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1916-1956)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나서 15세에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할 때까지 5년 동안 임용련에게 미술을 배웠다. 21세에(1937) 일본에 가서 문화학원 미술학부 서양화과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등과 사귀었다.
귀국 후(1941)에 미술창작작가회 회원이 되어서 김종찬, 문학수, 김학준, 최재덕, 진환 등과 같은 회원이 되었다. 1945년 일본 여인과 결혼(山本方子)
1946년에 이북에서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구상 시인의 시집에 삽화를 그린 것이 이유가 되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1950년에 국군을 따라 원산에서 부산으로 월남하였다. 이때부터 힘든 유랑생활을 하면서 고통의 삶을 살았다. 봄에 서귀포에 갔다가 겨울에 부산으로 왔다. 1953년 통영의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56년에 청량리뇌병원에서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가 사망, 3일간 무연고자로 있었다. 뒤늦게 친지에 의하여 망우리 묘역에 묻혔다.
지금 남아 있는 작품은 피난을 와서 제주도, 통영, 부산, 대구, 서울로 떠돌아 다닐 때 그린 작품이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하고 난 뒤에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문학수 등과 활동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야수파적인 화면에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세계를 만들었다. 더구나 자신이 삶을 농도 짙게 표현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선택한 소재는 소, 어린이, 등등 가장 한국적이라고 한다. 표현 기법은 가장 현대적이다.
이중섭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것에는 그림 뿐아니고 그의 애정 행각과 결혼, 그리고 불행하면서 한없이 순수하였던 삶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작품 세계를 냉정히 평가할 때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제외해야 한다. 그래서 너무 과대하게 평가를 받는다는 평도 있다.
36) 이중섭(1916-1956)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셔서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했다.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했다. 오산학교에서 미국 등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서양화가인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았다. 오산학교에서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일본에서 개최하는 미술전에 황소를 출품한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게 하는 상징물이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감탄했다.
21세에(1937) 일본에 가서 문화학원 미술학부 서양화과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등과 사귀었다. 귀국 후(1941)에 미술창작작가회 회원이 되어서 김종찬, 문학수, 김학준, 최재덕, 진환 등과 같은 회원이 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1945년에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다. 1945년 5월에는 원산에서 일본인 여자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과 결혼했다. 이남덕은 이중섭이 분카 학원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일본인 여자이다. .
1946년에 이북에서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였다. 1946년에는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다. 같은 해에는 그의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인 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일로 북한에서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1950년에 국군을 따라 원산에서 부산으로 월남하였다. 빈손으로 가족을 데리고 내려온 이때부터 힘든 유랑생활을 하면서 고통의 삶을 살았다. 봄에 서귀포에 갔다가 겨울에 부산으로 왔다.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했다고 한다.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중섭은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주일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1953년 통영의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야수파적인 화면에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세계를 만들었다. 더구나 자신이 삶을 농도 짙게 표현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선택한 소재는 소, 어린이, 등등 가장 한국적이라고 한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닭.어린이.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겼다는 것이 소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소》, 《흰소》,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등은 향토성이 진하게 밴 대표적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과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들은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이중섭은 주로 소를 소재로 하는 그림을 그리므로 박수근과 함께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민족화가로 알려져 있다. 살아 있을 때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가족과 떨어져서 외롭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의 그림을 말할 때 ‘소’ 그림으로 민족화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는 가족이라는 매우 개인적인 소재로도 많이 그렸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함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 낸 세계라고 한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중섭의 비극적 생애가 그의 작품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어린아이, 가족의 모습, 소, 비둘기, 닭, 물고기 등이 다분히 목가적인 분위기를 만드므로 관람자의 가슴속을 파고든다. 그의 그림은 동심의 세계를 아주 강력한 이미지로 표출해 냄으로 대중 취향에 쉽게 접근했다.
박고석에 회고에 의하면
“철두철미하게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러므로 그림에는 그의 개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중섭을 너무 신격화하는 것은 화가를 위해서도, 작품에 대해서도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는 설화 속에 나오는 영웅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불행한 민족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불행하게 살다 간 화가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인 동시에 ,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을 남긴 화가인 것이다.
전쟁 통에 빈 손으로 월남하여 생활이 어려웠던 1952년에는 부도 노동자로서 일을 하면서 살려고 몸부림쳤다. 일하는 틈틈이 은박지에 그림 그리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때 생활에 지친 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가족을 만나러 선원증을 만들어 일본으로 들어가서 일주간 가족과 함께 보내고는 생전에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방랑의 생활이 이어졌다. 제주에서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떠돌이 생활을 했다. 1955년에는 대구 미국 공보원에서 전시회를 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성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중섭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것에는 그림 뿐아니고 그의 애정 행각과 결혼, 그리고 불행하면서 한없이 순수하였던 삶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작품 세계를 냉정히 평가할 때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제외해야 한다. 그래서 너무 과대하게 평가를 받는다는 평도 있다.
1956년에 청량리뇌병원에서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가 사망, 3일간 무연고자로 있었다. 뒤늦게 친지에 의하여 망우리 묘역에 묻혔다.
지금 남아 있는 작품은 피난을 와서 제주도, 통영, 부산, 대구, 서울로 떠돌아 다닐 때 그린 작품이다.
이중섭을 잘 모르는 사람은 술독에 빠져서 퇴폐적인 삶을 살아간 예술가로 안다. 왜정시대에 유미주의가 유행하면서 왜정시대를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이 다분히 그런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섭은 아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노동자로서, 거지짓까지 별별 일을 다했다. 그러면서 통영에서 보낸 가족과의 즐거웠던 삶을 잊지 못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림 그리기는 손에 놓지 않았다. 노동 시간 틈틈이 은박지에도 그렸고, 다방 구석에서도 그렸다. 막걸리 집의 목로판에 엎드려서도 그렸다.
이중섭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것에는 그림 뿐아니고 그의 애정 행각과 결혼, 그리고 불행하면서 한없이 순수하였던 삶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작품 세계를 냉정히 평가할 때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제외해야 한다. 그래서 너무 과대하게 평가를 받는다는 평도 있다.
우리가 그림을 평가할 때는 과대하게 평가된 그의 기행과 일화는 제외해야 한다. 그의 행동 때문에 알려진 화기이지 작품은 별로다 라는 평가도 있다. (계간미술 79년 여름호) 그러나 이중섭 전체 작품 세계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많이 미흡하다. 주로 소 그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민족작가라는 평가를 한다. 그러나 이중섭의 전 작품에 대한 연구는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를 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정도 였다고 한다. 사실은 친구들도 전후의 어려움으로 돈이 없었다.
이중섭은 자신의 전시회를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일본에 머무는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그로 인해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1956년 간염으로 인해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한다.
2016년 9월 1일에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 1978년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추서했다.
2018년 3월의 옥션에서 이중섭의 ‘소’ 그림이 47억에 팔리므로, 지금까지 최고 비싼 작가라는 박수근을 뛰어 넘었다. 그림값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우리도 작품을 작품으로만 바라보고, 평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