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리의 앙상한 가을 끝자리.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수북이 쌓여있던 노란 은행잎들이 착하게 도로위에 납작 엎드렸다. 내리고 있는 이 비가 오후쯤에는 멈출 것이란 일기예보를 믿고 용감하게 30호 캔버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번 주가 지나면 가을은 저만치 물러나 버리고 말 것이란 예감에 절대 오늘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 주문을 진작부터 걸어두었었고 사생지가 동탄 ‘장지리’ 라 하여 감나무를 그려오겠노라 작정을 해 두었던 터였다.
현장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이사회 회의를 끝내고나서 동네를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비를 피하여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고 있는 화우들은 고참 병장이나 하사관만큼이나 숙달된 진지구축의 달인들이었다.
재작년 이맘때쯤 이었던가 이곳 장지리에 왔었던 그 때는 가는 곳마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장관이었건만 오늘은 일찌감치 수확을 끝내 놓은 탓인지 변변하게 남아있는 까치밥조차 보이질 않았다. 덕분에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기회가 생겨났으니 세상만사, 인연 따라 허송세월이란 없는 법인가 보다.
겨우 몇 개 정도의 까치밥을 간신히 매달고 있는 몇 그루의 감나무중 하나를 오늘의 모티브로 낙점하고 식당으로 되돌아 와 점심식사를 하였다. 굴밥이다. 인심 후하게 양념 넉넉히 들어간 간장을 술술 뿌려가며 비벼낸 굴밥을 한 움큼 입에 넣고 씹으며 창밖을 걱정스레 내다본다. 이 비가 점심을 먹고 난 후엔 과연 멈출 것인가.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점심식사를 끝낸 즈음 비는 감쪽같이 그 행방을 감추었다. 느긋하게 미리 보아 두었던 곳으로 가서 이젤을 펴고 캔버스를 걸었다. 비에 젖은 감나무는 더욱 더 까맣게 앙상해 보였고 회색 하늘과 잔가지들 사이로 점점이 매달려있는 감들은 오늘따라 풍요롭기 보다는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날씨 탓인가? 나 역시 흥분하고 있지 않았다. 감나무의 선을 유심히 관찰하며 나는 결과물보다는 컴포지션의 과정을 붙들고 한참을 캔버스 앞에 서 있었다. 과연 두 번째 개인전을 끝내 놓은 나는 어떤 숙제를 받았고 그 숙제를 풀기 위해서 난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동안 까치가 몇 차례 다녀갔다. 형태를 그려놓고 그 형태를 다시 풀어 헤쳐 놓고 있을 즈음이었다. 몸이 으스스 춥다 느껴지고 있는 마침 그 무렵, 한 어른께서 커피 한잔 따듯하게 내어 오시며 추울 테니 마셔보라 손수 권하신다. 철수시간인 4시가 다가오고 그림은 아직 끝나지 않아 무척이나 바쁠 즈음이었지만 어른의 따듯한 성의를 생각하여 붓을 잠시 내려놓고 어른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즐기는 행운을 누렸다.
빗물을 눈물처럼 머금고 있는 장지리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숙연하였다. 마지막 끝자락의 가을비 내린 그 적막 속에서 오늘 종일토록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 또 다른 <앙상한 나> 자신의 쓸쓸함을 스케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1.11.6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갑자기 숙제 안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인지...^^
하하하...
몇개 안남은 감까지 누가 몽땅 다 따가면 까치가 넘 불쌍할 것 같은 측은지심이 생기네요. 누가 까가지 않게 잘 붙들어 매 두시고 이왕이면 감 먹고 있는 까치도 그려넣었으면 안심일텐데 ㅋㅋㅋ ^^
까치 모델이 1분 포즈라도 취해주었으면 그렸을 겁니다. 훗날 자연스레 표현이 가능해지는 날, 까치 한 마리 날아와 앉게 만들어야겠어요. 사실 까치가 감을 쪼아 먹는 광경을 실제 보긴 처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