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에 있었던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는 아르헨티나의 영건 리오넬 메시를 위한 무대였다. 결승전 두 골을 포함, 도합 6골로 득점왕과 MVP를 휩쓴 그에게는 국민적인 관심이 쏟아졌고 그는 순식간에 아르헨 축구의 미래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불과 4년 전에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욱 뜨거운 환대를 한 선수에게 보냈었다.
사비올라의 슬픈 운명
2001년 세계청소년대회에서 무려 11골을 터뜨리며 득점왕과 MVP를 석권한 사비올라는 '마라도나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었다. 기대 속에 스페인의 명문 FC바르셀로나에 진출하며 마라도나의 뒤를 이을 것으로 전망되었던 그의 운명은 그 후 지나치게 꼬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중앙 공격수가 아닌 윙포워드로 기용되거나 주전 공격수의 부상이 있을 경우 대체 선수로 기용되곤 했다. 외관상 매 시즌 30경기 이상 출전했지만 실상은 확고한 주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3시즌 동안 리가에서만 44골을 기록하며 팀 내 어느 공격수보다 꾸준한 득점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모나코로 임대된 뒤 올시즌 다시 세비야로 임대되면서 사실상 바르셀로나에서 전력 외로 분류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대표팀에서의 시련은 이보다 더욱 심했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에르난 크레스포가 일찌감치 낙점된 이후 나머지 한 자리를 차지해 화려한 데뷔를 기다리던 그는 전성기가 한참 지난 노장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밀려 낙마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바티나 크레스포같은 확실한 타겟맨을 가운데 두고 클라우디오 로페즈와 아리엘 오르테가라는 양 윙포워드로 공격진을 짜는 3-4-3 포메이션에서 달레산드로와 파블로 아이마르라는 두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3-5-2 전술로 바뀐 이후에도 나머지 한 자리는 그가 아닌 좌우 측면에 모두 능하고 중앙 지원에도 충실한 윙포워드 세자르 델가도에게 돌아갔다. 명예회복을 벼르며 출전한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스포트라이트는 그가 아닌 카를로스 테베즈의 몫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시련은 사비올라의 저조한 포지션 이해도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팀의 심장이었던 히바우두가 밀란으로 떠난 뒤 패트릭 클루이베르트를 보조하는 세컨드 어태커의 역할을 주문받았던 그는 경기 운영 능력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루이스 반할에게 낙제점을 받았다.
때문에 10년 넘게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전형적인 타겟맨으로 활약해 오던 클루이베르트가 사비올라의 뒤를 받치는 세컨드 어태커를 맡아야 하는 부조화를 겪었다. 게다가 오른쪽 윙포워드로 기용되면서 준수한 활약을 보이고도 자신의 스피드와 개인기를 득점 외의 역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여 언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사비올라가 단순히 바르셀로나라는 팀의 포메이션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따름이지 그 자신의 능력에 의문부호를 달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비올라가 이렇게까지 곤경에 처하는 까닭은 그를 덮고 있는 그림자의 크기가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이다.
마라도나라는 넘을 수 없는 산
86년 월드컵 챔피언과 90년 월드컵 준우승을 조국에 선사한 디에고 마라도나는 94년 조별 예선서 팀을 2승으로 이끌던 와중 약물검사에 적발되어 월드컵 커리어를 끝내야했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아르헨티나는 34살의 노장인 그 한 명의 공백으로 전혀 다른 팀이 되어 16강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대 최고의 개인기와 경기 운영 능력, 환상적인 왼발 킥 등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자질에 삼류팀이나 다름없던 나폴리를 세리에A 우승으로 이끌던 포워드의 능력까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선수가 마라도나다. 그의 라이벌로 여겨졌던 미셀 플라티니에게조차 "나와 마르코 반 바스텐을 합쳐도 그를 능가하긴 힘들 것"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양 포지션을 넘나들던 그는 말 그대로 아르헨티나의 자존심이었다.
마라도나의 은퇴 이후 라이벌 브라질이 3개 대회 연속 결승에 올라 두 번이나 FIFA컵을 드는 동안 아르헨티나는 8강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청소년시기에 뛰어난 자질만 보이면 포스트 마라도나라 포장하며 브라질에 대한 그들의 열등감을 풀어주길 바랬다.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이며 이 칭호를 들었던 오르테가부터 동시대 주목을 받았으나 오르테가와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그늘에 가려져야 했던 마르셀로 가야르도. 4년 뒤 2002 월드컵에서 천재의 등장을 예고했던 파블로 아이마르나 20대 초반에 보카주니어스의 레전드가 되버린 후안 로만 리퀠메, 그리고 테베즈와 사비올라까지 포스트 마라도나로 거론되었던 선수들이다.
이들은 물론 탁월한 개인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었지만 국민들이 그들에게 바라던 모습은 너무나도 높은 마라도나라는 산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모습을 보여도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잠깐의 활약으로도 레전드 칭호를 받고 나폴리에선 신이 되어버린 마라도나와 달리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럽 무대 적응에 힘겨움을 겪어야 했다. 오르테가야 말할 것도 없이 망가진 케이스이고 가야르도도 르 샹피오나에선 제 몫을 했으나 빅리그 입성에는 제동이 걸렸다. 노란잠수함을 타고 부상한 리퀠메도 바르셀로나에선 사비올라보다도 더욱 찬밥 취급을 받아야 했다.
테베즈 그리고 메시
2년 연속 남미 최우수 선수상을 받고 올림픽에서 득점왕과 MVP를 거머쥔 테베즈는 예상과 달리 거액의 이적료로 브라질 리그의 코린티안스로 적을 옮겼다.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그가 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럽행을 서두르지 않은 것이라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유럽리그보다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브라질 리그에서 뛰는 까닭인지 아드리아노나 호빙요, 히카르두 카카같은 비슷한 연령대의 브라질 선수들이 주가를 높이는 것과 반대로 테베즈에 대한 확실한 평가는 아직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 오히려 열광적인 지지를 받던 지난해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올림픽과 코파아메리카컵에서 그는 좌우측면과 중앙, 미드필더와 공격을 가리지 않고 팀의 요구에 따라 공격의 어느 포지션도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에 플레이메이커로서 경기 운영 능력과 포워드로서의 득점력을 두루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상대 수비 2~3명의 방어를 받는 위태로워 보이는 상황에서도 노련하게 볼을 키핑하면서 주변으로 이동하는 동료에게 킬패스를 찔러주거나 2대1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방으로 뛰어들어가는 노련한 플레이는 약관의 나이로는 믿기지 않는 것이었으며 언론으로부터 포스트 마라도나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의 참혹한 패배로 아드리아노와 비교되며 국민의 질타를 받는 장면은 그가 사비올라와 다름없는 마라도나의 그림자에 가려진 선수가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는다.
이제 겨우 18살의 신성 메시에게 주어지는 포스트 마라도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마이클 조던의 은퇴 이후 해롤드 마이너부터 르브론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툭하면 조던의 그림자를 덧씌워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퍼부었던 NBA의 언론들과 다를바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 국적 문제가 해결되어 지난 8라운드 오사수나전에서 오랜만에 지울리 대신 선발 출장한 메시의 플레이는 이미 월드 클래스였다. 전반 내내 무기력했던 바르셀로나의 공격진에서 메시는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170의 단신임에도 정확한 위치 선정으로 헤딩슛을 해냈고 가공할 공간침투능력과 수비수 두 세명을 우습게 제쳐버리는 스피드와 드리블 능력을 보여주었다. 공격 포인트는 사무엘 에투와 호나우딩요의 발끝에서 만들어졌지만 메시는 놀라울 정도의 운동량으로 그라운드를 누볐고 선취골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며 3대0 승리를 이끌었다. 해설자의 입에선 연신 마라도나라는 이름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가 부진했을때도 그와 같은 찬사나 격려가 따를 수 있을까?
사비올라는 불과 20살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리그인 프리메라리가에 데뷔하여 세 시즌 연속 두자릿수의 득점을 올린 걸출한 선수다. 테베즈도 아직 유럽 무대 경험이 일천하지만 현재 보여주고 있는 능력만으로도 조만간에 빅리그 이적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메시는 두말 할 필요없이 누 캄프의 레전드로 일찌감치 점찍어진 선수다. 이들은 앞으로의 성장속도에 따라 마라도나 못지않은 대선수로 거듭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어린 선수들이다. 이들을 그 자체로 평가하고 이야기해야지 역사상 최고 선수의 굴레 안에서 이들의 기량을 잣대질하는 것은 결코 득 될 것이 없는 행동이라 여겨진다. 내년의 월드컵에 어쩌면 이들 세 명이 동시 출격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크레스포가 투톱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볼 때 남은 한 자리를 놓고 세 명의 경합이 예상된다.
물론 테베즈나 메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활용이 가능하지만 리퀠메, 아이마르, 달레산드로가 버티고 있는 관계로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다. 바티와 베론이 없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우승후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월드컵에 처녀 출전하는 이 영건 3인방의 활약 여부가 우승을 가늠하는 키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 잠시 포스트 마라도나의 환영은 접어두고 이들의 앞으로의 행보를 그들의 플레이 자체로만 흥미있게 지켜봐야 할 시점이다.
이들이 조국의 품에 정확히 20년만의 우승컵을 안겨준다면 그 때 다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스타들에게 하나의 지향점이어야지 종착점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