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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공간과 모더니즘적 공간의 변천
1. 서론
본 발표문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는 고도과학기술에 관련하여 모더니즘적인 공간이 크게 일변
하고 있음을 주목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각종 원동기 기관들을 통해 물질을 강력하게 제어함으로써 형성되는 압축적인 물질
공간이 주된 공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인터넷 등 감각적인 이미지를 강력하게 제어함으로써 전자
공간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RFID 기술을 비롯한 유비쿼터스 기술 및 사이보그 기술은 물질 공간과 전자 공간을 결합한
제3의 공간 이른바 전자물질 공간을 주된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압하고 있다.
그런데 물질 공간에서 전자 공간으로, 그리고 전자 공간에서 전자물질 공간으로 급격하게 변천해 가는
전체 지형을 원리적으로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몸 공간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몸 공간은 물질적이면서 전자적이고 따라서 전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본 발표문은 모더니즘 공간들의 변천 과정을, 몸 공간의 본질을 기술적으로 그리고 문화 예술적으로 점점
더 강력하게 외재화하여 구현하는 과정으로 보는 입장을 바탕으로 한다.
본 발표문은 그런 몸 철학적인 입장의 타당성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색다른 모더니즘 담론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예비모더니즘의 모더니즘 공간에의 기여
예비모더니즘(premoderism)의 공간은 르네상스에서 출발한다.
원근법, 인쇄술, 크리스털 거울이라고 하는 르네상스의 세 가지 발명은 17세기 이후 형성되기 시작하는
모더니즘(modernism) 공간의 형성에 바탕을 제공한다.
원근법은 화가의 시선을 중심으로 수렴/확산되는 전일적인 공간을 형성했다.
크리스털 거울은 뒤러와 다빈치에서 자화상을 낳게 했고 바로크로 이어지면서 루벤스, 벨라스케즈,
렘브란트로 대표되는 자화상의 시대를 만개하게 했다.
원근법과 자화상은 데카르트의 반성 위주의 자아 중심주의적인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비물질
적인 기하학적인 공간을 참된 공간으로 여기는 것과 결합된다.
이 같은 데카르트의 자아 중심적 기하학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공간의 내재화는 칸트가 공간을 감성의
형식으로 규정하는 데서 극점에 이르게 된다.
인쇄술은 구술문화의 시대를 마감하고 문자문화의 시대를 연다.
책을 통한 문자의 선형적인 배열 방식은 대중들의 의식/무의식 속에 인과관계뿐만 아니라 목적론적인
진보 개념을 각인시켰다.
이에 따라 기계적인 기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공간을 일정한 목적에 따라 배치함으
로써 시간성을 띠게 만드는 역사적인 공간이 탄생하게 된다.
3. 모더니즘 공간의 특징
이렇듯 예비모더니즘의 세 가지 기술의 발명은 모더니즘 시대로1) 이어지면서 자아 중심적으로 철저히
내재화된, 그러면서 세계의 현실 공간을 구성적으로 지배함으로써 인과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포괄하는
공간을 형성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대의 공간을 제대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발흥과 급격한 발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더니즘 시대 자본주의를 떠받친 핵심적인 기술은 원동기 기술이다.
증기 기관을 통해 증기선과 기차 및 각종 증기 기관을 활용한 생산 기계들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 핵심은 공간 내에서의 물질의 가속화된 이동과 변형이다.
물질의 이동과 변형이 가속화되면서 공간은 빠른 속도로 압축된다.
공간의 밀도와 강도가 높아지면서 공간에 대한 합리적인 관리와 지배는 곧 생산력의 발달 정도를 결정
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외부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 시대 공간의 핵심적인 특징은 압축된 물질적인 공간이다.
내부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 시대 공간의 핵심적인 특징은 자아 중심으로 압축되는 순수 기하학적인
물리적 공간이다.
순수 기하학적인 물리적 공간을 관통하는 원리는 이성이다.
그러니까 근대 자아 중심성이란 한편으로 보면 철저히 주관적인 감정을 벗어난 이른바 초월론적인
(transzendentale) 자아를 내세운 것이었다.
한편 이성에 의거한 공간의 관리와 지배는 압축된 물질적인 공간을 철저하게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그
실천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요컨대 모더니즘 시대의 공간 개념을 볼 때, 모더니즘은 자아 중심의 내재화의 방향과 물질 중심의 구성
적 초월화의 방향 즉 생산력 중심의 세계 지배의 방향의 일치에서 그 정신을 정확하게 형성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모더니즘 시대의 두 원리인 내재화와 초월화는 일란성 쌍둥이 내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었다.
갈릴레오가 수학적인 자연이라는 이념을 제시한 뒤, 데카르트는 기하학적인 좌표계를 바탕으로 한 해석
기하학을 발명함으로써 기하학적인 도형을 수식으로 바꾸어 계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뒤이어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을 발명함으로써 무한소의 미시적인 운동의 비율을 수식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모더니즘 시대의 자연의 미시적인 수학화는 그 자체 예술에서의 재현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 실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데에는 19세기 중반의 사진술 발명을 필요로 했다.
회화에서 재현 패러다임이 무너지는 시점은 인상주의의 출발에서 잡을 수 있고, 쇠라의 점묘화에서
극단화되는 인상주의자들의 미시적인 광학 효과에 대한 집착은 사진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잔을 거치면서 20세기 들어서게 되면 분석적 입체파와 칸딘스키에서 추상 회화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추상 회화는 모더니즘 정신의 두 원리인 내면화의 원리를 실현한 것이다.
이 과정은 라인하르트의 모노크롬 회화에서 극점을 이루는 추상표현주의에로 이어지고 저 유명한 그린
버그의 모더니즘 회화론을 가능케 한다.2)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이전 뒤샹의 <샘>을 비롯한 레디 메이드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에 들면서 미니멀리즘, 팝아트,
개념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세 가지가 서로 착종되기도 하면서 여러모로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향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들이 반모더니즘적인 기치를 내세우긴 했으나, 그때 모더니즘은 지독한 내재화의 길을 향해 나아간
그린버그적인 칸트주의였기 때문이다.
내재화를 향한 길을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되면 그 예술적 표현은 급기야 일체의 인간적인 감정과 그에
따른 이야기들을 배제하게 된다.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러한 인식론적인 자아는 일종의 자아극(自我極)으로서 아무
런 구체적인 내용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학적인 지향성의 원리를 도입해서 보면, 그럴 때 그 상대로 등장하는 대상은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도 지니지 않은, 혹은 설사 지녔다 하더라도 그 규정들을 전혀 알 수도 없고 안다 할지라도 별다
른 의미가 없는 이른바 칸트가 말한 사물 자체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때 대상은 그저 대상극(對象極)일 뿐이다.
후설의 경우, 대상극을 단적인 대상(Gegenstand schlechtin)이라 한다.
즉 일체의 내용적 규정을 벗어나 있는 대상 자체를 제시한다.
미니멀리즘 작품, 예컨대 칼 안드레의 직육면체 나무토막은 완전히 대상극으로 나아간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모더니즘 정신의 두 원리 중 하나인 초월화의 극단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 앞에서는 일체의 감정과 사유가 멈추고 만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의거한 추상표현주의가 내재화의 방향을 향해 극단으로 치달았다면,
미니멀리즘은 물질을 향한 초월화의 방향을 향해 극단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니멀리즘에서 표출되는 반모더니즘은 다른 한 방향의 모더니즘, 즉 본래의 더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일 뿐인 것으로 정위된다.
모더니즘 예술은 급기야 양 극단에서 분출되는 것으로 정위된다.
자아극으로 향한 내면적인 감각적 직관의 즉자적인 공간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모노크롬적인 모더
니즘이라면, 대상극으로 향한 초월적인 물질의 즉자적인 공간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미니
멀리즘적인 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미술사를 차례로 강력하게 지배한 이 두 모더니즘은 자아극 쪽이냐 아니면 대상극 쪽이냐 하는
방향만 다를 뿐 극단적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점검할 때 미니멀리즘적 회화를 운위하게 되고, 그런 과정
에서 추상표현주의 내지는 앵포르멜 회화 풍을 활용한 작가들이 미니멀리즘적인 경향을 띠는 것으로
혼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은 자아 중심에서부터 대상 중심으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이는 애초
모더니즘 시대의 정신을 양면에서 아로새긴 내재화와 초월화의 교차적인 이중성을 따로 분리시켜 드러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이중성은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에 의거한 존재 이해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나타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살은 감각하는 자가 감각되는 것에서 발생하고, 감각되는 것이 감각하는 자를
통해 자신을 감각하는 통로라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메를로-퐁티는 살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근원적인 감각 덩어리(masse sensible)를 제시한다.
감각 덩어리는 물질과 감각이 완전히 결합된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성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한편으
로는 감각성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그러나 근원적으로 감각성과 사물성이 완전히 결합된 지경을 지시한다.
모더니즘적인 내재화와 초월화의 두 방향을 완전히 결합함으로써 포착하게 된 아주 매력적인 개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내재적 초월화의 방향과 초월적 내재화의 방향을 예견케 하고,
나아가 이 둘의 방향을 이중교차적인 역동적인 꼬임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4. 모더니즘의 포스트모더니즘 공간에의 기여
모더니즘 시대가 기본적으로는 각종 원동기의 발달을 통해 기계적인 물질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서 성립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공간을 가능케 하는 맹아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두 기술을 낳았으니,
사진술과 영화 기술3)이 그것이다.
사진과 영화는 시간적인 측면에서 그 특성이 크게 나뉘지만, 뭉뚱그려 보면 지각 현실의 공간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미지화해서 기록, 재생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는 시간마저 기록, 재생하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모더니즘적 공간에 대해 크게 규정적인
역할을 한다.
공간의 역사에 있어서 영화는 이중적이 측면을 갖는다.
한편으로 영화는 플라톤 이래 계속 점철되어 온 반복성에 의한 본질 규정을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지각
적인 물질 공간에서의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그럼으로써 물질 공간을 존재론적으로 본질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
었다.
이 점에서 어쩌면 영화야말로 모더니즘 시대의 물질 공간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그 근본성을 확립하는
핵심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화 자체는 물질 공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이미지 공간만을 보여줄 뿐이다. 관객에 대해 일방적이긴 하지만 물질 공간을 기계적으로 이미지
로 바꾸어 관객이 이미지의 공간 자체를 만끽하도록 한다.
그런데 영화의 이미지가 주어질 때 관객은 공간적으로 철저히 이중적으로 분열된다.
관객의 시선은 이미지의 공간에 가닿아 있지만, 관객의 몸은 이미지의 공간에 대해 완전히 속수무책이다.
이러한 영화 공간에서의 사태는 앞서 말한 모더니즘의 내면화와 초월화가 철저히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시선은 이미지 공간에 몰두하면서 기계적으로 처리된 감각적 직관의 영역에 머물 뿐이고, 몸은 구체적
인 지각 현실에 철저히 빠져들어 있다.
시선에 의한 이미지 공간에의 몰두는 내면화에 상응하고, 몸에 의한 물질 공간에의 몰두는 초월화에
상응할 수 있다.
영화가 나온 뒤 수십 년이 지나면서 모노크롬적인 모더니즘에 이어 미니멀리즘적인 모더니즘이 나왔
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모더니즘인 이중화의 논리가 어떻게 분리되어 발달할 수 있는가를 어느 정도
포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전자 공간의 시대가 열려 이제 관객이 그저 속수무책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이미
지에 의해 수동적으로 공략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이미지의 공간에 대해 일정하게 능동적
으로 개입해 들어가 이미지와 상호작용을 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공간 즉 전자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자 공간이 물질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 공간임에 틀림없기에, 영화에 의한 이미지 공간의 확립
은 물질 공간을 넘어 전자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여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외에 한 가지 덧붙일 사안은 20세기 들어 모더니즘 예술 문화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한편에서는
컴퓨터 기술이 착착 발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복잡한 암호를 빠르게 해독하기 위해 창안되었던 컴퓨터 기술은 일찍이 인간의 계산적인 사유는 물론
이고 각종 지성적인 사유와 감각 및 감정까지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어 처리, 가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는 항상 겹치면서 연이어지는 두루마리와 같이 진행된다.
어느 시기를 딱 잘라 시대의 변화를 운위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모더니즘 시대가 한껏 발달하고 있는 시점에서 등장한 영화 기술과 컴퓨터 기술의 결합은 이제 모더니즘
적인 물질 공간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전자 공간을 강력하게 준비하고 있었
던 것이다.
5. 포스트모더니즘 공간의 특징
포스트모더니즘 공간을 운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 혁명에 의한 전자 공간 특히 인터넷 공간의
발명이다.
시대적인 공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특정 몇몇 사람들의 작업보다 일반
대중들의 활동에 의한 의식/무의식의 집단적 습관이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점이다.
시대적으로 물질 공간을 넘어 이미지적인 전자 공간으로 들어섰다는 것은 일반 대중들이 이미지의 공간
을 쉽게 가공, 처리하면서 개입해 들어갈 수 있고 급기야 그러한 공간을 생활공간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 공간은 과연 생활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 첫 번째 징후로는 전자 공간에 의한 물질 공간 관리와 지배를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화시스템의 확산을 들 수 있다. 공장에서 물질의 이동과 변형의 속도는 이제 고도의
정확성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산업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에 등장한 것이 산업 로봇들이다. 전자 공간이 물질 공간을 지배하는 가장 손쉬운 예로는 자동차를
들 수 있다. 이제 자동차의 보닛을 열면 이전의 복잡한 기계기관들 대신에 몇몇 검은 박스들만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컴퓨터 전자 시스템을 최대로 활용하고자 함으로써 더욱 더 정확한 통제를 가능케 하려는 것이다.
전 세계를 누비는 거대 물류는 전자 공간에 기입되고 반영되지 않으면 설사 물질 공간을 관통하고 있다
할지라도 아예 실종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된다.
모든 인간들의 유의미한 활동들은 인터넷에 기입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
으로 된지 오래다.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예컨대 한국 구글 검색란에 ‘조광제’를 검색 키를 누르면 조광제 본인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런 글을 썼는지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거나 아예 모르고 있던 내용들 모두를
확인할 수 있다.
물질 공간에 대한 전자 공간의 지배는 모더니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을 여지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자아에로 내면화되면서 수렴되던 공간이 파괴되고, 선형적인 인과성과 목적성의 공간이
와해되고, 객관적인 물질의 힘이 대대적으로 약화된다.
하루에 1조 달러를 거래되면서 실물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세계 금융 경제는 순전히 전자 공간에서 이루어
진다.
물질이 전자 공간 속으로 쏠려 들어가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처리되는 데서 이제 저 깊은 무의식적
인 욕망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이면서 감정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면서 이른바 물질의 이미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전자 공간은 한편으로 이미지 공간이다.
재현 패러다임에서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물질적 사물에 예속된 것이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들어서면서 이제 객관적 물질적 사물은 인식적인 자아에 예속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미지는 자아의 주체에 예속되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자 공간에서는 물질도 자아의 주체도 모두 이미지의 지배하에 복속되는 이미지
의 전일적인 지배 상황이 연출된다.
사진과 동영상 기술을 많이 활용하면서 물질성과 자아의 주체성을 넘어선 이미지 자체의 독자성을 기계
적인 방식으로 산출하기 시작했을 때, 예술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묘한 예술적 상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반자본주의적 예술을 기치로 내세운 개념미술의 경우, 예컨대 아예 사진이나 비디오 영상물을 활용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건을 미술의 재료로 삼는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 등의 경우, 일반 대중들
에게 전달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사진과 비디오 동영상이다.
만약 사진과 비디오 동영상 기술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예술 작업이 과연 정확하게 예술적 공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영구적인 물질적인 형태의 작품으로 팔거나 팔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자체 역사적인 흔적을 통해서
나마 존립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런 작업들이 크게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징후로서 물질 공간이 이미지의 공간에 의존하기 시작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면, 이제 모든 물질 공간이 전자적인 이미지 공간에 의존해서 유의미해지는 사회
전반적인 상황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상황의 핵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지의 공간이 물질 공간과 작가 자아의 주체에 예속되어 있을 때에는 이미지는 관객 내지는 수용자
에 대해 일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배후의 물질 공간과 작가 자아의 주체를 관객 내지는 수용자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 공간이 물질 공간과 자아의 주체 공간을 벗어나서 심지어 지배하게 되면, 이제 이미지와
관객 내지는 수용자 사이에 서로 개입해 들어가는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상호 순환적으로
그것을 위한 기술적인 장치들이 탄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디지털-컴퓨터 기술 혁명이다. 최근 많이 확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각종
디지털 매체 예술들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전자 이미지 공간 속으로의 쏠림,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그 은유적인 힘이 한껏 대중화된 가상현실
기술조차도 비록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본질상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상현실은 그 자체 원리상 물질 공간이 개입됨이 없이 순수한 입체적 이미지의 전자 공간이기 때문이다.
전자 이미지 공간으로의 쏠림이 강화되면서 몸은 증기화(vaporization)되는 것으로 진단된다.
6. 하이퍼모더니즘의 공간의 탄생
물질 공간과 전자 공간 간의 지배적 위치의 자리바꿈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그것은 제아무리 전자 이미지 공간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몸은 어차피 물질 공간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청되는 것이 물질 공간과 전자 공간 간의 존재론적인 완전한 결합이다.
물질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몸 공간과 전자 이미지 공간을 향유하는 몸 공간을 완전히 결합해 내는 것도
아울러 요청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유비쿼터스 기술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의 핵심은 RFID(radio frequency idenification, 라디오 주파수 정체확인)이다.
RFID는 작게는 0.3통신으로 주고받을 수도 있고 서로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고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내용들이 모바일 폰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기도 하겠지만, 유비쿼터스 기술의 핵심 특징 중 하나가
사용자가 그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만간 아예 핵심적인
RFID를 인체 내에 장착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갈수록 여러 종류로 개발되고 있는 RFID 기술은 다소 과장되게 말하면 앞으로 생활공간에서 유의
미한 모든 사물들에 필요에 따라 RFID들을 내장해 놓음으로써 모든 사물들이 서로 자기가 포착한 내용
들을 무선 통신으로 주고받을 수도 있고 서로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고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 내용들이 모바일 폰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기도 하겠지만, 유비쿼터스 기술의 핵심 특징 중
하나가 사용자가 그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만간 아예 핵심적인
RFID를 인체 내에 장착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이보그 기술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결합될 전망이다.
신경체계를 지닌 생물학적인 유기체와 디지털 전자 통신 장치가 결합되면 어떤 경우든 사이보그가 탄생
한다.
파리에게 RFID를 부착하여 파리의 신경과 호환되도록 하면 파리 사이보그가 된다.
스스로 사이보그가 되기를 원했고 상당 정도 성공한 로봇 공학자 케빈 워릭은 자신의 손으로 컵을 집기
만 함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로봇손이 컵을 집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정말 놀라운 일은 케빈
워릭이 눈으로 볼 수도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로봇손이 컵을 집는 촉감을 자신의 뇌에서 느낄 수 있었
다는 사실이다. 이는 굳이 내가 영화관에 가지 않더라도 내 대신로봇을 보내 영화를 보게 하면 집에
있는 내가 직접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원리를 가능적으로 담고 있다.
신경계와 전자계의 결합, 사이보그 세계의 핵심이다. 물질계와 전자계의 결합, RFID 세계의 핵심이다.
물질계와 전자계와 신경계의 결합, 사이보그 세계와 RFID 세계의 결합을 통한 완전한 유비쿼터스 세계의
핵심이다. 이를 공간의 역사에서 보면, 몸 공간을 바탕으로 한 물질 공간과 전자 공간의 결합이다.
모더니즘의 물질 공간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자 공간에 비해 볼 때, 전혀 차원을 달리하면서 양자를
하나로 결합해 낸 또 하나의 이른바 전자물질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를 지칭하기 위한 용어가 필요하다. 그래서 ‘초근대’라 번역될 수 있음직한 하이퍼모더니즘
(Hypermodernism)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제 전자물질 공간의 시대의 강력한 도래를 목도하면서 그 시발의 상황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이퍼모더니즘의 공간은 어떤 성격을 지닐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몸 공간의 성격을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몸 공간
몸 공간은 다중적인 층들이 결합되어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다.
첫 번째 층은 물질 공간이다. 하나의 물질적인 덩어리의 층이다. 저울에 올라서면 양적으로 표시되고,
차를 타고가다 급정거를 하면 관성에 의해 앞으로 몸이 쏠리는 몸 공간의 층이다.
두 번째 층은 감각-운동적인 생명 공간이다. 바깥에서 오는 자극들을 감각과 운동으로 바꾸어내고 안
에서 오는 자극들을 감각과 운동으로 바꾸어내면서 전체적으로 강력하고 복합적인 되먹임(feedback)의
관계를 통해 원심성과 구심성에 의한 수렴과 분산, 분열과 통일, 국소성과 전체성 등을 한꺼번에 실현
하면서 통일되어 있는 몸 공간의 층이다.
이 층은 몸 공간의 고유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말초적인 원심성 신경과 구심성 신경 그리고 중추신경
계의 무한에 가까운 복합병렬적인 감각운동적인 정보교환을 통해 그리고 각종 호르몬과 효소의 대사
적인 기능들을 통해 어느 한 부분의 공간도 다른 모든 부분의 공간과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몸 공간의 고유성을 잘 드러내는 몸 공간의 층이다.
몸의 실천적인 능력을 가능케 하는 몸틀이나 습관 혹은 체화된 무의식의 공간은 바로 이 몸 공간의 층
에서 이루어진다.
세 번째 층은 의식 공간의 층이다. 몸 공간의 이 층은 대단히 가상적이다.
몸이 감각과 운동을 수월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앞서 말한 두 번째 몸 공간의 층에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일시적인 층이 바로 이 의식의 층이다.
몸 공간의 이 세 가지 층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각기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로 통일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몸 공간의 바탕이 되는 물질적인 층은 여느 사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물질적인 공간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요컨대 신경 물질적인 공간이고, 의식 물질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종래의 존재론적인 개념들을 동원해서 말하면, 몸 공간은 물질과 물질이 거리에 관계없이 즉각적
으로 연결되는 철저히 네트워크적인 공간이고, 물질과 의식이 존재방식에 관계없이 직, 간접적으로 연결
되는 철저히 네트워크적인 공간이고, 의식과 무의식이 이중교차적인 방식으로 연결되는 철저히 네트워크
적인 공간이고, 감각과 운동이 선택적인 반응에 의해 연결되는 철저히 네트워크적인 공간이다.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요소들, 예컨대 물질, 힘, 에너지, 전자기 파동, 정신,
의식, 무의식, 사유, 행동, 습관, 생명, 욕망 등이 철저히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복합적인 파동의
공간이 바로 몸 공간이다. 말하자면, 몸 공간은 초유비쿼터스(hypeubiquitous) 공간이다.
유비쿼터스 기술은 몸에서 발휘되는 초유비쿼터스 공간을 몸 외부의 공간에까지 확장시켜 모든 사물들
을 마치 몸 공간의 구조처럼 만들고자 하는 기술이다.
유비쿼터스 공간의 중심은 여전히 몸 공간이다. 몸 공간을 중심으로 전체 유비쿼터스 공간이 수렴과
확산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더욱 원활히 하기 위해 몸은 사이보그로 나아가고, 사물들은 RFID를 장착
한 유사 신경세포들이 되는 것이다.
인간 몸을 포함해 모든 사물들이 신경세포로 연결되어 세계 전체가 한 몸이 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른바 ‘몸의 세계, 세계의 몸’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사이보그가 된 인간 몸은 세계의 몸에서 뇌에 해당되고, 유비쿼터스화된 사물들의 RFID 감각전달체계
들은 세계의 몸에서 말초신경에 해당된다.
이러한 일이 더욱 더 진전되면서 다가오는 현재에 걸친 미래 시대를 일단 ‘하이퍼모더니즘 시대’라고
명명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래하고 있는 하이퍼모더니즘 시대 미래의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변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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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학회 발표원고
2006-05-27
조광제
작성자 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