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고픔 달래던 음식에서 수출 효자품목으로…환갑맞은 한국라면 / 23.09.01.
_ 1963년 삼양라면 등장…80년대 신라면·진라면 등으로 '라면 전성시대' 개막
_ '우지파동' 고비도…2000년 들어 '라면의 변신'
_ 라면 수출액 2015년부터 8년 연속 증가…지난해 7억달러 돌파
_ 삼양라면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1963년 9월 15일 탄생한 '삼양라면'.
한국 라면이 탄생한 지 오는 15일로 60년이 된다. 사람으로 치면 한국 라면은 올해 '환갑'을 맞는 셈이다
어려웠던 시절 라면은 한 끼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서민의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현재는 국내 식품 수출을 이끄는 '세계인의 음식'이 됐다.
1966년부터는 정부가 식량 부족을 해결하고자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치면서 라면 판매가 늘었다.
또 라면이 연말연시 선물이나 결혼식 답례품 등으로 활용되며 생활 속으로 더 가깝게 들어왔다.
삼양식품 사사(社史)에는 삼양라면의 색이 바뀐 과정도 기록돼 있다.
출시 당시 삼양라면은 닭 육수를 바탕으로 한 하얀국물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며 지금의 빨간국물 라면이 됐다는 것이다.
● 1980년대 황금기 맞은 라면…'우지파동'으로 위기 겪기도
1980년대 한국 경제 성장에 따라 라면 시장도 급격히 커졌다.
특히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로 업계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_ '신라면' 출시 제품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1986년 출시한 농심 '신라면' 의 이쇄 광고. 구봉서와 강부자가 출연했다. [농심 제공]
● 1963년 9월 15일 첫 한국 라면 탄생…혼분식 장려 정책으로 판매↑
한국 라면의 시작은 삼양라면이다. 6·25전쟁 이후 사람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삼양식품 창업자인 전중윤 명예회장은 1961년 남대문시장에서 사람들이 꿀꿀이죽을 먹으려고 줄을 선 장면을 보고 창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꿀꿀이죽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과 음식물 쓰레기 등을 모아 끓인 것이다.
전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먹어 본 인스턴트 라면을 대안으로 떠올렸고, 1963년 일본에 가 묘조식품에서 기술을 배우고 라면 기계를 들여왔다.
그해 9월 15일 출시된 삼양라면의 중량은 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당시 꿀꿀이죽 가격의 2배였지만, 30원 정도였던 김치찌개 백반, 커피 한 잔보다는 저렴했다
_ 삼양라면 광고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1963년 9월 15일 탄생한 '삼양라면'의 신문광고. [삼양식품제공]
농심은 1982년 너구리,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 1986년 신라면을 잇달아 출시했다.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는 1984년 팔도비빔면을 내놨고, 오뚜기는 1988년 진라면을 선보였다.
이른바 '황금기'를 맞았던 라면 업계는 1989년 '우지파동'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공업용 우지로 라면을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가 검찰에 전해졌고, 기업 관계자들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구속되며 라면의 안전성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학계와 정부 등에서 우지를 사용한 라면이 인체에 무해하다고 발표했으나, 당시 논란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 2000년 이후 짬뽕라면·미역국라면 등 제품 다각화
2000년 이후 라면 종류는 더욱 다양해졌다.
각 유통사는 자체브랜드(PB) 제품을 선보였고, 라면업체들은 짬뽕라면뿐 아니라 미역국라면, 북엇국라면 등 다른 메뉴와 접목한 제품을 선보였다.
2011년에는 한 TV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개그맨 이경규가 개발한 '꼬꼬면'이 나왔고 이후 하얀국물 라면이 유행하기도 했다.
_ 꼬꼬면 [연합뉴스 자료 사진]
매운맛을 즐기는 소비자들의 '맵부심'(매운 음식을 잘 먹는 자부심)에 맞춰 매운라면 제품 출시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농심은 신라면보다 2배 매운 한정판 제품 '신라면 더 레드(The Red)'를 선보였고, 오뚜기는 열라면에 마늘과 후추를 더한 '마열라면'을 출시했으며, 삼양식품도 '맵탱' 브랜드로 제품 3종을 내놨다.
제품 활용법을 창조하는 소비자인 '모디슈머'가 등장하며 라면을 즐기는 방법은 더 다양해지고 있다.
올해로 환갑을 맞은 라면은 여전히 한 끼를 해결하는 대표 음식이다. 60년이 지난 현재 삼양라면의 중량은 120g, 소비자가격은 910원이다.
최근 한류를 타고 한국 라면은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라면 수출액은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연속 증가했고, 지난해 라면 수출액은 7억6천543만달러로 처음으로 7억달러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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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
우리나라 사람은 라면을 좋아한다.
세계 최대 라면 소비국은 중국이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으로 따지면 한국이 최고다. 한 사람이 1년에 68개를 먹는다고 하니까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이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 1963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됐다. 인스턴트 라면이 처음 개발된 해로 따지면 55년이다. 라면, 이 위대한 음식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반백 년 라면의 역사는 시련에서 출발한다. 그 탄생사는 전쟁의 고통, 그 혼란에 내동댕이쳐진 개인의 눈물, 그리고 힘든 세월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라면의 역사는 고난 극복의 궤적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땀과 눈물이 모두 스며 있다.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안도 모모후쿠라는 사람이 처음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 일본 국민들 대다수는 미군이 제공하는 밀가루로 연명했다. 뒤집어 보면 국수 장사로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직장을 잃은 안도는 장기간 보관해도 원래의 맛을 살릴 수 있는 국수를 대량 생산해 사업화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업이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다. 거의 10년 동안 국수 개발에 매달린 안도는 마침내 가진 돈을 모두 날려버리고 가정은 파탄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나이도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안도는 좌절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하자며 포장마차를 찾았다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음식 만드는 모습을 보던 안도는 포장마차 주인이 어묵에 밀가루를 입혀 기름에 튀기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젖은 국수를 기름에 튀기면 밀가루 반죽에 포함된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면서 밀가루에 숱한 구멍을 남긴다. 이 구멍에 뜨거운 물이 들어가면 국수가 다시 부드러운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 안도는 연구에 매달린 끝에 1958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간편하게 먹는 즉석 라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라면 생산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안도가 라면 제조 방법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도 쉽게 라면을 만들 수 있었다.
한국에서 라면을 처음 생산한 것은 1963년이다. 경쟁이 치열한 일본 라면업계에서 한국에 라면 제조 기술을 이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최고지만 라면이 처음 국내에 선보였을 때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밀가루 음식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느끼한 국물에 값도 싼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라면은 가격이 10원으로, 당시 식당에서 사 먹는 백반이 30원이었으니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라면이 널리 보급된 것은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덕분이다. 쌀을 아끼려고 라면 보급을 장려한 것인데 대통령까지 관심을 보였다. 대통령이 우리 국민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느끼한 국물 대신 고춧가루를 이용한 수프를 개발해보라고 제안하면서 개발 자금까지 지원했을 정도다.
일본 라면이 패전의 허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발달했다면, 한국 라면은 산업화 도중 식량 자급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라면이라고 하면 인스턴트 라면부터 떠올리지만 라면은 사실 생라면을 기름에 튀기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생라면은 어디서 비롯된 음식일까?
일반적으로 생라면의 뿌리는 중국으로 보고 있다. 1870년대, 요코하마의 부두에서 일하던 화교 노동자들이 먹었던 국수를 원조로 본다. 이들이 고향에서 먹던 ‘라몐(拉麵)’이 일본의 생 ‘라멘(らめん)’의 뿌리라고 하는데, 라몐이란 쉽게 말해서 수타국수다.
수타국수가 밀가루 반죽을 바닥에 때리며 늘리는 것과 달리 라몐은 공중에서 그대로 잡아 늘리는 것이 다르고 수타국수보다 면발이 훨씬 가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수타국수를 주로 짜장면으로 비벼 먹지만 중국은 라몐을 쇠고기 국물에 말아 먹는다. 때문에 겉보기에도 일본의 생라면과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생라면을 예전에는 지나(支那)소바, 또는 주카(中華)소바라고 불렀다. 생라면에는 이렇게 격변의 시대에 고향을 떠나 요코하마에 와서 돈을 벌어야 했던 중국 쿠리(부두 노동자)의 눈물이 배어 있다.
라면은 지나치게 먹으면 건강에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라면은 싼값에 허기를 잊도록 해주는 구원의 음식이다.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라면에는 극한의 가난을 견디어낸 중국 부두 노동자들의 질곡과 패전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일본인의 노력, 산업화 과정에서 잘살아보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맨 한국인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