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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장
1. 하나님의 뜻(1-8)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에 대해서 사도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도에게 기쁨이었고 위로였으며, 면류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할 때 이 정도의 믿음이라면, 삶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가 과연 믿음이 있는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내용이 등장합니다. 왜 이런 교회를 사도가 그토록 칭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도가 디모데를 통해 들은 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3절의 말씀대로 음란이었습니다. 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사도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데살로니가교회에 음란이 성행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곧 데살로니가교회의 음란은,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몇몇 개인의 문제였다면, 교회를 향해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그처럼 음란이 교회적인 문제였던,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까? 이것만 봐도 믿음은 인간의 도덕적인 삶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도덕적인 삶을 배경으로 한다면, 데살로니가교회는 결코 칭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음란을 정당화하거나, 행하여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사도는 음란을 버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음란을 행하지 않는 것이, 의로움이고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음란을 버림으로써, 거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각처에 믿음의 소문이 퍼질 정도의 교회에서, 음란이 성행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음란은 도덕적 기준에서도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교회에서 성행했다면, 그 교회는 참으로 문란했다는 증거인데, 그러한 교회가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데살로니가교회에 성행한, 음란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데살로니가교회의 음란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음란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녀 간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의미에서의 음란은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음란을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1:9절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접하기 전에는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이었고, 당시 우상을 섬기던 의식에는 음행이 수반되었으며, 결혼하지 않은 여인과의 음행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 당시 이방인의 사회적 분위기였음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들에게 음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음란이 자연스러운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음란이 잘못된 것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음란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음란이라는 행위를 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않는 것이, 곧 믿음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란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구별을 의미하는 것인데, 음란을 행하지 않는 것이, 성도와 세상을 구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는 교회가 음란이라는 행위를, 버리지 못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기 보다는, 성도는 세상에서 벗어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의 풍습을 따르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말은 음란을 행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할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렘 10: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나라, 곧 이방 나라의 길을 배워서는 안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방 나라의 길을 배우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방 나라의 길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방 나라의 길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한 거룩입니다.
당시 음란은 그들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고, 그것이 세상이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기 즐거움을 위해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도구로 부름 받았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즐거움이 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이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룩의 길을 가는, 성도에게서 나타나야 할 믿음의 열매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구별을 교회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사도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사도가 교회에 보여준 것은, 자기 영광과 자기 즐거움, 그리고 자기 이름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고 매 맞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옥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를 아는 사람들이, 사도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교회가 힘써야 하는 것은, 인간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라는 것이고, 사도가 본을 보인 것, 역시 바로 그것임을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에게서 복음을 받고, 그 복음을 믿는 교회라면, 사도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가기를 힘써야 하고, 그것이 세상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을 음란을 버리는 것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가는 길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인데, 그것이 잘못됨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4-6절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남편이 색욕을 따라 음란을 행한다면, 그것은 아내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일이며,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를 대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곧 한 여자의 남편으로써 아내만을 사랑하는 것이, 남편의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고, 형제 곧 아내를 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기 즐거움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길로 가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분수를 앎으로써 색욕을 따르지 않고, 한 아내에게만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세상의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하나님의 당연한 보응을 아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보응은 심판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분수에 비하면 넘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성도는 지금의 것으로도,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고 많은 것을 취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결국 형제를 해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뜻대로, 자기 백성을 거룩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세상이 가는 길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시면서, 거부할 수 있는 성도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즐거움을 위해 세상의 것을 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음란을 버리지 못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7-8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정함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거룩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길이 곧 부정한 길임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이 가는 길과는 상관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이 가는 길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복음을 전한 사도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들, 그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보면서, 세상이 가는 길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거룩함이며,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을 거부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임을 아는 것이 성도입니다.
2. 형제 사랑(9-12)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로부터, 믿음에 있어서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했기에, 그런 칭찬을 받는가?’에 관심을 둘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이 받은 칭찬이, 무엇인가를 실천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을 말하면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선교를 했다든지, 구제를 했다든지, 아니면 사회사업을 했다는 내용들이 없습니다.
단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음을 언급할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는 믿음을 칭찬함에 있어서, 실천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떤 형편과 환경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쉬운 일도, 형편과 환경에 따라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과부의 헌금을,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의 헌금보다, 더 많이 넣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헌금의 액수를 생각하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과부와 부자의 형편을 생각하면, 부자의 헌금보다는 과부의 헌금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자에게 두 렙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과부에게는 생활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극심한 환난과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믿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환경에도 형편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 데살로니가교회로 말미암아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9-10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이 아니라, 형제 사랑에 있어서도, 사도가 더 이상 쓸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서로 사랑했습니다. 사도가 쓸 것이 없다고 할 정도라면, 대단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어떻게 형제를 사랑했기에, 사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였을까요?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가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사랑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곧 내 교회 안에 국한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모든 형제라면, 마게도냐 지역에 있던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고후 8:1-5절을 보면, 마게도냐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을 언급합니다. 물론 다른 교회를 위해 얼마든지 헌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게도냐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고,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연보를 풍성히 한 것입니다. 마게도냐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에 있던, 빌립보교회와 더불어 데살로니가교회를 일컫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가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을 했다면,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행한 사랑, 역시 환난과 시련, 그리고 극심한 가난이라는 자기 형편과 환경을 초월한 사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형편과 환경을 초월해서 돕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한계입니다. 때문에 단지 이웃을 돕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구별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기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길로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매여 사는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환난과 시련, 그리고 극심한 가난이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믿음의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현재를 바라본다면, 환난과 시련 그리고 가난은, 절망과 낙심의 조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환경적인 것은 잠시 동안의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을 넘어서, 어려운 형제를 도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보다는, 나의 환경과 형편을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환경과 형편이 좋아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믿음의 문제는 무시되기 십상입니다. 이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추호도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을 돕는 신을, 곁에 두고 싶어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8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성령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주신 이유는 거룩, 곧 구별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과는 차별된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차별은 환경과 형편의 차별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차별이고, 가치관의 차별입니다.
만약 성도가 이러한 차별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세상과 똑같이 땅의 것으로 차별을 누리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기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주에 속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으로 가르침을 받은 성도는, 자신을 넘어서 형제를 사랑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11-12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당시에는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인데, 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으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궁핍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다른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이기에,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자기 일을 하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로 삽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에서 손을 놓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을 힘써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에서 형제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성령을 주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는 것이, 혹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형제 사랑은 환경과 형편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앞세우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를 사랑할 의도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의도가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언급한 것은, 자기 형편과 환경에 맞게 사랑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만족을 누리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에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우며, 그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채워지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3. 예수 안에서 자는 자(13-18)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종말, 곧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느긋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천년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았으니, 오실 때는 아직 멀었다거나, 아니면 재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긴박한 문제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고 하신 그 말씀이,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뤄질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이 환난과 박해 중에도 주를 믿는 믿음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재림에 대한 이같은 믿음이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함께 예수님을 기다렸던 가족과 성도들이 하나둘 죽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어 버리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릴, 성도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재림의 영광을 살아서 예수님을 맞이한 성도가 누리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재림 전에 죽은 자는, 살아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과 기쁨은, 누리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몫이지, 죽은 자들은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조바심과 염려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해, 재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13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교회가 자는 자에 관해서, 꼭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는 자에 대해 알아야,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날 때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깨어나게 되면 또 다시 살아가는 세계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에는 다시 깨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소망 없는 세상의 시각입니다. 그래서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성도는 죽음에 대해서도 세상과는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없는 세상은, 죽음이 곧 끝이기 때문에 슬픔 밖에 없지만, 성도에게는 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으며 따라서 죽음에 대해서도, 슬퍼하지 않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도 나름대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는 공통적으로 내세에 대해 언급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다시 깨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된 소망은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한다면, 세상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는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을 하면서, 자는 자에 대해 알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14-15절에 있습니다.
14-15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교회가 죽은 자에 대해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부활하게 하여,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십니다. 그래서 비록 재림 전에 죽었다고 해도,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에 있어서는, 산 자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슬퍼할 수 없고, 염려할 수 없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이것으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달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 세상은 그동안 쌓아놓은 모든 문명과 과학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안에 있는 성도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성도는 이미 산 자가 되었고, 생명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없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으로 성도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세상에 기대를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에 기대를 두면서, 재림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진심으로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도, 소망 없는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16-17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에게 이 내용은 장차 일어날 실제 상황입니까, 아니면 단지 판타지 소설의 한 내용입니까? 물론 위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 재림은 분명히 있을 실제 상황이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도 주를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새로운 완성된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왔고 좋아했고, 소망을 두었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진 채 말입니다. 재림에 대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세상에서 사는 것 까지 포기해 버리는 자가 있게 했지만, 진심으로 주를 기다리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이지 않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다시 낫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죽은 자가 다시 일으킴을 받는 부활이 기적입니까? 심지어 목숨이 끊어진 자가 다시 소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참된 기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가 되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참된 소망이고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성도를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18절에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오히려 성도에게 죽음은 육신을 벗어버리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믿음이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소망을 기대하는 믿음이라면, 단언하건데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에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의 영광에 마음을 뺏기고, 흔들리는 것을 염려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께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소망 없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고, 다른 것을 소망하며,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는 이것으로 그 구별됨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끝이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사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끝, 예수님이 오시는 때가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주안에서 자는 자’라는 이 말이 여러분께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