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 하나, ‘반가워…’
깜찍한 화분들이 담긴 꽃바구니가 들어오더니 집 안 표정이 달라졌다. 꽃분 두 개는 베란다 마루의 장식장 위에 자리를 꿰차고 앉아 창으로 찾아든 햇살과 오종종한 꽃들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빨강 분홍 흰색의 시클라멘 화분들은 갈색 바구니 안에 터를 굳힌 체 나지막한 거실 장 위에서 꽃 노래가 다정하다. 오선지 위에 날렵하게 앉은 음표 같기도 하고 아기 입술을 닮기도 한 꽃잎들이 쫑긋거리면 사방에 꽃 등불이 하나씩 켜지는 것 같다. 아롱아롱한 꽃빛엔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도 좋은 만큼 나도 깜빡, 꽃이 될 수밖에.
음표 둘. ‘따스해…’
여태 따뜻한 빛을 피워내는 이 화분들은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서 받은 선물이다. 한꺼번에 모여든 여러 꽃다발들이 처음엔 저마다 색과 향기를 뽐냈지만,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마치 찬란한 청춘의 한때가 호숫가의 안개처럼 사라지듯이. 기특하게도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꽃분들이 품은 화초들만 지금껏 생글거리며 피고 있다. 특별한 정성이 담긴 꽃바구니였다. 전화 주문이 아니라 꽃집을 찾아 직접 바구니를 고르고 색색의 생화들이 심어진 작은 화분들을 담아 만든 것이다. 꽃잎 속에는 꽃을 안겨 준 사람의 향기도 들어있는 것일까. 올망졸망 핀 꽃들을 보고 있으면 지인의 자상한 마음 향이 느껴진다.
음표 셋. ‘신기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어도 앙증맞은 고것들과 여느 하루가 밝다. 덕분에 회색 빌딩 속 메마르고 긴 겨울도 화사하고 경쾌해졌다. 좀 더 오랫동안 꽃 빛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한 정성만큼 무게감도 있어 행사장까지 들고 오기에도 쉽지 않았을 테다. 그 마음을 아는지 화초들은 날마다 가녀린 꽃대를 세운 채 벌써 두 달째 번갈아 꽃을 피우고 있다. 볼수록 기특하고 신기하다. 가냘픈 꽃대에 달린 여린 꽃 빛 하나가 세상을 이토록 변화시키다니. 알고 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비 속이 틀림없다. 너무 약삭빠른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눈을 잃어버려 제대로 보지 못할 뿐이다.
음표 넷. ‘놀라워…’
세상과 사물을 애타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잊고 산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여자아이가 있었다. 세상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는 네 살 때 ‘월광 소나타’를 듣고 외워서 피아노 연주를 했고, 남들이 수년을 걸려 연습해야 하는 곡을 일주일 만에 마스터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지금은 음악 영재 교육을 받는 열한 살의 나이로 어느 날 TV에 출연한 유명 지휘자가 동시에 짚는 다섯 음계를 정확히 짚어내는 절대 음감은 시청자들을 감동의 물결로 몰아갔다. 소리로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는 약고 약해빠진 우리들에게 남과 똑같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보이지도 않는 건반 위에서 춤추는 열 손가락에 마음 줄이 흔들렸던 그 날, 모두가 두 눈 멀쩡한 스스로를 한 번쯤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우며 그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하지 않았으리.
음표 다섯. ‘눈물 나…’
대체로 예사롭게 여기던 사물이나 소리도 가슴 밑바닥까지 확, 닿는 순간이 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도 그랬다. 밤낮 딸의 눈과 손발이 되어 주며 살아 있는 동안 변함없이 사랑의 메신저인, 그런 어머니가 그 아이 곁에 버팀목으로 서 있는 걸 보면서 알았다. 무한한 사랑을 품은 어머니의 존재는 딸에게 어떤 음표보다 더 고운 파장을 일으켰으리라. 남다른 딸을 음악 영재로 키우고 있는 남다른 어머니는 아이가 피아노를 칠 때 얼마나 빛나고 행복해하는지, 아마 피아노로 자기 마음을 위로하는 것 같다며 딸을 소개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슬픔 대신 헌신적인 사랑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환희의 날을 만들어 가는, 눈물 나도록 고운 또 하나의 음표였다.
음표 여섯. ‘행복해….’
새로 피어난 시클라멘 분홍 꽃잎을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세상엔 기쁨을 주는 음표들이 참 많구나. 어찌 보면 멍에일 수 있는 것들도 받아들이기에 따라, 가꾸기에 따라, 의미도 다르고 열매도 달라진다. 혹시라도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을 일삼다가 삶의 표정마저 굳어져 버린다면 살아 있음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다. ‘런던 타임스’에서 공모했다는 가장 행복한 사람의 정의에 대한 결과를 보면 행복이 조금 뚜렷해진다. 1위는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난 어머니, 3위는 세밀한 공예품을 만든 뒤 휘파람을 부는 목공, 4위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고 방금 생명을 구한 의사라고 하였다. 소소한 것이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낸 순간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을 기억해 두리라. 시클라멘 꽃이 나를 보며 웃는다.
음표 일곱, ‘고마워…’
악보에서 음표는 그냥 기호가 아니다. 각각 다른 높낮이와 깊이로 리듬과 어우러져 팽팽한 선 위에서도 감동의 선율을 펼치는 동사요 감탄사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음표가 되고 있을까. 이슬처럼 투명하게 맑은 꽃들에게 묻고 싶다. 조용조용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고마운 꽃 음표들이 마음을 닦아 주듯 타이른다. ‘감사한 마음을 가져 봐. 상대방을 생각하는 진심 어린 배려가 필요해. 그런 것들이 팍팍한 세상 길 위의 꽃 음표인걸.’ 어느 명사의 말이 꽃향기까지 품고 있을까.
‘오늘’이 ‘선물(present)’이라고 한다. 돌아보고 둘러보고 자세히 보면 선물처럼 느껴지는 소중한 것들이다. 그 촉촉한 삶의 음표들을 하나씩 불러 본 오늘, 꽃과 나의 속삭임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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