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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님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정, 또 서 있는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어려움을 쉽게 피하지 못할 때가 많죠.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들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함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없이 살았으면 참 좋겠는데, 순간순간 찾아오는 어려움 고통이 나를 넘어뜨리려 할 때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나로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오늘 특별한 인물 스테반의 삶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스테반은요. 고난 극심한 고난 순간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유지했던 신앙의 모범인 사람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죠. 그는 세상이 주는 근심, 두려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평안,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그 앞에 직면한 고난을 마주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평안 안에 거하면서 담대함으로 맞설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당시 스데반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스테반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 7명 중에 한 사람으로 선출이 되었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 그리고 그는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집사를 택했던 구절 5절인데요. 그 구절을 보시면 다른 집사들과 좀 다른 그런 부분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스테반에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이죠. 우리 5절 말씀 한번 같이 읽어보십니다.
온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우로보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밤에 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여러분 이 문장을 자세히 보시면 좀 구분을 시켜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라는 것과 그리고 나누어서 또라는 표현을 시작하면서 나머지 여섯 집사의 이름을 기록해 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구분이 되죠. 개혁 한글에는 저렇게 구분이 돼 있지 않아요. 실제 원어 성경을 봐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 해당하는 이 헬라어 문구는 스데만에게만 수식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나머지 여섯 사람에게는 이게 수식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이걸 아셔야 돼요. 집사를 뽑을 때에 모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칭찬받는 사람들을 뽑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믿음도 없고 성령도 없고 이것이 아니라 있었죠. 있었으나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저자였던 누가가 그 스데반의 삶을 조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 이 사람은 다른 집사분들보다 조금 더 믿음이 있고 조금 더 성령 충만했던 사람 우리도 실제 신앙생활하면서 서로 보잖아요. 저분은 나보다 성령이 더 충만한 것 같아 이런 기준이 있잖아요.
우리 안에도 저분은 믿음이 참 좋은 것 같아 그런 것처럼 누가가 바라봤던 일곱 집사 중에서 그래도 이들보다는 조금 더 성령 충만하고 믿음으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스데반이었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유독 스데반을 향해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콕 집어서 기록해 주었다는 것이죠.
또한 저자는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7장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이야기를 풀어갑니까? 스데반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는 것이죠. 스데반의 설교를 장황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볼 때 누가가 바라본 스데반은 일곱 집사 중에서도 좀 남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 오늘 본문을 우리가 읽을 때도 시작이 그러잖아요. 기적과 표적을 행하던 시대가 그러니까 그에게 권능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은혜가 있어서 그의 사역들을 그렇게 감당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했잖아요. 사도들이 전하는 그 복음을 이 스테반 집사도 동일하게 전했다. 그래서 지난주에 우리가 나누었듯이 자유의 해당에서 스데반이 그들과 논쟁을 했다.
뭐 때문에 논쟁했어요? 말씀 때문에 논쟁한 것 아니겠어요? 격렬한 논쟁 속에서 결국에는 이 스데반의 지혜와 성령으로 능이 그들이 감당하고 이기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잖아요. 그만큼 특별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적자들과 함께 논쟁을 하는데 이길 수 없으니까 이들이 하는 스데반을 모함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 공작을 피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부터 14절까지 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 공작은 사람을 사주했다는 거예요. 사주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말들을 잘 알려주었던 것이죠. 아마 이들은 몇몇 남자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스데반이 했던 말을 왜곡해서 그들에게 전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백성들에게 가서 전해라 그래서 그들을 충동시켜라 이렇게 명령한 것이죠.
그렇게 해서 스데반을 아주 손쉽게 공해에 고소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1절 말씀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스데반의 대적자들은 이 스데반이 했던 이야기들을 공회에서 설명을 해내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 스데반이 했던 이야기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파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좋은 의미가 아니죠. 그들은 율법과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오더니 그런 일을 벌이고 또 이제 예수를 전한다고 하는 스데반이 그 이야기를 하니 이들의 마음 가운데는 기쁨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전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더 듣기에는 선을 넘은 말이었어요. 선을 넘어 우리가 어떤 선을 지켜주어야 되잖아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나 종교심 이런 것들이 선을 지켜줘야 되는데 선을 넘어서는 매우 파격적인 그러한 메시지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께 했듯이 스테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해방한다든지 모독하게 되면 돌에 맞아 죽는 그러한 형벌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을 매수한 것 두 번째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격동시켰다는 거예요.
스데반의 대적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을 충동시키는 일을 감당케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잡는데 동의를 얻고 그를 공회 앞에 세우는 일을 하는 것이죠. 12절 말씀 읽어보십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대상이 있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이라고 돼 있잖아요. 장로와 서기관들은 실제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백성이라는 그룹을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되는데 이들은 우리가 앞서 5장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을 칭송했던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들을 표현해 주고 있어요. 사도들이 어려움에 빠지자 방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전 맡은 자와 관속들이 이 사도들을 붙잡으러 갔다가 이 사람들 괜히 백성들 민란이 일어나고 반란하면 안 되니까 두려워서 강제로 소환하지 못했던 장면이 5장에 기록돼 있잖아요. 그런 백성들이에요. 그런데 이제 이들이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충동에 너무나 쉽게 동화되어버렸다는 것이죠.
스테반 입장에서는 이들이 아군이었는데 갑자기 저들이 와서 충동하니까 적군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아니 내 편 되어줘도 내가 지금 힘을 내서 지금 복음을 전할까 말까인데 어떻게 너희들이 등을 돌릴 수가 있지라는 그러한 마음이 들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백성들 마음의 중심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이들의 사상이 율법과 성전 중심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아직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거짓 증인을 세웠다는 거예요. 스테반을 대적하는 자들, 그들은 공회 앞에서 피고인으로 스데반을 세우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고소하게 해서 직면해 있는 그런 상황에 있게 된 것이죠. 우리 13절 같이 읽어볼까요?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맞지 아니하는도다.
율법을 거스르는 말, 거룩한 곳에서 율법을 거스르는 말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죠. 그 핵심 내용이 14절에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겠다 성전 중심인데 성전을 헐겠다니까 말도 안 되는 것이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규례를 고칠 것이다.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율법을 그걸 고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몰아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스테반이 결국 이 공예 앞에서 그렇게 핍박과 고난을 당하다가 결국에는 마지막 직장에서 설교를 하고 순교하게 되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7장의 설교를 기록하기에 앞서서 마지막 6장 마지막 절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한 메시지를 선포해 주었다는 거 15절 말씀인데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 구절을 왜 적어줬을까 스데반의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 직전에 그 공회 앞에서 심문받고 있던 이 스데반의 상황을 보면서 보니까 공예 중에 있던 사람들이 주목해서 스데반을 쳐다봤는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는 표현을 오늘 성경에 기록해 주었다는 것이죠.
즉 지금 스데반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대적자들의 방해 공작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그러한 모습과 태도가 삶이 그 안에 집약돼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도대체 뭐냐? 여러분 뭐라고 설명하시겠어요?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어떤 게 도대체 천색 그냥 막 실실 웃었을까요?
아니면 천사하면 하얀색이 떠오르는데 앞에 천사가 있었나 하여튼 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 분명히 이 안에 의미가 있는데 오늘 이 스데반이 앞서서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했다는 그러한 조건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해답을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평안함이 있었다는 것으로 우리는 해석해 볼 수가 있죠. 스데반이 공회 앞에 신문을 받을 때 그의 얼굴이 근심이 있을 수 있잖아요.
큰일이네 걱정이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해야 되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잡히면 안 되는데서부터 해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를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근심빛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라는 것은 그에게 평안함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충분히 근심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고난 앞에서도 근신 빛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천사얼굴과 같은 평안함을 볼 수 있다.
여러분 스데반의 이 보여준 천사와 같은 얼굴은 이 고난 중에 평화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고난 가운데 놓일 때 그 상황에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인위적으로는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오기라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스데반이 그 상황에서 그러한 천사의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그는 기쁜 신앙, 즉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서는 여러분 우리가 이해하기가 참 어렵죠.
우리도 그렇습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내가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하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우리의 표정에 담아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근심 빛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는요. 스테반 외에도 고난 중에 성령 충만하여 평안함을 유지했던 사람들을 이곳저곳에 많이 배치해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니엘 아시죠? 다니엘 그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특별 훈련의 과정을 걷게 됩니다. 당시 바벨론 왕이 그들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면서 동시에 허락했던 것이 자신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하사한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특권을 받은 거예요.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포로가 대단한 특권인 것이죠.
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겠다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합니다. 그리고 왕이 준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는 거예요. 왜 이것을 통해서 나를 더럽히지 않겠다 그러한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거절하게 됩니다. 그 결심과 행동은요. 그의 얼굴빛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과정 속에서 이제 다른 사람들은 왕이 준 음식을 먹기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왕의 음식을 먹은 자들보다 그러나 더욱 아름답고 더욱 윤택했다.
그들의 얼굴빛이 그랬다는 것이죠. 더 좋아 보이는 것이 그렇게 그 다윗과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렇게 뜻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훗날에 이제는 총리 중에 총리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다니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마침 시기하던 총리들과 고관들이요. 다니엘을 고발하기 위해서 열심히 근거를 찾아보지만 도대체 이 사람에게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 허물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들이 생각해낸 것은 왕에게 우리가 요청을 하자 한시적으로 한 법률과 한 금령을 좀 내리게 하자. 그래서 왕에게 가서 요청하는 것이
왕이시어.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골에 던져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으로 등극한 이 왕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죠. 나를 위해서 이렇게 애써주는 신화를 보면서 아주 기분 좋게 조서를 쓰고 거기에 도장을 찍고 만천하에 금령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대신들이 꾸민 이 일로 인해서 다니엘은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요.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고도 똑똑하게 기록해 주고 말씀해 주십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인데요. 우리 같이 한번 큰소리로 읽어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의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여러분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힘을 알았다는 거예요. 아는 순간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어요? 해 알아야 되나 이 고민 안 들겠어요?
왜요?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자 밥이 되는 거잖아요. 사자굴에 그냥 들어가는 건 죽는다는 거잖아요.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경배했던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감사 기도했던 거 이거 하지 말라는 건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 생각하면 근심이 들어오겠어요? 안 들어오겠어요? 그죠?
그런데 오늘 다니엘서 6장 10절은 아주 평안해 보여요. 하던 대로 하던 대로 눈치 본 게 아니에요. 그냥 그가 하던 대로 일상대로 늘 하던 방식대로 가서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도 했다.
여러분 그가 눈치 보면서 했을까요? 적어도 이 표현 속에서는 담대하고 또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근심 걱정이 아니라 평안함으로 그 하던 일을 지속해서 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평화는 외부 상황보다 하나님의 관계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죠. 그러니 앞에 놓인 상황으로 인해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도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습니까? 그런데 또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죠. 여러분 매 맞고 감옥에 갇혀서 창고에 묶여 있는 그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면서 이 꼬라지가 먹고 복음을 전하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게 이게 맞는데 하나님 도대체 뭐 하십니까? 우리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애썼는데 하나님 우리 이게 맞습니까라고 원망하고 그에게 투덜대면서 근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들은요 밤이 되자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들이 매질 당하고 감옥에 있지만 이들은 성령 충만하여서 하나님께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여러분 그 가운데 그들이 근심이 있었겠어요? 아프긴 아팠겠죠.
그러나 그들의 마음 안에 있던 성령 충만이 외적으로 화면 안으로 아마 보여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27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거기서 성령을 이야기하신데 이어서 평안 주게.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면 그 평안으로 말미암아 너는 근심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나 불확실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의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셨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그러한 상황이 없을 리 없는데 나는 어떠한 표정으로 그것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우리의 시선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고정될 때에 공회원들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강이 담긴 천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삶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요. 그의 얼굴에 천사와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담대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공회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있는 그 자리에 공회원들이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얼마나 당당하게 서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공회원들이 볼 때 도대체 뭐가 지금 저렇게 당당히 해도 돼라는 그러한 마음으로 아마 쳐다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담대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요. 앞서 이야기했던 믿음이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이죠. 스데반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러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은 거예요. 담대하게 할 말 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된 것이죠.
여러분 담대함 하면 생각나는 성경 인물이 누구 있습니까? 그래도 용맹스러운 다윗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골리앗 앞에 선 다윗 그를 한번 생각해 보시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한쪽 편에는 블레셋 군대가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한쪽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에서는 가드 사람 골리앗 장군이 싸움을 걸기 시작합니다.
1대1 대결 요청을 하는 거예요. 가드 사람 골리안 그가 얼마나 큰지는 아시죠? 그가 와서 열심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나설 만한 사람 하나를 뽑아서 내게로 보내라. 나를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약 내가 그를 이기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서 맞서 싸워보도록 해라. 우리가 싸워서 결정을 내자 하면서 계속 도발을 하는 것이죠. 골리앗의 계속된 도발 앞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몹시 놀라고 크게 두려워서 떨기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해요. 누구 한 사람 나갈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싸울 만한 사람이 없는 거예요. 떨기만 하면 되도 버세요. 그런데 이것이 무려 4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골리앗이 나와서 외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조롱을 퍼붓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당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 그 군사들의 반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러한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 믿는 한 사람이 있었다면 당장에서라도 나가서 싸웠겠죠. 그러나 그 믿음이 없었던 것, 그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때마침 베들레헴에서 양치던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고 전쟁터로 가게 됩니다. 형들을 만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골리앗이 다시 나와서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전과 같은 말을 계속해서 퍼붓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그 이야기를 듣자 또 두려워서 덜덜 떨고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이야기 앞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이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군사들 앞에서 그렇게 선포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군사들이 자꾸자꾸 전해지다 보니까 사울 왕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사울 왕의 앞에서 그가 이야기합니다. 사실 당시에 다윗은 소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한 160 정도 됐으려나 사울 왕이 자신이 입었던 그러한 갑옷들을 주지만 맞지가 않아요. 사울이 볼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야 골리앗과 싸우러 간다는데 소녀가 와가지고 내가 싸우겠다는데 보내야 돼 말아야 돼.
여러분이 왕이라면 그런 생각 안 하겠어요? 그런 고민 속에서도 있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때 사울을 향해서 이야기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베들램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지킨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양을 물고 가면 당장에 추격해서 내가 그 짐승을 쓰러뜨리고 그 입에서 양을 구원해낸 사람이에요. 맹수가 덤벼들면 그 머리를 붙잡고 때려 죽였던 사람입니다. 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놈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지금 계속 조롱하고 모욕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막 강력하게 당당하게 나가니까 사울이 앞에 니가 한번 가봐라 가봐라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죠. 그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구해주셨던 것처럼 틀림없이 저 플레셋 군대로부터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요. 막대기와 시냇가에 돌 5개를 딱 취해서 당당하게 골리앗 앞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골리앗이라면 저기 다가오는 다윗을 보면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웃기죠 아니 지금 40일 동안 내가 외쳤는데 한 명 보낸다는 사람이 지금 소년을 보내고 키가 한 160 정도 됩니다.
여러분 골리앗은 키가 어떻게 됩니까? 9척 정신이잖아요. 성경에 보면 6 한 뼘이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2m 70에서 3M 사이 거의 2배 가까이 되는 거예요. 저기 앞에서 꼬맹이가 지금 이렇게 막대기 하나 들고 달려오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그래서 여러분 골리앗이 외치잖아요. 아주 호통을 치며 저주합니다.
지금 내가 나를 개로 여기냐 이렇게 외치면서 고작 막대기 가지고 지금 나를 대항하려 하느냐 와라 내가 내 살을 공중에 세워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다.
여러분 9척 장신 골리앗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년 다윗에게 이렇게 겁박했다면 사실 이 정도 되면 겁날 만하지 않아요. 저 같으면 겁났을 것 같아요. 저보다 1m 이상 큰 덩치 큰 친구가 갑옷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사람이 방패를 옆에 같이 들어 줄 정도로 얼마나 웃기겠어요.
그런데 다윗은요. 전혀 걷는 기색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당합니다.
내가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해서 내게 나왔느냐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내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나아간다.
할렐루야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은 거죠. 신뢰한 것이죠.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길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내 목을 베어 블레셋 사람의 죽음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이다. 또 승리는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온 무리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선포해버립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 핵심적인 건 무엇입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즉 그가 너희를 우리의 손에 비치리라.
할렐루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 다윗의 담대함과 용맹은 말뿐만 아니라 아마 얼굴 속에서도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가 사실 그런 표현이었지만 마땅히 그렇게 들어갔겠죠. 그리고 이 담대함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여러분 그가 선포한 말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지금 공예 앞에 잡혀서 심문받고 어쩌면 죽어야 될 그러한 상황 가운데 담대한 모습을 보면서 이 공회원들이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서 우리의 얼굴 표정에 다윗과 같은 스데반과 같은 담대함이 표출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물론 나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 다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나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죠.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충만 충만 그래서 충만 앞에 서면 우리는 은혜의 은혜가 더해지는 것이죠.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어 세상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베소서 3장 12절을 한번 보실까요? 같이 읽어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다.
누구 안에서 예수 안에서 무엇으로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담겨 있는 것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세상을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곧 담대함이라는 것이죠.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에 천사같이 빛난 장면은 그가 성령 충만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당시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심한 핍박과 아픈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지만 성령 충만함을 통해서 그는 깊은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성령의 충만함은 그 내면에 흔들림 없는 평안을 주었고, 이것이 외적으로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보여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이 빛남은 내면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그를 통해 외부로 표현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얼굴과 같이 빛났다.
또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얼굴과 같이 빛났다는 것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담대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적 두려움이나 압박감을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도 강한 믿음을 신뢰하고 담대히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스데반의 얼굴에 빛났던 표현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충실된 믿음 안에서 얻어진 두려움이 없는 표현이다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 성도 여러분 스테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날 수 있었던 것. 성령 충만, 믿음 충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스데반의 모습을 본받아서 이왕 신앙생활하는 거 성령 충만하시고 믿음 충만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삶의 표정이 평안함이 흘러가시고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겨나가는 믿음의 권소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