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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5:1-3 여호와여 영광을 : 칼빈
이 시는 교회가 심한 환난을 당했을 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실 만한 가치는 없지만, 성도들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비방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지 않도록 자기들을 구원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용기를 얻어 모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면서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택해 주신 행복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또 여기에서부터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자비를 깨닫도록, 또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또 다른 기회를 삼고 있습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입니다.
이 시가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 구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첫머리 구절을 통해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망을 평범한 말로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자기들이 간구 하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공로 의식을 청산했으며 구원을 얻는 희망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하신 영광을 위하여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한 희망과 하나님의 영광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게서 배척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조소를 당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 위로와 도움 얻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자기들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아무 공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점입니다.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자가 못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고 계시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실 때에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우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또 주의해야 할 점은 성도들의 겸손과 절제는 자신들의 고통을 공개적으로 불평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과 그들은 자기 구원에 대한 요구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5 편
그들의 환난은 그 자체가 배척을 받을 만한 것으로서 수치가 만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들을 감히 분명하게 하나님께 구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근거로 아무것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 사실을 밝히 증거 해 주시라고 호소합니다.
이러한 기도 형식은 한때 교회에서 채택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방도에 있어서 자기 모든 의를 떨쳐 버리고 우리 소망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도우심을 구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아서 구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기도 형식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사48:11)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기대가 무너졌을 때 오직 이것만이 자기들의 피할 곳으로 알았습니다.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공로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백 번씩이나 배척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기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어떠한 항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2. 본문 2절은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입니다.
성도들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존하실 때에 어떻게 그분의 영광을 지켜 나아가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교회가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자기 종들이 궁핍할 때에 버리셨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능력이 없으시다고 모독하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에게서 그분의 이름이 악한 비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지킨 방법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거룩한 열심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시69:10), 또 이것은 수사학적인 장식을 사용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교회를 보호하시도록 그분의 능력을 행사하시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시편 115 편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안전을 위한 열망이 이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하나님 영광이 자기들 구원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어 주신 분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그분의 약속이 허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악인들의 교만은 무너지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고 기억한 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으로 지켜 주시겠다고 한 자들, 즉 자신의 크신 긍휼을 베풀어 선택의 특권을 부여해 주셨던 자들의 기대를 실망케 하는 비참한 환난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도 그분의 복음에 동참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아들의 몸에 우리가 접붙임을 받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동일한 공적인 감사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3. 본문 3절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입니다.
1) 성도는 거룩한 담력을 가지고 용기를 얻어 더욱 기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의심으로 동요를 일으킬 때에는 우리 기도가 무가치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이 우리 마음 속에 침투하게 되면 우리 기도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의 기도를 계속함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매우 적절하게 막아내고 있습니다.
하반절에서 그들은 우상들, 즉 이방 사람들의 추잡스런 미신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조심스러운 고찰을 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할 것은 하나님을 일정한 지역에다 제한시키려고 한 것이나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를 한정시키려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적인 육체로만 갇혀진 존재나 운명 또는 행운에 예속된 것으로 제한시키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주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둡니다.
하나님은 모든 방해물보다도 우월하신 존재이십니다. 그러므로 만사를 자기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다음 구절에서 더욱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시편 115 편
그러므로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붙잡혀 있고 아무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실대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경고가 필요한 것은 호기심에 찬 사람이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광적인 망상을 변호하기 위해서 올바른 교리를 남용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이 문제에서 인간 죄악의 사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 찬송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신비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경외심도 없이 한가한 한담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교리에서 어느 의미를 추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천지에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실 수가 있다는 사실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보존하고 교회의 복을 예비해 주기 위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 있으므로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취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모든 방법과 편안하게 되는 점에서 모든 방편들이 다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모든 장애물들보다 높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굴복시켜 자기 뜻을 이룩하실 수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매사는 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결과일 뿐이며 아무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야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행하기 쉬운 것처럼 하나님 영광에 대한 개념을 엉터리로 조작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제적으로 이 교리 사용을 신중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은 자기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를 이러한 방법으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예정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깨닫기를 수치스럽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3) 이 구절을 근거해서 어거스틴은 매우 정확하고도 재치 있게 우리들에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해서도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왜 자신이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시편 115 편
왜 자신과 대적하고 있는 마귀와 모든 악인들을 억제하시지를 않습니까?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묵인하고 있는 한 에피큐로스 학파가 추측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행하는 것과 당하는 것의 중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지(豫知)를 가지고 계시고 자기가 만드신 세상을 주관하시고 감독하시며 그 어느 한 부분도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만물이 처해 있는 형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되어졌다는 사실이 자연히 뒤따라 나올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인 것처럼 말하려는 자는 완악한 변론가입니다.
더러운 개들은 아무리 짖어대도 거짓말로 선지자와 맞서 대치할 수도 없고 세상의 통치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빼앗아 취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이나 작정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죄를 금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왜 그런 완악한 자들의 처사를 허용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한 경향을 북돋아 주셨기 때문에 죄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갈대아 사람들도 똑같이 이것을 원했으나 그 방법은 서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사람들을 빈번하게 용병(傭兵)으로 부르셨고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동을 받았다고 말했으며(사5:26)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의 칼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과 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동맹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열망으로 자기의 공의가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열망으로 자기들 욕망과 탐심과 잔악함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죄가 행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가장 선한 이유에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심오함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승복할 만큼 하나님의 의지에 만족하는 자들은 가장 의로운 자로 여겨집니다(시36:6).
이러한 방식의 전폭적인 신뢰는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하는 표준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의 모든 통찰력보다도 훨씬 더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고 하면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은 그가 기쁘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115 편
이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환난을 당해도 자기 화평을 못 본 체하거나 붙잡아 두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교회가 고난을 당하도록 허용하셨는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탐욕, 교만, 배신, 잔인, 야망, 자만 호색(好色), 술취함 등, 이 세상에서의 온갖 종류의 부패는 세상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즉각 중지시키는 모든 구제책을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좋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혹은 우리를 구원해 줄 방도를 취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이것을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써 기다리도록 하여 우리에게 신속하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십시다.
하나님은 지연시키는 것과 연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분명히 즉각 고치실 수 있는 것을 얼마동안 못 본 채 덮어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115:4-8 저희 우상은
(1) 이 시인은 하나님을 증거 함에 있어서 먼저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려야 한다고 역설합니다(1절). 신자는 이와 같은 옳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도와 주시는 은혜를 받은 후, 기도자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은 도적 행위입니다.
(2) 이 시인은 그 다음에 여기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2-8).
만일 이스라엘이 실패를 당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이 승리한다면,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할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우려하여 이스라엘의 승리를 하나님께 구합니다.
1. 본문 4-7절은 “④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편 115 편
⑥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⑦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입니다.
1) 이 대조는 거룩한 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신성(神性)에 대한 모든 생각은 어리석은 사색과 기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과오와 우매함을 아는 것은 참된 경건을 확립하는 데 공헌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셔서 우리가 천지의 조물주를 확실하게 알아서 이유 없이 또는 헛되이 예배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니다.
교만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조소하고 악한 자들의 오만함을 보다 효과적으로 잠잠케 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그들의 거짓 우상들을 멸시하여 비웃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을 ‘우상’ 즉 허무한 것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것들이 생명이나 감각이 없는 무생물들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우상들을 형성하고 있는 재료도, 또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형상도 우리 인간이 그것들에 존경을 바쳐야 할 만큼 최소한의 신성이나마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그것들에게서 어떤 도움을 기대하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동시에 선지자는 재료의 가치가 우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우상이 보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암암리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반대되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을지라도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은 아닙니다. 만일 선지자의 의도가 단순히 그것들이 구성하고 있는 재료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은금으로만 말하지 않고 나무나 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우상에게 실존이나 형체나 영광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들 자신도 곧 사라지게 될 자신들의 생명을 다른 것에 의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이방 사람들이 자기들이 고안해 낸 우상에게서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근거 없는 자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손에 많은 양의 물질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금이나 은으로 잔이나 다른 종류의 그릇을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필요한 그릇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시편 115 편
그러나 그들은 우상 만드는 쪽을 택했습니다.
한편 생명이 없는 것에 새로운 신성을 부여하는 것보다 더 모순된 일이 있겠습니까?
또 선지자는 풍자적으로 이방 사람들은 자기들의 우상에 각 지체를 만들어 놓았으나 우상이 그것들을 움직이거나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성도들은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자기들의 편이라는 사실로 인해 자기들의 특권이 더욱 가치가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이 자기들의 우상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도움은 헛된 것이요 다만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닮았거나 연관이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외면적인 형상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원리를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방인들은 비록 자기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지상에서 우상을 만들기는 했어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을 정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불만을 터트릴 소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피터가 돌이나 금이나 흙으로 지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이러한 재료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로마사람들의 상식적인 말중에 “신들앞에서 기도하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시세로(Cicero)는 시실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도를 드릴 대상인 신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들의 모습을 동(銅)이나 은이나 대리석으로 나타내는 일이 만연되어 있지 않았었다면 시세로가 이처럼 야만적인 방법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들에게 나아감으로 신들이 자기들에게 점점 더 가까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썩어질 물건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 했던 이 비열한 생각을 선지자는 생생하게 들추어 냅니다 돌이나 대리석 조각이나 나무나 또는 나무 줄기나 동이나 은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거리가 먼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는 비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켜 거짓 무리들이라고 했습니다(합2:18).
또 선지자는 놀려대는 투로 그들의 우상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있습니까?
우리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우리 안전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도와 줄 인자와 능력이 풍성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시편 115 편
이러한 형상들이 감각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하면 이것들에게서 자기들의 부족한 것을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2. 본문 8절은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간구이므로 가정법 미래 시계로 보아 ‘저희가 우상과 같이 되게 하소서’ 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롱하는 말로도 간주할 수 있습니다. 즉 선지자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나무 줄기나 돌맹이 그 자체와 똑같이 우매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선지자는 나면서부터 판단력을 부여받고 있는 사람들을 매우 근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이성과 판단력을 구별하려고 하며 심지어는 일반 상식까지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서 생명을 구하는 자는 모든 이성의 빛을 소멸하기 위해서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컨대 그들이 일반 상식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감정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것들에게 신성을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이 생각만으로도 일반 상식에 명백히 상반되는 거짓 의상들을 만드는 무지(無知)를 제거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당연한 귀결은 자원해서 소경이 되어 흑암으로 자신을 봉하고 어리석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전혀 핑계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를 마치 경건한 열심의 결과인 양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선지자의 의도를 온 인류는 자발적으로 우매하여졌으므로 모든 무지의 근원과 그 모양들을 다 제거시키려 하는 데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2) 본문에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우상들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예배가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만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고 또 하나님께로서만 얻는 줄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독특하게 속해 있는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쉼을 얻는다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경배를 탈취 당하시며 자기 영광이 무시당하는 것이 됩니다.
선지자는 우상과 거짓 신들이 하나님께서 빼앗기신 영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질투에 비유하여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욕하고 있습니다(출34:14, 신5:9).
시편 115 편
만일 어떤 사람이 대리석이나 나무나 구리에 형상을 새긴다거나 또는 금이나 은으로 형상을 부어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행위의 결과 자체는 그렇게 죄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만든 것들에 하나님을 불러들여서 하나님을 하늘에서 내려오시게 하고 자기들이 형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큰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썩어질 형상으로 제작되어질 때에는 그 순간부터 거짓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사야 40장 25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러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과 능력이 우상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여겨질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피해를 당하신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과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들이 정한 어떤 한계 속에 하나님께서 고정되어 있기 전에는 자기들에게서부터 심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돌이나 나무나 진흙이나 어떤 땅에 속한 물질을 가지고 만든 하나님을 그토록 열심히 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영적인 방법으로 구하는 것과 역행하여 하나님을 그분의 보좌에서 끌어내려서 생명이 없는 것들보다 아래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들 속에 하나님의 귀가 들어있고, 또 그분의 눈과 손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들에게 기도를 드리기에 이르고 그것들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죄악이 거의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즉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자는 그것들에게 어떤 신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선지자가 불신자들은 우상을 의지한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정죄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115:9-15 이스라엘아
(1) 이 시인은 국난(國難)에 처한 이스라엘더러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9-16).
이 부분에 “의지하라”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든지 이 세상 나라와 달라서 전쟁 때에도 병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도 옛날의 이스라엘처럼 범사에 하나님만 의지해야 됩니다.
(2) 이 시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의지해야 될 이유를 진술하였으니 곧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편 115 편
이 부분에 “복을 주신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이렇게 거듭거듭 말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사실이 확실함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1.본문 9-10절은 “⑨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⑩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입니다.
1) 선지자는 또다시 하나님을 순전하게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궁핍할 때에 버리시거나, 언약을 파괴하실까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교리적인 문제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행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일반적인 교훈을 합니다.
이어서 둘째로는 특별히 아론의 집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권면을 합니다.
2) 이 말씀의 순서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을 차등을 두지 않고 택하사 자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이와 일치하는 말씀을 하기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행26:7).
그러므로 선지자는 매우 적절하게 이스라엘 전체를 먼저 말한 것입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특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레위인들을 세우셨고 특별히 아론의 집을 제사장으로 세우사 다른 지파들 보다 앞서게 하시고 교회의 문제를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에 선지자는 일반 백성들에게서보다 아론의 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을 더욱 요구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그들에게만 특별하게 약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는 특권을 그들만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종교적인 스승으로 택하신 너 아론의 아들들아 너희들을 그의 성소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자의 지극히 높은 영광을 깨달아 다른 자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라.
시편 115 편
너희를 통해서 진리가 보존되고 확산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본문 11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자들처럼 이방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이스라엘의 자녀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과 연관시킴으로써 선지자는 아직 양무리에 계수되지 않은 이방인들, 즉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별도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선지자 자신이 앞에서 말한 것을 암암리에 바로잡고 있는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으로 순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었던 위선자들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믿음에서 떠나갔기 때문에 선지자는 여기서 그 약속을 믿음으로써 이 구분을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왜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아론의 집’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중에서 전체 교회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과 교사들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권면하는 경우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거짓으로 단지 이름만 교회에 걸고 자랑스럽게 뽐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거짓없이 섬기는 자들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본문 12-14절은 “⑫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⑬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115 편
⑭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입니다.
1) 많은 사람들이 ‘복을 주시며’ 라는 말을 과거로 번역하여 ‘그가 복을 주셨다’ 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선지자는 장래에 대한 좋은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의 형통함과 풍성함과 견고함은 오직 여기에서부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진리,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 이상으로 형통이나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는 원리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어려움에서 구원함을 받고 궁핍할 때 건짐을 받으며 다정한 방법으로 대접을 받은 것만큼이나 빈번하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는 생생한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사를 미래에서 과거 시제로 바꾸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에는 성도들이 이미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복이 약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문맥의 흐름과 매우 일치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마음에 두시고 우리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시작하셨으므로 영원히 이것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복들을 말함에 있어서 동일한 순서로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위선자들을 제외시키고 아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복의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2) 선지자는 “대소 무론하고” 라는 말로 하나님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멸시를 당하는 자라고 간과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도움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보호를 더욱 크게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결단코 사람을 외모로 취급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낮음이나 미천한 처지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도 매우 자비하게 자신에게로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5 편
또 ‘복을 주시리로다’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흐름에는 중단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 줍니다.
혹 과거 시제로 ‘그가 복을 주셨다’고 보려는 자가 있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오랜 기간동안 계속되어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보살피심이 한결같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은혜를 그들에게 오래도록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14절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은 사람들의 배은망덕함으로 할 수 없이 그 길이 막히게 되지 않는 한 결코 중단되거나 마르지 않는 근원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인생들의 형통함이 늘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기 선택의 은혜와 그 결과를 나타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5절은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입니다.
앞 절에서 선지자는 결코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창고에서부터 나오는 중단 없는 축복에 대한 소망을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후하고 많은 것으로 베풀어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즉 자신의 풍성함에 동참할 자로 인정하신 자들을 부요케 하기를 그치지 않으실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을 확증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이 구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특권을 의지하여 자비롭고 인자하신 아버지께 자기 자신을 주저함 없이 솔직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또 육신적으로는 그 어리석음의 결과로 하나님의 권능을 이해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이해력이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어야 평안과 안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에 선지자는 하나님을 천지를 만드신 분이라고 말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후 이제 와서는 하늘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한번 읽으십시다. 끝 절을 한번 더 읽고 찬송함으로 마치십시다.
시115:16-18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시편 115 편
이제 시인은 사람이 생전에 육신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하는 것이 요긴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람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가 심판 때에 잘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가 별세한 후에는 이런 의미의 경건 생활을 해 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생활을 재차 역설(力說)합니다(1, 17, 18)
1. 본문 16절은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충만케 해주심으로 인류를 아버지같이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족의 자상한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시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사면에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매우 많은 좋은 것들이 지구 곳곳에 뒤덮여 있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누리는 위로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보살피심의 증거와 비례합니다.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거의 유의하지 않는 점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기 영광으로 만족하셨던 하나님께서 땅을 선한 것들로 충만하게 하여 부요케 하사 인류가 어떤 것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거처를 하늘에 정하고 계시므로 그는 세상의 모든 부귀와는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나 옥수수 또는 현재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어떠한 것도 거기에서는 생산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필요한 것들을 직접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형편이 ‘하늘’이란 말을 반복해서 ‘하늘 하늘은 여호와께 충분하다’(칼빈 사역: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한글 개역) 라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도움을 능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세상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결론이 나오는데,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재물들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향하여 얼마나 복을 주시는 아버지이신가를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5 편
성령께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인자하심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생각하고도 이 교훈에 흥미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시편을 자기들의 교회에서 노래하면서 지금까지 복잡한 종교의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실 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단지 우리들의 감사하는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자들은 그들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됩니까?
또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인들이 가장 사악한 방법으로 노골적이고도 추악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왜곡시켜 이 말씀을 농담으로 만들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하늘에서 빈둥거리시면서 사람들의 행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세상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아버지로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입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도 개, 돼지 같은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인간 이성과 동떨어진 생각을 가지신 분이기에 인간들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왜곡하여 이 말씀을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를 말하려 합니다.
우리가 어떤 여관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하늘 나라의 생명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하나님을 모욕하는 무례한 사람 하나가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 들어서 “하늘들의 하늘은 주님의 것이다” 라고 농담조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극심한 고통을 겪더니 온 집에 그의 목소리가 가득 차도록 큰 목소리로 “오, 하나님! 오 하나님!” 하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처사에 분개한 나는 내 길을 재촉하면서 그에게 따뜻하게 경고해 주기를 당신은 이제 최소한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은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손님들 중에 정직하고 경건한 어떤 한 사람이 더욱 익살스럽게 그때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다니! 당신의 철학을 잊어버렸소?
왜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하늘에서 편안히 계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오 하나님’ 하고 외쳐 대면 다른 사람은 그를 조롱하며 너의 주님의 하늘들의 하늘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응수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고통은 경감되었고 그의 앞으로의 인생은 무사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시편 115 편
2. 본문 17-18절은 “⑰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⑱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 자신이 교회에 인자하심을 보여주시라고 계속 간구하면서 인류가 완전히 잘려지는 것을 막는 것보다 더 바랄 것이 없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즐길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고 그 이름에 기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베풀어 주신 일반 은혜를 찬송한 후에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누리는 도중에도 반역을 일으키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만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입장에 이르고 있습니다.
즉 “주여 주께서 우리가 멸망당하도록 버려주신다면 그 결과는 다만 주의 이름이 소멸되어 우리와 함께 매장되어 버리는 외에 또 무엇이겠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모든 감각을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선지자의 말씀을 볼 때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죽은 자는 보다 강력하고 활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에게서도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더욱이 선지자는 사람들의 거처를 땅에 정해 둠으로써 사람들과 하나님을 구별하고 따라서 하나님은 짐승들이나 똑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다르다고 합니다.
땅은 유일하게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소, 돼지, 개, 사자, 곰 등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파충류와 곤충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날지도 않고 기어다니지도 않는 것은 무엇이든 그 거처를 땅에다 두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은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경 여러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라는 말씀이 그 중 하나입니다(시118:17).
좋은 왕이었던 히스기야도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사38:19) 라고 말했고, 요나도 역시 물고기 뱃속에 빠졌을 때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욘2:9) 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15 편
선지자는 매우 정당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서 죽은 자들을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간에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교통이나 친교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로 끝을 맺습니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땅이 사람들을 위해 주어졌고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소유할 때까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땅의 풍성함은 짐승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만물이 원칙적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구원하시지 않았다면 자연의 전 과정이 멸망당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을 부르는 백성이 없었더라면 의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땅에는 항상 살아 남을 자가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보존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는 이렇듯 보존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자에게 감사의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더욱이 선지자는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단순하게 한 세대에 속한 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대로 붙들고 계시는 모든 교회의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증거를 안 남기시고 떠나거나 자신의 공의, 인자, 자비를 선포하지 않고 떠나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