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3월 31일 부활절 첫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67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요20:19-31절(신184)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부활의 참 신앙(He is alive!)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의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서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부활절이 지나가면, 그의 부활과 거의 관계가 없이 살아갑니다. 이처럼 부활절을 과거에 일어난 그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같은 역사적 신앙은, 개혁주의자들에 의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신경을 통해 그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결과(의미)에 대해서도 고백합니다. 전자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백(believe)이며, 후자는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부활로 살아 계시사 우리와 연합하신 주님에 대한 고백(believe in)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는 말씀과 같이 부활을 통하여 우리와 영원히 연합하사 날마다 함께 사시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참 신앙을 가지시기 원합니다.
먼저 19a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여기서 ‘이날’은 주님의 부활의 날(1), 빈 무덤을 본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그것을 확인한 날,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는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전한 날입니다(18). 또한 ‘이날’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전하였고(눅24:35), 그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말’(눅24:34)을 들었던 날입니다.
그때 함께 모인 제자들은 그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했을까요? 그들 대부분은 ‘내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증거(막16:11), 베드로의 증거(눅24:34), 그리고 엠마오의 두 제자의 증거(막16:13)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24:34).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증거까지 한 베드로와 엠마오 두 제자, 그리고 ‘빈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던’(8) 다른 제자(요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의 부활에 대한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모든 문을 꼭꼭 닫았다(19)는 사실에서 암시됩니다.
또한, 이것은 20:9절에서도 증거됩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데이’ 동사는 부활의 절대 필요를 의미합니다.
그(예수)가 ‘데이(반드시 ~해야 한다)’의 주어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그(예수)는 ‘다시 살아나야(하나스테나이)’의 부정사 주어 역할을 하는 목적격입니다. 그래서 ‘데이’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이며, ‘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의 부정사는 ‘데이’ 동사의 목적 역할을 합니다.
9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성경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의 부활에 대한 충분한(참) 신앙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반드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해야만 할까요? 성경에 의하면, 구속 언약에 따라 죄인인 우리를 위한 그의 죽음으로 창조(율법) 언약을 다 이루신 그의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은 반드시 창조(율법) 언약에 따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창조(율법) 언약을 범하신 불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그럴 경우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주님과 연합한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그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고전15:20). 하나님은 주 안에서 우리를 그의 십자가로 세우신 새 언약에 따라 물과 성령으로 이미 거듭나게 하셨고(칭의의 생명), 그의 아들 예수님을 닮게 하고 계시며(성화), 반드시 우리에게 부활의 몸을 주실 것입니다(영화).
그러므로 이날의 저녁에 부활의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그의 육체적 부활의 사실을 증명하여 믿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승천)을 통하여 그들의 주님으로 그들과 연합(17절에서 그들은 이미 그의 형제, 그의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아버지 하나님)한 사실을 믿게 하여 그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19-20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모든 문이 닫혔는데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사’(19)는 그가 초자연적(시공간을 초월)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보이지 않는 부활의 주님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셨다가 보이시는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 이는 부활의 예수님이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라는 말씀에서와같이 교회는 부활의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엡1:23).
특히 우리 성경에서 생략한 ‘그러므로(운)’(20)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가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결과로 제자들이 주를 (알아) 보고 기뻐하더라’(20)입니다.
이것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셨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눅24:16),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30-31). 여기서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는 그들을 떠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보이지 않게 그들과 함께하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함께 하신 부활의 주님을 육신의 오감을 통하여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우리는 그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 부활의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살롬)이 있을지어다’(19)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요한은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라는 말씀을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20)라는 주님의 행위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평강’이 그의 십자가의 결과인 것을 암시합니다. 그의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그와 화평(하나)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서로 화평(하나)하게 합니다(엡2:14-16). 엡2:16절입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그의 죽음이 구속 언약 가운데서 우리 죄를 위하여 창조(율법) 언약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이처럼 ‘평강’은 그의 십자가 은혜의 열매로 죄로 파괴된 창조질서가 회복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의 평강’을 전하신 것입니다(19).
부활의 예수님은 그를 알아보고 기뻐하는 그들, 즉 그와 연합한 그들에게 그의 사역의 위임 명령을 주십니다(21-23).
먼저, 22-23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여기서 주님의 위임 명령은 ‘~것같이 ~노라’라는 두 단어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입니다(2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은 ‘보냄을 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와 같다’라는 유대인의 권한 위임 법칙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그 아버지가 존재하시고 아버지의 말이 선포되며 아버지의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셨습니다(5:30). 5:1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성도 여러분, 위임의 동일한 원리에 따라 부활의 주님과 연합한 제자들도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13:2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그의 구속 사역을 그의 제자들에게 넘겨주지 않으시고, 그의 계속되는 사역(그의 천상 사역)에 그들을 동역자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고후6:1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그래서 요한은 여기서도 ‘이 말씀을 하시고’(23)라는 표현을 통하여 주님의 위임 명령(21)을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라는 말씀과의 연결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선교 사역에서 성령님의 능력이 절대적입니다(행1:8). 성령님은 ‘또 다른(예수와 같은, another) 보혜사’(14:16)이시며, ‘그의 대리자’(14:20, 롬8:9-10)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와 연합한 우리를 통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이것,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바울의 사역 원리입니다. 롬15:17-19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선교)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이처럼 바울은 그와 연합하신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계속하신 그의 사역에 믿음으로 동역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위임 명령(21-22)의 앞과 뒤에 있는 21절과 2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의 주님은 이미 19절에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셨는데, 여기서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반복하십니다. 왜요? 이는 부활의 주님이 그의 위임 명령(21)을 수행하는 그들보다 먼저 평강의 복음을 전하시거나, 그들을 통하여 그것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엡2:16b-17절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와 연합한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평안(복음)을 전하십니다.
또한,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위임 명령(21)과 관련하여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복음)’(눅24:47)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막16:15-16절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은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리라.” 부활의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하여 믿고 세례받은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믿지 않는 자들의 죄를 최후의 심판을 위해 그대로 두실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날의 이성적인 현대인과 같이 의심 많은 도마를 통하여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우리를 위해서 그의 부활의 참 신앙을 말씀하십니다(24-29).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있지 않았던(24)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증거를 믿지 않고서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라고 말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다음 일요일)’(26), 부활의 주님은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도마가 함께한 제자들에게 오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시고, 특별히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아마 부활의 주님은 도마가 25절을 말했을 때도 그와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라는 말씀에 주의 손자국과 옆구리를 확인한 도마는 단지 ‘그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오직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다’(28)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가 그의 종(소유)이며, 그의 백성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라는 말씀과 같이 부활의 주님과 그의 연합이 포함된 신앙고백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바울도 도마와 같이 고백합니다. 갈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 여러분,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단지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사시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부활에 대한 참 신앙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부활의 참신앙을 가질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십니다(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것은 도마에게 책망의 말씀이지만,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부활의 참 신앙을 가질 우리에게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데도 부활의 참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욱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목적도 부활의 참신앙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도 부활의 참 신앙은 단지 ‘너희로 믿고’(31)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힙입어(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여’(31), 즉 부활의 주님과 연합을 통하여 생명을 소유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부활의 참 신앙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부활절은 우리에게 결혼기념일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구속 언약에 따라 그의 십자가로 창조(율법) 언약을 다 이루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사 그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와 영원한 결혼(연합)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연합(결혼)하신 부활의 주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선교 사역에 책임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참 신앙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더욱 즐길 우리 미래를 소망하시면서 우리의 결혼기념일 같은 우리 주님의 부활절을 크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사 항상 나와 함께하신 나의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찬송 170장을 부르신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