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세계》의 신인상 시 심사평입니다.
작년도 여름호 게재분이지만, 시에서 '낙차와 낙법'은 생소한 개념이기도 해서 문득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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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차와 낙법으로써 시 쓰기
이영숙
「아부지의 저녁」 외 4편으로 《시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는 최성익 시인께 먼저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시력이 길든 짧든 간에 등단 무렵의 시에는 응축되고 집약된 생의 에너지가 있다. 그 시적 폭발이 등단이다. 발견과 해석, 파격과 변이를 내장한 채 시는 세계로 던져져 본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낙차’와 ‘낙법’의 방식으로 시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여기가 그의 시의 고향이다.
낙차
물은 낙차의 힘으로 전기를 일으킨다. 시가 낙차를 이용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이 최성익의 시에는 일상처럼 흔하다. 수시로 찌릿찌릿하다.
집으로 들이셨다 풀이 귀해 상수리 나무순이나 여뀟대를 마당귀에 쟁여두고 뒷간의 생똥을 흩뿌리셨다 갖은 벌레들의 냄새가 퍼져나갔다 누야들은 코를 쥐고 나도 그 근처엔 얼씬도 안했다 두엄더미 삭아가는 참았다가 집 뒷간에서
―「아부지의 저녁」 부분
감각적 시 쓰기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이 시에는 ‘생똥 냄새’가 진동한다. “뒷간의 생똥”을 퍼냈을 때 그 뒤척임이 가져온 활기는 온 집안을 장악하고도 남아 시가 적힌 지면까지 건너올 지경이다. “두엄더미 삭아가는 참았다가 집 뒷간에서”의 이 생뚱한 문장은 “코를 쥐고” “그 근처엔 얼씬도 안했”던 “나”의 후각 상태와 관련이 있다. ‘두엄더미 삭아가는 (동안 코를 쥐고) 참았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냄새가 잦아들 무렵에야) 집 뒷간에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가 그 전말일 텐데, 괄호 안의 맥락을 생략함으로써 이 시는 숨을 참는 화자의 행위를 실감나게 전달한다. 시간의 낙차 효과다.
여전히 하늘 뒷간의 노을을 삭히고 계실까 아부지는// (중략)//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명을 내리실 아부지의 아부진 (「아부지의 저녁」 부분)
내 속에는 여전히/ 형과 내가 당긴 밧줄을 나가가지 못했던/ 아부지/ 거기서도/ 허리춤에 밧줄을 매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제 몸을 갉아먹던 누에 되어」 부분)
수레에 실려간 7살 돼지 남은 것 없이/ 뜨물이나 먹다가 팔려 간다니 서운했다/ 내가 일곱 살 나던// 추석 며칠 두고 실려 간 7살/ 돼지 여적지 오지 않는 (「7살, 나와 돼지」 부분)
마찬가지로 시간의 낙차를 보여주는 이 시들은 “하늘 뒷간”, “거기서도”가 가리키는 저승과 이승 간 공간의 낙차, 죽은 “아부지”와 육식용으로 팔려 간 “돼지”가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시키는 생사의 낙차, 그리움과 연민에 의한 통각의 낙차 등을 포괄한다. 객지에 있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늦도록 재봉틀을 돌리는 어머니를 그린 「형들의 객지」에서는 눈 내리는 소리, 엄마의 한숨 소리, 재봉틀 소리, 바람에 대문 덜컹거리는 소리로 밤이 붐빈다. 이 소리들이 “귀에/ 내렸다 눈은 골목을 지나”로 끝나는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귀’를 아예 ‘골목을 지나’ 한길쯤에 내다 둔 눈치다. 그뿐인가. ‘생똥 냄새’로 우리의 후각을 거의 마취시켰던 그는 「제 몸을 갉아먹던 누에 되어」에서 ‘누에가 뽕잎 갉는 소리’와 ‘황톳물로 변한 냇물 소리’를 자신의 몸속에 ‘누에비 내리는 소리’로 믹스하여 틀어놓고 우리에게 생중계한다.
당연하지만 낙차는 경계에서 발생하며 시작과 끝의 거리가 멀수록 그 폭도, 강도도 증가한다. 최성익이 감각의 최대화로 전기를 증폭시키는 방식이다.
낙법
감각적 시 쓰기를 통해 시의 낙차를 강화했다면, 시인은 충격을 완화하는 낙법의 방식으로 낙차를 시 속에 안전하게 착지시킨다.
시간은 있었다 못대가리에도
못 받은 나무에게도
헛간이었다 아부지 돌아가신 후 아부지 드나들며
늘 자물쇠 걸어 함석으로 지붕을 덧씌운 내 어린
눈은 무서웠다 삽 로터리 괭이 아끼던 경운기는
여러 해 손길 닿지 않아,
용접한 것으로 보이는
쟁기날 재차 쓸 일은 없겠다 싶은 거미줄 쳐진
어두운 소리 노루발 장도리가 댔다
헛간 문짝을 뜯느라 그 못은 나뭇결을 놓질 않는
빠루 쥔 손에 꺾자
못대가리 부러져 툭,
사리 같은 눈물 쪼갠다고 슬픔이 못대가리 박힌
자릿결을 따라 송판을 잘랐다
유충처럼 노출된 못의 전신 제 살에 박고 있었던
그 둘레에 녹물이 배어 있었다
기둥의 속살 솔송,
―「대못」 전문
다른 작품들처럼 이 시도 유년이라는 과거와 ‘아부지’ 돌아가신 후 여러 해 지나 헛간 문짝을 뜯어내고 쓸모없어진 헛간을 해체하는 현재 시점이 혼재한다. 여러 가지의 농기구가 들어 있었고 늘 자물쇠를 걸어두었으며 함석으로 지붕을 덧씌워 어둡기도 했을 헛간이 ‘내 어린 눈’에 비친 ‘무서움’이라는 정서와 당시의 농기구들을 이용해 헛간 문짝을 뜯는 ‘다 자란 나의 눈’에 비친 ‘슬픔’이라는 정서 사이에도 낙차가 발생한다. 시인은 구체적으로 “못대가리 부러져 툭,” 떨어지는 감각을 “사리 같은 눈물”로 형상화하는데 ‘사리’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그 ‘눈물’에는 아버지의 전 존재가 투영된다.
기억이라는 관념을 감각화하는 게 낙법의 한 요소라면, ‘아부지’를 내 삶에 재현하는 게 또 하나의 그것이다. ‘삽’, ‘로터리 괭이’ 혹은 ‘로터리 쟁기날이 달린 경운기’, ‘노루발 장도리’, ‘빠루’ 등이 암시하는 삶의 구체성은 ‘다 아부지의 내림’이며, ‘아부지의 아부지’로부터 내게까지 전해진 체화된 세계 그 자체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형들이 다들 학교에’ 간 사이 ‘아부지와 지낸 어린 나’가 있었고, ‘형들이 다 객지에 나가 있을 때 엄마의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한숨을 지켜 보았던 어린 나’의 생체험적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법은 시의 안전장치다.
다만 “새 소리만으로 아침은 내가 먹고 자란 때문이다”와 같은 몇몇 문장에서 징검징검 건너뛰는 맥락의 낙차에 대한 이해는 두 갈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이를 그 앞 연의 “날씨가 추워지면서 냄새조차 얼어들어간/눈 쌓인 녹은 자리에 새들이 놀다 간”(「아부지의 저녁」)의 ‘새’와 연결했을 때 가능해지는 낙법의 한 예로서이다. 그런 장치들이 시 속에 속속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정교하지 못할 때 이는 비문으로 치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바라기는 최성익 시인이 타고난 언어 감각을 더욱 벼리는 일이다. 당선작을 통해 이미 보여준 가능성 중에서 무엇보다 “못대가리 박힌/자릿결을 따라 송판을 잘랐”을 때 “유충처럼 노출된 못의 전신”을 발견해 낸 시인의 비유는 놀랍다. ‘못’의 숨결이 느껴진다. “유충처럼 노출된 못”이라니! 무슨 구태의 말을 덧붙이랴.
―《시와세계》 202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