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로 카메론 선교사 간증- 선교 방해하던 자들의 잇단 급사
아프리카 카메론에서 40년 동안 사역한 윤원로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내가 아프리카 카메론에서 사역할 때 통역을 맡아 현지적응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청년이 있었다.
그가 마탱이다.
그는 선교구 인가를 위해 대통령궁에서 일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정부관계자들을 만나는 일도 도와줬다.
나는 그를 신학교에 보내주고 여러 해 동안 아낌없이 후원했다.
그는 훤칠한 키, 잘 생긴 외모에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기타를 치고 찬양을 인도하는 데도 탁월했다.
총각인 마탱은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는 돈 많은 독신녀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가 종종 밤늦은 시간 여성들을 방문하는 것이 염려가 돼 늦은 시간에 혼자 있는 여자를 만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그러자 그는 발끈해서 화를 냈다.
“우리 교회 오는 교인들이 당신 때문에 오는 줄 알아. 나 때문에 오는 거야” 하며 대들었다.
그 뒤 90여명 교인 중 30명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버렸다.
독기가 오른 그는 앙바사 목사와 방송기자, 변호사와 함께 나를 카메론에서 쫓아 내려고 ‘스파이 혐의’로 현지 외무부에 고소했다.
가장 가까운 동역자에게 배신당한 충격이 컸다.
카메론의 모든 것이 싫어지고 카메론 사람들이 미워졌다.
차라리 쫓겨나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탈진해서 말씀 묵상과 기도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교인 중 앙드레가 중보 기도팀을 조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 개입해 주시도록 금식하며 부르짖었다.
얼마 후 마탱과 손을 잡고 나를 배신한 앙바사 목사가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목사님, 스물 살 된 제 아들이 이유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게 또 무슨 다른 일이 닥칠까 두렵습니다. 저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세요.”
다른 일행인 젊은 방송기자는 갑자기 1000km 떨어진 북부도시 마루와로 발령이 났다. 그는 그곳에서 몇 달 만에 사고로 죽었다.
남은 한 명인 변호사는 마탱과 다투고 떠났다.
나를 대적한 마탱팀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됐다.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교회(거룩한 사람들의 모임)를 대적하면 하나님이 치신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하나님은 카메론에서 쫓겨날 뻔한 주의 종의 권위를 오히려 높여 세워주셨다.
케메론 선교사로 부른 하나님의 섭리
내는 서울신학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전도사로 일한 교회에서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목사님의 사택이 멀어서였다.
열심히 일하는 전도사가 기특했던지 대학원을 졸업하니 담임목사님께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셨다.
3년간 전액 장학금을 줄 테니 미국 유학을 하든지, 목회를 하고 싶으면 교회를 지어 주고 싶다고 했다.
유학은 당시 신학생들의 로망이었고, 20대에 교회를 건축하고 담임목사가 되는 것도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님께 엉뚱한 제안을 했다.
“목사님, 선교하는 배 ‘둘로스’를 타고 싶으니 후원해주세요.”
목사님은 쾌히 2년간 후원해 주셨다.
둘로스를 타기로 한 것은 유럽 및 아프리카 20개국을 구경한 뒤 넓은 시아로 목회하자고하는 마음에서였다.
1980년대는 해외여행이 제한 받던 시기라 여권 발급이 매우 까다로웠다.
몇 달 후 어렵게 여권이 나왔다. 감격 속에 ‘축 여권발급 감사예배’ 현수막을 걸고 예배를 드렸다.
어렵게 받은 여권으로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경유지인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시내 관광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숙소에 오니 여권이 없었다.
대사관에 찾아가니 담당자가 말했다.
“북한 공작원이 한국 여권을 사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여권을 분실하면 임시 여행증을 받아 즉시 한국으로 가야합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유럽과 아프리카 여행이 물 건너 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 알아서 하십시오. 둘로스를 타지 말라고 하시면 저는 이왕 온 김에 실컷 관광이나 하다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뒤 편한 마음먹고 태국 시내를 걷던 중 한 여인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여인의 손에는 내 분실한 여권이 들려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를 알아보고 여권을 돌려주다니.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만일 그 때 여권을 찾지 못했다면 나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지 않고 국내에서 목회했을 것이다.
둘로스호는 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아프리카로 갔다.
아프리카는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의 땅이었다.
깡마르고 헐벗은 아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져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는 모습을 보며 울컥하는 긍휼의 마음이 생겼다.
한국에 돌아가면 목회를 잘 해서 아프리카 땅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마음에 평화가 없었다.
“너 자신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오기 싫어하면서 남을 보내려고 하느냐”하는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이 자꾸 들려왔다.
며칠 괴로워하다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스스로 아프리카에 와서 사역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면 특별한 방법으로 저를 불러주세요. 그러면 순종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둘로스가 드디어 카메론 항구도시 두알라에 도착했다.
카메론은 나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2년간의 유럽과 아프리카 일정을 카메론에서 마치고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둘로스가 카메론에 도착한 다음 날 한국인 부부가 찾아와 나를 보더니 말했다.
“전도사님, 카메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메론에 선교사로 와 주세요. 우리 부부가 3년 넘게 카메론에 한국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전도사님이 이곳에 온 것은 우리 부부의 기도 응답입니다. 반드시 카메론에 선교사로 오셔야 합니다.”
이들 부부가 그렇게 간청했다.
그래서 나는 카메론 선교사가 됐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잠언 16장 9절)
버스 추락 사고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내 동역자 리고벨 목사가 동부도시 요까두마에서 수도 야운데로 가는 표를 사러 버스터미널을 찾았다.
그곳에는 두 달을 함께 생활했던 절친이 표를 팔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리고벨 목사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계속 표를 팔았다.
리고벨 목사는 화가 났다.
“야, 빨리 표 줘”라고 재촉 하려니, 성령께서 “가만히 기다려라”고 하셨다.
리고벨 목사가 타려던 차는 떠났다.
다음 차표 판매가 시작되자 절친이 말했다.
“어, 이상해 내가 너에게 표주는 것을 깜박 잊었어”
그 친구는 제일 좋은 앞좌석 표를 줬다.
다음 차를 타고 한 시간쯤 가니 길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통곡소리가 요란했다.
리고벨 목사가 타려던 앞차가 도로를 벗어나 밀림 속으로 쳐 박혀 12명이 사망했다.
리고벨 목사 입에서 “주여, 감사합니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고벨 목사가 밀림지역 교회들을 방문하고 35인승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두알라에서 야운데로 올라오고 있었다.
맞은 편 큰 트럭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시아를 완전히 가렸다.
순간 리고벨 목사가 다급하게 “예수님 구하소서”를 두 번 외치는 중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잠시 후 깨어나 보니 옆에서 운전하던 운전사는 죽은 채 리고벨 목사 어깨에 기대어 있고, 뒷좌석에 앉은 여인은 충돌 충격으로 솟구쳐 올라 앞 유리를 들이박고 머리가 심히 찢어진 채 리고벨 목사 무릎위에 떨어져 있었다.
차 안팎에 선혈이 낭자했다.
아비규환 중에도 리고벨 목사는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고, 자신의 가방 두 개까지 찾아 나올 수 있었다.
왜 하나님은 리고벨 목사를 특별히 보호하셨을까?
그는 카메론의 교회 없는 마을에 100개 교회를 개척하는 우리 팀 책임자다.
오토바이로 밀림지역을 끊임없이 돌며 교회를 세우고, 세운 교회를 돌보며 성장시키는 열정에 불타는 전도자다.
그가 없으면 카메론의 교회 개척 사역은 큰 타격을 입는다.
그는 하나님께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하나님은 열정적으로 복음전하는 자들을 특별히 돌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