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朝鮮旅行案內記(조선여행안내기)》(11x16.5cm, 236+309쪽)(조선총독부 철도국, 소화9<1934>년 발행)의 안내편 60쪽부터 69쪽까지의 내용, 즉 경의선 철도의 역(驛)중에서 서울역(설명생략)에서 토성역까지의 기록내용이다.
지금으로부터 71년 전에 나온 출판기록이다.
교통관련 방송에 MC 또는 게스트로 적지 않게 참여해온 필자로서 이처럼 자세하고 명쾌한 자료를 보고 크게 통탄(痛嘆)했다.
이 책을 통해 일제에 철두철미하게 점령당했던 조선인한데는 기관사, 역장조차 시키지 않았으며 그리고 생물학, 지질학, 지리학 학자 양성을 절대 금지시켰던 그 시절과 당시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이 책에서는 “중간에 있는 작은 역으로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고 별 볼일 없다던 경의선의 봉동역이 6.25전쟁 휴전회담 첫 장소였다. 역사적 가치의 경중(輕重)은 변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그들의 연호를 써서 ‘분로꾸 노 에끼’(文綠の役, 문록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기서 우리의 역사는 말할 것 없고 이웃의 역사도 잘 가르쳐야 함을 강조한다. 누구보다도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믿었던 필자였지만 일본의 '분로꾸 노 에끼'(文綠の役)를 처음 들으면서 내 심장과 지식이란 것이 좁쌀보다 더 작음을 재삼(再三) 느꼈다.
이 책이 일어(日語)로 되어있어서 선배 이한수(서울대 치대 2회 졸업,1948) 박사님께서 번역구술하시는 것을 필자가 기록하고 정리하였다.
원문(原文)이 한국을 비하하는 태도 또는 어조로 된 부분이 없지 않아, 번역과 정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본의 아닌 실수를 범한 점이 있지 않을까 심히 조심스럽다. 이 번역 정리는 두 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 필자 주
고려유적과 개성인삼 《朝鮮旅行案內記》번역②
개성 땅은 고려 태조가 맨땅(生地)이던 곳을 개주(開州)라 칭하고 수도로 정한 이래 34대 470여 년간 고려의 수도로서 번영했던 장소이다. 그 건축, 미술, 공예 등이 크게 번창하여 소위 고려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현재에도 후세 역사가로 하여금 한반도문화의 황금시대였다고 이야기 할 정도이다. 그 유적의 대부분은 고려 말기에 병란을 입어 거의 소실 파괴되었으나 아직 당시의 유적도 남아있어 일일(一日) 사적(史蹟)관광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남문루] 개성시가 성문 밖으로 발전됐기 때문에 지금은 여기가 시가지의 중심을 이룬다. 남문루는 조선 태조 3년 개축되었고 경성의 남대문보다는 2년 정도 오래되며 그 루 위에는 조선 명종(名鐘)중 하나인 연복사(演福寺)의 종이 놓여있다. 약 6백 년 전에 만들어진 종의 도안과 모양은 매우 예술적이며 산스크리트어(語) 티벳계(系)의 파스파문자(文字)로서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이란 말(語)이 조각되어 있다.
[선죽교] 남문루로부터 1㎞ 정도. 자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 고려 말기 유신(儒臣)의 중심세력인 정몽주가 한을 머금고 명을 잃은 장소로 다리의 돌에는 아직도 암적색이 있는 것은 그 당시에 혈흔(피자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비장한 감(感)에 사로잡혀 발을 돌리기 힘들다. 그 부근에는 정몽주의 사적(事跡)을 조각한 두 개의 비석을 세운 비각도 있다. 그 비각 뒤에는 모포정(慕圃亭) 건물과 다정(茶亭) 등이 있다. 그리고 구릉을 따라 호정(虎亭), 숭양서원, 박물관, 관덕정 등 명소를 거쳐 남문루로 나오는 길은 관광객에게 권하고 싶은 좋은 코스이다.
[목청전] 이성계의 잠저(潛邸)터이다. 선죽교에서 조금 떨어져 논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다. 옛 건물은 문록전쟁(임진왜란)때 병화에 휩싸였으나 재건하여 이성계의 화상을 모시고 있다. 그 일부는 지금 총독부에서 관장하는 수산장(授産場. 사회사업, 취업지도기관)으로 쓰고 있다. 이 잠저는 정몽주가 조난을 당했을 때 이성계를 찾았다고 하는 곳이다.
[만월대] 남문루로부터 기다혼마찌(北本町)를 똑바로 1.5㎞ 정도, 선죽교로부터는 약 3㎞, 시가지를 우회해 갈 수 있다. 만월대는 그 좌우에 계류가 있고 그 뒤쪽에는 송악산을 두고 궁전은 만월대 위에 남쪽을 보고 있다. 그 규모는 넓고 크다. 고려 말기에 병란 때 화재를 입은 후 황폐된 그대로 있다. 현재는 누문(樓門)과 전각(殿閣)의 주춧돌만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그 옛적에 많던 옥루의 장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채하동] 시가지의 북부, 송악산 기슭에 있는 명승지이다. 이 부근 일대는 특별히 가을 단풍 때에는 관광객이 많다.
[경덕궁] 남문루로부터 남쪽으로 1.5㎞. 철도선로 맞은 편에 있다. 이 태조 즉위 3년 후에 왕도는 경성으로 천도됐으나, 제2대 정종이 한 때 개성으로 천도했을 때 일시적으로 궁궐이 있었다고 한다. 그 건물은 문록전쟁(임진왜란)때 타버렸다. 효종때 석벽을 올리고 옛터를 보존했다.
이 궁내에서는 음력 5월5일에 개성의 부녀자들이 그네를 타는 일이 관례로 되었다. 또 이 궁 뒤쪽, 남산 기슭에는 반구정(半球亭)과 또 반구정 동쪽에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적지가 있다.
[현릉(顯陵)] 이 능은 역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4㎞. 중서면 태조 능동(陵洞)에 있다. 이 능은 도선스님이 풍수를 보아 태조의 수능(壽陵)으로 정한 곳이다. 그 경내에는 울창한 소나무들과 장엄한 기가 넘친다. 태조 만년에 왕씨 분묘지로 하여 고려 역대 왕릉이 많다.
[현릉(玄陵)] 현릉(顯陵)으로부터 산을 넘어 약 2㎞, 개성역으로부터 약 4㎞, 다음 역 토성으로부터 가면 가장 가까워서 약 2㎞, 중서면 여능리(麗陵里)에 깊숙이 있는 봉명산 중턱에 있다. 왕과 왕비의 묘역이 두 기(基)가 있고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등(石燈) 등 묘역의 양식이 완전히 구비되어 있다. 고려 석조유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술품이다. 이 현릉은 개성을 관광하는 사람으로서 꼭 여기까지 관람하지 않으면 안된다.
[박연폭포] 이 폭포는 천마산 기슭에 있다. 별명은 산성(山城)폭포이다. 높이는 10여m. 역으로부터 약 24㎞. 자동차로 갈 수 있다.
[대흥산성] 박연폭포 위쪽을 보면 경치 좋은 누문이 있다. 이 문은 대흥산성의 북문이며 그 옛적 고려조정의 이궁(離宮)이 있었던 진성지(鎭城址)이다. 북문을 통해 올라가면 관음사, 약수, 만경대(萬景岱) 등 명승지를 거쳐 대흥사로 갈 수 있다. 옛적에는 거찰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간신히 사원의 면목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근처는 산기(山氣)가 넘치는 별천지이다.
탐승순로/관광코스
제1코스 역 → 경덕궁 → 부조현비(碑) → 남문루 → 관덕정 → 박물관 → 숭양서원 → 선죽교 → 성균관 → 채하동 → 만월대 → 역.
제 2코스 역 → 태조현릉 → (자동차) → 박연폭포 → (도보) → 산성북문, 남문 → (도보) → 박연폭포 → (자동차) → 역
개성인삼은 조선의 대표적 특산품이며 그 품질, 형태, 효능 모든 면에서 타국 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 그러하니 만큼 예부터 조선인이 인삼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대단해서 병기가 위급해지면 그 최후의 치료수단으로 꼭 이것을 사용하고 만약 이것으로 치유되지 않으면 천명으로 단념하는 것은 물론, 가난하여 그 구매가 여의치 않으면 인삼을 빌려다가 환자 머리맡에 놓고 그 영험을 받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탁월한 효과가 있고 고가인 것이었으므로 인삼재배에는 적지 않은 고심과 경비가 필요하다. 그 방법은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개성지방에서는 8월 초순에 인삼종자를 채취해 잘 씻은 다음 모래와 혼합해서 땅속에 묻고 가끔 그 위에 물을 뿌린다. 11월 초순경에 그것을 다시 캐내어 발아한 종자를 골라 항아리에 넣어 땅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해 3월에 이것을 묘상(苗床)에 심는다.
묘상은 그 주위를 청석(靑石)으로 두르고 그 안에 황토 5, 약토(藥土) 4를 혼합시킨 상토(床土)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대충 1촌(寸) 간격을 두면서 한 알씩 심고 발아될 때까지 볏짚으로 덮고 발아 후에는 차광판을 건다. 본시 인삼은 그늘을 좋아하는 성질이어서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인삼밭은 반드시 남향을 향해 경사된 반지붕형의 차광을 한다. 개성부근을 여행하면 차창으로 보이는 산 경사지에 많은 차광을 설치한 밭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심어진 인삼은 그 다음해 4월에 비로소 본 인삼밭에 이식한다. 그 성장 정도에 따라서 1년근, 2년근이라고 연수(年數)를 붙여 불리어지며 1년근은 복엽(複葉) 1매이며, 2년째로부터 5년근까지는 매년 잎이 하나씩 늘어간다고 하는 신비한 특징을 갖고 있다. 보통 인삼을 이식하고 나서 3년째 5월 달에 개화하며 그 7월 달 경에는 빨간 윤기가 나는 열매를 맺고, 5년째 가을쯤 즉 6년근을 9월 상순으로부터 10월 말까지 채취한다.
이렇게 해서 뽑은 것을 수삼(水蔘)이라고 한다. 개성 전매국출장소에 가서 감정을 받아 합격되면 홍삼(紅蔘)으로 만든다. 대체로 형체가 큰 것을 양품으로 하고 20근 또는 30근으로 부르면서 그 품위와 가격을 구별하고 결정한다. 이것은 1근에 대한 개수를 뜻하며 홍삼은 보통 50편품(片品, 50뿌리)을 최소로 한다. 백삼은 200편(200뿌리)에 이르는 것도 적지 않다.
수삼에 불합격품은 후포(後圃)라고 하여 인삼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그 주인은 이것을 씻어 껍질을 벗기고 햇살에 말려 백삼으로 만들어 다시 삼업(蔘業)조합에 검사를 받아 시장에서 판다. 그 가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1근에 8-9원정도이다.
합격품은 소정가격으로 정부가 수납하여 세삼(洗蔘)ㆍ증발ㆍ건조 과정을 거쳐 엿 빛깔의 제품으로 만들어 그 품질이 좋은 것을 홍삼 또는 천삼(天蔘), 질이 나쁜 것을 끽삼(喫蔘) 또는 지삼(地蔘)이라 하여 시장에 판다. 그 가격은 홍삼이 80원이고 끽삼이 40원 정도이다. 그 밖에 홍삼으로부터는 부산물로서 엑기스, 분말홍삼, 욕용(浴用)엑기스 등을 제조하여, 버리는 것 없이 모두 이용된다.
예부터 황해도 도청소재지인 해주로 가는 교통 요충지를 이루며 자동차의 연락지점이었으나 최근에는 조선철도 황해선이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백천, 연안의 두 온천을 거쳐 해주까지 개통되어서 경성으로부터도 편리한 여행지가 되었다. 또한 토성 서남쪽 약 3㎞ 지점에 있는 벽란도(碧瀾渡)와 심교(深橋)로부터는 강화도와 인천까지 해운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