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 삶의 긍지
나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때 언뜻 떠오르는 것은 "청춘은 아름다워라"와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청소년 시절을 회상해 보노라면 마음이 아련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비슷하겠지만 나에게도 청소년 시절은 아름다움과 고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하였지만 나의 청소년 시절은 꿈과 낭만이 넘칠 정도로 충만했었다. 그 당시와 오늘을 비교할 때 나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맹목적으로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는 도시화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바라볼 때 미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의 위기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루소는 '에밀'에서 "인생의 초반 30년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지나가버리며, 나머지 30년은 무엇인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은 채로 흘러가 버린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한 실물의 경우, 씨와 싹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따라서 대체로 그 식물의 장래가 결정되는 것과 마차가지로, 인간에게 있어서도 청소년 시절이 얼마나 알찬가에 따라서 그의 일생이 좌우되기 마련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상 우리들 현대인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매일을 반복해가며 무의미하게 일상성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다. 특히 오늘날 청소년들마저 일상성에 물들어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 없다.
청소년 시절은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과도 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충문함에도 불고하고 청소년들이 그 힘을 사용할줄 모르거나 아니면 전혀 그럿된 방향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삶의 손실이란 말인가?
한 그루의 과일 나무가 훌륭한 과일을 맺기 위해서는 긴 세월과 아울러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적절한 양분과 물과 태양, 그리고 알맞은 기온이 필수적이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요소만이 갖추어져서는 안되고 모든 요소들이 고루고루 갖추어져야만 한다.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로 여러 요소가 적절히 갖추어져야만 뒷날 보람찬 삶이 기대될 것이다. 오늘날 획일적인 청소년의 삶을 바라보고 나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할 때, 긍정적인 생각보다 부정적인 생각이 훨씬 더 나를 지배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청소년 시절은 일반적으로 중.고등학교 시기에 해당된다. 나는 항구도시 인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부산에서 잠시 살다가 우연히 인천에 정착하게 되어 국만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1950년대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피난민 자녀가 많았고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곤궁한 처지였으므로 우리들에게는 가정보다는 학교 생활이 거의 전부였으며, 따라서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받는 영향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인천 중학교와 제물포 고등학교를 자랑스럽게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우선 철저한 수업이 우선이었다. 시험도 무척이나 자주 보았다. 그 당시 선생님들 중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도 계실 것이고 대부분은 은퇴하셨을 것이다. 한결같이 엄하고 철저하신 분들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과외라는 것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당시의 선생님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분들이 수업을 꼼꼼하고 알차게 했으며 수업에 게을리 임하는 학생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엄한 처벌을 내렸다는 점이다. 두번째로, 그분들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세상을 멀리 보고 넓게 살기를 진심으로 충고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도서관에 가서 늦도록 이광수, 김동인, 이인직 등과 아울러 헤르만 헤세, 지드 까뮈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 기억에 현재 남아 있는 문학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은 청소년기에 읽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푼 되지 않는 수업료이었지만 한 반에서 반 수 이상의 학생이 제때에 수업료를 내지 못하여 담임 선생님의 불호령과 회초리에 쫓겨서 수업료를 마련하러 시간중에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는 몹시 엄했고 교무실에서나 운동장 또는 온실에서는 따스한 부모의 정을 우리들에게 듬뿍 나누어 주었다.
우리들은 한 달에 한번 꼭 소풍을 갔다. 그것은 당시 교장 선생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는데, 처음 몇 번은 신바람났지만 소풍이 거듭될수록 지루하고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고 나니 인천 주변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알게 외었고 또한 계절에 대한 감각도 어느 사이에 얻을 수 있었다.
또 매월 한 차례 시험을 치르고 나면, 전교 학생이 모인 조회에서 교장 선생님이 직접 매 학년 12명씩 상금을 주었다. 일류 고등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경쟁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한 시도라고 생각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좀 지나친 것으로 여겨진다.
요사이 청쇼년들의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나의 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은 학교생활에 의하여 좌우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도 추억으로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클럽제도와 무감독 시험제도이다.
확실하게 기억되지는 않지만 중학교에서 고들학교를 진학 할 때 우리들은 따로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중학교 3년간의 성적을 평균하여 6백명 중에서 2백명을 선발하고, 나중에 다른 중학교 학생들은 따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는 미리 선발된 2백명에게 10명 이내로 클럽을 구성하면 클럽을 짜맞추어 고등학교의 반을 편성하여 주이었다.
당시 꿈과 낭만에 젖은 우리들 청소년은 저마다 멋진 클럽이름을 지어내느라고 고심하였다. '등대', '희망', '클로버', '야생마', '백호'... 어떤 클럽은 10명이 꽉 찼고 어떤 클럽은 2명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언 30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의 클럽회원은 변함없는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볼 ㄸ 그와 같은 클럽제도가 환상적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각 클럽은 저마다 특색이 있었다. 운동을 잘하는 클럽, 노래를 잘하는 클럽, 공부벌레들끼리만 모인 클럽... 내가 우두머리로 이끌던 클럽은 '등대'였고 회원은 모두 10명이었는데, 우리들은 등산이나 야영을 좋아했으며 운동과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두 사람은 이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서 제 몫들을 착실히 하고 있다.
물론 끼리끼리 모여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폭넓은 우정이 결여된다는 단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몇 명의 동료들 사이에서 진한 우정을 지속시키는 장점이 더 보람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어떤 시험을 보든 감독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무감독 시험제도가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부작용이 조금 있었다. 누가 보아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책을 버젓이 꺼내놓고 답을 베끼는 학생도 있었고 거리낌 없이 남의 답안을 그대로 보고 쓰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 행위를 담임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급 토론을 통해서 각자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도록 약속하고 학기말에 가서 유급자가 생기면 두 번 정도 재시험을 통해서 낙제생을 구제하면서부터는 무감독 시험제도가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무감독 시험제도란 거의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지금도 여전히 실시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기억에는 무감독 시험제도가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홀로서기'를 가능하게 했으며 한 개체로서의 긍지와 힘을 갖도록 해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의 동료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은 우선 철저한 수업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점진적으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공부와 취미, 그리고 놀이를 엄밀히 구분하기를 가르쳤고 우리들도 그렇게 하여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가치있고 보람있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이 언제나 희망과 보람에 찬 것만은 아이었다. 우선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 불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차남인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걸핏하면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잤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나는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은 꼭 집에 달려와서 먹고는 다시 학교로 달려갔다. 나만의 공부방도 없었고 식구들이 북적거리는 것이 싫었으며 부모님의 잡안 걱정이 귀찮아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쩌다가 공원 뒷산에 올라가 상급 학생과 한판 붙기도 했고 밤거리에서 술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 걸치고 거나하게 취해보기도 했으므로 사실 문제학생이 될 소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클럽의 왕초 노릇을 해야 했고 집에서는 공부잘하는 둘째였기에 내 위치를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더 나를 지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청소년 시절에 소위 그 흔한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예쁜 여학생을 보면 가슴이 쿵쾅거렸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마음에 점찍어 둔 여학생을 뒤따라 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너무 내성적이어서 였는지 한마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내이름도 겉봉에 쓰지 않고 몇 차례인가 짝사랑의 편지를 써본적도 있다. 친구 따라서 교회에도 몇 차례 나간 일이 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자연스럽게 남녀가 만나서 서로 위하며 사랑을 건넬 수 있는 만남의 장이 우리 사회에 건전하게 정착되었으면 하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다.
청소년 시절 나의 희망은 소설가 아니면 화가였다. 당시 친구들 중 현재 중견화가가 된 사람들도 있고 문단에 등단한 사람도 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글도 써보고 그림도 그렸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님을 따라서 자주 교회에 나갔다. 나야 물론 건성으로 다녔고, 찬송가나 성경봉독에는 경건한 마음을 느꼈지만 노인들의 꿈지럭거리는 행동과 노랫가락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평일에 시간 여유만 있으면 잠시 빈 교회당에 들르는 것은 그 당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친구네가 절에 다니기에 친구네를 따라서 관악산에 있는 절에도 가끔 가보았다. 절과 스님, 그리고 예불 모두가 낯선 것이었으나 후일 내가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적어도 나의 청소년 시절은 '고향'이 있었다고 자부한다. 좋은 친구, 훌륭한 선생님, 그리고 좌절을 극복할수 있었던 나의 삶에 대한 긍지 등이 바로 나의 청소년 시절의 '고향'이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한 채로 매일을 살아간다. 특히 청소년들은 오로지 출세를 위한 입시의 노예가 되어 있다. 지금이야말로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열린 삶을 위하여 스스로 깨 닫고 보다 바람직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청소년은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