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마을에서 혹시 지하수나 빗물을 식수로 쓰면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가의도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의도는 태안 일대 바다에서 단 하나뿐인 ‘유인도’다. 이장은 아직 식수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거나 문제가 생긴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다행이었다. 다행인 일인데, 마음 한 켠엔 기사가 성립이 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도 들었다. 정녕 사람 같은 기자는 되지 못할지언정 괴물이 될 셈이냐 스스로를 자책하며 한 마디 더 물었다. “오늘 자원봉사자는 많이 왔고요?” “오긴 뭘 와.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데. 오늘은 바람 때문에 많이 못 할 것 같어...”
규모가 크지 않거나 뭍과 직접 연결되지 않은 가의도 같은 섬에서 사람들이 아직 산다는 건 사실 신기한 일이다. 생업이야 어업과 민박 등으로 꾸려간다 해도 초등학교 분교조차 없는 곳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시킬 것인가. 배도 하루에 두 번 다닐 뿐이다. 유학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의도에 사는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65세 이상이다. 38가구가 사는데 총 주민이 67명이다. 다시 말해 65세 이상의 노부부들이 주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닥친 재앙, 그리고 풍랑... 통화중 바라본 만리포에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 자원봉사자를 환영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날아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뭍이 이 정도라면 섬은 어떨까.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은 바람을 맞으며 섬 주민들이 바닷가 자갈을 닦고 있었다. 뱃길이 험해 외부에서 온 사람은 전혀 없었다. 가의도는 작은 섬이지만 기름띠가 덮친 해안 길이를 더하면 10km가 넘는다. 주민들이 방제에 나선 해안은 그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더러워져 자갈을 닦는 노인들의 손길은 너무도 무력해 보였다. 수십년 뒤 우리가 이 섬을 떠나고 나면 누가 여기에 살게 될지 모르는데, 어쩌자고 이런 일이 터졌단 말인가. 사고 5일째. 복잡하고 서러운 마음을 묵묵히 견뎌내며 작업을 해온 노인들은 몰아치는 바람 속에 체력의 한계를 느꼈는지 하나 둘 씩 주저앉았다. 그동안 하소연할 곳도 없었는지 마이크를 들이밀면 여기저기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파도리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엔 ‘게르마늄 바지락의 산지 파도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팻말이 있다. 게르마늄 바지락. 마을에 사는 131가구가 공동 출자를 해 올해 초부터 시작한 사업이다. 바지락 양식장에 게르마늄 성분이 포함된 모래를 뿌려 조개를 키우는 사업으로, 지난달에는 특허도 획득했고 드디어 첫 번째 수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기름사고가 터진 것이다. 주민들은 굴과 전복은 포기해도 바지락은 안된다는 절박함에 야간까지 방제조와 순찰조를 편성해 대대적인 기름띠 차단에 나섰다. 결국 파도리 해수욕장 부근의 굴 양식장은 전부 오염됐지만 바지락 양식장을 지켰다. 조개들은 모두 살아 있었고 기름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보람도 잠시. 아무리 괜찮다고 설득해도 계약 해지를 통보한 서울의 대형 업체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랬다. 아름다운 갯벌이 유명했던 의항은 기름띠로 초토화돼 유전에 오면 이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천연기념물인 신두리사구와 최근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두웅습지의 코앞까지 기름띠가 밀려들었다. 사고 현장에서 5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안심하고 사고 초기엔 만리포에 가서 자원봉사까지 했던 안면도 외도의 주민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터전을 덮친 끈적끈적한 타르 덩어리들을 지켜봐야 했다. 해안에서 가까운 곳이건 한참을 배 타고 나간 먼 바다건 건져 올려지는 꽃게는 여지없이 기름 범벅이었다. 발견된 것만 수십 마리의 철새가 죽었고, 기름을 피해 황급히 바다를 떠난 철새들 때문에 주변 일부 저수지가 오염됐다. 힘겹게 명맥을 유지해 온 태안의 조그만 초등학교들은 다시 폐교의 위협을 맞고 있다.
여러 번 보도됐듯 1995년에 여수 앞바다에서 ‘씨프린스호 유출 사고’가 있었다. 재발을 막기 위한 연구 용역 결과 2천 5백억여원을 새로 들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이행되진 않았다. 3천~5천톤급 방제 선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지금 그런 선박을 찾아볼 수 없다. 흡착포 같은 방제물자도 잠깐 생산하다가 더 사고가 나지 않자 중단돼 버렸다.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두 겹 구조의 이중선체만 운항할 수 있도록 제한해야 하며 미국과 유럽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현실을 정부와 관련 기업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고 선박과 같은 단일선체 사용을 금지하는 제도는 오는 2010년 도입되는 것으로 멀찌감치 제껴져 있었다. 이윤 때문이겠지만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단일선체 사용을 밀어붙인 대기업들의 고집 또한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사고는 어쩔 수 없으니 일단 방제에 주력하자고만 말하기엔 벌어진 참사 자체가 너무나 크지 않은가.
썰물인데도 조개들이 모래 밑으로 숨지 않고 그대로 밖에 나와 있었다. 이미 기름 범벅이 된 모래 밑으로 들어가 봐야 숨을 쉴 수 없다는 걸 겪어봤기 때문일까. 껍데기를 벌린 채 기름 냄새를 풍기는 조개를 집어 들었다. 다 죽어가면서도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껍데기를 닫으려 했다. 숨을 쉴 수 없어 살기 위해 벌린 입, 그리고 다시 닫으려는 입. 이 조개들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것일까. 숨을 쉴 수 없어 살기 위해 밖으로 나온 주민들과 밖으로 나온 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탄화수소 투성이인 기름 공기.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것일까. 이토록 이들의 생존 자체마저 위협하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인가.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내년 초에 태안으로 갈땐 섬지역으로 가야겠습니다. 혼자라도 일단 닥치는대로 일해야겠네요
epismelo 기자님. 저는 기자님이 누구인지 알아요. ㅎㅎㅎ 좋은 글과 보도 감사드려요. 멀리서 늘 응원하고 있답니다. 아자아자!^^
epismelo 기자님. 저도 기자님이 누구인지 알아요. ㅎㅎㅎ 좋은 글과 보도 감사드려요. 멀리서 늘 응원하고 있답니다. 아자아자!^^
epismelo 기자님. 저는 기자님이 누구인지 몰라요. 하지만 좋은 글과 보도 감사드려요. 멀리서 늘 응원하고 있답니다. 아자아자!^^
저도 선배님이 누구신지 알지요. 언론사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글과 기사로, 또 입사한 뒤에는 경찰서에서, 현장에서 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배우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남겨주신 글로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없는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으나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것이 길이 되었다 -루신
누구신지 궁금하고 격려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건승하시길..:)
꺄악... 저는 기자님이 누구인지 알아요. ㅋ 기자님을 어제도 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