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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18. [역경의 열매] 김정하 <1-17> "내 주먹 믿어라"… 10대에 가출 '40년 광야 생활'
뒤늦게 신학교 편입해 목회자 길… 무일푼 불구 하나님 은혜로 교회 개척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201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경기도 성남 샬롬교회에서 지인들과 함께했다. 왼쪽부터 서정인 한국컴패션 대표, 필자, 아내 최미희씨, 탤런트 차인표."외국인이 '한국에는 자랑스러운 성직자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김정하 목사님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탤런트 차인표씨가 TV에 나를 초대해 이렇게 말해줬을 때 고맙고 민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내게도 다르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나는 소위 무신론자였다. 누가 교회가자고 하면 "내 주먹을 믿어라"고 지껄였다. 직장생활을 같이한 선배가 어느 날 전도사가 돼 나타나 "예수님을 믿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쌀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우리 집 문 앞에 쌀을 놓고 가게 하신다. 너도 예수님을 믿어봐라"고 말했다. 그때도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실컷 믿으세요" 하고 빈정댔다.
돌아보니 그때부터 꼭 10년간 세상에서 밑바닥을 전전했다. 끝내 거지가 돼서야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그 뒤 신학교에 편입했을 때는 어린 급우들이 '큰형님'이라고 부를 만큼 늦은 나이에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게 미련했다. 그럼에도 무일푼으로 샬롬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해 나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출했다. 가방공장, 청바지공장, 양말공장 등을 전전했다.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했다. 나의 광야는 그렇게 파란만장했다. 만약 주님이 나를 이끌어주시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패륜아나 알코올 중독자가 됐을 것이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 부모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다가 쓰러졌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내 속에 심어두신 하나님의 마음, 즉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하도 간절해 '전도'하는 일에 내 삶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구호단체인 컴패션을 알게 되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지구촌의 아이들까지 품을 수 있었다. 구두를 닦아서라도 그 아이들의 희망을 키워주고 싶었던 까닭도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 덕분이었다.
현재 루게릭병으로 겨우 검지 하나만 움직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는 내 안에 여전히 바다처럼 출렁이는 그 마음, 곧 한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놀랍게도 그 마음만 가졌을 뿐인데 하나님께선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신다.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과 나누며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 "내 주먹 믿어라"… 10대에 가출 '40년 광야 생활'
* [역경의 열매] 김정하 <2> 전경 제대 무렵 영창 안에서 찬양 듣고 통곡
* [역경의 열매] 김정하 <3> 카페 축대가 와르르… 신학교로 방향 바꾸는 계기 돼
* [역경의 열매] 김정하 <4> 두릅 농사·병아리 키우기… 손대는 족족 실패
* [역경의 열매] 김정하 <5> "오두막에 전기를" 기도 4개월 뒤 놀라운 일이…
* [역경의 열매] 김정하 <6> 산 덮친 화마에도 우리 오두막은 무사
* [역경의 열매] 김정하 <7> 40일 작정기도에 교회개척 응답 주셔
* [역경의 열매] 김정하 <8> "자네 사는 모습이 귀해서…" 통장 쥐어준 이웃 어르신
* [역경의 열매] 김정하 <9> 개척교회 고난 속 성도들로부터 위로·기쁨 얻어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0> 아이들 후원하려 구두 닦던 2년여가 가장 행복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1> 다섯 아이 더 후원 위해 교회 앞에 구둣방 차려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2> 차인표씨 통해 케냐 후원아동과 영상편지 주고받아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3> 불치병에도… 의지할 하나님 계시니 감사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4> "목사가 무능해 병을 못 고쳐" 타목회자 설교에 상처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5> 장애인들, 우리가 선물한 쌀을 이웃과 다시 나눠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6> 나와 잦은 다툼에 아내는 교회서 위로 받아
* [역경의 열매] 김정하 <17·끝>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손 검지뿐… 그래도 행복합니다
◇약력 △1959년 강원도 삼척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과, 서울장신대학교 신학과 및 신학대학원 졸업 △2006년 경기도 성남 샬롬교회 개척 △2010년 10월 루게릭병 발병 △국민추천 대통령훈장 표창 △'지금 행복합니다'(청우) 펴냄
***[역경의 열매] 김정하 <2> 전경 제대 무렵 영창 안에서 찬양 듣고 통곡
처이모 전도 받고 교회 출석… IMF사태로 생활형편 '바닥'
총각 때 만난 주님을 잊고 살다가 간호사인 아내 최미희(오른쪽)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주님은 끊임없이 나를 인도하셨다.주님께서 나를 가엾게 여기셔서 친히 찾아와 만나주셨다. 나는 지치고 외롭고 아프고 가난했다. 정말 하루하루가 고되고 팍팍한 삶이었다. 주님을 찾아갈 여유조차 없었으니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게다가 미련해 오랜 세월 여러 차례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셔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아먹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혼자 살다가 군대에 가기 위해 전투경찰에 지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치되기를 바랐으나 나는 가능하면 군 생활만이라도 집에서 멀리 복무하고 싶었다. 그래서 배치 받은 곳이 남쪽 바다가 보이는 삼천포였다. 삼천포에서 울산으로 다시 서울로 전출됐고 제대가 가까워졌다. 그 무렵 나는 군기가 해이해져서 복장과 두발상태를 가다듬지 않고 외출했다가 기율교육대에 넘겨져 1주일 동안 영창에 있어야 했다.
처음엔 나를 영창으로 보낸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어느 교회의 찬양팀이 영창을 방문해 은혜로운 찬양을 불러주고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눈물이 났고 어느새 통곡이 됐다.
영창에서 나가면 교회에 다녀야지 생각했다. 또 결혼하면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야지 다짐했다. 그러자 나를 영창에 보낸 그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러나 다짐은 그때뿐, 영창을 나오는 순간 까맣게 잊고 살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아내 최미희를 만나면서 처이모의 전도를 받았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주일을 빼먹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지근한 신앙이었다. 주님의 흔적이 내겐 없었다. 교회에 가면 교인처럼, 교회 밖에 나오면 세상 사람처럼 살았다.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산 셈이었다.
그러다가 IMF가 터졌다. 생활형편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고향인 삼척에 내려가 7년 가까이 머물렀는데 주님은 나를 끊임없이 이끌어 가셨다. 그런 주님께 나는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보여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다.
처음에는 소소한 질문에 답해주셨다. 조금씩 보여주시고, 그러다가 끝내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돼라고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시듯 내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한마디만 해도 절묘한 시각에 꼭 맞게 응답하셨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놀랍게도 그 만남들이 내 안에 있던 온갖 분노의 시간을 하나하나 지워가는 과정이었다. 비로소 나는 주님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됐다. 그러다가 내 안에 일어나는 그 모든 시간이 사람으로서는 결코 만들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기적임을 보여주셨다. 성경의 기적들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님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믿음이 아니고선 지금의 루게릭병을 어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난 주님으로부터 스카우트된 사람이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큰지, 돈으로도 환산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걸린 루게릭병이 10원짜리 같다. 그 많은 것을 받고 겨우 10원을 잃었을 뿐이라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역경의 열매] 김정하 <3> 카페 축대가 와르르… 신학교로 방향 바꾸는 계기 돼
생계 위해 오픈하려던 카페 공사 중단… 이 경험으로 하나님 뜻 먼저 구하게 돼
카페 공사장의 무너진 축대 모습. 하나님께서는 카페를 열어 돈을 벌려던 계획을 여러 징후를 통해 멈추게 하시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하셨다.'IMF(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내 생활기반도 흔들렸다. 급기야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했다. 강원도 삼척. 그곳에 조부님이 물려주신 땅이 조금 있었다.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겠다는 기대감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고향은 어릴 적 인심 좋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외지 사람들이 대부분의 상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은 휴가철에 집을 고쳐서라도 민박을 받으려 치열하게 경쟁했다. 뭘 하고 먹고살까. 압박감이 밀려왔다. 이때 섬기던 교회의 한 장로님으로부터 제안 하나를 받았다.
"김 집사님, 카페를 열면 좋을 것 같아요.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장로님으로 교회를 섬기면 어떠신지요. 제가 기도할게요."
장로님의 제안은 달콤했다.
'그래. 나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잘 섬기는 장로가 돼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뒤 곧장 실행에 옮겼다. 카페 공사를 하기로 한 날, 포크레인 기사를 기다리는데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기사가 그날 오전 다른 곳에서 일하다 고압선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는구나.'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공사를 중단했고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기로 계획을 틀었다. 석축 공사가 시작돼 거의 마무리되던 날 아침, 이번엔 아랫집에 사는 할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와 "큰일 났다"고 소리를 쳐댔다.
알고 보니 쌓아 올린 축대의 아랫돌들이 빠져나와 구른 바람에 자칫하면 할머니의 아들이 큰일을 당할 뻔했다. 게다가 다른 돌들이 밭으로 굴렀고 항의를 받느라 온종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아, 하나님이 이 일을 원치 않으시는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카페 문 여는 일을 멈췄다. 공사비용만 쏟아부은 셈이었다.
그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구하기 시작했다. 고민이 깊어질 무렵, 하나님이 이끈 곳이 있었다. 강원도의 한 신학원(강원동성서신학원)이었다.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입학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을 많이 알아야 전도할 때 유익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신학원을 졸업할 즈음, 이번엔 신학교 편입학 권유를 받았다.
이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내와 함께 "주님, 우리가 이 길을 가야 합니까" 하고 기도했다. 만약에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표징을 보여 달라고 간구했다.
이때부터 신비한 일들이 일어났다. 부탁을 받고 설교하려 하는데 준비한 가방을 가져오지 않아 다른 목사님께 강단을 넘겨주는 꿈을 꾸거나 고향에 교회를 세우는 꿈도 꾸었다. 아내는 더 고약한 기도를 드렸는데 신학교에 입학서류를 준비해 보내던 날 "주님,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면 이 서류가 어디론가 사라지게 해주시고, 그럼에도 편입시험을 치르게 하시고, 그 시험을 치른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 짓궂은 기도를 하나님께서 모두 받아주셔서 서류가 사라진 일이 생겼다. 사본을 준비해 무난히 시험을 치렀고,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까지 했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4> 두릅 농사·병아리 키우기… 손대는 족족 실패
개밥용 짬밥에서 생선 건져 먹기도… 생활고로 오막살이에도 매일 예배 드려
아내, 어머니와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가시에 찔리면서 야생 참두릅 밭을 가꾸었으나 실패했다.낙향해 바닷가 마을에서 보낸 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길었다. 나를 들어 쓰시겠다는 주님의 약속만이 그 막막한 시간을 견디게 해준 유일한 힘이었다. 가을이 오고 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심방 왔을 때도 여전히 손님 대접할 음식조차 없었다.
초라한 살림살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배가 출항하고 귀항하는 부둣가에 나가지 않았다. 어장에 나가면 생선 몇 마리쯤 얻어 와서 상을 차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동정이 죽기보다 싫었다.
사람들은 나를 '예수쟁이'라고 불렀다. 교회를 열심히 다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입에 고귀한 그분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는데, 어느 날 길에 큰 호박 하나가 덩그러니 나뒹구는 게 아닌가. 아마 꼭지가 썩었다고 누군가 버린 듯했다. 그 호박을 날름 주웠다. 아내에게 가져다주니 썩은 데를 베어내고 깨끗이 씻어 범벅을 쑤었다. 그리고 그날 심방을 온 손님의 상에 호박범벅이 올랐다.
비록 소박한 상이었으나 손님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한 권사님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 그 범벅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때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는 아내에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그게 천상의 맛이었을 걸"이라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어촌 마을에서 보낸 몇 달 가운데 웃음을 머금은 기억은 이처럼 모두 주님의 위로를 통해 주어진 것들이었다. 우리는 여름에 와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1998년 새봄을 맞았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낸 모든 시간은 온통 실패의 연속이었으리라.
500평 밭에 야생 참두릅을 옮겨 심으려고 아내, 어머니와 온 산을 뒤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두릅을 캐 밭에다 심었는데, 사람 키의 두 배는 족히 되는 그 두릅나무에 하도 찔려 성한 데가 없을 정도였다.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두릅농사는 실패를 맛봤다.
병아리도 분양받아 키웠다. 하지만 밤에 족제비들이 다 물어가 버렸다. 속이 상했다. 개를 사육하기도 했는데, 병으로 죽어가는 개들을 보면서 속이 상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광견병에 걸린 개를 살린답시고 개 입 속에다 손을 넣어 약을 먹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깰 만큼 아찔한 순간들이 하루 지나고 나면 또 하루가 이어졌다.
한 번은 군부대에서 가져온 짬밥으로 개밥을 끓여 먹였다. 한데 짬밥 국물을 만지다 손에 습진이 생겨 고생했다. 그러면서도 먹을 것이 없어 짬밥에서 생선 덩어리를 꺼내 끓여 먹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올 무렵, 우리 가족은 산골짜기 외딴 곳으로 이사했다. 거기 내 이름으로 된 땅에 폐자재를 활용해 지은 창고가 있었다. 여기에 방 한 칸을 덧붙여 주거공간을 만들 셈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거처할 공간을 만드느라 땀 깨나 흘렸다. 거의 1년간 이렇게 해서 마침내 우리 네 식구를 위한 오두막이 완성됐다. 남들이 보기엔 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겐 어느 왕과 왕후의 궁궐 못지않았다. 이제부터 이 오두막에서 하나님이 선생님 되시고, 우리 가족은 학생이 되어 놀라운 믿음의 학교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 매일매일 우리 가족은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하루하루 기도의 추억을 쌓아갔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역경의 열매] 김정하 <5> "오두막에 전기를" 기도 4개월 뒤 놀라운 일이…
아주 저렴하게 가설 전화는 공짜로 놓아… 아이들 지금도 "기도 들어 주셨다" 간증
오두막 앞에서 찍은 큰 아이 고은(오른쪽)이와 둘째 동엽이 모습. 한겨울 눈이 오면 길에 내린 눈이 녹을 때까지 우리는 꼼짝하지 못했다.오두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날 때면 그곳이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여기는 너희를 위해 마련한 에덴동산 같은 곳이란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불편하고 위험했다. 밤에는 자동차에서 떼어낸 낡은 배터리를 충전해 5촉 꼬마전구로 방 안을 밝혔다.
어느 날 아이들을 남겨두고 저녁예배를 다녀왔는데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자랑했다. "글쎄 배터리가 다 닳아 불빛이 희미해지는 거야. 너무 무서워 기도했어. '하나님, 엄마아빠가 오실 때까지 저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아직까지도 불빛이 안 꺼졌어. 신기하지?"
지금이야 '하나님께서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셨구나' 하고 감사할 일이지만 그 말을 들은 그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불빛 때문에 맹수들이 오두막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는데 배터리가 방전되어가는 걸 보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너희들을 지키는 사람이야. 너희를 지키기 위해 아빠는 어떤 용기도 낼 수 있어"라는 말로 안심시켰던 기억이 난다.
이튿날 날이 밝자 나는 곧장 한전으로 달려가 전기와 전화를 가설할 수 있는 방법을 캐물었다. 하지만 우리 오두막이 위치한 지역은 큰돈이 든다는 한전 직원의 말만 들은 채 돌아와야 했다. 우리 가족은 함께 손잡고 기도했다. 어쨌든 오두막에 전기가 들어오도록 말이다.
그런데 4개월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설치에 400만원이 든다던 전화는 전화국에서 공짜로 놓아주었다. 또 1200만원 있어야 한다는 전기는 100만원의 가설비만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셔서 전화와 전기를 놓아주셨다고 간증한다. 아내와 나는 전화와 전기가 설치된 것보다 아이들에게 귀한 믿음이 생겨난 것을 더욱 감사하고 있다.
하루는 내가 야간신학을 하느라 강릉에 갔을 때다. 잠자리에 누운 큰아이 고은이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아내가 깨 보니 몸길이가 15㎝나 되는 지네가 고은이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오두막이 위치한 곳이 습했으므로 지네가 자주 발견됐으나 지네에 물리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지네에 물리면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고은이는 "엄마 나 이제 죽는 거야"라며 울부짖었다.
밤인데다 차도 없었다. 걸어서 읍내 병원까지 가면 독이 온몸으로 퍼질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보건소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캄캄한 밤에 오두막까지 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고은이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는지 유언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잘못한 거 많지? 용서해주세요. 엄마, 그리고 나, 천국 가겠지? 우리 천국에서 또 만나는 거죠?"
순간 아내는 이 예쁜 아이를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는가 싶어 눈물이 범벅이 됐다. 그리고 "고은아, 엄마는 네가 엄마 딸이어서 너무 행복했어. 난 고은이의 엄마였던 게 자랑스러워"라고 했다. 다행히 보건소 소장님이 긴급히 달려와 응급처치를 해주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6> 산 덮친 화마에도 우리 오두막은 무사
2000년 강원도 산불 일주일 간 이어져… 교회로 피신해 드린 기도 들어주셔
집 옆에 세워둔 나무는 재가 됐고 알루미늄 섀시는 완전히 녹았다. 그런데도 불과 180㎝ 옆의 오두막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때 녹은 섀시 덩어리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2000년 4월 삼척부터 고성까지 강원도의 산들이 1주일 넘게 화마에 시달렸다. 실로 재앙이었다. 거대한 산불이 오두막을 향해 빠른 기세로 번지던 그 시각, 아내와 버스카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멀리 불이 번져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내가 가로막고 있고 불이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시내가 있는 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불은 그 시내를 뛰어넘었고 오두막을 태울 기세로 번져갔다. "큰일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두막은 산속 외딴 곳이지만 폐자재를 사용해 지었으므로 불을 만나면 기름처럼 탈 것이라고 생각됐다. 게다가 개와 병아리까지 키우고 있었으니….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여보, 집에서 꼭 갖고 나와야 할 물건이 있어?"
"글쎄, 모레가 주일이니까 예배드릴 때 입을 옷 한 벌하고 성경가방이 필요하긴 한데…."
그러고 보니 집이 불타더라도 옷 한 벌과 성경가방 외엔 별로 떠오르는 물건이 없었다. 아까울 게 없는 인생이 오히려 그땐 감사했다. 나는 불길을 헤치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가스통을 치우고 집안에서 성경가방과 옷 한 벌을 얼른 챙긴 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때 아내와 아이들이 버스와 집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버스와 집,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이었다. "주님. 우리 오두막이 불에 타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태우지 마십시오."
아내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뜨겁고 거센 불길이 화장실만 태울 뿐 오두막은 태우지 못하는 환상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심하자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나 불길이 산등성이를 핥으며 타올랐다. 우리 가족은 일단 교회로 몸을 피했다. 교회까지 불씨들이 날아왔다. 우리는 예배당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져 모든 것을 잃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은 지금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게 만드신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을 향한 원망 섞인 기도가 나왔다. 한편으론 나의 처량한 인생이 서글프기도 했다.
이튿날 오두막에 가보았다. 들어서는 길목부터 폐허가 따로 없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들 사이로 우리 오두막이 보였다. 그런데 우리 앞에 나타난 모습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 사이로 우리의 오두막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화장실과 창고는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타버렸는데 오두막은 그대로였다.
바로 집 옆 산자락에 섀시 문짝을 쌓아놓았는데 다 녹아 버렸고 집을 지키던 개들이 우리를 향해 '멍멍' 짖었다. 어제 잠시 들렀을 때 불길 사이로 하도 급히 나오느라 목줄도 풀어주지 못해 많이 걱정이 됐던 터였다.
하지만 개들까지 털끝 하나 그을지 않았다. 닭도 그랬다. 닭이 품었던 계란이 숯으로 변했지만 계란을 두고 달아난 어미닭들과 병아리들은 한 마리도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말했다. "하나님이 지키셨다." "맞아.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셨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역경의 열매] 김정하 <7> 40일 작정기도에 교회개척 응답 주셔
무일푼이었지만 길 열어주심 확신… 임대보증금·비품 등 지원 이어져
교회개척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갈멜산기도원에서 40일 동안 작정기도를 드렸다. 기도원 숙소를 구하지 못해 승용차 안에서 신문지를 이불 삼아 새우잠을 잤다.2006년 10월 21일 상가 한 층을 임대해 교회를 개척했다. 바로 경기도 성남 수정구 단대동 161의 2번지 지금의 샬롬교회다.
농어촌에서 자란 나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농어촌 목회의 꿈을 키웠다. 또 중어중문학을 전공했으니 중국 선교사의 꿈도 꾸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뜻과 달리 지금의 장소로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교회개척을 하게 하셨다.
교회개척을 앞두고 아내, 두 아이와 함께 갈멜산기도원에 올라가 40일간 작정기도를 드렸다. 기도원은 이미 사람들이 가득해 숙소를 구할 수 없었고 승용차 안에서 신문지를 이불 삼아 새우잠을 잤다.
제대로 씻지 못한데다 모기에 물리면서 집회에 참석했고 교회개척을 위한 기도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내와 나는 금식을, 아이들도 하루 한 끼를 금식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샬롬교회 개척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강사 목사님께 메모를 전달했다. 메모에는 나를 소개하는 내용과 교회 개척의 뜻을 적었다. 목사님 교회가 개척 임대보증금 1000만원을 빌려주시면 1년 뒤에 꼭 갚겠다고 적었다.
실제로 교회개척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우리는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어떻게든 길을 내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날 오후 설교 중에 개척교회에 대해 30분 이상을 할애해 이런저런 유익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우리는 목사님으로부터 보증금에 대한 뚜렷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믿음을 갖고 평안한 마음으로 기도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막상 개척을 결심한 뒤에도 당장 손에 쥔 돈이 없었기에 이런 저런 구상을 해보았다. 남의 집 옥상에 천막을 치고 개척할지, 컨테이너 박스를 빈 공터에 놓고 시작할지, 폐차한 대형버스를 구입해 시작할지, 아니면 남한산성 양지공원 정자 아래서 주일마다 야외예배를 드릴지 등 여러 방안을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기도원에서 간구한 돈을 지인을 통해 보내주셨고 지금의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어느 교회가 지하예배당을 떠나 이사를 가면서 강대상과 장의자를 놓고 가는 바람에 우리는 중요한 성구를 거저 얻었다. 또 어느 목사님이 접이용 의자를 보내주셔서 그야말로 풍성해졌다.
간증했던 교회에서 사용하던 피아노 한 대를 기증해주셨다. 고모님이 빔 프로젝트를, 강원도에서 관리집사로 일할 때 만난 분들이 현금과 물품을 보내주셨다. 군대동기까지 나서 교회간판을 달아줬다.
원주의 한 교회는 새 차를 구입하면서 쓰던 차를 보내주기도 했다. 심지어 강대상 뒷면의 빛바랜 커튼이 거슬려 기도했더니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대형 걸개그림을 보내주셨다.
무엇보다 사택 걱정이 컸다. 다행히 옥상에 조립식 패널로 지은 가건물이 있어 바닥에다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 전기패널 6장을 얻어 방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 방에서 1년간 살았다. 불편하고 힘들었으나 우리 가족에겐 행복한 추억이었다. 아내는 그만뒀던 간호사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개척교회는 한걸음씩 나아갔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8> "자네 사는 모습이 귀해서…" 통장 쥐어준 이웃 어르신
아들처럼 집안일 돕고 전도했던 분… 덕분에 옥상서 방 2개 반지하로 이사
교회 개척에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달 중순 경기도 성남 샬롬교회 주일예배 모습.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이가 필자.옥상에서 네 식구가 한 방에 기거하면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우리 가족은 강원도 산골에서 오랫동안 불편하고 힘겨운 생활을 함께해온 터였으므로 새삼스럽진 않았다. 그해 여름의 더위와 겨울 추위는 하도 혹독해 기억에 남는다.
한여름엔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너무 더울 때는 얼음덩어리를 발바닥에 놓고 물수건으로 목을 축이며 견뎠다. 또 겨울엔 너무 추워 두툼한 옷을 몇 개 껴입고 잠을 자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작고 허름하더라도 사택이 있어 아이들에게 공부방도 내주고, 더위와 추위로부터 조금은 비켜 생활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때가 되면 그런 환경을 주십사'라고 기도했다.
교회를 개척하고 1년 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고자 반가운 분을 보내주셨다. 강원도 삼척에 있을 때 교회 건너편에 사시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와 사셨는데 일제강점기 때 도쿄 유학까지 다녀오셔서인지 말씀하실 때도 배움의 기품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누구를 만나든 마찬가지지만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셔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바라고 기도하다 보니 정이 더 갔다. 할아버지의 일을 자주 거들었다. 풀을 베고, 염소우리를 짓고, 보일러도 고쳐드렸다. 아내는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할아버지 아들 같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가 출석하던 교회에 나오셨다. 예수를 믿게 된 할아버지가 어느 날 내게 "이 좋은 예수를 내가 왜 이제야 믿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두 분은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셨고 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리고 6년여 시간이 흘러 찾아오신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어 여기저기 자네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왔네."
할아버지와 그동안 함께 한 일들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교회개척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방문은 그 힘겨운 시간을 위로하시듯 하나님이 보낸 천사 같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질 때 할아버지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은행 통장과 도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자네들 살아가는 모습이 하도 귀해 내가 이거라도 주고 싶네. 우리 아이들이 용돈 하라며 준 건데 내가 차곡차곡 모았어. 가만 보니 오늘을 위해 그리 모아온 것 같네. 옥상에다 스티로폼 깔고 네 식구가 얼마나 불편했겠어. 내 눈에 선하네. 이 돈이 도움이 되면 좋겠네."
통장에는 2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미 사양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을 굳게 하신 뒤였다. 그 고마운 돈으로 우리는 방 두 개가 있는 반지하방을 사택으로 구해 이사했다. 1년 만의 기도응답이었고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감사하는 계기가 됐다. 나와 아내는 그 후로도 시간을 내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 성경공부를 했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역경의 열매] 김정하 <9> 개척교회 고난 속 성도들로부터 위로·기쁨 얻어
아픔 가진 이들 함께 기도하며 변화해… 꼭 와야 할 사람들 선택해 보내셔
장애아가 태어날까 봐 낙태를 고민하던 자매는 나와 상담한 뒤 용기를 얻고 출산했다. 아이(사진)는 건강하게 자라 이제 열 살이 됐다.교회개척 과정은 쉽지 않았다. 소속 교단의 노회조차 허약한 재정을 이유로 개척교회 가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친분을 가진 교회는 같은 지역에서 개척했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했다. 그렇게 열악하고 차가웠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은 다른 곳으로부터 왔다. 샬롬교회 개척 후 몇 해 동안 교회에 오신 분들 때문이다.
교인들은 이혼의 아픔을 가졌거나 사별한 사람들, 실직자, 알코올중독자, 부모 없이 살아가는 어린 가장 등 하나같이 어려운 형편에서 주님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분들이었다. 소외된 교인들이 위로와 기쁨의 진원지였던 것이다.
A집사는 남편이 계단에서 실족해 사망한 뒤 날마다 소주로 슬픔을 달래며 살았다. 하지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술을 끊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기쁨을 회복했다.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 술 냄새가 많이 나 아무도 곁에 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직장도 열심히 다니고 십일조 생활에다 새벽예배까지 나오게 됐다.
B부부. 우리 교회에 나온 뒤 세례까지 받은 형제와 자매가 혼전에 임신했다. 며칠 뒤 태아의 기형아 검사를 했는데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로 나왔다. 두 사람은 낙태 문제로 싸움까지 한 뒤 목회자인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나는 낙태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범죄라고 알려줬다. 만약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부부가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출산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 달 뒤 태어난 아기는 장애아가 아니었다. 우리 교회는 아이의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온 교우와 함께 치렀다. 두 사람은 이후 결혼했고 교회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했다.
C형제. 이혼 후 오락과 술·담배 등으로 피폐한 삶을 살던 이 형제는 교회에 출석해 신앙생활을 시작하더니 세례를 받고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았다.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더니, 나아가 신학교까지 입학해 목회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의 목회자를 세우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D형제의 아내는 이단교회에 빠져 끝내 이혼하고 8개월 된 아이까지 내버려두고 집을 나갔다. 형제는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교회에 나오면서 조금씩 회복됐다. 형제는 고난을 겪은 뒤 믿음이 더 커졌다. 오토바이에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싣고 수요예배까지 나왔고, 나중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아기를 멋지게 키웠다. 나는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 변화하는 모습이 고맙고 감사해 눈물을 흘렸다.
E형제는 많은 빚 때문에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해 자살까지 생각하다 교회 앞에서 전도지를 건네받고 우리 교회에 나왔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 백내장이 심해 직업도 없이 살았다. 나는 안면이 있는 병원에 도움을 청해 무료수술을 받도록 했다. 눈이 밝아진 그는 직장을 구해 돈을 벌면서 조금씩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됐다.
상가 개척교회, 게다가 아직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전도사가 목회하는 교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세상이다. 세례를 못주느니, 축도를 못 받느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선 꼭 와야 할 분들을 선택하셔서 샬롬교회에 보내주셨다. 아멘.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김정하 <10> 아이들 후원하려 구두 닦던 2년여가 가장 행복
몸이 굳지 않았으면 구두 계속 닦았을 것… 대통령상 받게 하신 하나님 뜻 헤아려
2012년 청와대에서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교회에 돌아와 주님 앞에 상장을 보여드렸다. 아내와 함께 대통령이 주는 상보다 주님께 상 받기를 기도하며 기념촬영을 했다.하나님을 만난 것이야말로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의 만남이지만 내 인생을 바꾼 또 하나의 만남을 꼽으라면 컴패션과의 만남이다.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탤런트 차인표 신애라씨 부부가 경영하는 패션의류 기업쯤 될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는 두 사람이 컴패션이란 구호기관의 홍보대사로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지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작은 힘을 보태기로 마음먹었다.
교회개척 때부터 무일푼이었지만 그런 형편에서도 길이 보였다. 당시 주일마다 우리 교회에 강단 화분을 가져오는 부부 집사님이 계셨는데, 이분들은 다른 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화분을 바라보다가 문득 '화분값을 한 달 모으면 두 아이를 후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하루는 집사님에게 말을 건넸다. "기도하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집사님께서 주일마다 강단에 화분을 가져와 주시는데 한 달 치 화분 값을 모으면 어린아이 두 명을 후원할 수가 있네요. 그리하면 안 되겠습니까." 두 분은 고맙게도 내 뜻을 흔쾌히 받아줬다. 이렇게 해서 두 명의 아이를 샬롬교회 이름으로 후원하게 됐다.
컴패션은 미국의 스완슨 목사가 한국전쟁 고아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구호기관이다. 스완슨 목사는 기아로 죽은 고아들이 수레에 실려 가는 처절한 모습을 목격하고 미국에 돌아가 이런 사실을 알리고 후원금을 모아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이 땅의 고아들을 살려냈다. 컴패션을 통해 후원만 한 게 아니다. 지금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잘 자라 미래의 선교사가 되길 기도했다. 실제로 컴패션의 도움으로 양육된 청년들이 여기저기서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가고 있다.
게다가 고사리손으로 기도하며 편지를 보내주는 그 아이들이 있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까닭 또한 이 천사들의 기도 덕분일 것이다.
더 많은 아이들을 후원하고 싶어 구두를 닦던 2년여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 만약 내 몸이 지금처럼 굳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나는 구두 닦는 목사로 살고 있을 것이다. 내게 그 일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불치의 병을 얻어 구두 닦는 일까지도 멈추어야 했을 때도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을 더 이상 후원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짐을 나눠서 함께 짊어져준 동역자들 덕분에 지금까지도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2012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에서 '국민추천 포상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한 일은 결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주변에는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하고도 숨어 지내는 분들이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그런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여러 차례 거절했다. 하지만 국민의 추천을 받아 포상하기 때문에 청와대가 임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해 그야말로 떠안듯 상을 받았다. 상을 받으러 청와대로 가는 날 아침에도 몇 번을 망설이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 상을 주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1> 다섯 아이 더 후원 위해 교회 앞에 구둣방 차려
'너에게는 군대서 배운 구두닦는…' 후원금 고민 중 갑자기 하나님 음성
구두닦이를 시작하면서 새롭게 어린이 5명을 후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밑천도 들지 않는 훌륭한 후원금 벌이 아르바이트를 주신 셈이다. 사진은 필자가 컴패션을 통해 후원하는 어린이들.컴패션을 통해 제나보우와 루이스, 두 아이를 후원한 지 1년쯤 지나 우리는 한국컴패션 후원행사에 초대받았다.
그 자리에서 후원을 기다리는 또 다른 다섯 명의 어린이와 눈길이 마주치고 말았다. 사진 속 아이들의 눈망울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아이들 얼굴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매달 제때 후원금을 보내기 위해 쌀이 떨어져도 쌀을 사지 않고 그 돈으로 우선 후원금을 보냈다. 아이들이 마시던 우유도 끊었다. 덕분에 다행히 한 번도 후원금을 미루지 않았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워 선뜻 새로 다섯 명의 어린이를 후원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보자는 마음으로 문득 생각난 성도에게 전화해 담뱃값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는 얼마 전 담배를 끊었다.
"담뱃값은 왜요? 2500원이죠. 제가 피우던 담배는…." 나는 담뱃값을 알고 나서 주일예배 광고시간에 이렇게 제안했다.
"여러분, 하루에 담배 한 갑을 연기로 날려버리면 한 달에 7만5000원이 날아가 버립니다. 건강도 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돈이면 두 어린이를 공부시킬 수 있습니다. 건강 잃고 돈까지 날리느니 우리 그 돈으로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데 씁시다."
그러나 호소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우리 교회에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더 이상 강권할 수 없었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무슨 수로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를 더 후원합니까. 우리 집 형편 잘 아시잖아요."
그러면서 나는 신문배달을 해볼까, 우유를 배달할까, 폐지를 주워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매일 새벽에 새벽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니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어느 날, 먼지 앉은 구두를 닦다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처럼 확실하게 '너에게는 군대에서 배운 구두 닦는 실력이 있잖아'라는 울림이 느껴졌다.
'아참 그렇지. 군대에서 고참들의 구두를 닦는 일을 했었지. 구두 닦는 일은 내 전공이잖아.'
이미 루게릭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한쪽 팔이 저렸지만 아직 구두를 닦는 데는 큰 불편은 없었다. "아빠 생각 어때? 내일부터 당장 교회 앞에서 구두를 닦을 거야. 괜찮겠지?"
가족들에게 먼저 동의를 구했다. 그랬더니 "아빠 뜻은 이해하는데, 구두를 닦는 아빠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며 좀 생뚱맞은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아빠의 고집을 꺾으려 들지는 않았다.
아내도 내가 다섯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알아서인지 "당신은 구두 닦는 모습도 거룩해 보일 거예요"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렇게 구두닦이 생활이 시작됐다. 곧장 컴패션에 전화해 결심을 전했다. 다섯 명의 아이들도 비록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가슴으로는 우리 가족이 됐다.
구두통을 만들었다. 또 구두약과 융으로 된 헝겊과 솔, 토시, 슬리퍼 세 켤레를 구입했다. 그래봐야 2만원도 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밑천 안 드는 사업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구름 위를 나는 사람처럼 교회 앞에다 구둣방을 개업(?)했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2> 차인표씨 통해 케냐 후원아동과 영상편지 주고받아
열악한 생활 보고 미안한 마음 커져… 낡은 교실 보수하게 추가 후원 결심
2007년 2명으로 시작된 후원 아동은 현재 9명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이 아이들이 각국의 컴패션을 통해 말씀으로 잘 양육돼 십자가 군병이 될 것을 믿고 기도한다. 사진은 후원금을 벌기 위해 땀 흘려 구두 닦는 필자.나는 당구장, 부동산중개업소, 식당 등을 찾아다니며 구두를 닦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수익금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구두를 닦고 거스름돈을 안 받는 분이 많았다. 더 수지맞은 일이 벌어졌는데 '구두 닦는 전도사님' 이야기가 퍼져 나가면서 많은 분이 후원하기 시작했다.
간증집회를 인도해 사례비를 받기도 했고, 교회에 직접 오셔서 후원금을 전달하는 분도 계셨다. 신문에 소개되고 텔레비전에도 나왔으니 수지가 아니라 가히 대박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지만 우리 아이들이 아닌가. 그 아이들을 위해 구두를 닦는 건 너무도 당연한데 하나님께선 수지가 맞게 해주셨다.
그해 여름. 탤런트 차인표 집사가 컴패션 홍보대사로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우리를 찾아와 카메라를 들이댔다. 케냐에 들러 후원아동인 에릭을 만나려 하는데 에릭에게 영상편지를 전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에릭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릭, 사랑해. 컴패션을 통해 에릭을 만나 기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해.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어. 우리 에릭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하나님 열심히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네 앞길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거야. 나는 에릭이 케냐에서 제2의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어.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 케냐의 멋진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
나와 아내의 목소리를 담아 떠난 차 집사는 돌아올 때 이번에는 에릭의 모습을 담아왔다. 에릭이 공부하는 학교의 교실은 함석지붕에 흙벽으로 지은 낡은 집이었다. 어두운 교실에 케냐 지도가 걸려 있고, 나무토막으로 얼기설기 만든 창으로 햇살과 바람이 들어왔다.
에릭이 공부하는 자리가 보일 때 '아, 여기가 기도로 낳은 우리 아들 에릭이 공부하는 교실이구나'라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 집사는 그곳 선생님들에게 우리 가족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선생님들은 그 영상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루게릭병으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구두를 닦아 후원금을 보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소년 에릭은 어른스러웠다. 집 안에 성경이 있었다. 성경 속에는 우리가 보낸 편지와 우리 가족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에릭의 엄마는 우리에게 감사하다며 닭 한 마리를 삶아 들고 나왔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영상을 통해 전해졌다. 차 집사가 돌아간 뒤에도 우리는 동영상을 보고 또 봤다.
에릭이 살고 있는 케냐의 열악한 삶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 부자로 살고 있어 미안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에게 있는 돈을 에릭이 다니는 학교에 보내도록 합시다. 교실을 새로 보수하면 좋겠어요. 에릭이 공부하는 허름한 교실이 자꾸 눈에 밟혀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쳐주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아내도 동의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여러 분들이 약값에 보태라며 후원해 주신 돈을 그대로 모아두고 있었다. 차 집사의 수고 덕분에 에릭과 에릭의 가족이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 다가온 사실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3> 불치병에도… 의지할 하나님 계시니 감사
근육이 마비돼 대화조차 힘들어져… 주님이 일하시기를 잠잠히 바랄 뿐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하나님이 아닌 어떤 대상도 의지할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이때가 감사할 때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과 함께한 생일축하 파티.2010년 병원 MRI 검사 결과를 확인하던 날, 사람들은 추석 명절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내 병명은 루게릭병이었다. 추석을 코앞에 둔 그날 우리는 암담한 진단 결과를 받아들고 그래도 추석이니 감사기도의 제목을 찾고자 했다. 그날은 감사하는 날이니까 말이다.
"여보, 우린 참 가진 게 없네요. 당신 병은 세계적인 희귀병이고 불치병인데…. 우린 돈도 없고 이럴 때 편의라도 봐줄 의사 하나 없네요. 그냥 캄캄하네요."
아내의 말에 나는 "다행이지 뭐"라고 했다. 아내는 귀를 의심했다. 다행이라니,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포기할 수 있어서? 더 이상 희망 같은 걸 붙잡지 않아도 돼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에게 나는 이런 말을 이어 나갔다.
"돈 싸들고 치료하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잖아. 고치지도 못할 의사에게 살려달라고 떼쓰지 않아도 되잖아. 남은 건 하나님밖에 없으니 차라리 감사하잖아."
하나님 아닌 어떤 대상도 의지할 수 없게 됐을 때, 그때가 감사할 때란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이제 갈 길은 명확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대하고 잠잠히 바라볼 뿐 우리의 길은 하나님 뜻에 따라 좌우될 것이었다.
그저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나의 연약한 몸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실까. 앞으로 펼쳐질 크고도 은밀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아내와 함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우리 같이 비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주님의 특별한 일에 동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젠가 우리 입술을 통해 주님의 위대하신 일을 증언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그저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루게릭병은 근육이 말라가는 병이다. 음식물을 잘 씹지 못해 몸은 야위어 간다. 움직이기 힘들고 급기야 말도 어눌해지다가 나중에는 절망에 이른다. 그렇게 모든 근육이 마비되는데도 정신은 멀쩡해 몸의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가야 한다. 잔인하고 지독한 병이라고들 한다. 무엇보다 루게릭병에 대한 가장 절망적인 것은 아직까지 완치된 사례가 없다는 사실이다.
내게도 증상이 하나둘 나타났다. 말이 어눌해졌다. 손놀림도 다리근육도 뻣뻣해졌다. 옷의 단추를 끼우는 일부터 밥상에서 밥 먹는 일까지, 심지어 이젠 대화하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내 힘으로 할 수가 없다. 아내와 가족, 나아가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이제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여보, 우리 봉고… 이제 보낼까."
개척 후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발이 되어준 정든 차를 필요한 곳에 보낼 생각이었다. 내 제안에 아내도 "그게 좋겠죠"라고 했다. 몸이 더 불편해지기 전에, 그래서 차를 더 이상 운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차를 가져다주기도 어려울 테니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나는 미리 떠나보내고 싶었다.
어느 날 아내는 미용실에 들러 긴 머리를 짧게 다듬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머리 만지는 시간도 줄이고자 했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아줌마 같다"고 말했다. 아뿔싸, 아줌마 같더라도 병든 남편의 아내로 남고자 하는 여자에게 할 말은 결코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4> "목사가 무능해 병을 못 고쳐" 타목회자 설교에 상처
아내 "당신은 내겐 둘도 없는 목사님" 24시간 돌보고 위로하는 사랑에 감사
루게릭병에 걸렸지만 아내는 여전히 나를 둘도 없는 목사님으로 인정해줬다. 아내와 함께 쓴 책 '지금 행복합니다' 출간 후 CGN TV에 출연해 개그맨 이홍렬씨(왼쪽)와 기념 촬영한 모습.루게릭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우리를 후원하고 기도해주는 분들, 우리가 후원하는 아이들, 그리고 딸 고은이와 아들 동엽이에게 미안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빨리 병이 나아 이 빚을 갚아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미안한 마음이 쌓여갔다.
하루 24시간 남편을 간호하는 아내에겐 미안한 마음조차 표현하지 못했다. 때로는 내 몸의 불편함만 토로했다. 아내라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사람인 양 말이다.
아내가 전도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가던 날, 나는 혼자 집에 있을 수 없어 아내와 함께 움직였다. 시험시간 3시간여를 차에서 기다렸다. 아내는 내 걱정을 했는지 허겁지겁 시험을 치르고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내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소변이 마려운데 차 안에서 당신만 기다렸어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엔 원망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아내에게 "아내가 임신하면 남편도 같이 입덧을 한다고 하잖아요. 내가 오늘 그런 것 같아. 아무튼 잔디밭 위를 거니는 까치가 부러운 하루였어요"라고 말했는데, 실제 그랬다.
아내는 그런 내 말 한마디에 기뻤고 평온을 되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난 당신이 이런 모습으로라도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라고 했다. "다른 누구보다 나에게 당신은 '둘도 없는 목사님'이에요"라고 말해줬다.
아내의 말에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남자인 듯 미소를 지었다. 루게릭병이 주는 고통조차 아내의 아가페 사랑 앞에선 보잘것없어 보였다.
얼마 후 부흥회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3일간 열렸는데 장소가 하필이면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라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이런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작 은혜를 받으려 참석한 집회에서 상처만 쌓였다. 설교하는 목사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능력한 나를 자책하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질병이 치유됩니다." 설교자가 그렇게 말할 때 마치 '치료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는 말로 들렸다.
"요즘 목회자들, 능력이 없어. 그러니 병을 고칠 수도 없어"라고 말했을 때는 '내가 참 무능력한 종이구나' 싶어서 부끄러웠다. 그러나 누구보다 힘들어 한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는 그때 느낀 마음을 글로 남겼다.
"나아만 장군을 생각한다.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요단강에 들어갈 때 차라리 낫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얼마나 병을 벗어던지고 싶었으면 목숨만큼 소중한 권위조차 내려놓았을까. 집회 참석 첫 시간부터 내 속에선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끓어올랐다. 하지만 주님과 약속한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내겐 누구와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 남편을 위해 생명을 아낌없이 드릴 것이다."
아내가 남긴 글대로라면 나는 적어도 한 사람에게만큼은 '유능한' 목회자인 셈이다. 무엇보다 착한 아내와 동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5> 장애인들, 우리가 선물한 쌀을 이웃과 다시 나눠
처음엔 문만 겨우 열어주다가 차츰 변화… 불편한 몸으로 3층 계단 올라 교회 출석
2015년 성탄절은 참 따뜻했다. 샘터사역을 통해 섬기던 가족들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와 함께 성탄예배를 드렸다.2014년 선한목자교회가 금요철야예배를 드리며 모은 헌금을 우리 교회에 보내왔다. 아내와 기도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그대로 묻어둔다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꾸지람을 들은 종처럼 되지 않을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주님. 이 귀한 헌금을 어디에 쓸까요?"
교회 주변의 장애인 가정들이 떠올랐다. 겨울인데 난방도 충분하지 않은 방에서 고생할 것이 분명했다. 식비와 병원비, 교육비 등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하니 걱정됐다.
밤새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날이 밝자 지인에게 장애인 가정을 방문하게 했다. '샘터사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자꾸 퍼내야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퍼내는 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몸이 불편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분을 위해 교회가 직접 찾아간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역이다.
처음엔 겨우 문을 열어 쌀과 생필품만 받곤 했다. 하지만 방문 횟수가 늘자 마음 문이 조금씩 열리더니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소소한 집안이야기를 나눴고 나중엔 손잡고 함께 기도했다. 겨울엔 난방비를 챙겨드렸다. 반찬과 과일, 생활필수품도 떨어지지 않게 도왔다.
하나님은 후원자들을 보내셔서 샘터사역을 도우셨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까지 매달 쌀을 보내주셨다.
샘터사역 2년째. 미국 선한교회에서 1000달러를 보내주셨는데, 우리는 이 돈을 교인에게 나눠주고 성탄절을 맞아 섬김의 시간을 갖도록 숙제를 드렸다. 성도들은 점퍼와 식사를 마련해 장애인 가족을 초청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장애인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교회를 찾았는데 이분들과 마주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내 손을 잡더니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헛살았어요." "목사님을 뵈니 나는 장애인도 아니에요."
무엇보다 기뻤던 건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도 의지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알게 해주셔서 이제는 예수님 의지하는 인생이 됐어요"라는 말이었다. 이분은 주일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 교회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이분들을 통해 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드린 쌀을 먹고 남은 쌀을 또 다른 어려운 이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쌀은 됐으니 예배를 드려 달라며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곤 한다. 장애로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수 없으니 그 시간이 무엇보다 간절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쌀과 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육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누리는 이곳이야말로 하나님나라임을 깨달았다. 그곳이 교회이다.
건강했더라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이런 기쁨들. 저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내게 루게릭병까지 주시면서 저분들을 인도하게 하셨을까. 그런 아버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하면 나는 저분들을 부르시고자 하나님께 스카우트된 셈이다.
한 교인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3층 예배당까지 올라오셔서 "나는 이렇게라도 움직일 수 있는데 목사님은 그럴 수도 없으니 미안한 마음이에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 덕분에 힘이 생기고 감사할 뿐이다.
요즘 한 가지 기도제목이 생겼다. "하나님,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주십시오." 세상에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목사인 주제에 나만큼 사랑받으며 목회하는 목사가 또 있을까 싶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6> 나와 잦은 다툼에 아내는 교회서 위로 받아
대학교 선후배로 만나 8개월 만에 결혼… 아내 함부로 대한 것 지금 생각하면 아찔
아들 제대 후에 찍은 가족사진. 하나님께선 부모가 면회 갈 형편이 안 되는 걸 아셨는지 아들을 휴전선 철책에서 근무하게 하셨다.부모님이 헤어지고 만남을 반복한 탓에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나 혼자라는 외로움이 무척 힘들었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고 17세부터 객지생활을 시작했다.
아내와는 1987년 대학 선후배 사이로 만나 교제 8개월 만에 결혼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액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는 소박함이 무엇보다 용기를 주었다. 가난한 남자에게 어쩌면 시집을 오고 잘 살아줄 것 같았다.
결혼 후 아내는 직장생활을 했다. 나는 아직 학업을 마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렇다 할 직장을 갖지 못했다. 고은이와 동엽이가 2년 터울로 태어났다. 이때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나를 낳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좋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지 아버지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게 겨우 여자는 결혼 초에 꽉 잡아야 한다느니,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느니 하는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말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부부는 정말 많이 싸웠고 나는 부덕하고 우악스러웠다.
싸움이 잦으니 아내가 견디기 힘들었던지 어느 날은 내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이쿠. 이를 어쩌나. 졸지에 혼자되게 생겼네.' 다행히 아내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위로를 얻었고 어쩌면 그 힘으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어느 주일에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가족야유회가 있었는데 아내는 교회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들만 딸려 보냈다. 그날 나는 무척 화가 났다. 집에 걸린 성구액자와 성경을 찢으며 난동을 부렸다. 그렇게 못된 남편이었는데도 아내는 한 번도 집을 나가지 않았고 밥을 해주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런 아내에게 뭘 믿고 그리 함부로 대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결혼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아내는 "당신 덕분에 제대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편한 남편을 만났다면 이만큼 주님을 의지할 수 없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돌아보면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아내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누가 배우지 못한 아비 아니랄까봐 툭하면 매를 대고 훈계했다. 치마 입는 딸아이 종아리에 회초리를 댔고, 아들 엉덩이에 피가 흐를 때까지 매질을 해댔다.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그런 의미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뒤 나는 무엇보다 가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산다. 이 병은 나를 남편이나 아빠의 자리에 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환자 몸에서 냄새나면 안 된다며 씻기고 입히고 닦아준다. 밤에도 몇 번이나 깨서 잠든 내 몸을 이쪽저쪽 바꿔준다.
아내는 지금 갑상샘암을 앓고 있다. 쉬어야 하는 몸인데…. 남편의 품위 유지를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8년간 정성껏 간호를 해주고 있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끙끙거리며 휠체어에 나를 앉힌 뒤 3층에서 1층으로 내리고 올려준다. 지금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아이들이 옮겨줄 때가 가장 안심이 된다. 이제 훌쩍 커버린 아이들,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김정하 <17·끝>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손 검지뿐… 그래도 행복합니다
받은 은혜 1억이라면 병은 10원 잃은 것… 말 어눌해져 자막으로 '보는 설교' 준비
루게릭병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어눌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왼손 검지를 사용할 수 있어 설교문을 만들고, 듣는 설교가 아닌 보는 설교를 할 수 있다. 사진은 필자가 컴퓨터로 설교 원고를 준비하는 모습.연재 마지막은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토막토막 소개하는 것으로 정리하려 한다. 첫 이야기는 고향인 강원도 삼척의 교회에서 관리집사로 보낸 시간을 언급하고 싶다. 그때는 성서신학교를 졸업한 뒤였는데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훈련 코스였다.
관리집사로 교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수리할 곳을 찾아 고치고 또 고쳤다. 청소하고, 풀을 뽑고 정원을 가꾸었다. 성도들의 발이 되고 싶어 대형버스 운전면허를 취득해 새벽기도회 차량을 운행했다. 성도들이 편하게 교회당을 드나들 수 있기를 바라며 순종하고 섬기고자 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었다.
탄광촌에서 교육전도사로 첫 사역을 할 때의 기억도 소중하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깨워 예배를 드렸다. 전도사의 적은 사례비를 쏟아부어 아이들 간식을 마련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의 일도 생각난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친구들이 나를 떠났다. 소외감이 밀려왔고 예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옛 친구들을 떠나보낸 뒤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났다. 고아처럼 살았는데 아버지 같은 장로님, 어머니 같은 권사님들을 만났다. 오두막을 수리할 수 있도록 후원금을 보내주신 재미교포 집사님도 고마우신 분이다.
얼마 전 샬롬교회 창립 11주년을 맞았다. 개척한 뒤 곧 병을 앓았으므로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일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서 목회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설교 준비를 할 때마다 이 설교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강단에 선다. 내 설교는 듣는 설교가 아니라 보는 설교다. 처음 내 설교를 듣는 분들을 위해 자막을 준비하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분은 지금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루게릭 방언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아직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하신 분은 화면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게도 열 손가락 중 왼손 검지를 사용할 수 있다. 이 글도 컴퓨터 화상 키보드 클릭키를 이용해 왼손 검지로 마우스를 움직여 쓰고 있다.
이렇게 서울장신대 채플과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컴패션 모임 등에서 설교를 했다. 밤늦게까지 마우스를 잡고 기독교 안티 카페를 찾아다니며 '역경의 열매' 등 좋은 글을 퍼 나른다.
안티 카페 회원들은 내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라'고 욕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 가운데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열혈 전도자'로 변신한 그 사도 바울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언어장애와 중증 지체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아내는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루게릭이든 갑상샘암이든 하나님의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루게릭병 때문에 불평할 까닭은 없다. 돈으로 비유하자면 1억원을 벌었는데 10원짜리 동전 한 닢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고백한다. "지금 행복합니다"라고.