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20. <당신에게 돋아 있는 가시는 > 240815
여고생들과 문학 수업을 할 때는 수행평가로 꼭 글쓰기 포트폴리오를 작성한다. 제목이 거창하지만, 사실 문학 작품을 함께 읽고 공부한 다음에 그것과 유사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거나 자기 삶에 그 작품의 주제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고민해 보게끔 하기 위해서다. 수능 시험에 많은 것들이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단순하게 암기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대신 수업과 삶을 연결하게끔 도와주려는 나름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신라 향가 ‘제망매가’를 공부했다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하고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글을 써 보게 한다거나, 경기체가 ‘한림별곡’을 읽고 자신의 성격이나 개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단어들을 골라 시가의 형식에 맞춰 써 보게 하는 식이다. 전자를 통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후자를 통해서는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 선생님이 혼자 강의해서는 학생들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이 활동을 통해 많이 알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한 학기에 예닐곱 번의 글쓰기를 하고 나면 수행평가 영역이 저절로 채워지니 애들도 좋고 나도 좋다.
이 활동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쓴 글에 대해 선생님이 피드백을 적절하게 주는 것이다. 대체로 자기 삶의 이야기들이 소재이기 때문에 우선 아이들이 무척 진지하고, 덕분에 나도 읽는 재미가 좋다. 그렇지만, 한 학년에 백에서 백오십 명 사이를 담당하다 보면 과제 하나를 내주고 읽고 답글을 달아주는데 못해도 일주일씩은 걸린다. 하지만 그걸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모처럼 솔직하게 용기를 내서 자기 내면을 드러내 준 것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보석 같은 성장의 과정을 목격하는 ‘뽕’에 취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희덕의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라는 수필을 읽는 시간이었다. 탱자나무 줄기에 있는 가시가 남을 다치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며 때로는 그것이 스스로를 다치게 하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이 하나씩 주어져 있더라는 삶의 깨달음을 다룬 글이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여기저기 가시에 찔려 본 일이 어른들에게는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가시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걸 보고 아직은 순수한 면이 더 많은 열여덟 여고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는 걸 듣고는 과제를 이렇게 냈다. “자신의 삶에서 ‘가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쓰고, 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써 봅시다. 분량은 글쓰기 노트 20줄 이상” 그중 한 편을 소개한다.
“내 삶에서 가시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완벽주의? 강박관념? 인 것 같다. 거울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그러긴커녕 피부, 새치, 몸무게, 외모 등등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 항상 보인다. 또한 시험을 보거나 할 때도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정말 노력한 부분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받았을 때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다음에 잘 하도록 하자 이런 마음보다는 그냥 이 시험 결과가 이러니까 이제 내 인생은 어떡하지, 나는 왜 살지?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부정적인 마인드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장점들을 잘 봐주고 남을 많이 생각해 준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정작 내가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장점을 봐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못한다. 내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텐데.
내 완벽주의와 강박관념이라는 가시 안에는 자기 비하와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 등의 잔가시가 박혀 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이 자괴감에 빠져 있다. 내 안의 가시를 인정하는 길은 아무래도 지금의 나로서는 힘들어 보인다. 탱자나무 글처럼 가시를 빼내고 그곳에 상처를 더하지 않아도 같이 공존해 나갈 수 있었으면 자기가 자신을 이겨낼 수 있었으면 한다. 솔직히 날이 가면 갈수록 가시는 더욱 박혀가는 것 같고 그 누가 조언을 해 주고 좋은 말을 해줘도 다시 원점으로 아니 그보다 더 힘들어진다. 내 가시는 남과의 비교, 열등감 덩어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해 줄 때도 그 사람은 나보다 뛰어나고, 잘났으니까 내 기분을 100%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또 나만 이상한 사람이고 스스로를 가혹하게 낭떠러지로 떠밀겠지 라는 생각만 든다.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다. 또 내가 힘든데도 밖에 나가서는 그렇지 않은 척 웃으며 다니는 것도 싫고 내가 자신에게 이렇게 계속해서 가면을 씌우는 것도 싫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렇지 않았는데, 학교가 끝나면 학교 앞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고, 미어터지는 떡볶이집에서 500원의 소소한 행복을 느꼈는데 이젠 그런 소소한 행복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굳이 찾지 않아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찾아야 겨우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지나간 것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가시를 무작정 빼내고 도려내기보다는 이해하고 가깝게 지내보라고 말하고프다. 내 잃어버린 행복을 찾는 방법 중 하나는 이것일 수도 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자책하지 말고, 오늘도 버텨줘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다.”
노트 한 페이지에 빼곡하게 적힌 자기 감정에 대한 솔직한 고백.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찾고 싶다는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다음과 같이 손으로 답을 적었다
“예나야! 쌤이 느끼기에는, 내가 고3 때보다 니가 살아가는 지금의 학교 환경이 훨씬 힘든 것 같다. 할 게 이렇게나 많으니 어차피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각종 평가들은, 수능 하나로만 비교하던 걸 각 과목별, 영역별 수많은 평가로 비교의 기준만 더 늘려놓고 학생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라고는 주지 않으면서 괴로움만 더해 주는 것 같다. 예나야, 경쟁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눈앞의 경쟁에서 이겨도 내 앞엔 이미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 그럼 우리는, 그 밖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거지. 사실 냉정한 이야기다만, 자신에 대한 사랑은 누가 넣어줄 수가 없어. 온전한 본인 몫인 거지.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어렵고, 물리적인 실천도 필요해. 약간 토 나오더라도 거울 속 나한테 소리내서 사랑한다고 말하기. 그날 자기 전에 감사한 일 3가지 적어두고 자기. 쌤도 하고 있어. 진짜 힘든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정수기에서 찬물이 정상적으로 나왔다. 해가 떴다. 나도 무사히 눈을 떴다.’ 같은 말도 있어. 이걸 꾸준히 하다 보면 생각보다 내가 가진 게 많고, 주변에 사람도 많다는 걸 느끼게 될 거고, 인생에서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게 뭔지 어렴풋이 느끼게 될 거야. 특히, 니가 좋아하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 고리키 같은 러시아의 대문호들은 그것들에 대해 많이 탐구했어. 그 사람들의 소설도 꼭 읽어보면 좋겠다.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밑으로 떨어져도, 그곳에도 꽃이 피고 사람이 산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는, 마음 깊은 곳의 너를 만나길 응원할게.”
나도 사춘기가 있었다. 공부, 친구 관계, 이성과 세상에 대한 관심.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수많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일어나기 전에 일하러 나가셔서 잠든 후에야 들어오시는 부모님께는 물론이고 즐겨 읽던 책에도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그때 우리 성당 수녀님께 들은 방법을 아이에게 그대로 전수해 준 것이다. 하루에 감사한 일 세 가지 생각하기. 자려고 누워 천장에다 썼던 말들을 떠올렸다. 안방에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시다. 내일 일어나면 창밖으로 변함없이 바다가 보일 거다. 내방 앞에 내일도 동백꽃이 피어 있을 거다. 할 것도 너무 많고 그것들이 다 자기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또 그 헤매는 시간이 나중의 본인을 지탱해 주는 나이테를 새기는 시간이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답글을 써주고 몇 달이 지나 그 내용도 거의 잊어버렸을 학기의 마지막 수업 시간, 수행평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려고 걷은 노트 마지막 장에 엽서가 한 장 붙어있었다.
“원재쌤! 저 예나에요.
벌써 봄 여름 가을이 다 지나고 겨울이 와서 곧 제가 졸업식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전에 제가 시에 대한 답변 적어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크리스마스카드에 몇 마디 적어봐요! 선생님이 써주신 편지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다음 날 눈이 퉁퉁 부었었어요. 앞으로 살면서 가끔씩 꺼내볼 것 같아요. 특히 경쟁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그 말이 너무 와닿아서 가시가 커지는 날이면 이 말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다독일 수 있게 되었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감사한 일 세 가지 쓰고 자기를 했었어요. 정말 저도 모르게 제가 바뀌더라고요! 여전히 자기 비하나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여러 곳에서 생기는데 금방 괜찮아지는 제 자신을 보고 놀랐어요. 우울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었는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주신 좋은 말씀처럼 저도 다른 사람에게 삶에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021년 한 해 동안 문학, 독서 수업 너무 재밌었고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이게 뭐냐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지만, 그 아이는 얼굴을 붉힌 채 창 너머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창에 비친 이전보다 조금 덜 밉고 조금은 더 사랑스러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