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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진실의 추구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날의 삶 속에서 진실이란 개인이 보고 느끼는 인식의 수준에서 주관적으로
결정되곤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낮은 의식 수준에서는 비논리적이고 근거 없는 사실들이라도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론적인 증명이나 실제적 표현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정신이 나간 소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이지 못하고 편견을 갖는 목격자의 진술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계적으로도, 동유럽이나 중동에서 매년 일어나는 전쟁을 정의로운 복수라는 광신에 그 근본의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광적인 믿음은 끝없는 분쟁을 초래한다.
'평화의 사도'를 겉으로 외치는 종교들조차도 정의의 깃발 아래 전쟁이나 살생을 금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들에게 살생은 '정당화'되어 있다. 물론 희생자에게는 살생이 정당화될 수 없다.
신앙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그러한 자가당착적인 행동도, 영적 가르침들의 진화와 퇴화를 가늠하는 임계점
분석을 적용해 본다면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니다. 그러면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파된 가르침의 수준은 가장 높은 차원인 1,000이었다.
그러나 2세기경,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실행 수준은 930으로 떨어졌고, 6세기경에는 540으로 하락했다.
11세기 초 십자군 시대에 와서 그 수준은 현재의 498로 되었다. A.D. 325년에 있었던 의식 수준의 급하강은,
본래의 가르침에 대한 니케아 공의회의 왜곡된 해석의 전파에 의한 것 같다.
종교사를 볼 때 바울,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시대와 이전 시대에서 기독교가 보여주는 진실의
수준은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람어로 된 신약의 람사(Lamsa) 번역판은 750에서 측정되지만, 그리스어로 번역된 킹 제임스 판은 500에
머무른다. 여러 번역판에 따라 그 진실의 수준이 크게 다르듯이, 신앙 형태에 따라 진실의 수준도 다양하다.
가톨릭, 성공회, 크리스천 사이언스(그리고 퀘이커교 같은 작은 교파들) 등은 500대 중에서도 높은 수준에서
측정된다. 현대판 <기적의 코스(Course in Miracles)> 같은 특수한 주석서나 14세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신비주의자의 저술은 600에서 측정된다. 이슬람교처럼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정치적 안건을 갖는 과격파
원칙주의자들은 125 정도의 낮은 수치에서 측정된다.
불교
부처의 원래 가르침 역시 1,000에서 측정된다. 6세기경, 가르침의 실행 수준은 900으로 하락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 비해 훨씬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소승불교는 850, 대승불교는 950, 선불교는 600대에 측정된다.
힌두교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1,000으로 측정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수준이 떨어져 현대의 힌두교는 850에서
측정되고 있다.
유태교
아브라함의 가르침은 985에서 측정되었고, 모세 시대에 그 진실의 수준은 770이었으며,
이것은 탈무드의 수준이기도 하다. 현대의 유태교는 499에서 측정된다. 구약 성경은 475에서 측정된다.
이슬람교
이슬람교의 의식 수준은 540이었다. 코란은 570에서 측정된다. 이슬람교의 핵심은 사랑의 포용과 내적인 평화의
표현이었으나 실제로 그들의 독선적인 행위는 종교 전쟁이나 성전(聖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영토 확장의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십자군 말기에 가르침의 진실성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광적으로 국수주의를 고집하는 종교
운동의 출현은 피해 망상과 배타주의와 함께 종교의 영적인 본질을 크게 손상시켰다. 오늘날 호전적인 이슬람
원칙주의자들이 믿는 가르침의 수준은 130에 그치고 만다.
세계 주요 종교들의 진실 수준이 하락하는 것을 관찰해 보면 음양의 개념에서 '음'에 머무르는 종교는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남는 반면, 세상사에 깊이 관여하는 '양'의 종교는 현저한 수준 저하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양'의 종교에서 무력 사용을 마다 않는 열성분자들은 중요한 분기점인 200 이하로 측정된다.
종교의 신조가 이원론적일수록 교리의 해석에 오해가 생길 우려가 많다.
이원론은 믿음과 행동에 분리를 가져오며 진실의 수준을 하락시킨다.
또한 영적 본질이 육체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혼동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수호병'이 된 군인은 문자 그대로 기독교를 위해 전장에서 살인을 합리화시키게 된다.
힌두교는 교리의 해석에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의 서문에는 전쟁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슈나가 힌두교인들에게 전쟁 참여를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부처의 가르침 또한 왜곡되어서는 안 되고 그럴 여지도 거의 없다.(모든 아픔과 고통의 원인은 무지에서 생기고,
'죄'가 있다면 이 무지가 바로 죄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품어야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높은 영적 가르침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오해에 의해 극심한 손상을 받아 왔다. 이미 정해진 그 사람의 의식
수준이 그 사람의 이해 정도와 관점을 결정해 주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거나 높은 의식 수준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모든 영적 가르침은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왜곡과 오해가 항상 존재할 수 있다.
성전(聖典)은 어떤 경우든지 그에 맞게 인용될 수 있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왜곡된 편견과 도덕을 위해서는
난폭함도 괜찮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위험을 내포한다.
어느 종교에서나 원칙을 고수하는 과격파들은 항상 낮은 수치를 보이며, 그들은 많은 경우 범죄자의 의식 수준
에서 행동하게 된다. 그들의 특징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인구의 85%가 200 이하인 경우, 이러한 오류는 널리 퍼지게 되고 세상 어느 곳에서나 쉽게 받아들여
지게 된다.
사이비 종교가 성행하는 이유는 진실과 허위를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운동역학 시험에서 200 이하로 측정된다면 그것은 심령 운동이나 사이비 종교로 볼 수 있다. 사이비 종교는
희귀하거나 변절자들에 의한 현상만은 아니고, 위대한 종교 속의 분파로 성장하며 가르침을 왜곡하고 목적을
파괴하기도 한다.
사이비 종교는 형식적으로는 전혀 종교성을 띠지 않는다. 궁극적인 사이비 종교는 악마주의적인 반종교에 불과
하다. 이들은 종교적인 내용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 원칙에 반대와 질타로 이루어져 있다.
사이비 종교는 우리와 항상 같이 있어 왔다. 상은 하를, 빛은 어두움을 내포하듯이, 우리들의 체계적인 진실 탐구,
또는 높은 영적 수준의 도달을 위한 노력은 항상 그 반대인 허위의 전파와 낮은 에너지 장의 진입을 내포한다.
반종교 그룹의 본질은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갖는 강력한 파괴력이다.
악마주의는 젊은이들의 유행 중 하나로서, 주 매개체는 널리 행해지는 특정한 음악 형식이다. 악마주의의 원칙
들은 그들대로 존재하며, 끌개 장을 형성한다.
이 영향은 도시 근처에서 개업하는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에너지 장의 파괴력은 병의 원인이
된다.
피해자들은 선악의 구별에 무감각해지며 가치관의 혼동이 임상적으로 관찰된다. 이들 피해자들은 반복되는 부정
적인 음악에 대한 반응으로 기(氣)의 흐름이 '파괴'되며, 대뇌의 불협화음 현상이 나타난다.
그 결과, 음악을 듣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과 불온한 가사에 민감해지는 최면 현상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어린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파괴 행동들을 쉽게 저지르고 그것의 노예가 되나,
실제로 이들은 제 정신이 아닌 최면 상태 속의 암시에 의해 이런 행동을 저지르며 자신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지도 못한다.'
음악이 끝난 후에도 오래 지속되는 육체와 면역 계통의 허약함은 운동역학 시험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준다.
정상인들을 약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자극은 이들에게 강한 반응을 초래하며,
반대로 정상인을 강화시키는 자극은 이들을 약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이 바로 강력한 부정적 에너지 장의
희생자라는 것을 모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억지 힘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러한 육체적, 감정적, 성적 혹사를 당하는 젊은이들은 뇌의 신경회로에 영구적인 피해를 받으며,
나중에는 우울증에 빠져 살게 된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파트너를 찾고 최면에서 오는 자살의
유혹과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암흑시대인 중세를 연상케 하는 영적 재앙이 오늘의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사악한 영향들은 도덕의 공백 지대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재앙을 길러 주는 조건을
갖추지 않은 사회구조라고 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청교도적인 우리 사회의 모순은, 유혹은 오히려 부추기면서도 실제적인 만족은 부정하는 데에 있다.
정상적인 분출구에 대한 계속되는 좌절은 결국 사악한 방향에서 분출구를 찾게 한다. 우리가 문화라고 생각
하는 어떤 요소들은 사실에 있어 연속적인 좌절을 배양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폭력을 앙양하는 TV나 컴퓨터 게임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반면, 부모는 성인 프로그램에 의해 세뇌된다.
운동역학 시험은 전형적인 TV 연속극이 한 타임에 피험자를 113번이나 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험자의 약한 반응 하나하나는 그들의 면역 조직을 약화시켰으며, 중추 혹은 교감 신경에 해로운 반응을 초래
했다. 기의 흐름(혈점들)도 113번 동안 계속해서 저하되었도, 흉선의 저하를 초래했으며, 하나하나의 악영향은
뇌의 예민한 신경 호르몬과 신경 전파 조직을 저해했다.
하나하나의 부정적인 영향은 이들을 결과적으로 병적으로 만들고, 우울증으로 몰고 갔다. 우울증은 이제 세상
에서 가장 흔한 병이 되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우울증은 사실 모든 병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영적인 데에 기인되는 우울증은 고칠 수 있는 약이 없다.
이것은 뇌의 부작용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모독에 대한 정확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육체란 영혼이 표현하는 물질에 지나지 않고, 신체의 병변은 그 신체에 생을 부여하는 영적 투쟁의 표현이다.
'바깥 저곳'의 믿음은 '여기 이 안'에 영향을 준다. 모두가 결국 우리 손에 의해 죽는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적인
개념이 아닌 절대적인 임상적 사실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을 강요하려는 시도는 사실 가장 큰 도덕적 함정이다.
도덕의 고정관념 없이도 200 이상의 수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생을 보양하며 좋은 것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200 이하로 측정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파괴적이므로, 생을 돕지 않는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험에 의해서 '목적을 위한 방법은 타당하다'는 것이 악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개념은 작은 상행위의 속임수에서부터 전쟁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간 행동에 버젓이
당연한 것으로 용납되어 왔다. 이러한 영적인 불확실성은 결국 선악의 혼동을 초래했고, 인간 사회에서 아킬
레스의 발목이 되어 왔다.
확실한 통찰력 없는 진실의 왜곡은 위에서 만한 세계 종교들의 하락을 초래했다. 500 이하의 수준에서 측정되는
종교는 사랑에 대해 설교할 수는 있지만 실행은 불가능해진다. 전쟁을 종용하는 종교는 절대로 영적인 권위를
보유할 수 없고, 이로 인한 노골적인 위선의 자세는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신론자로 만들게 했다.
끌개와 모방자에 대한 구분 능력이나 다양한 의식 수준에 대한 인식 능력이 둔화될 때,
사회는 집단적으로 피해 받기 쉬운 상태가 된다. 공권력의 남용이 법이 되고, 과격한 정치인들은 독선적인 슬로건
으로 민중을 우롱하게 된다.
폭력을 행하는 어린이들은 결국 범죄자로 전락하고, 자기의 의식 세계를 보호할 수 있는 통찰력을 잃은 혼돈의
사회는 그 사회의 어린이들을 보호할 수 없게 된다.
개인의 의식 수준은 그가 준수하는 원칙들에 의해 결정된다. 의식의 발전을 위해서는 원칙의 예외가 없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개인은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편의주의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다면 그 원칙에 예외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예외가 정당화되고 감정적으로 옳은 것
같더라도, 이로 인해 사형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살인은 항상 문제로 남아있게 된다.
사형과 살인은 같은 인식 수준에서 온다. 살인자 또한 살인을 그들 나름대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원칙이 일단 깨지면 변이된 원칙은 암처럼 퍼져 나간다. 전쟁이든 경찰이든 형법상이든, 죽음을 허용하는
사회는 동시에 범죄자들이 행하는 살인도 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살인은 살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일 뿐이다. 사형의 찬반은 권력 장악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문제마저
인구의 85%는 무관심하며 또 모든 정부도 외면하고 있다.
‘척추동물 연구소’의 원숭이인 코코(Koko)는 심리학자와 수년간 일한 결과 손짓말의 단어를 풍부하게 알게
되었고, 진실하고 예쁘며 똑똑하고 신뢰감을 지니게 되었다. 코코의 정직성은 250에서 측정된다.
이것은 우리들이 85%의 세상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코코와 있을 때 더 안전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의 ‘영적인 눈’에 대한 상처는 도덕적 시야에 어두움을 가져왔고 진실에 대해 눈멀게 했다. 이것은 정직
이하의 수준에 머무르는 85%의 인구에게 나타난다. 전 인류가 갖는 커다란 문제는 어떻게 영적인 눈멀음을
치유하느냐에 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데 너무 치우치면 우리는 초점을 잃게 되고, 이것은 낮은 의식 수준에
기초를 둔 관점에 불과하다.
어린이들에게 위험한 행동은 ‘그르다’고 가르쳐야 하지만 자라남에 따라 분별력이 도덕주의보다 더 중요
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낮은 의식 수준의 사람들은 살인이 도덕적일 수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높은 의식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얘기가 한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원론적인 도덕성은 의식 수준이 500인 경우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고,
600의 수준에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개인이 주로 이성으로 행동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400 이상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데카르트 등은 499에서 측정되는데, 이 수준은 휴머니즘의 수준이다. 하지만 자아도취에 빠져 큰
안목을 갖지 못하는 이성은 인간에게 결코 확고한 도덕이나 지적인 확신을 주지 못해 왔다. 이성은 인간을
무지의 와중에서, 또 다른 불투명한 미로로 인도할 뿐이다.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진실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필요하다.
바라건대 우리의 연구가 바로 그러한 척도가 될 수 있음을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진실이 인간의 집단
의식에 영향을 끼치면 끼칠수록 우리들의 장래는 더욱 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미세한 에너지의 변화도 분별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상술했다.
이것은 우주에서 의식이 감지할 수 없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인간이 사고하는 에너지는 물론
미세하지만 절대적으로 측정된다. 100 정도의 수준에서 나오는 생각은 대수 108억~107억 마이크로와트로
측정된다. 반면에 의식수준 500에서 나오는 사람은 대수 103,500만 마이크로와트로 측정된다.
지구상 인구의 15%가 분기점인 200 이상의 의식 수준에 속하지만, 15%의 집단적인 힘은 전 인구 85%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상쇄시킨다.
잠재력의 수치가 대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의식 수준 1,000의 아바타르(Avatar, 몸을 입은 영적 스승)는 전
인구의 부정적 에너지를 상쇄할 수 있다. 운동역학 시험 결과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7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7,000만 명을 상쇄한다.
6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1,000만 명을 상쇄한다.
5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75만 명을 상쇄한다.
4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40만 명을 상쇄한다.
300의 한 개인은 200 이하의 인간 9만 명을 상쇄한다.
700의 12명은 한 분의 아바타르와 같다.
(현재 지구에는 70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12명 존재한다.)
이러한 상쇄작용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부정적 에너지의 혼란으로부터 이미 자멸했을 것이다.
사랑(10350만 마이크로와트)과 두려움(107억 5,000만 마이크로와트)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다.
이로써 우리는, 하루에 몇 번씩 일어나는 사랑스러운 생각은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상쇄하고도 남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인 행동의 관점에서 볼 때, 진리란 우리의 믿음이 어떻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원칙들이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갖는 주관적 진실, 현실적 진실, 감정적인 진실, 지적인 진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실제 자료들
또한 존재한다. 이들의 진실성은 주어진 관점의 수준에 의해 좌우된다.
진실이란 깊은 의미를 갖지 않는 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의미란 가치관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특정한
에너지 장에 의존하게 된다. 사실과 자료들이 한 수준에서는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다른 수준에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주어진 정보의 활용도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소화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진실이 펼쳐지기 위하여 진실은 ‘진실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 수준에서의 진실은 그 아래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 되며, 특정 수준 이외의 영역
에서는 아무런 신빙선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보통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 각 수준에서 진실이라고 보이는 것은
사실은 ‘의존되는 진실’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주어진 관점에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과학적인 진실’은 조건들의 정의에 의한 진실이고, 이로써 이 진실들은 논란과 오류에 접하게
된다. 통계학적인 결론은 하나의 선전 도구가 되었고,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는 통계학적인 왜곡의 가능성은
신뢰를 잃게 했다.
개인의 조건이나 관점에 무관한 진실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책에서 설명된 연구 방법에 의한 진실은 궁극적인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의 성품이나
의견을 따르지 않음은 물론이고 피험자의 상태나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무지는 공격에 의해 무너지지 않지만, 진실의 표현 앞에서는 빛에 의해 분산되듯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향상시키는 유익한 방법은 개인의 정직성, 이해, 그리고 긍휼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길밖에 없다. 다양한 인간들이 이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인간 사회의 생존과 행복은 보장된다.
각자가 그의 생활에서 진실을 추구하게 되면,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또 더 높은 의식 수준의 발판이 되어
주는 분기점의 의식 수준 200으로 도약하게 된다.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는 결국 포용의 수준을 초래하며,
이는 벌써 350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이미 여기에는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존재하게 된다. 이 단계는 결국 사랑의
수준인 500의 힘으로 전환된다. 우리 자신과 남들의 결점들을 알 때 용서가 나타나며 자비심이 따라오게 된다.
자비야말로 은총으로 향하는 관문, 또 우리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는가 라는 질문의 관문이 되며,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원천이 된다.
제6장 앞으로 나아갈 길
이 책을 철저하게 소화한다면 독자들은 35점 정도의 의식 수준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일생 동안
겨우 5점의 발전을 한다고 생각하면 35점의 향상은 굉장한 것이다. 첨단 이론물리학과 비선형 동역학이 보여
주듯이, 개인의 작은 향상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의식 수준의 향상은 개인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더구나 이 선물은 파도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그 출처로 돌아오게 된다. 전 인류의 의식 수준은 몇 세기 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1980년대 중반에 갑자기 204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이제 위로 전진할 수 있는 안전한 발판 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준다.
지금껏 우리가 다룬 여러 문제들이 뉴스에서 뻔질나게 다루어지고 있다.
종교의 타락, 범죄의 가중, 어린이들의 폭력, 정치의 비도덕성, 사이비 종교의 이해하기 어려운 난폭함 등이,
거짓이 난무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갖지 못한 우리 사회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혼동과 마비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도덕의 부족에서 온다.
필자는 '도덕'을 논한 이 책이 이와 같은 공백을 메우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도덕'이라는 어휘에서 옳고
그름을 가르는 도덕적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가장 고귀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결정과
사고의 기초가 되는 객관적이고 개인적인 토대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는 200 이하의 정치 조직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이제까지 언급한 새로운 검사 방법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직자들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이제는 가능해졌다. 각 공공기관은 효과적인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 수준이 요구된다. 대체로 200 이하의 공직자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야기
시킨다고 보아야 한다.
더 큰 사회 문제는, 이처럼 어두운 인간 행동의 와중에서 어떻게 자비심을 발휘하느냐에 있다.
이 세상은 상대적이라서 개인은 그의 진실의 수준에서 행동하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다.
바로 이 '옳음'은 과격분자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사회의 진정한 위험은 백인우월주의(150의 수준)
같은 편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주의에서 오는 손상은 최소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위험은 내면을 비밀스럽게 정복하는,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이다.
부정적인 끌개 장들은 대중 의식에 편승하여 다채로운 수식어와 상징 조작으로 겉만 요란하게 꾸미게 마련이다.
의식을 파괴하는 것은 부정적인 메시지의 주입보다는 그것을 따르는 에너지 장에 의한 것이다.
인기 있는 사이비 철학의 부정적인 요소는 이 책들을 시험해 봄으로써 간단히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정
적인 요소들에 대한 예방의 마음가짐도, 그 책들을 읽을 때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에 의한 영향으로
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책들을 지성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책에 노출되는 그 자체가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부정적인 영향권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마음 속으로 살며시 침투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통찰력과 종교성을 내세우는 문헌들을 대할 때에는 흔히 마음을 놓기 쉽다.
하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가증스러운 범죄는 신이 이름 아래 행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이비 종교들은 뚜렷하게 보여 배척할 수 있지만,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의 체계는 정말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보이지 않는 끌개 장이 파괴를 부르는 쪽으로 은밀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무서워하거나 싸우려 하지말고 단지 피하라'는 오래 된 지혜의 말씀을 듣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 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악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의
우리말로 고쳐 말하자면 젊은이들(성인들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젊은이를 포함하여)이 이러한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되면 낮은 끌개 에너지 장에 의해 부패된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분별의 가르침으로 독살 당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두움은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고 분별의 빛을 비춤으로써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도덕적 분별력의 유지와 배양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의 연구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은 현재 선악의 분별 능력을 결핍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깨달음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이미 발전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속기
쉽고 감각에 의해 쉽게 유혹되며 육체적, 지적인 매혹의 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분별력을 향한 첫 단계를 밟는다고 할 수 있다. 이원적인 세상에서 파괴적인 것을 즉시 알아
내어 아직 모르는 마음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식을 우리는 갖고 있으며, 이 신호는 해로운 자극이 존재할 때
육체의 약함으로 나타난다.
지혜란 궁극적으로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운동역학을 사용함으로써 진실과 허위에 대한 영혼의 어두움은 점차 밝아질 수 있다.
직관력을 타고난 극소수만이 부정적인 에너지에 의해 해를 입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최면술 같이 작용하는 파괴적 끌개 장에서 오는 손상을 보수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한 가지 중독에서 회복하는 일에만 한 사람의 일생이 소모될 수 있다.
가장 흔하고 만연된 중독은 부정이며, 이것은 이지적인 허영에 의해 우리를 어둠으로 덮는다.
지성이란, 허위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결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허위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분별력
을 견지할 만한 힘이 부족하다. 역사를 통해 나타난, 지성적인 숙고의 결과 이루어진 수많은 저술들을 보라.
인간에게는 결정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심한 것일까?
철학의 전 분야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지를 알기 위해 수천 년 동안 고심해 왔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는
증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오래 전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야 하지 않은가? 평범한 인간 행위
에서는 지성으로 진실과 허위를 알 수 있다고 해도, 지성은 아무래도 부정적 에너지 장의 영향을 저지시킬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우리의 지성은 될수록 모든 원인들을 상상해 내려고 하지만 인간 고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개인이 지성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자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지식 자체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독에 대한 지적인 인식만으로는 중독을 고칠 수 있는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에는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들에 의해 고통받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사물에서 보이지 않고 조용한 에너지의 빛이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듐의 발견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뢴트겐의 엑스레이는 치명적이고 방사선의 방출은 라돈과 마찬가지로 조용한 죽음을 가져온다.
우리를 파괴하는 끌개 에너지 장 역시 보이지 않고 은밀하지만 그 힘은 절대로 약하지 않다.
누가 '홀렸다'고 할 때의 뜻은, 부정적인 끌개 장의 지배에서 그 사람이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면에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 홀려 있어서, 자신들의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당이나 지옥을 택하며, 결국 자신의 선택의 노예가 된다. 지옥이란 신의 판결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지옥이란 부정적인 에너지의 계속적인 선택과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최종 결과이다.
깨달은 이들은 중생이 하나의 꿈속에 갇혀 있다고 묘사해 왔다. 대다수는 보이지 않는 억지의 힘에 의해 밀려,
이 때문에 많은 시간을 절망 속에서 헤맨다.
우리는 죄를 사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 고백으로 안심을 구한다.
후회는 인생사에 너무 잘 배여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파괴적인 영향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갇힌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과연 가능한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구원이란 가능한 일이다. 구원이란 사랑의 생각이 부정의 생각보다 훨씬 힘이 크다는
간단한 사실에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기도에 의한 문제 해결은 확실히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인간은 자신 속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성이란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고통이다. 우리 스스로 태어날 것을 요구했는지 우리는 기억할 수 없으며,
제한된 마음을 물려받은 결과 어느 것이 생을 돕고 어느 것이 죽음을 초래하는지 구분할 능력이 없다.
인생의 고뇌는 근시안적인 생각을 어떻게 초월하느냐에 있다. 이원성을 초월하고 더 이상 지상에 묶이지 않는
지점으로 진보하지 않는 한, 우리는 존재의 더 높은 차원으로 진입할 수 없다.
우리를 무지의 어둠에서부터 헤어 나오게 하는, 본래부터 주어진 나침반을 발견하게 하는 능력은,
초월을 향한 집단적인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금껏 막대한 대가를 치러 왔던 교활한 지성의 덫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슨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면 족하다. 이 나침반은 단지 예, 아니오를 말할 뿐이다. 이것은 천당의 궤도 위에 선 것에는
강하게, 지옥의 궤도 위에 선 것에는 약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항상 접하는 인간의 에고는 실제적으로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그것'일 뿐이다. 이러한 환상을 꿰뚫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끝없는 '우주적 농담
(Cosmic Joke)'이며, 인간의 비극은 그 코미디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분리된, 개별적인 '나'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가 얼마만큼이나 맹렬히 투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본질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는
그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애쓴다.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의 뒷머리를
보려고 하는 것 같은 희극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허영심은 끝이 없어서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그렇게도 애쓰고 있는 것이다.
에고와 동일시되는 마음은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진실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마음이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마음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착각임을 인식하는 순간 용해되어 버릴 것이다.
에고를 초월한 마음의 패러독스를 넘어서야만이 '존재'는 마음의 무한한 절대성 속에서 스스로를 빛나는 자리에
세울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말은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의 눈멀음에 대한 자비심이 우러나와야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평화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나아갈 길은 명백하다. 인간의 의식 수준이 마침내 200 이상이 된 오늘날, 우리는 인간 문화의
전 분야에서 획기적인 대전환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의 앎과 행동에 훨씬 진지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좋든 싫든,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제 집단적인 깨달음의 진화를 꾀할 수 있는 지점에 와 있다. 무지로 인한
대가를 이제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치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집단 의식은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오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암흑의 노예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저 높은 곳에 신의 영광이 있을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