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6일 목요일
몸이 하는 말
박경선
이번에 몸이 아프면서 몸이 내게 가르쳐 준말은 ‘눈을 찔끈 감고’ ‘이 일을 어떻게 할까?’ ‘대과 없이’ 이 세 마디의 뼈저린 의미였다.
<눈을 질끈 감고>
추석 전에 시골집에 들어갔다. 무화과가 잘 익어서 한 통 따서 들고 오다가 자갈을 깔아놓은 통로길에 엎어졌다. 얼른 일어나려고 몸을 꿈틀거려봐도 몸이 들리지 않았다.
“여보, 여보!”
있는 힘을 다해 악을 쓰며 불러도 텃밭에 있을 남편이 대답이 없다. 억지로 몸을 꿈틀꿈틀 움직이며 일어서려니 지렁이 행세였다. 겨우 땅을 짚고 일어나서 다리를 보니 정강이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조금 흐르다 그칠 피라서 오른팔을 들어보니 뒤꿈치 부분에도 피가 나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오른팔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리는 멀쩡하니 일어나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무화과를 주워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 씻었다. 한참 뒤에 남편이 보이기에 넘어져서 불렀는데 왜 대답 안 했냐고 했더니 안 들렸단다.
‘그래? 날이 갈수록 귀머거리가 되어가네.’
걱정스럽고 안쓰러웠다. 그보다 내가 더 걱정이었다. 당장 옷을 갈아입으려고 해도 왼쪽 팔은 끼웠는데 오른쪽 팔은 들 수 없어 ‘눈을 찔끔 감고’ 팔을 들어 억지로 끼우려면 눈물이 질끔 났다. 그때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왜 ‘눈을 질끈 감고’라는 말을 하며 살아왔는지. ‘눈을 질끈 감는다는 말은 몸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일 때 눈이 저절로 감기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는 걸, 내가 평생 살면서 몸으로 겪어본 말의 의미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게다가 워드 작업 할 일이 태산같이 밀려 있었다. 경북아동문학회 일을 맡고 있다보니 10일에 있을 총회 일정표 짜기, 동화 합평하기 원고 작성하기, 39집 책 보낼 곳 주소 정리 등을 해야 하지만, 왼손으로 오른 손을 들어 컴퓨터 자판기 마우스 위에 올려놓아야 손가락을 움직여 워드 작업을 뜨덤뜨덤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아이구,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이럴 때 이 말이 사용되는구나!’ 몸이 내게 해주는 말의 의미를 또 하나 깨치며 그럭저럭 힘겹게 숙제를 했다.
<대과 없이>
다음 날이 추석 전날이라 추석을 쇠러 서울 형님 댁에 갔다. 팔 병신이 되어서 일을 제대로 거들 수가 없었지만, 큰집 며느리 두 명에다 우리 집 며느리 다섯 명 합쳐 일곱 명 일꾼이 되다 보니 나 같은 것이 일을 못 한다고 문제가 될 리는 없다. 추석날 아침에는 다른 동서들이 부엌에서 상차림을 하는데 나는 아무 도움도 안 되어, 작은어머님•작은아버님 상 옆에 붙어 앉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동서들보다 아침밥을 먼저 먹게 되었다. 작은어머님은 구순노인이면서 칠순 며느리인 나의 비빔밥 그릇의 밥을 비벼주시고 작은아버님은 작은 어머님 옆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딱해 보였든지 고기반찬을 젓가락으로 떠서 내 비빔밥 그릇에 던져 넣어주시고, 간이 싱거울세라 간장을 한 숟가락에 떠서 내 밥그릇으로 던져 넣어 주셨다.
“아이, 괜찮아요. 짭거러….”
투정까지 부리며 밥을 비벼 먹었다.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모였다 보니 어른들 이야기는 모두 내게로 몰려 우리 두 아들한테 ‘엄마 모시고 병원 가봐야 한다.’며 주문이 쇄도하였다. 그러잖아도 그전부터 어깨 근육이 뭉쳐 경락마사지를 받아왔고, 서울에 오기 전에도 다친 데를 치료받으려고 경락 마사지를 다녀온 터라, 차차 나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온갖 경험을 풀어놓았다.
서울에서 내려와서, 하루하루 팔이 조금씩 들어 올려지고 있어 참아보면 나을 것 같아 기다리는데 서울 사는 아들과 서울 형님 전화가 빗발치고 남편과 큰아들도 병원 가봐야 한다고 윽박질러대었다. 연휴라서 병원도 쉬니까 ‘월요일쯤에 통증의학과 정도는 가볼게’ 하며 눈을 질끈 감고 계속 좀 참아보려고 마음먹었다.
추석을 마치고 고령 시골집에 들면서 대구 동생내외를 불렀다. 내가 팔을 쓸 수 없으니 동생이 밥을 해먹게 되었다. 남편이 동생 부부와 마주앉아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 사람이 엎어져서 불러대는데 나도 더운데 일하느라 바쁜데 신경질이 나서 대답을 안했더니 나중에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내한테는 부르는 소리가 안 들렸다고 해놓고 동생부부한테는 이실직고를 하다니. 나는 마음 문이 확 닫혔다. 게다가 서울 막내 동생 부부한테 쉬는 날이니 대구 내려와 놀다가라고 전화했더니 ‘언니, 지금 교통사고 났어. 저기 경찰 온다.’ 하기에 ‘그래? 일 처리 잘해라.’ 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대구 제부는 서울 막내 제부한테 전화 걸어 고령 집에 놀러오라고 했는데, 막내 제부는 자기 처가 교통사고 난 소식도 못 듣고 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라면 이런 사건, 사고가 나면 남편부터 불러댔을 텐데, 막내 동생은 어려도 마음이 단단한 아이 같았다.
‘하긴, 달려와 애정스럽게 말하며 도와줄 사람이 아니고, 나무라거나 질책부터 해대면 자존심 문제이니, 차라리 혼자 일 처리하는 게 낫겠지.’
이 참에 나도 ‘남편 없는 듯 살기 프로젝트’를 가동시켜볼 참이었다. 옷 입는 것도 안 들어올려지는 오른쪽 어깨를 먼저 들어 올려 끼우고 나서 왼쪽을 끼우니 훨씬 옷입기가 편해졌다. 조금 더 꾀가 생기니 옷의 뒷 목덜미 부분에 왼손을 넣어 머리통쪽 앞쪽으로 꺼집어 올리니 옷을 쉽게 갈아입을 수 있는 요령이 터득되었다. 하지만 오른손에 힘이 없었다. 반찬통의 뚜껑을 닫으려고 해도 뚜껑 네 곳에 붙어있는 닫힘 단추를 ‘딱’누를 힘도 없고, 우산을 들고 나가도 우산을 자동으로 펼쳐줄 자동 단추를 “탁‘누를 힘도 없었다. 친구 신교장이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 배달을 할 때 할머니들이 반찬 통 뚜껑도 못 열더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이 내 처지를 말하는 경우가 되었으니, ‘한 스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 힘이 재산이다!’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문득 교장들 퇴임식에 초대되어 갈 때마다 ‘대과없이’ 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사용하던 선배 교장들이 우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육현장을 걸어오면서 퇴임을 한 발자국 앞두고 학교에 사고, 사건이 터지면 물러나야 것이 교장의 길이었기에, 퇴임식을 앞두고는 살얼음판 길을 걷는 심정이라는 걸, 퇴임식을 앞두고 보니 비로소 알게 된 말이었다. 막내 동생은 어저께 내가 전화했을 때가 아침 출근길이었을 텐데 ‘대과 없이’ 잘 처리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남편한테도 비밀로 한 것 같으니 그 뒤에 무사한지 물어볼 수도 없어 은근슬쩍 문자를 보내보았다.
“우리 형제 모두 부자는 못 되도, 몸, 마음 아픈데 없이 편안하면 좋겠다! 막내야, 못 보니 더 그립다. 잘 있제?”
“네, 비가 오고 있어 꿀꿀하기는 한데 괜찮아유.”-막내
“괜찮다니 다행이다. 우리는 모여 잘 놀고 있다.”-형제 1
“모두 다행, 그것만큼 맘 편안한 말은 없어. 잘 먹고 잘 놀자.”- 형제 2
눈 질끈 감을 탈 없이 사는 일, 처리해야 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며 사는 일, 이 모든 것이 몸이 알려준 ‘대과 없이’ 라는 말 한마디로 압축될 것 같다.
월요일에는 더불유병원에 갔더니 50만원 드는 MRI를 찍어봐야 한다고 내일 오라고 했다.
“9월 5일에 다쳐서 지금 차차 좋아지고 있는데 MRI를 굳이 찍을 필요가 있나요?”
했더니 근육이 찢어졌을 수도 있어 잘못 두면 더 큰일난다고 겁을 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락 마사지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9월 5일에도 내 몸을 만지며 치료해준 선생님이라서 내 몸에 뼈가 금 간곳이 있는가? 근육이 찢어진 곳이 있는가 물었다. 그런 일은 없고 그냥 두면 차차 낫는다고 확신에 차 말씀하였다. 그래서 조카 김동한 의사한테도 문자를 넣었다.
<이국종 의사선생님 다음으로 내가 존경하고 믿는 김동한 의사선생님! 바쁘겠지만 무식한 경선 이모가 한 가지만 의논 드리려고요.
9월 5일에 고령 시골집에서 돌바닥에 넘어진 뒤로 오른쪽 팔이 안 들려져 밥숟가락 들기, 컴퓨터 워드 치려면 왼손이 오른손을 들어 마우스 위에 올려놓아야 워드를 칠 수 있었어. 9월 23일 (오늘)현재는 오른손으로 밥숟가락질도 잘하고 워드도 잘 치고 하루하루 많이 나아져서 오른팔이 2/3 가량 위로 들어 올려져요. 다만 통증이 좀 있어서 팔을 완전히 위로 들어올릴 수는 없어. 그 전부터 어깨가 아파서 경락 마사지 다녔던 곳 선생님말로는 내가 뼈, 금 간 곳도 없고, 근육 찢어진 곳도 없으니 시간만 가면 차차 낫는다고 하는데 그냥 있어도 아무 문제없을까요? 그냥 있다가 더 큰 병을 불러올 병도 있나요? 아니면 병원 가서 50만원하는 MRI를 찍어보고 그 병을 찾아내어 치료하면 치료될 병이 있나? 신체 구조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어서 실력 있고 믿을 수 있는 김동한 의사선생님의 고견을 부탁드려요.>그랬더니 답장이 왔다.
[친척 ㅡ김동한 조카.의사] [오후 6:20] 증상만 봐서는 어깨 관절 문제 일 듯 하네요~ 좋아지는 추세라서 그냥 보셔도 될듯한데, 다음 주까지 보시고 증상 남아있으면 검사해보시는게 좋을듯합니다^^.
그래, 참아봐야지. 돈 50만원을 병원에 그냥 갖다줄 수는 없지. 나는 마음에 중심을 잡고 주변을 둘러보며 주위 사람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대과 없이 내가 온전하고 건강해야 세상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날마다 행복하소서. 모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