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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위에 따른 상급과 책망 ( 3 : 10 - 15 )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 : 10 지혜로운 건축자 -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
본 절을 통해서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묘사하며 터를 닦아 두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도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사도 직분의 은사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여러 지역을 순방하며 살았다.
* 행 18: 11 -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 행 20: 31 -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작업은 한곳에 머물러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은 인터넷의 발달로 온 세상에 동시에 전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직접 방문하지 않고서는 전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기록한 디모데후서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바울의 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력하게 강조한 것을 볼 수 있다.
* 딤후 4: 1-8 –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 똑 같은 터를 닦았다.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알고 살았다.
2]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지혜로운 건축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포스 아르키테크톤'(*)은 '숙련된 건축가'라는 뜻으로 헬라어의 관례에 따르면 다른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울이 '집'(*, 오이코도메)이란 말은 곧잘 사용했지만, '건축자'라는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하였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있는 숙련된 건축자였다.
* 엡 3: 7-11 -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그는 고린도 지역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교리적인 터를 닦아 놓았다(2: 2).
* 행 4: 11 -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엡 2: 20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 벧전 2: 6 -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바울은 복음 사역을 이렇게 농사에 비유하고 또 건축에 비유한다. 복음 사역은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과 같고, 또 터를 닦고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복음 사역자들은 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과 같고 하나님의 집과 같다.
바울은 건축의 비유를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은 자로 표현하고 자기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을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로 묘사한다.
바울은 터를 바르게 잘 닦아 놓았기 때문에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
기초를 닦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여 영혼들을 구원함으로 교회를 시작한 것을 말한다. 이제 기초가 잘 닦여진 고린도 교회는 더욱 튼튼히 세워져야 한다.
목회(牧會)는 집을 완성하는 일이요 목회자는 집을 완성하는 자이다. 그것은 외형적인 예배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말한다.
목회의 목표는 교회의 영적 건립과 성장이다. 물론 복음 전파를 통하여 죄인들이 계속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고 속죄 신앙을 가진 자들은 충실한 가르침을 통하여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출산 후에 양육이 있듯이, 영적으로도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시작이요 성화(聖化)는 구원의 진행이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자라고 훈련되어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경건하며 진실하고 온유, 겸손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2]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다른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로스'(*)는 단수이다.
'각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카스토스'(*)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교회의 모든 사역자를 개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이 이미 닦여진 그 터 위에 건물을 세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각자는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를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워야 할지 조심하면서 하라고 경고한다.
세우다 라는 <에포이코도메오>는 ~위에<에피> 집<오이코스>을 짓는다<데모>는 뜻이다. 즉, 기초가 닦여진 곳에 집을 짓는 것을 말한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운다는 것은 사도가 복음의 초석을 놓은 곳에 다른 사역자들이 후임자로 목회하는 것을 말한다.
각각 어떻게 세우기를 조심하라는 것은 사도가 처음 개척할 때의 그 정신이 변질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목회는 함부로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여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후임 목회자들에게 바울의 개척 정신을 계속 유지하여 복음만을 증거하고 복음의 토대 위에서만 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고전 3 : 11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다른 터는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믿는 속죄 신앙은 믿음의 핵심이다.
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본 절은 앞 절에서 경고했던 이유를 제시한다.
모든 건축에 있어서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도 교회의 터가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고서는 세워질 수 없다. 이 터를 바울이 닦았으나 실상은 그가 닦은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그 터를 닦으신 것이다. (Meyer).
닦아둔 것이라는 <케이마이>의 원뜻은 누워있거나 놓여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집을 짓기 위하여 기초 공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는 말은 <데멜리오스 알론 우데이스 뒤나타이 데이나이>인데 바울 사도가 아니면 터를 닦아둘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닦아 둘 다른 터가 없다는 뜻이다,
곧 사도가 닦아 둔 터인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없으며, 다른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나 성도가 있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2]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주인이며 교회의 진정한 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교회라 할 수 없다.
엡 2: 20에서는 사도들을 '터'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이라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이심을 보여준다.
* 엡 2: 20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떠한 인물이나 사상 체계도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 외에 다른 터는 있을 수 없다.
만일 다른 터를 닦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다른 집단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반석은 그가 조금 전에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속죄 신앙은 그 믿음의 핵심이며 성도의 기본적 자격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집에 기초가 되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 있다. 행 4: 11에서 그리스도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하였고, 엡 2: 20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다고 하였다.
또 벧전 2: 6에서는 시 28: 16을 인용하여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리라고 말씀하였다.
또한, 마 16: 16-18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은 주님께 대한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이다.
이 모든 말씀은 주님께서 교회의 초석이 되신다는 뜻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집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따라서 성도는 몸의 지체들(롬 12: 5)이라고 했으므로 교회를 이루는 재료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절에서 사도는 자신만이 터를 닦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터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터요. 기초다. 터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변하지 않아야 한다. 터가 움직이면 집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큰 집이나 높은 집을 지을 때는 기초 공사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터가 흔들거리며 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도 영원토록 변함이 없어야 하는데, 만세 반석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 마 7: 24-25 –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마 16: 18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눅 6: 48 -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고전 3 : 12 두 종류의 자재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
건물을 건축하는 데 두 종류의 건축 자재가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 같은 내구성(耐久性)이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 같은 내구성이 없는 것이다.
두 종류의 목회가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가 참 교회이다.
1]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바울은 건축에 사용되는 두 종류의 자재를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집을 짓는데 필요한 건축 자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금, 은, 보석' 등 값비싸고 견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풀, 짚' 등 값싸고 허술한 것이다.
금<크뤼소스>이나 은<아르귀로스>이나 보석<리도스 티미오스>이라는 것은 모두 불에 안 타는 재료들이다. 반면에 나무 <엑쉴론>나 풀<코르토스>이나 짚<칼라메>라는 것들은 모두 불에 쉽게 타버리는 것들이다.
바울은 순수하며 변치 않는 영원한 것과 이에 비해 무미건조하고 일시적인 것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거짓된 가르침은 쉽게 소멸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후자(後者)는 '천한 초등 학문'이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다.
* 갈 4: 9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 골 2: 8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본문은 목회에 대해 말한다.
칼빈은 말했다. “그는 주의 참된 목사들이 그 날에 대한 눈을 가지도록 권면한다,” “항상 그 기초를 가지고 있지만 풀과 금, 짚과 은, 나무와 보석을 섞는 자들, 즉 그리스도 위에 짓지만 육신의 연약성의 결과로 어떤 인간적인 것을 용납하거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엄격한 순수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자들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목사들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이다.” John Calvin, I Corinthians [1546], pp.139,140,141.
촬스 핫지도 말하였다. “전체적 논의는 설교자들과 그들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비록 복음의 기본적 교리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에 오류를 섞는 교사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일반 신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과 그들의 교훈들에 관한 것이다.” Charles Hodge, I Corinthians [1857], pp. 56, 57, 58.
건축 자재에 따라 교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일 것이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진 내구성(耐久性)과 영구성(永久性)이 있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어진 내구성과 영구성이 없는 교회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교훈을 가리키며, 나무와 풀과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참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세상적인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혼합된 말을 전하는 자들도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회개를 외치기보다 평안을 선포하기 좋아했다. 그러나 평안은 오지 않았다. 평안은 죄를 버릴 때만 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두 종류의 목회를 의미한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것은 자잿값이 비싸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크고 웅장하게, 또 빠르게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짓는 것은 자잿값이 비싸고 기술도 많이 필요해서 아마 집을 짓기가 힘들고 그렇게 웅장하지도 못하고 또 더딜 것이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교회를 짓는 목회만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만이 참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무엇이며, 나무나 풀이나 짚은 무엇인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바른 교훈을 가르치며, 나무나 풀이나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르친다. 박윤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비유는, 기독신자들이(특별히 교역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는 것을 가리킨다. ‘금이나 은’은 순결한 하나님의 진리를 비유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거짓된 교훈을 비유한다(Hodge). 박윤선, 고린도전서 [1969], 49쪽.
칼빈도 역시 그런 의미로 말하였다.
참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바른 교훈, 건전한 교훈, 견고하고 확실한 교훈이 없다면, 참되고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바른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악한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기보다 거짓된 평안을 선포하기 좋아하였다. 그러나 선포된 그러한 평안은 오지 않았다. 참 평안은 죄를 버릴 때만 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것 같은 외적으로 거창하게 보이는 일들은 환난의 바람이 불어 닥쳤을 때 여지없이 무너졌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대목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희생 제물이 되셨다.
* 롬 5: 6-11 –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 요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롬 8: 1-2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를 범하고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포 가운데 지내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절망적인 것이 희망적으로 보인다.
둘째, 현재에 베푸시는 능력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힘과 소망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죄악 세력과 고전분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롬 7: 15-24 –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육과 영의 싸움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그는 담대하게 외쳤다. 우리가 넉넉하게 이긴다.
* 롬 8: 31-37 –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빌 4: 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장래의 희망을 보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장래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만사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계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 요 14: 1-3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세상에 훌륭하고 으리으리한 저택을 가졌을지라도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인생의 터를 삼지 않으면 오는 세상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인생의 터를 오직 예수로만 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