국남부 Florida주엔 일년에 몇차래씩 태풍이 불어옵니다.
태풍은 엄청난 수재를 몰고와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힐뿐 아니라 곳곳에 다리를 끊어놓고, 산사태로 도로를 막아 많은 생활의 불편을 주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상학자들은 태풍의 고마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태풍은 바닷물을 휘저어 바닷물을 정화시킬 뿐더러 대기의 오염된 공기를 정화시키어 맑고 푸른 하늘을 만들어 준다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말세를 맞이하여 악인들로 온 지상이 뒤덮힌 것 같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력으로 핍박하며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시킨 로마제국을 쓰시어 외국정복을 위해 잘 다듬어 놓은 거미줄같은 길을 통하여, 땅끝까지 복음전파에 사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중국 복음화에 일등공신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일인철권으로 믿는 자를 말살해버린 모택동이라는 주장입니다.
그의 생존시엔 철두철미 교회와 신자말살에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위해 건설한 철도가 전국을 모두 연결시킨 것이나 통치를 위해 만다린어를 중국이 표준어로 통일시킨 이 일들이 중국의 복음화에 누구의 어떤업적보다 큰 그의 업적이라는 역설입니다.
55개나 되는 소수민족의 언어가 북경어 하나로 의사소통된적이 역사상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벌써부터 준비하시되 가장 하나님에 적대하는 한 사람을 사용하시어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크고 힘든 전지작업을 하고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혹 공의가 없는 것 같고, 여러분 눈에 악인이 형통한 것 같습니까?
혹 하나님의 일이 더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일사불난하게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나가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백성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아니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주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안에서 믿음을 지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경이 주는 의미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속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사 우리를 믿음으로 굳게 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들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난이 옵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살려 노력하고, 정직하게 살아 손해도 보고, 어려운 이웃, 필요한 이웃에 정성껏 봉사도 하고 헌신도 했는데 내게 도저히 이해할수도 납득할수도 없는 고난이 옴니다.
"이제 끝이구나!" "이제 망했구나" "이제 소망이 없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주십니다.
그리고 또한 시험당할때엔 반드시 피할길을 주시어 넉넉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귀한 것입니다.
그리나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갑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남은 자를 붙들어 하나님의 일을 이어갑니다.
바벨론 포로에서도 남은자들을 3차에 걸처 귀환시키심으로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어오셨습니다.
우리는 남은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땅에서 진행시켜 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저를 부르시고, 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한 가족을 세우는 일이나, 한 가문을 세우는 일은 큰일입니다.
그리고 한 나라를 세우는 일은 정말 큰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이 일이야말로, 이땅에 태어나 일생을 걸고 해볼만한 보람되고 가치있는 일 아닙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학대하는 것을 보니 학대받은자는 억울해 눈물을 흘리되 위로자가 없고,”
학대하는 자에게는 권세가있어 악행을 보호하고 정당화시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백성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있고 공의가 강물같이 흐를 것 같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세상 속에 믿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살아있는자 보다 죽은지 오래된 자가 더 복이 있고, 이 둘보다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자가 더욱 낫다" 하는 세상에 과연 믿는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입니다. (롬12:2)
"악에게 지지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입니다. (롬12:21)
그래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삶을 사는 것 입니다. (롬12:9)
이렇게 살기위해서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의 불길을 지펴야 합니다.
노력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속에 나를 맡겨야만 할 수 있습니다.
혼자는 힘듭니다.
주님은 모이기를 힘쓰라 우리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사람의 불길은 뜨겁습니다.
3사람의 불길은 더 뜨겁습니다.
10사람 100사람의 불길은 용광로가 되어 물에 젖어 생장작같은 사람일지라도 금시 성령의 불길로 태울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불길로 뜨겁게 타야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처나야 합니다.
교회가 기도의 부르짖음으로 넘처 흘러야 합니다.
놀라우신 성령의 불길은 욕심을 태우며, 갈등이나 시기나, 미워함이나 오만을 태워버립니다.
되지도 않고 된것같은 교만을 태우며, 하찮은 이론법칙을 태워버립니다.
이제 자존심을 태우며 모든 악한 것을 송두리체 태워버립니다.
성령의 불로 타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교인수가 늘어나는 성장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겠다 뜨거워진 가슴의 부흥입니다.
부흥의 물결은 변화시키는 무서운 능력과 함께 합니다.
개인이 변하는 능력으로 함께 합니다.
가정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며, 가는곳 마다 무서운 변화를 가저옵니다.
둘째로 모순된 이 세상을 사는 성도의 삶은 위로자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것과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설명하셨습니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이웃을 위로하는 삶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됩니다.
사랑하는 삶, 위로하는 삶을 살기위해 성도는 일을 합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을 위해 일을 합니다.
그의 모든 재물이나 소유물은 모두 자신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열심히 쌓아둡니다. 부지런히 모아둡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오늘 본문은 4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한마디로 말해 다 소용없는 일이라 결론짓습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부유해 지는 것을 행복해지는 삶의 요건이라 생각해왔으나 이것 또한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인도 우화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농부가 논을 개간했습니다. 열심히 거름을 주고 정성을 다한 그의 논에 심은 벼는 잘 자라서 대풍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아래에 있는 다른사람의 논으로 자신의 논에 있는 물이 흘러내려가 역시 똑같이 대풍을 이룬 것이 아닙니까?
농부는 자신의 논에 있는 풍부한 거름기가 가득한 물이 아랬논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자신의 논을 물 한모금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튼튼하게 개조하였습니다.
그후 어떻게 되었을가요?
논에는 여전히 거름기가 가득한 물이 그득하였지만 흘러내려 갈곳이 없었기에 고인물이 썩는바람에 벼까지 모두 썩어버려서
그래서 잠3:27-28절
"네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재물은 은사입니다.
은사는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은 이웃이요, 함께 섬기는 성도들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세상의 재물을 세상에서만 사용하게 하시고 죽어서 가지고 가지못하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본문 7-8절입니다.
"내가 또 돌이켜 해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며 무익한 것임이라"
이 말씀은 실제로 아들이나 형제가 없는 그런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아들과 형제등 가족 친지들의 어려움조차도 전혀 돌보지 않을 만큼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저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라고 말합니다.(딤전5:8)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재물을 단지 쌓기에만 급급하여 결국은 자신이 모은 재물들로 즐기지도 못한체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간다고 경고하십니다. (눅12:13-21)
세번째로 모순된 이 세상을 사는 성도는 혼자 살지 않습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저마다의 삶이 바빠지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문을 잠근체 혼자만의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사단은 우리의 삶을 고립시킴으로서 쉬운 타켓을 만들어 갑니다.
교회 나가는 것 까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말이 얼마나 많다고 교회엘 나가려 하느냐?
오히려 교회엘 가려거든 아무도 모르는곳 뒷자석에 앉았다가 끝나기 5분전쯤 번개처럼 나오거라. 그래야 말이 없단다.
오늘 성경은 두사람이 한사람보다 낳고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일을 하면 혼자하는 것 보다 갑절의 효과를 얻을 수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가? 둘이 가다가 한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를 일으켜 주지만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궁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추운 겨울 밤에도 두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자면 서로 따뜻하게 되지만 혼자 잔다면 어떻게 따뜻해질수 있습니까? 또 혼자 서있을 때 공격을 받으면 십중팔구 지고 말지만 두 사람이 있을 때라면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능히 공격자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사람이면 훨씬 더 유리합니다.
세겹으로 꼰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은 쾌락을 누리는데 재물을 탕진하지만 정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재물이건 달란트건 친구를 얻는데 사용합니다.
함께 성공하며, 이 성공은 함께 즐거워하는 성공입니다.
실로 해아래 인생은 근본적인 죄성에 기인한 욕심 때문에 진실한 친구를 갖지못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해아래 인생에게 필연적인 허무를 주는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우리 성도들은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함으로 악에 지지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는 사람의 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충만 함으로만 이룰 수있는것인바 교회가 성령의 불길로 뜨겁게 타야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위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초점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살라 하십니다.
우리의 재물도, 달란트도 오직 이웃을 위해 사용함으로서 우리는 하늘의 상을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세 번째로 동무를 세움으로서 함께 이루며, 함께 상을받는 삶을사는 것입니다.
함께 즐거움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권세있는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받은 권세가 세상의 빛이되고, 세상의 소금이 될 때에 하나님의 지경은 넓어질 것이요, 열방과 모든 족속은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이와같은 놀라운 권세와 권능을 가진 성도답게 이웃을 위로하는 삶을 살며, 동무를 세우는 삶을 살므로서 세상으로부터 주님의 제자로서 대접받으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을 살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크고 놀라운 하늘의 복을받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