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앞바퀴굴림 차에 350마력이라는 출력을 전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게다가 자연흡기 방식도 아닌 고압 터보의 과격한 42kg·m를 쏟아낸다면 상황은 제법 심각해진다. 제대로 직진을 유지해줄지, 코너를 빠져나오며 재가속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공포스러운 면모를 지닌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스바겐 골프 GTI TCR이었다.
골프 GTI가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면 GTI TCR은 늑대의 탈을 쓴 흉포한 불곰에 가깝다. 이 차는 TCR이라 불리는 국제 투어링카 레이스 규정에 맞춰 폭스바겐 모터스포츠 전담부서에서 개발한 레이스 전용 머신이다. 좌우로 이두박근처럼 뻗어 나온 휠아치는 차체 너비를 1950밀리미터로 늘려놨다. 순정 GTI보다 무려 15센티미터나 넓다. 차체 길이도 4555밀리미터(순정 GTI는 4255밀리미터)로 커졌다. 공력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방으로 길게 튀어나온 스플리터와 해치 게이트 뒤로 길게 자리 잡은 대형 리어윙 때문이다. 초고속 안정성 확보 및 새로운 트레드 수치와의 비율 조정을 위해 휠베이스도 25밀리미터 늘었다.
편의장비와 내장재를 모두 덜어내고 카본과 케블라, 유리섬유를 듬뿍 두른 보디워크로 몸무게는 0.3톤가량 가벼워진 1170킬로그램. 그중 앞 타이어에 740킬로그램에 달하는 상당한 무게가 집중돼 있다. 마력당 무게비는 3.5킬로그램으로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 3.7초의 최신 911 GTS와 유사한 수준이다. 앞부분에 익숙한 골프의 얼굴이 남아있긴 하지만 넓고 납작하게 바닥에 웅크린 모습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도어를 열고 고정식 레이스 시트에 몸을 구겨 넣는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롤케이지는 차가움과 포근함이 공존한다. 처음 조종석에 앉을 때는 왠지 모를 엄숙함마저 감돈다. 외부 기온이 30℃에 육박하지만 에어컨 따위는 없다. 운전석 도어 쪽에 파워윈도 스위치 한 개가 남아 있다. 이 차 최고의 편의장비이자 실내에서 GTI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클러치, 브레이크, 가속페달 세트가 바닥에 놓여 있지만 기어 레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진 기어들과 후진 기어 모두 시프트패들을 통해 연결한다. 레이스 전용 시퀀셜 기어박스 덕분에 클러치 페달은 출발 때만 필요하다. 그럼 시프트업은 어떻게 하는가? ① 먼저 레드존에 도달할 때까지 풀 스로틀을 유지한다. ② 그 상태로 오른쪽 패들 시프터를 당긴다. ③ 왼발은 놓는다. 사실 기어박스의 구조는 전혀 다르지만 조작법은 흔히 몰고 다니는 오토매틱과 다르지 않다. 반면 브레이크페달은 구조는 비슷하지만 조작법은 전혀 다르다. 양산차는 흡기관과 연결된 진공 배력장치 덕분에 적은 힘으로도 제동력을 얻을 수 있지만 이 차는 오로지 다리 근력으로 차체 무게를 이겨낼 만큼 패드를 밀어내야 한다. 풀 브레이킹을 하려면 브레이크 라인에 80바이상의 압력을 가해줘야 한다. 차체를 지탱하고 있는 타이어 공기압이 통상 2.5바 정도이니 어느 정도 힘을 줘야 할지 상상에 맡긴다.
전원과 시동 스위치를 올린 후 운전대 위에 빨간 버튼을 누르자 엔진이 깨어났다. 아이들링 사운드는 의외로 조용해서 골프 GTI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1단을 넣기 위해 시프트패들을 당기자 “탕!” 하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기어가 들어간다. 뉘르부르크링 트랙으로 진입하며 워밍업을 시작한다. 엔진회전수에 따라 스퍼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음이 볼륨을 높인다. 변속할 때마다 한바탕 총격전도 일어난다. 운전석 위치는 일반 골프와 비교해 훨씬 뒤쪽으로 물러나 있어 타이트한 코너에서도 좌우 시야 확보가 좋다.
한국타이어 레이싱 슬릭 C52 컴파운드에서 조금씩 접지력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랑프리 서킷을 빠져나와 노르트슐라이페로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페이스를 올려본다. 플루크플라츠를 지나 고속 전개 오르막이 나타나자 가볍게 시속 240킬로미터를 돌파한다. 중간에 살짝 점프하는 요철 구간이 있어 보통 가속페달을 떼어야 했는데 골프 TCR은 로드홀딩이 유연해 풀 스로틀을 유지할 수 있었다. TCR 출고 사양의 2웨이 빌슈타인 댐퍼는 3웨이 KW 시스템으로 변경했다. KW 연구소에 머신을 통째로 보내 F1 머신 개발용으로 쓰던 7축 다이나모 위에서 찾아낸 최적 값이라고 한다. 올해 출고한 차에 서스펜션만 6세대 버전이라고 하니 하체 세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지난해 V 클래스 경주차를 타고 북쪽 코스 요철과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운전대를 수정하며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TCR은 운전이 아주 쉽고 승차감은 안락하기까지 하다.
초고속 영역에서 앞바퀴에 상당량의 다운포스가 가해지고 있음이 운전대 무게를 통해 전해진다. 고출력 앞바퀴굴림에 대한 걱정? 완벽한 기우였다. 편중된 무게 배분과 달리 고속으로 올라갈수록 다운포스 덕분에 앞뒤 50:50에 가까운 감각을 보여준다. 대부분긴 코너에서도 거의 언더스티어를 허용하지 않고, 강한 제동과 함께 코너에 뛰어들 때 가끔 나타나는 오버스티어 역시 점잖고 다스리기 쉽다. 1.8G 이상의 횡가속도에서도 노면을 꾹꾹 눌러가며 앞서 달리는 포르쉐와의 거리를 좁힌다. 넓어진 차체는 코너링 한계 속도를 올려주는 대신 전면 투영 면적이 늘어나 공기저항도 증가한다. 따라서 350마력임에도 종합적인 공력 특성 때문에 최고속도는 겨우 시속 260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1~2단 기어비가 독특하다. 1단에서 시속 94킬로미터, 2단에서 시속 124킬로미터까지 낼 수 있어 저속 시케인 구간은 1단까지 활용할 수가 있다. 단, 1단으로 코너를 탈출할 때에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 운전대가 돌아간 상태로 조급하게 가속을 시작하면 막대한 토크와 LSD가 합세해 앞바퀴의 슬립 앵글이 급증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운전대를 돌렸음에도 차는 직진하듯 나아간다. 조향을 일찍 풀어주거나 가속페달을 세밀하게 다뤄야 한다. 이후 직진 가속에서는 아무리 거세게 출력을 걸어도 토크스티어는 느낄 수 없다. 두터운 토크가 전 회전 영역에서 퍼져 나와 레이스카 특유의 까칠함마저 없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레이스카는 빨라질수록 드라이빙이 더 쉬워짐을 느꼈다. 국내도 TCR 도입이 시급하다.
TCR International Series
2015 시즌으로 시작한 양산차 투어링카 레이스의 새로운 카테고리. 기존 WTCC 머신의 제작비용에 비해 아주 합리적인 가격으로 레이스 머신이 공급되고 있고, 다양한 메이커가 TCR 규격의 차량을 판매하면서 급성장 중이다. 혼다, 세아트, 폭스바겐 등이 먼저 참여했고 아우디, 오펠, 알파로메오 등 점점 많은 브랜드가 레이스에 합류했다. 현대자동차 역시 TCR 규정에 맞는 i30 모델을 최근 공개했다. 앞바퀴굴림 2.0리터 가솔린 터보 엔진에 흡기 리스트릭터를 통해 출력 균형을 맞추고 있어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이 많다. 시즌 10라운드가 열리는 올 시즌 레이스에선 7월 15일 현재 혼다 시빅 타입 R이 가장 많은 포인트를 쌓아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