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장의 무기로 써먹어 왔던 말 중 하나가 ‘여자 말 들어도 패가(敗家), 안 들어도 망신(亡身)’입니다. 이게 고딩 때 배운 ‘장끼전’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하면 대부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번 우연한 기회에 장끼전을 읽게 되었는데, 오랜 세월의 간극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 사설 외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이 구절만 오십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지 나 자신도 미스테리입니다. 이 소설 역시 ‘별주부전‘과 마찬가지로 쓰여진 시기가 그리 오래된 건 아닌 듯합니다. 꿩을 잡는 데 활이 아니라 총과 포수가 나오고, 성경 구절도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이 소설의 전반부에는 콩을 주워 먹으려는 장끼(수꿩)와 이를 극구 만류하는 까투리(암꿩)와의 설전이 치열합니다. 꿈과 해몽으로 이어지는 부부간의 입씨름은 고전의 진수를 모아놓은 듯 현란합니다.
凶夢과 吉夢
까투리가 콩 주변에 사람 자취가 있으니 주워 먹지 말라고 하니, 장끼 왈,
“자네 말은 미련하기 그지없네. 이때를 말하자면 동지섣달 눈 덮인 겨울이라 첩첩이 쌓인 눈이 곳곳에 덮여 있어, 천산(千山)에 나는 새 그치고 만경(萬徑)에 사람의 발길 끊겼으니1) 사람의 자취 있을까 보냐?”
그래도 지난밤 꿈이 불길하다 하니,
“내 간밤에 한 꿈을 얻으니 황학(黃鶴)을 빗겨 타고 하늘로 올라가2) 옥황상제께 문안드리니 상제께서 나를 보시고는 산림 처사로 봉하시고, 만석고(萬石庫)에 콩 한 섬을 주셨으니 오늘 이 콩 하나 아니 반가운가? 옛글에 이르기를 '주린 자 달게 먹고 목마른 자 쉬 마신다.'3) 하였으니 어디 한번 주린 배 채워 봐야지.”
까투리가 “어젯밤 이경(二更) 초에 첫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북망산(北邙山) 음지쪽에 궂은비 흩뿌리며 하늘에 쌍무지개 홀연히 칼이 되어 당신의 머리를 뎅컹 베어 내리쳤으니, 이야말로 당신이 죽을 흉몽(凶夢)임에 틀림없으니 제발 그 콩 먹지 마시오.”
이에 장끼가, “그 꿈 또한 염려 말게. 춘당대(春塘臺) 알성과(謁聖科)에 문관 장원으로 급제하여 어사화 두 가지를 머리 위에 숙여 꽂고 장안 큰 거리로 왔다 갔다 할 꿈이로세. 어디 한번 과거에나 힘써 볼까나.”
註 1) 당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의 ‘강에 눈은 내리는데(江雪)’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온 산에 새들 사라지고, 모든 길에는 인적도 끊어졌네.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외로운 배엔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서 홀로 낚시하네.
註 2) 이백(李白)도 감탄했다는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 -전반부
昔人已乘黃鶴去 옛 사람은 벌써 황학(黃鶴)을 타고 떠나가고
此地空餘黃鶴樓 여기엔 부질없이 황학루(黃鶴樓)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은 한번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白雲千載空悠悠 흰 구름만 천년을 부질없이 떠도는구나.
註 3) 성경 구절
夜三更에 꿈을 꾸니
까투리가 다시, ”야삼경(夜三更)에 또 한 번 꿈을 꾸니 천근들이 무쇠 가마를 그대 머리에 흠뻑 쓰고 만경창파(萬頃蒼波) 깊은 물에 아주 풍덩 빠졌기로, 나 홀로 물가에 앉아 대성통곡하였으니, 이거야말로 당신이 죽는 꿈이 아니겠소?”
이에 까투리가, "그 꿈 더욱 좋을시고! 명나라가 중흥할 때, 구원병을 청해 오면 이 몸이 대장이 되어 머리 위에 투구 쓰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중원을 평정하고 승전 대장 될 꿈이로세.”
까투리가, “사경(四更)에 또한 꿈을 꾸니 잔치를 하는데 스물두 폭 구름 장막을 받쳤던 서발 장대가 갑자기 우지끈 뚝닥 부러지며 우리들의 머리를 흠뻑 덮어 버렸으니 어찌 답답한 일을 볼 꿈이 아니리요? 오경(五更) 초에 또 한번 꿈을 얻었는데 낙락장송이 뜰 앞에 가득한데 삼태성(三臺星) 태을성(太乙星)이 은하수를 둘렀는데, 그 가운데 별 하나가 뚝 떨어져 당신 앞에 걸렸으니 당신 별이 그렇게 된 듯, 삼국시대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운명할 때 긴 별이 떨어졌다고 하옵디다.”
이에 장끼가 더욱 신이 나서, “그 꿈도 염려할 게 전혀 없네. 장막에 덮인 것은 푸른 산에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화초병풍(花草屛風) 둘러치고, 잔디 장판에 등걸로 베게 삼아 칡잎으로 요를 깔고 갈잎으로 이불 삼아 자네와 나와 추켜 덮고 이리저리 뒹굴 꿈이오, 별이 길게 떨어지는 것은 옛날 중국 황제 헌원(軒轅)씨 대부인이 북두칠성 정기를 받아 생남하였고 견우 직녀성이 칠월 칠석 상봉함이니, 자네 몸에 태기 있어 귀한 아들 낳을 꿈이로세. 그런 꿈이라면 제발 많이 꾸게나.”
다 아시다시피 이후에도 마누라 말을 안 듣고 기여이 일을 내고 말지요.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